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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 같은 천국(하나님 나라)의 은닉성 ( 마 13:31-32 )
글 : 김 강석 목사
이 세상은 양대산맥처럼 두 세계가 서로 대립하며 흘러가고 있습니다. 한쪽 세계는 약육강식의 방식에 의한 힘의 논리 구조를 띤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며 어떻게 해서든 세상 왕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하는 땅의 세계이고,
또 다른 세계는 어떤 강력한 외부의 힘에 의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당하면서 그 세상 세력의 실체를 폭로하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그 세상 힘의 권세에 의해 핍박을 당하는, 삭제 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하늘의 세계로 분류가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창세기 때부터 항상 인류를 둘로 구분해 내시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쪽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고, 그와 다른 한쪽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쪽이 항상 그 은혜에서 제외된 자들에게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양쪽 진영의 싸움에서 가해자로 분류가 되는 자들이 결국은 항상 심판을 받습니다. 성경전체가 그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4장에 보게되면 가장 먼저 가인이라는 힘의 세계와 아벨이라는 은혜의 세계를 나눕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왕의 세계 즉 힘의 세계는 자신의 행위를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그 자신의 행위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업신여김을 당할 때에는 가차 없이 사람을 죽을 수 있을 만큼 잔인해집니다.
왜냐하면 그 힘의 세계 속에서의 주인공은 언제나 “나” 자신이기 때문에, 그 행위가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그 행위자인 내가 무시당하는 걸 못 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하기에 그 나의 제사, 나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그 어느 누구도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게 이 힘의 세계, 힘의 원리로 사는 이 왕의 세계의 삶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벨과 가인의 제사에서 하나님께서 그 가인의 제사 즉 그 가인의 선한 행위를 이유도 말씀 하시지 않으시고 인정해 주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만약 가인이 하나님보다 더 강했다면 그는 하나님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자기보다 강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분노를 표출할 다른 대상을 찾았고 그렇게 찾다보니까 곁에 있는 자기보다 약한 존재인 동생인 아벨에게 그 분노의 표출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인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의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는 것에 생각에 이르자 그래서 자신보다 약한 동생 아벨을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힘의 원리입니다.
그렇게 가인은 힘을 추구하고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며 뭇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자기의 공로와 업적과 착한 삶을 내어 놓으면 하나님은 그걸 근거로 나를 칭찬해 주어야 된다라는 그러한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힘의 원리에 따라 인본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았고, 하나님께도 나름대로 멋진 제사를 정성스럽게 올려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안타깝게도 자신의 제사가 기각이 되고 반면에 동생인 아벨의 제사만 하나님께 인정을 받게 되자 그의 열심과 정성의 실체가 결과적으로 살인이었다, 라는 그런 극악한 모습으로 폭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가인의 모든 열심은 결국 자기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반면에 아벨은 그렇게 가인의 정체를 폭로하고 죽어 버립니다.
이렇게 창세기 4장에서의 아벨과 가인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 즉 예수로 대표되는, 아벨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은 바로 이 세상의 힘의 원리의 구조를 띤 그 왕의 세계에 의해서 맞아 죽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모형으로, 상징으로 예시되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아벨의 라인으로 바로 그 다음에 노아라는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창6장에 보게되면 노아는 조롱과 멸시와 업신여김을 받으면서 120년 동안 세상 전체의 악함을 폭로하는 역할로 섭니다.
세상은 그를 120년 동안 조롱했습니다. 왜 아직 비라는 게 오지도 않았는데 무슨 배냐? 그것도 산 꼭대기에다가 왜 배를 짓고 있어? 10년, 20년, 30년, 40년, 50년이 지났을 때에 그 때에도 배를 짓고 있었어요? 어리석다! 모자라다! 그럽니다.
이처럼 세상은 계속 자기들이 갖고 있는 선악의 패러다임 구조로 노아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들에 의해서 판단을 받는 자로 노아가 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 왕의 세계, 힘의 세계는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스스로의 목표지점을 설정하고 그것만을 추구하며 사는 세계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상식과 야망에 맞지 않는 모든 것들은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선악 판단의 패러다임에서 어리석고 무식하고 악한 것으로 규정해 버립니다.
