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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넷 독자들의 성원 속에 포켓히스토리도 벌써 연재 4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필자의 졸필을 격려해주시는 여러 독자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서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번 주에는 13세기 유럽인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몽골군 얘기를 한번 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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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기병들
먼저 몽골군에 대해 이야기하기 이전에 고대 유목 기마민족의 기원을 살펴보자.
기마 민족은 크게 3계통으로 분류된다. 첫째는 건조지대를 본거지로 삼은 유목기마민족으로서 서방의 스키타이, 사르마트, 아바르, 하자르, 동방의 흉노, 유연, 돌궐, 위구르, 몽골 중간 지역의 오손, 월지 등이 이에 속하며, 둘째는 원래 건조지대와 삼림 또는 농경지대와의 접촉지대에서 주로 농경·수렵을 하던 기마민족으로서 동방의 오환, 선비, 거란 등이 그들이다. 셋째는 삼림지대에서 수렵에 종사하던 민족이 기마민족화한 부여, 고구려, 여진, 만주 등이다.
유목과 기마는 당초부터 하나로 결부되어 있던 것은 아니다. 기마술이 언제 어디서 발명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것이 고대 오리엔트에서 보급된 것은 BC 12세기 무렵부터일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지방의 기마술을 연마하여 유목과 결합시켜 세계역사상 최초로 전형적인 유목 기마민족국가를 세운 것이 아리아 계통의 스키타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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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기마전사 (BC 6세기)
스키타이는 BC 8세기 말 동방에서 남 러시아 초원에 나타나서 BC 6세기 이후 남러시아, 북 카프카스 초원을 중심으로 강력한 국가를 세웠다. 이들 유목민은 기마술을 연마함으로써 증기기관이 발명되기 이전 시기에 최대 기동력을 발휘, 신출귀몰한 기마군단을 만들어 농업 정착민의 군대를 압도하게 되었다. 또 스키타이 계통의 무기, 마구, 장신구 등의 특징은 여러 가지 동물의 모습을 부조하여 나타낸 동물무늬가 많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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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장방형 옷 장식 : 숫 사슴 머리를 물고 있는 사자 (BC 4세기 초)
이와 같이 동물무늬를 특징으로 하는 기마문화는 동방으로 전하여 몽골고원의 유목민족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BC 3세기 말에는 흉노의 유목 기마민족이 성립되었다. 흉노가 멸망하자 선비가 남만주에서 몽골고원으로 진출하여 2세기 무렵에 기마민족국가를 세웠으나 그것은 3세기 중엽에 몇 개의 부족으로 분열되었고, 그들 중 일부는 중국으로 들어가서 5호16국 중의 몇몇 나라를 건설하였는데, 마침내는 선비의 부족인 탁발이 화북에서 북위를 세웠다. 북위는 북아시아의 기마민족이 중국 내부에 수립한 최초의 큰 왕조이다.
한편, 몽골고원에서는 유연(5세기 초∼6세기 중엽), 돌궐(?∼8세기 무렵), 위구르(?∼9세기 중엽), 그리고 거란, 몽골, 준가르 등 유목 기마민족이 흥망 하였다. 이들 중에서 흉노, 유연, 돌궐, 거란, 몽골, 준가르 등이 끝내 그의 본거지를 확보한 이유는 그들이 본디 유목민이었기 때문이고, 선비족이 그의 본거지를 버리고 농업지대로 이주한 것은 그것이 원래 목축과 함께 농업도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부여나 고구려도 그러한 선비족의 유형에 속하는 비 유목 계통의 기마민족이었다. 특히 고구려는 동북아시아·만주에 있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이었고, 4∼6세기 초에 걸친 전성기에는 한반도의 태반과 남만주를 그의 세력권에 두었다. 스키타이 계통의 기마문화가 농업지대로 흘러들어간 것은 주로 이들 비 유목 계통의 기마민족이었다. 즉 그것은 남쪽으로 옮겨간 선비에 의해서 3∼5세기의 화북에 유행하였고, 또 고구려·부여 등을 통해 한반도에 전파되었다. 동물무늬를 수반한 무기, 마구, 기타 스키타이 계통으로 보이는 기마문화는 일본의 고분시대 후기문화를 특징짓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의 사학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는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와 ‘고사기(古事記) ’,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에 보이는 신화나 전승, 나아가 동아시아사의 대세, 이 세 가지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후 기마민족설을 제창하였다.
