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의 슬픈 여행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의 면적 7만 5870평, 둘레 6㎞의 작은 섬으로
무인도이다. 인천광역시에서 남서쪽으로 20㎞ 정도 떨어져 있으며,
영종도 인천국제공항 바로 아래쪽 무의도와는 하루 두 번 썰물 때
갯벌로 이어진다. 섬 대개가 해발고도 80m 이하의 야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안은 모래와 개펄이 뒤섞여 있다.
인천공항1 터미날
북파 공작부대로 계획되었던 대한민국 공군 684부대의 훈련장으로
유명하다. 현재 그 흔적으로는 밧줄을 걸어 유격훈련하던 바위만 그대로
숲풀에 가려져 일부 남아 있었다. 영화 실미도의 배경이며, 실제로
촬영도 여기서 진행되었으나, 크랭크업 이후 촬영지를 해체해서 현재는
갈대밭에 촬영지였다는 팻말만 있었다.
1971년 8월 23일, 실미도 부대원 24명이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하여 인천광역시 남구 학익동·용현동·숭의 로터리·
제물포역·석바위 등을 지나 서울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49-6 유한 양행 앞에서 군경과의 총격전 끝에
20명이 사망하였다. 실미도 대원 생존자 4명은 1972년 3월 1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실미도 부대는 1968년 1월 21일 ‘1·21 사태’가 발생하자 정부의 대북
대응 조처 강구 방침에 따라 중앙 정보부 주도로 1968년 4월 1일 대북
특수 공작을 목적으로 하여 창설되었다.
과거사 진상 규명 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실미도 부대 공작원들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여 모집 되었으며 당시 첩보 수집을 담당하던
공군 2325부대 내에 소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석바위를 지나던 중
버스 바퀴가 펑크나 이곳에서 서울행 버스로 갈아타고 계속 서울로
향하였다. 오후 2시 15분경 군경 저지선에 막혀 총격전을 벌이다.
수류탄을 터뜨려 부대원 다수가 사망하고 4명은 생존하여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다.
실미도 사건은 냉전 시대 반공 이데올로기가 강화되어 가던 시기에
국가가 자행한 인권 유린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으로 필자
는 보였다. 46년이 지나서야 진상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을 꾀할 수 있었고, 이와 유사한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진실의 일부를 확인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해설자는 말한다.
실미도는 썰물때는 물이 빠져 걸어서 하루에 두번 왕래 할 수 있다.
46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사실을 명백히 밝혀 어두운 과거를 재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야 국가를 위해 병역의 신성한 의무를 하다
곤히 잠든 새벽에 날벼락을 맞고 희생된 젊은 영혼들의 넋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생때같은 귀한 자식들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들의 찢어지는 가슴을 치유하는 길도 될 것이다.
실미도 사건의 억울한 희생자들은 나라로부터 제대로 예우나 대우를
받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버렸다. 이 기막힌 심정을 어디에
하소연하겠는가?
실미도 부대를 쭉 지켜보고 사건현장을 생생하게 접한 사람(지역 증인)
들도 하루 빨리 진상이 재조명되기 바라는 마음일 것으로 보면서,
실미도의 슬픈 여행을 마친다.
hl4ckn@daum.net
2018년 5월마지막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