그렇게 자신들의 선악 구조에 의해서 선악을 판단하고 가치와 무가치를 판단하는 세상 왕의 세계, 힘의 세계는 자기 주변에서 약함이라는 것이 감지가(포착이) 되면 그 약함을 공격하여 자신의 위상을 세우는 데에 기꺼이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는 항상 강함이 선이고, 약함은 악이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항상 이 세상 속에서 강함은 약함을 감지(포착)하게 되면 폭력을 유발합니다. (요즈음 학교, 직장, 군 병영생활 속에서 이루어진 각종 구타 및 왕따 또는 상대를 폄하 하는 말로 상처를 주는 현상들이 발생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해석되어 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가장 약한 자로 오신 예수가 그렇게 힘 있는 세상에게 맞아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때는 그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떡 만들어내고, 밥 만들어내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그랬을 때에는 강자로 보였기 때문에 그 앞에서는 벌벌 기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되어 주세요! 왕이 되어 주세요! 라고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약한 모습으로 벌거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려 버리니까 죽여라! 그런 것입니다. 왜냐하면 힘의 원리가 다스리는 세계는 마귀의 세상이기 때문에 약한 자는 필요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힘을 쌓아서 왕이되고 싶어하는 인간들은 세상에 내어 놓는 자신들의 행위에서 나타난 그런 착함과 선함과 지혜로움까지도 모두 힘으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걸로 내 영광, 내 가치, 내 만족, 내 인기, 내 평판을 챙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걸 폭력이라고 합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마지막 때에 이 세상이 왕의 세계라고 자처하며 내어 놓는 그 힘의 원리로 약자를 지배하는 그런 세계를 묵사발을 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걸 성경은 진짜 승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걸 이 세상 속에서 가시적으로, 영의 눈으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걸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만이 영안이 열리게 되어서 예수님이 이 땅으로 연약한 모습으로 오셔서 벌거벗음과 예수님의 십자가가 절대 실패와 저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그 십자가와 벌거벗음으로, 그의 옛 사람의 육적인 옷을 벗는 것으로 초대를 받습니다. 그들만이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끌어 당겨집니다. 그런데 그걸 복이라고 그럽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진짜 복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마16:2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벌거벗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인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입은 것을 벗으라는 것입니다.
그 옷이 무엇입니까? 옛 사람의 육적인 옷들 말입니다.
특히 이 세상 역사 속에서 자신의 힘을 쌓아서 왕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거인 되고 싶어 하는 것, 유명한 자 되고 싶어 하는 것, 용사되고 싶어 하는 것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세상 역사 속에 내어 놓는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서 착함과 선함과 지혜로움까지도 모두 힘으로 사용하여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걸로 내 영광 챙기기, 내 존재가치 드러내기, 내 만족, 내 인기, 내 평판을 챙기는 것, 이것이 이 세상 것들의 나의 옛 사람적 육적인 낡은 옷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 왕의 세계는 자신의 강함과 자신의 왕 됨, 그리고 자신의 신 됨을 추구하면서 스스로의 판단과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그 추구 점을 향해 자신의 일로 매진하며 삽니다. 그래서 그들은 강해 보입니다. 언제나 승자 같아 보입니다.
성경이 그걸 세상 왕의(힘의) 세계, 세상 나라라 부르고 그 세상 나라의 모형으로 함의 후예들이 만든 애굽과 바벨론 앗수르 등을 등장시켜서 그들을 몽둥이로 사용하시면서까지 당신의 백성들을 그 속에서 뽑아내는 것을 구원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런 옛 자아인 육적인 ‘나’ 에게서 탈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역사 속에서 내 뜻, 내 비전, 내 야망, 내 희망 다 부정당하고 부인 당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이 세상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여 그 ‘나’ 라는 나라를 구축하는 것이 아닙니다. ( 여기에서 “나“ 라는 나라를 구축한다는 것은 내가 소유한 자기 자아(自我) 뿐만 아니라 “나” 와 관계된 가족, 돈, 건강, 직업, 친구, 나라 등이 다 포함된 “나”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그 옛 사람적 육적인 이 “나”라는 나라를 더욱 더 견고하게 구축하기 위해 하나님이 내 소원 들어주어야 되고 나를 도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세상 나라의 반대편에 있는 나라를 하나님 나라, 천국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 천국이 이 세상 역사 속에 펼쳐질 때에는 그 세상 나라에게(힘의 원리에 의해) 보여지는 천국은 때론 어리석은 모습으로, 세상에게 조롱당하며 멸시 당하는 모습으로, 왕따 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아벨이나 노아, 셈, 교회 모든 천국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약자의 모습으로, 비경제적이고, 비 효율적이고, 비실용적이고, 비합리적인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되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 백성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다! 라고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삶이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고삐에 끌려서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은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수난 당하고, 멸시 당하고, 실컷 두들겨 맞다가 눈알 뽑히고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게 하늘 왕의 삶이었습니다. 그게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사53:2-12 )
그렇다면 그 왕의 나라에서 살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의 삶은 또한 어떠해야 됩니까? 똑 같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는 뜻입니다(마16:24절)
그러니까 천국백성의 요구되는 삶은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결국 세상에게 맞아 죽는 것이 천국 백성의 삶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두 증인이 바벨론성에서 맞아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게 성도의 승리라고 그럽니다.