기마민족설이라 함은 일본의 고대국가가 기마민족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보는 학설이다. 원래 기마(騎馬)라 함은 말을 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사전적 의미로는 '말을 타는 민족' 이란 뜻이 된다. 그러나 말을 교통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있어온 여러 민족의 공통적인 습속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말을 탈 수 있는 민족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그 민족이 어떠한 생산 산업에 종사하는가에 따라 구별할 때, 농업을 주된 산업으로 삼을 경우에는 농정민족이라 하며, 목축을 주된 산업으로 할 경우에는 유목민족이라고 일컫는다. 이 경우 유목민족이 사회구조상 목축생활을 하기에 말을 보다 필요로 하고 가까이 접하기는 하지만 이를 기마민족과 동일시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기마민족이라 함은 군사적으로 기마전술에 능하였던 북방 내륙의 건조지대를 무대로 활동하였던 스키타이 흉오 돌궐 선비 오환 등의 여러 민족을 일컫기 때문이다.
이 설의 발상은 일본 고분문화가 전 후 각 시기의 문화적 성격이 근본적으로 상이하다고 보는데 있다고 생각된다. 일본 고분시대의 시기구분 방법에는 전 중 후 3기로 나누는 구분법과 전 후 2기로 나누는 구분법이 있는데, 기마민족설을 주장한 에가미 나미오의 경우 중 후기의 고분문화는 본질적으로 같고 일련의 것으로 전기와는 구분된다고 파악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기를 3세기 말(혹은 4세기 초)에서 4세기 후반까지의 시기라 보고, 후기를 4세기 후반부터 7세기 후반까지의 시기로 나누어 구별하였다. 그는 이러한 시기 구분의 관점에서 전기 고분문화의 경우는 앞 시기인 야요이 후기 문화와 연대적으로도 관련성을 보이고 있으며, 문화적 요소도 동일성을 가진다고 보았다. 따라서 전기의 경우에는 원분도 있으며 구릉의 정상 가까운 곳에 고분을 만드는 특징이 있고, 부장품도 복식적, 상징적, 주술적, 종교적인 요소를 가지며 특히 거울 칼 구슬이 함께 묻혀 있는 점은 야요이시대의 전통을 잇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후기의 경우는 오우진릉 닌토구릉으로 대표되는 거대한 전방후원분이 상당수 있고 부장품도 무기나 마구, 복식품이 많으며 그 중 대부분은 3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만주와 몽고 그리고 북중국에서 크게 활약하였던 동북아시아의 기마민족인 호족의 문화와 동일한 것이 많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전기가 평화적이고 종교적이며 소박한 특질을 가진 데 반해 후기는 군사적이고 실용적이며 화려한 요소가 특징을 이룬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서기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중국 만리장성의 이북에 살고 있었던 오호민족이 장성을 넘어 중국의 화북지방으로 이동할 무렵, 고구려와 가까운 퉁구스 계통의 북방 기마민족의 일부가 새로운 무기와 말을 가지고 한반도로 남하하여 당시 남부지방에 있었던 구야국을 중심으로 한 변한 지역을 정복하였다고 한다. 나아가 진수가 찬술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 보이는 삼한세력의 연맹장인 진왕은 남하한 퉁구스계의 지배자였다는 것이다.
한편 4세기초에 이르러 이 진왕의 통치 아래 있었던 기마민족이 현해탄을 건너 북큐슈의 츠쿠시 지방에 도착하여 그 지역의 정치집단을 정복하여 왜 한 연합왕국을 건설하였다고 보았다. 이것이 제1차 일본국가의 건국이며, 그 창시자가 일본서기에 보이는 슈진 천황이라 추측하였다. 이어 그 세력은 4세기 말경에는 다시 키나이지방으로 진출하여 강대한 세력을 가진 야마토정권을 수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제2차 건국이며 이를 성취한 인물이 오우진청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오우진 시대에 왜 한 연합왕국은 키나이 지역에 그 세력을 확립함과 동시에 한반도 남부에도 세력을 확장하여 4세기말에서 5세기 초에 걸쳐서 한반도 남부의 제국과 연합하여 대고구려작전의 주도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그 주장의 요점이다.