왜냐하면 힘의 원리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세상에서 자신의 왕 됨을, 자신의 야망과 비전과 희망을 추구하며 살던 그 옛 사람의 육적자아인 이 육이 죽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며 사는, 은혜가 왕 노릇하는 삶의 자리로 영으로 다시 살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고치는 것이 없습니다. 반드시 죽고 다시 나와야 됩니다.
바로 그 모형으로 예수님의 육신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사시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나의 옛 사람적 육적인 나를 (자꾸 내가 힘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들 그 “나”를 ) 하나님 한테 자꾸 빼앗기는 것입니다. 차압 당하는 것입니다. 그걸 이 세상 역사 속에서 성도가 성령에 의해 믿음으로 장악되어서 그렇게 끌려가는 삶의 자리를 가리켜 자기부인이라고 하고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그럽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이 세상 나라에서 아들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골 1:13절 14절을 보세요?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
그래서 성경은 그 힘의 원리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이 세상에서 왕이 되고 싶어 하는, 그 흑암의 권세에게 붙들려 사는 상태를 “죄”라 하고, 반면에 그 흑암의 권세에서 빠져나와 아들의 나라로(하나님의 나라) 옮겨가는 것을 구속, 죄 사함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그 아들의 나라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여 사는 자로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이 세계에서는 약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론 무식하게도 보이는 것이고, 그래서 비실용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가시적인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서는 그렇게 보일 수 있단 말입니다.
오죽하면 세례 요한도 감옥에 갇혀 자기 하나 감옥에서 빼내 주지 못하는 그 메시아가 이해가 안 되어서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내어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 맞습니까?(마11:3)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계속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볼 정도였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세례요한에게 뭐라 전하라 하십니까? 마11:6절에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 예수님은 지금 힘의 원리 속의 세상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는 모습으로 와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만이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삶을 보고 실족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천국은 이 세상 나라를 침공해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세상 나라를 박살 내어 점령해 버리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11: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 세례요한 때부터 천국이 세상 나라를 침노하여 빼앗는다는 뜻입니다. 즉 천국화 된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 자격, 내 조건, 내 열심, 내가 나의 종교적인 노력들을 통하여 그 공로로 천국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자들이 이 구절을 왜곡하여 인간의 열심으로 천국을 침탈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단 말입니다. 아닙니다. 그거는 성경을 왜곡되게 잘 못 해석해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알미니안주의이고, 그게 인본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차지하고, 천국이 세상 나라 즉, 애굽과 바벨론을 침공하여 그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곳에서 빼내올 때 그 세상 나라는 풍지 박산이 납니다. 왜냐하면 강한 자가 약한 나라를 침공해 들어와 거기서 늑탈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꿔말하자면 ‘나’ 라는 육적인 세상 나라가 하나님 나라의 침공을 받게 되면 그 육신의 나라가 조금씩 점령을 당하면서 (그 옛 사람적 육적인 그 ‘나’ 라는 존재의 그 육적 자아는 내가 소유한 것과 내가 관계하는 그 모든 것을 총칭하는 것으로 그게 “나” 입니다.)