아... 머리 아프다. 이제 고만하자. -..-
그럼 본격적으로 공포의 몽골의 기마대에 관해 얘기하도록 하자.
유럽인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몽골기마대. 그들은 몽골 이전(흉노, 돌궐등)부터 있었던 유목민 특유의 전술이 한 요인이 되었다. 몽골군에게는 두 가지의 강력한 무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몽골말과 병사 개개인의 탁월한 전투력이다. 몽골 기마병들은 1인당 말 3~5마리를 끌고 다니면서 빠른 속도로 진격하였는데 이는 말을 계속 바꿔 타면서 말의 체력을 안배함으로써 기동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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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전사들
몽고의 말은 평균 132㎝로 대략 158㎝ 정도인 서양의 말보다 왜소하나, 여러 가지 우수한 점들이 있는데 먼저 사료를 안줘도 스스로 해결한다. 겨울엔 언 땅에서 죽은 풀 먹고 주간에 먹이를 주지 않았다. 야간에 달빛아래 먹이 찾고, 수시로 묶어두어 불필요한 기름기 소모하여 수 백 킬로미터를 달려도 땀이 없고 지지치 않는다. 수백, 수천 필의 말을 집결하여도 울지 않도록 훈련되어 있고 종마이외에는 전부 거세하여 온순하고 지구력 강하다. 10주야 까지 매복 시에도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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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말
또 특유의 치고 빠지기, 기습, 돌파. 숫자상 불리하거나 적의 지휘부가 약해보이거나 할 때 가장 강력한 정예군으로 하여금 중앙을 돌파 하여 지휘부를 괴멸시키는 전술 등을 사용하여 적을 교란시키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여기서 몽골군의 전술을 몇 가지 살펴보자.
1. 윤번충봉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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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납와전법 : 주머니 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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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좌우마를 달리게 해서 교란시킴.
- 주위를 질주하면서 활을 쏘고 식량 등 물자 부족 시에 돌격 감행.
- 고의로 포위망을 풀어줌 → 선두부대의 돌진 유도.
- 자루 속에 넣고 전 방향에서 공격.
- 300∼1000명의 선두부대를 향해 적에 대해 공격 시엔 전방 지휘관의 신호(깃발. 함성)로 자루 형성함.
3. 도시 공격 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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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촌락의 장정 강제 징집을 통해 후속 병력 보충 차단 및 자대 병력 보충
- 대보구축.
- 공격 시 선두부대 이용
- 자기끼리 싸우게 함.
또 징기스칸을 돋보이도록 하는 공포전략도 한 몫을 하였다. 이러한 예는 호레즘과 러시아 침공 시에 이용하였던 것인데 이는 물론 대량의 학살로 주변의 다른 성들을 공포에 몰아넣어 항복시키는 전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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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 (Chingiz Khan, 1155 ?~1227.8.18)
물론 그 이전 유목민에게도 이러한 학살은 있어왔지만 그것을 전략으로 이용하지는 못하였다. 징기스칸은 부족한 병사를 그 지역에서 보충하는 방법을 취했다. 물론 그 지역 병사들은 다음 싸움에 최전선에서 싸워야 하였고 물러날 시에는 뒤에서 몽골군의 활이 가만히 두지 않았다. 물러날 곳이 없는 싸움인지라 포로처럼 끌려온 병사들은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징기스칸이 그 자신이 잔인하였다는 소문을 만들어 낸 곳은 역시 호레즘과의 싸움이었다. 그는 한곳에서 보름동안 무려 9만 명의 죽였는데 그곳엔 사람이 살았던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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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골 기마대의 공성전