그 “나” 라는 나라 속에 갇혀있던 그 새 생명이 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되고, 결국 육으로서의 그 "나는" 천국으로부터 침공을 당해 점점 멸절(소멸)되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 안에 새 생명이 잉태되게 되면 이 새 생명에 의해서 잉태 된 아이의 어미가 먹히고 결국 새 생명이 출산되는 것처럼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어미의 몸이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망가지잖아요? 그 원리에 의해 우리가 이 육신의 몸을 새 생명에 의해 먹히고 점령 당하고 결국에는 새 생명으로 확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 속에서 자꾸 부인 당해지고 저와 여러분의 희망과 야망과 비전과 뜻이 하나님의 의해 기각 당해지는 경험을 할 때에 그러면서 점점 내 뜻은 이거 아무 것도 아니구나! 성취되어져 봤자! 별 것 아닌 거구나! 라는 것을 마음으로 깨달아 가는 그 상태가 천국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이 세상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 즉 천국에 사는 것이 어떤 모습입니까? 천국이 침공해 들어와서 나를 늑탈해 버리는 상태인 것입니다.
강한 자를 꽁꽁 묶어버리고, 나를 이 펄떡 펄떡 뛰던 내 야망, 내 비전, 내 희망, 내 소원, 그것 성취하려고 펄떡 펄떡 뛰던 그 옛 사람적인 그 “나”를 꽁꽁 묶어 버리고서 점진적으로, 점차적으로 죽여가는 것 즉 점점 소멸되어 가는 것이 천국인 것입니다.
그 상태를 가리켜 하나님 나라가 임한 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 늑탈이란 뜻은 철저하게 뺏어 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차압 당한다는 뜻입니다. 내 것은 철저히 하나님께서 반드시 다 챙겨 가시겠다는 뜻입니다. 그게 저와 여러분의 이 세상 역사 속 현재적인 삶 속에 지금도 일어나고 있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일하심의 열심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래서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자들의 삶은 그 “나” 라는 우상을 숭배하기 위해서 온갖 세상 힘들을 끌어 모으고 쌓아가던 그 옛 사람적 육적 자아가 점차 결박이 되어지고, 그 속에서 작은 불씨로 존재하던 그 새 생명이 밖으로 조금씩 조금씩 드러나는 형국이 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마12:29절에서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쉬운 말로 ‘나’를 사랑하고 ‘나’를 숭배하기 위해 심지어 착한 척, 바른 척, 열심 있는 척, 경건한 척까지 하며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려 하던 그 ‘나’ 가 천국에 의해 실체를 폭로 당하고 그 천국이라는 불도저에 의해서 납작하게 오징어포가 되어가는 그런 모습이 된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의해 침공을 당하는 성도는 때때로 보이는 세계 속에서는 실패한 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게으른 자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늑탈해 버렸거든요?
그가 힘의 원리인 그 세상에서 그가 힘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그 나라로 자기 울타리 안에 쌓아 놓고 있었던 것들을, 야망, 비전, 꿈, 희망, 소원 등등을 하나님이 하나하나 점진적으로 뺏어 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때론 실패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연약한 자처럼 보이기도 하며, 때로는 불성실하고 부도덕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내가 진심에서 우러나서 한 착한 일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나의 인기와 평판과 자기존재 가치를 드러내고 그리고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했던 일이라는 것이 하나하나 폭로가 되면서부터 그 일이 그때부터 시시해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자기 위상과 자기 인기와 명성을 위해서, 자기 존재가치를 위해서 했던 것이라는 것을 본인이 이제야 올바로 깨달아 알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성도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이렇게 하나님의 천국은 우리를 침노해 들어와서 우리를 부인시키고 해체 시키며 점령해 갑니다.
결국은 우리를 그 옛 사람적 “나” 라는 그 세상 육적 나라에서 늑탈 해 내 버리신 겁니다. 철저하게 끄집어 내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게 천국(하나님의 나라)을 사는 이들의 삶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너무 좋아 죽겠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가 너무 좋아 죽겠는데! 라고 하는 그 성도에게서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 옛 사람적 육적인“나”를 빼어 버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난 이제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현실 속에서는 자칫하면 실족할 수 있는 그런 삶? 그게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사람들의 삶이란 말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오늘 우리가 서론에서 읽은 겨자씨의 비유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겨자씨의 비유에서 주님은 천국을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게 되는 지를 아주 기가 막힌 소재를 사용하셔서 설명을 해 주십니다.
천국은 이 땅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 겨자씨처럼 은익이 됩니다. 은패가 됩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이 볼 때에는 에잇! 이게 뭐냐! 하면서 천국(하나님 나라)은 실족할만한 모습으로 와 있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거의 안 보입니다.