그는 학살을 한 후 떠나가면서 후발대를 남겨두었다가 몽골군이 떠난 것을 보고 도시로 돌아오는 생존자마저도 학살하였다고 한다. 몽골군은 적의 항복 여부 무관하게 우선 철저한 파괴와 살상을 통해서 풀 한 포기, 작은 집, 짐승 한 마리 없이 완전 소멸하는 초토화 작전을 심리전에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공포 분위기 조성하고 저항 시에는 몰살시키나 항복 시에는 살상을 중단하여 무혈점령의 성과 증대시켰다. 이러한 초토화 전략은 후대에도 많은 전략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러한 몰살전략은 나중에 오히려 반감의 큰 영향을 끼쳐 지반을 흔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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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기마궁수의 복장
이렇듯 강했던 몽골은 칭기스칸 사후 100년 뒤 중국 땅에서 밀려났고 200년 뒤에는 지금의 러시아 초원에서 밀려났으며 300년 뒤엔 페르시아에서 소멸하였다. 하지만 그 계파인 오이라트(준가르제국)는 한때 중국의 일부를 점령하기도 하였지만 대포에 밀려 패배하였고 중국에 복속되었다. 물론 이들도 지금 중국 위구르지역 서편에 자치주를 얻어 살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에 편입된 후손들은 카자흐스탄, 키르키즈스탄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지금 몽골의 국력은 약화된 것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근대화에 적응을 못하였기 때문이다. 대포와 총을 사용하는 적에게 활과 말로써 싸운다는 것은 어떤 학자가 말했듯 그야말로 13C와 18C의 싸움이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중국과 러시아에 복속되었고 그것은 근대화의 길을 더디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몽골군의 우수한 전장상황 파악은 몽골군이 보유한 경기병의 효과적이고 적극적인 운용으로 오는 정찰상의 이점과 관련이 있고 우수한 기동력은 전군을 기병으로 하는 몽골군의 특성에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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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기마병
그들의 우수한 장거리 공격화력은 그들이 보유한 복합 합성궁 덕분인데, 당시 몽골 활을 유럽최고의 롱보우에 비교하자면 영국 롱보우는 주목으로 만든다. 기술적으로는 단순한 형태의 직궁에 속하며, 활의 형태는 가운데 힘을 받는 부분을 굵게 만들고, 양끝으로 올라갈수록 점차 가늘어진다. 그 크기는 5피트 이상 6피트에 달해 이 활을 쏘는 궁수들의 키보다도 컸다.그 큰 덩지에도 불구하고 75파운드 힘과 250야드의 사거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훨씬 작은 몸집의 몽골 활은 100~160파운드 힘과 350야드의 사거리를 보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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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롱보우(long bow)
몽골 경기병은 화력지원과 정찰에 사용되었고 활을 이용한 경기병 공격이 적 부대의 숨통을 완전히 끊기에 부족할 때에는 중기병의 충격력을 이용한 공격이 사용되어졌다. 적의 대형이 무너지고 틈이 보이기 시작하면 몽골 중기병은 12피트 길이의 창으로 무장한테 돌격하여 결정타를 날리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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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중기병들
보다 우수한 기동력과 화력으로 무장하고 신출귀몰하는 몽골군은 거리를 두고 적에게 화살공격을 가했다. 만약 몽골군이 적을 포위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그들은 망구다이 전술(Mangudai Tactics) 같은 다른 전술을 사용하였다. 망구다이 전술은 후퇴하는척하며 적을 일부를 유인하여 본대로부터 떨어뜨린 후 집중포위공격을 가하는 전술을 말하며 위에 기술한 납와 전술의 파생 전술이다.
전략적으로는 몽골군은 몇 대의 부대로 나누어 일반적으로 넓은 전선을 평행으로 진격하게 하면서 곳곳에 경기병 척후를 보내면서 주력부대의 이동을 은닉한다. 그러다가 척후들에게 발견되는 적부대가 있으면 이는 근처 모든 평행선상에 있는 몽골군부대의 집중 타겟이 된다. 군을 몇몇 부대로 나누는 것에는 유리한 점이 있다. 일단 겁을 먹은 적의 눈에는 여러 방향에서 진입해오는 군대의 규모가 훨씬 커 보이고 보급차원에 있어서도 소규모부대는 대규모의 부대보다 훨씬 용이하게 스스로의 보급을 해결할 수 있었다.