성지순례에 갖다 온 분들이 책받침에다가 겨자씨 하나씩 코팅해 오곤 합니다. 왜냐하면 겨자씨가 아주 작기 때문에 책 받침에다가 코팅을 해 줍니다.
그런데 진짜 평범한 겨자씨는 눈에 잘 안 보입니다. 심지어 참 깨의 오십분의 일도 안 된다고 합니다. 천국은 그렇게 겨자씨처럼 작은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은익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천국은 공중의 새들이 와서 가지에 깃들일 만큼 엄청난 실체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서 새들이라는 것은 랍비들의 용어로는 열방이라는 뜻입니다. 보편적 교회가 다 깃들일 만큼 풍성한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천국의 완료성입니다.
그 완료성과 종결성을 은닉하고 있는 천국(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바로 겨자씨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들어 와 있습니다. 세상 속의 천국으로! 그래서 그건 안 보여야 됩니다.
하나님은 그 안 보이는 천국을 무시하고 조롱하면서 에잇! 그럴 것이라면
안 믿어! 라고 가는 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천국을 그런 모양으로 보내십니다.
그런데 그 천국이 바로 그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이 좁은 의미에서 천국(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9절 에서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는 자다 “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런 모습으로, 없는 모습으로, 안 보이는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먹히는 모습으로 보일 뿐입니다.
특히 큰 겨자나무 앞에서 세상은 겨자씨 보다 겨자나무를 더 추구합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힘의 세계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 앞에서 조그만 한 겨자씨로 존재하는 게 성도입니다. 그러한 천국의 모형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을 침공해 들어오신 것입니다.
눅 17:20-21절 보세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 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안 보여야 됩니다. 왜냐하면 공간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이미 어디에 이렇게 완성이 되어 있는데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우리에게 오는 거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공간적 개념의 국가 개념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통치권 안에 ) 들어 있는 자들(존재들)과 하나님과의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그 상태를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끌어 당겨지는 하나님의 백성들 또한 각자가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에 의해서 천국백성이 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게됩니까? 아주 작은 겨자씨처럼 삽니다. 겨자나무처럼 못 삽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그 왕이 이 땅에 오셔서 수난을 당하고, 멸시를 당하고, 연한 순과 같은 약한 자로 살고, 발가 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리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사 53:2-12)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이 되는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왕 되심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의해 통치되는 곳이지, 내 힘을 사용하여 나를 증명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조차도 자신의 힘을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단 한 번도 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걸 하나님나라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죽기까지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통치권에 완전하게 항복하는 모습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왕으로 통치하시는 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겨자씨처럼 작고 약하고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통치를 받는 다스림을 받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기독교는 내 소원, 내 비전, 내 야망, 내 희망을 내어놓고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걸 이루었다! 그럽니다. 그러나 세상 왕국은 그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왕으로 드러나기 위해서 하나님을 자신의 통치권 안으로 끌어 당깁니다. 내가 나의 뜻대로 나의 욕심으로 나를 통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소원과 비전과 야망과 희망을 성취하고 인기와 명성과 훌륭한 평판을 얻는 데에 하나님을 이용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섬기는 듯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옛 사람적 육적인 그‘나’라는 왕국의 수호와 발전과 번영을 위해서 신앙의 행위와 신앙의 대상을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선교도 열심히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헌금도 열심히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왕 됨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은 무섭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걸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한 악이라고 그럽니다.(롬10:2-3절에서)(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2-12)
그렇게 그 옛 사람적 육적인 ‘나’ 라는 존재의 성실함, 경건함, 착함, 부지런함, 똑똑함 등을 챙기는 용도로 신앙 행위와 하나님이 근사하게 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겨자씨가 아닌 것입니다.