몽골 부대들은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적을 공격하는 것이 원칙이다. 적의 정면을 담당하는 사단은 상황에 맞추어서 적의 진격을 멈추거나 천천히 뒤로 빠지고 그와 동시에 다른 사단들은 적부대의 측방과 후방으로 접근한다. 적 부대는 병참/연락선을 끊겨지기 않기 위해 뒤로 후퇴할 것이고 몽골군은 이때 일어나는 혼란을 최대한 이용하여 적을 포위하는데 성공한다.
각 부대 간의 연락은 말을 탄 연락병들의 집단이 릴레이 형식으로 말을 달려가며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전술적으로는 깃발과 고둥나팔 화전 등을 사용해 신호를 보냈다. 전략적으로는 몽골군 부대가 지평선에 나타나기 훨씬 전에 몽골 스파이들이 상인무리로 가장하여 항상 앞서 작전지역에 투입이 되었다. 기병이 효과적으로 운용되기 힘든 지형인 늪지대, 두터운 숲지대, 산악지형의 경우엔 몽골군은 좁은 길에 치명적인 약점을 보이는 기마부대의 성격상 승리하지 못했다.
13세기 초 몽골제국은 서서히 서쪽으로 확장을 꾀하기 시작했고 러시아는 1240년 몽골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바투 칸 휘하의 몽골군은 러시아를 정복하고 헝가리로 눈을 돌렸다. 헝가리로 진입하기 전에 바투는 북쪽방면의 폴란드방면을 견제하기 위해 일대의 병력을 바이다르 장군에게 주어 공격케 했다. 헝가리와 폴란드 방면으로 진입한 몽골 부대들의 기동력과 유기적인 협조는 흡사 이차대전의 기갑부대들의 그것과 흡사했다.
1241 년 4월 5일에 바이다르 장군이 이끄는 2개의 몽골 부대들은 사일레시아의 듀크 헨리2세가 이끄는 2만5천명의 폴란드와 독일병사들과 Liegnitz에서 조우했다. 상대적으로 드넓은 평원지역이었던 Liegnitz에서 몽고군은 그들이 애용하는 망구다이 전술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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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군에게 관광을 타는 중장 튜토닉 기사단과 템플러들
몽골군은 유럽의 중장 튜토닉 기사들과 템플러들을 몽골 경기병을 이용하여 몽골군의 중앙으로 유인했고 일단 헨리 휘하의 중기병부대가 공격에 동원되자 일단의 몽골 경기병들은 옆으로 퍼지면서 유럽기사단과 나란히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아댔다. 몽골 경기병들 사이에서 끼인 기사단은 앞, 좌, 우 삼면에서 몽골 경기병들이 쏘아대는 화살에 완전히 노출되었다. 그리고 적당한 순간이 다가오자 숨어있던 몽골 중기병들이 돌격하여 결정타를 날렸다.
폴란드 쪽을 짓밟은 몽골군은 헝가리를 침공하는 본대와 재빨리 합류하여 벨라왕이 이끄는 대규모 유럽기사단을 사조강 전투에서 대패시켰다. 하지만 헝가리의 운명은 오고타이 칸의 죽음으로 겨우 완전파멸을 면했다. 몽고군은 나타 날 때와 같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유럽인들은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궁수부족과 전술의 부재로 스텝의 기마궁수들을 상대하기 벅찼다. 유럽의 군대는 기사를 주력으로 삼고 의지 하였으나 기사들의 돌격은 주로 적 보병들의 방진을 와해시키는데 사용되기에 알맞은 전술이었다.
유럽의 보병들은 기사들이 돌격할 때 뒤에서 보조하며 기사들의 후미를 보호해주며 기사들이 미처 죽이지 못한 적이나 말에서 낙마한 적을 죽이는데 주로 쓰여 져 왔다. 서양의 기사들은 우수한 갑옷을 착용하고 훈련도는 매우 뛰어났으나 재빠른 몽골 경기병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후에 이 전투로 인하여 신성로마제국으로 가는 입구가 열리고 서유럽까지 몽고군에게 피바다가 될 수 있었으나 1242년 오고타이칸의 사망으로 유럽은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다....
5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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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크헉.........엄청난 역사가.....잘 읽고 갑니다....
크으으으으으으으으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