이 겨자씨의 비유가 구약의 에스겔서 17장22절에서 인용이 되었습니다. (17:22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17:23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17:24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렘 17:22-24) ---- 예수님이 이걸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갑자기 에스겔서를 인용하셔서 겨자씨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까? 이 겨자씨의 비유는 율법과 행위로 자신들의 우월한 선민 됨을 챙기며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의 힘의 원리 속에서의 화려한 성공으로 오해하고 있던 당시 유대주의에 대한 대답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겨자씨의 비유는 힘의 원리를 삶의 원리로 채택하여 살아가는 세상의 대표로 등장하는 유대주의에게 진짜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비추어지는지를 설명하는 비유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행위와 열심과 지혜와 비전과 야망인 희망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뢰하는 죽은 흙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향목 가지 중 가장 연한 새순을 꺾어서 땅에 심는 것이고, 비로소 그 나무에 새들이 깃드는 그림이 에스겔서 17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겨자씨와 겨자나무의 비유인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성도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연한 순으로, 비워진 그릇으로 존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혹 네피림, 거인, 영웅, 유명한 자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힘의 원리의 구조를 갖고 있는 이 세상에서 왕 되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식은 그 존재가 다 비워지고 하나님의 생명력이 채워져서 연합이 되어진 상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나라의 존재양식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여 비워 하나님이 채워지는 것,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나라의 존재 양식이라고 한다면
그와 반면에 오히려 이 세상 속에서는 힘의 원리가 선이고, 의이고, 참이며, 정의라고 여겨지는 이 세상의 가치 질서로 보여지는 그러한 것들이 참된 하늘의 가치질서와 막 딱 들여질 때에 어떻게 보여 지겠느냐는 것입니다.
약함, 봐보 같음, 불성실함, 연약함, 패배, 망함, 숨겨지고, 낮아지고, 연약해지고, 보잘 것 없어지고, 비워지고, 해체 되어지는 그런 모습으로 보이는 게 이 세상 속 천국(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러한 약함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선악 판단에 의해 그들을 조롱하고 비웃는 자로 폭로가 되고 그렇게 세상은 둘로 극명하게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교회는 그런 칭찬 받는 곳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보다, 이것보다, 먼저 중요한 것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일 촛불 들고 어디 나가 갔고 사회에 참여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이 그를 미워해야 된다는데 그 세상을 오히려 주도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 속에서? 그걸 건강하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덩치가 커지고, 사람이 많아지고, 소유가 많아지는 것을 부흥이요 축복이라고 가르칩니다. 그걸 성공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큰 교회가 왔따인 것입니다. 완전히 반대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신자의 천국의 영광은 영원 속에서 비로소 들어나는 것이지,
절대 이 세상 속에서 겨자나무처럼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 권세 잡은 자에게 속해 있는 교회 안의 가라지들은 천국이 이 세상 속에서 겨자나무처럼 번성할 것이고, 그 화려함을 드러낼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이 세상에서 화려한 다윗왕국이 재건 될 것이라고 믿고 그런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힘 있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날 교회가?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가라지들의 논리가 이 세상에서는, 현실 속에서는 맞아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겨자나무 맞네! 부흥되네! 성공되네! 그게 시편 73편의 아삽의 시입니다. 맞아 들어간 것처럼 보입니다.
아삽 뿐만 아니라 하박국이나 요나나 전부 아니! 하나님 왜 악인들이 성공하고 번영하고 번성하도록 놔두십니까? 왜? 의인들이 그들에게 당하게 놔두십니까? 하고 얼마나 불평을 했습니까? 요나서, 하박국, 전부 그걸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답은 뭡니까?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거야 그럽니다. 외양간에 송아지 없고 논밭에 식물이 없어도, 무화과나무 열매 없어도, 그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부자가 되기 위해 쌓아 놓는 물질이 아니라 생필수품이었습니다.
그게 없어도 나는 오직 여호와로만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 가라지들의 삶은 이 세상에서 강자로, 왕으로, 다스리는 자로, 지혜 있는 자로, 이기는 자로, 힘 있는 자로, 번영과 성공과 번성을 누리는 자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천국의 겨자나무에는 천국 백성인 천국의 새, 즉 하나님의 열방이 거하게 되는데 이 땅에서는 그 천국의 겨자나무가 겨자씨로 보여 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겨자나무의 모습으로 오는 천국을 기대하는, 그렇게 세상의 힘과 권세를 추구하는 자들의 교만한 백향 목 나무에는 힘을 추구하는 악한 새들이 우글거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겨자나무 되고 싶어 하는 자들, 겨자씨가 아니라 겨자나무 되고 싶어 하는 자들 즉 세상의 힘과 권세를 얻어서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숭배하고자, 인기와 평판을 누리고자 하는 그런 자들의 무리 속으로 수많은 세상의 새들이 몰려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조엘 오스틴의 교회가 세계에서 제일 큰 것입니다. 세상의 새들이 몰려들어서 번영을 약속해주거든요? 백향목 되게 해 줄께? 긍정적 사고 해 보자는 거죠? 그러니까 세상의 새 때들이 다 몰려 들였어요?
그러니까 그들은 그 앗수르의 권세와 방불한 세상 힘을 음미하고 누리며 승승장구하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세상의 백향 목, 겨자 나무에 내려앉는 모든 새들을 교만한 자, 멸망할 자라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요한계시록 18:2-4절까지에서 그러한 세상 앗수르, 바벨론, 그 왕의 세계의 권세와 그 힘, 그 힘의 나무, 그 백향목 나무에 내려앉으려 하는 새들을 더럽고 가증한 새라 부르십니다.
짝새도 아니고 황새도 아니고,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 그들이 모이는 거기는 번영의 신학을 외치는 곳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더러운 새들이 모이는 곳, 이 세상에서 왕 되고 싶어하는 더러운 새들이 모이는 곳으로 그래서 계18:4절에서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Come out of her, my people? 거기서 나와라입니다. 새들아! 거기 가서 앉지 말아라입니다. 거기 가서 앉으면 죽는다는 뜻입니다. 근데 거기에만 벌 때처럼 몰려갑니다, 새들이?
그러나 이 세상 속의 천국(하나님 나라)은 겨자씨이지 겨자 나무가 아니란 말입니다.
계18:12-13절 보면 이 세상의 힘을 대표하는 바벨론에서 사람의 영혼들이 거래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영혼들이 거래되는 곳이 어디입니까?
거시적으로 보면 이 세상 전체가 사람의 영혼을 담보로 하여 힘과 가치로 물물 교환을 하는 곳이지만 미시적으로 축약을 해 보면 이 세상 교회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의 영혼을 놓고 거래가 벌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서, 바벨론 되기 위해, 백향목 되기 위해, 겨자 나무 되기 위해서 더러운 새가 모여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일단 모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이 정신 똑바로 차리셔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이 세상의 힘이 영원할 것 같지만 일 시간에(일순간)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절대 이김을 추구하며 사는 이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비워져가고, 낮아지고, 연약한 자로 섬기는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힘을 가지면 힘을 추구하면 끊임없이 바벨론이 되어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마귀화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을 추구하는 것,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것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세상에게, 세상 속에서 영향력을 끼쳐서 야! 우리도 저렇게 한 번 착하게 살아볼 까? 누구 닮아볼까? 그런 것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성도는 자기가 부인되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은혜만 오롯이 드러나야 됩니다. 그분의 영광만 드러나야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능력과 그분의 침노가 나를 해체 시켜가는 그 위대한 경험을 현재 자신이 자리한 그곳에서 몸소 체험하는 현장이 되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겨자나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겨자씨로 은익 되어져야, 숨겨져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제 나타난다고 그럽니까?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우리가 그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겨자나무로 확 완료, 종결 되는 곳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면 말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 때 비로소 그 화려하고 위대한 그 정체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은익(숨겨지게)되어 있어야 됩니다.
따라서 천국(하나님 나라)은 다른 게 아니라, 저와 여러분 자신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그렇게 숨겨져(은익되어져)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위대한 기독교인 이런 평가는 잘 못 된 평가인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왕의 세계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 안의 왕의 세계에 십자가 지신 예수가 왕인 힘의 세계로, 침노해 들어오셔서(천국으로 침노하셔서) 옛 사람적 육적 자아인 그 ‘나’ 라는 존재의 악한 실체를 폭로시키십니다. 성령에 의한, 성령의 주도에 의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장악된 그 은혜가 내 안에서 왕노릇 함으로 말미암아 나의 악한 실체가 하나하나 폭로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그 천국(하나님 나라)의 세력에 의해서 그 옛 사람적 육적 자아인 그‘나’의 세계가 완전히 점령을 당하고 그 옛 사람적 육적 자아인 그 ‘나’는 새로운 하늘의 “나”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해체 되어지고 부인되어지는 그 내 안의 전쟁을 치르면서, 그 과정을 겪으면서, 내가 또 세상 속으로 침투되는 천국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침투되는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성도는 작은 예수의 역할을, 겨자씨 같은 작은 예수의 역할을, 연한 순 같은 작은 예수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는, 신자는 겨자씨처럼 은닉되어 있는 듯, 없는 듯, 작은 자로 약자로 살다가 제 역할 다 마치고 천국에 영광스럽게 입성하는 진짜 천국의 삶을 잘 살아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