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시간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 연속적 시간의 흐름만 있는 것일까. 시간의 흐름에 불연속적 부분은 없는 것일까. 이를테면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잠깐 쉬게 하는 ‘쉼표’ 같은 것은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한 성찰을 담은 시가 〈자정(子正)을 지나며〉이다.
“오늘이 잦고 내일로 가는 길목”인 “자정(子正)”에 “가교(架橋)”가 “있을 거”라고 하고 있다. 가교(架橋)로 들어가는 “문고리”가 있을 것이라고 하고 있다. 문고리가 있는 방에 들어가면 “꿈들과 사랑도 있을” 것이라고 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틈(혹은 시간의 틈)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의 틈’에서 우리는 진정한 본래적 자아를 만나게 될지 모른다. 고정된 주체, 확정된 주체를 만나게 될지 모른다. 시의 끝에서 장지성 시인은 “내가 나를 맞는구나”라고 하였다. ‘이때의 나’를 확정된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의 틈’에 대한 발상이 놀랍다. 여태까지 누가 시간의 틈에 대한 인식을 펼쳐보였던가. 누가 불연속적 시간에 대해 언급하였던가. 기껏해야 프랑스의 바따이유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불연속성에 대해 언급했을 뿐이다. 장지성의 시조들에는 낯익은 구석이 없다. 독서자를 낯선, 새로운 세계로 인도한다. 장지성의 시들을 ‘새로운 세계, 낯선 세계에 대한 발견’이라고 간단히 정의할 수 있다. 월하문학상 수상작인 〈법주사〉도 이 점에서 주목된다.
그 중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종장 “그림자 밟히지 않는 인간 꿈은 어디인가”이다. 그림자 밟히지 않는 인간 꿈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세상의 법칙, 현실의 원칙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세상의 법칙, 현실의 원칙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법칙, 현실의 원칙에서 벗어나 있는 세계를 꿈꾸는 장지성 시인, 희로애락의 세계, 오욕칠정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는 세계를 꿈꾸는 장지성 시인!
‘그림자 없는 인간’은 희로애락의 세계, 오욕칠정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는 ‘다른 세계’에 대한 절묘한 은유였다. 이 점에서 조윤아 교수가 장지성의 시 세계를 ‘부처를 꿈꾸는 시인의 인생에 대한 통찰’이라고 명명한 것은 타당하다. 그림자 없는 인간의 세계는 열반에 도달한 부처의 세계였다. 그림자 없는 인간의 세계가 열반에 도달한 부처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 근거를 다시 〈법주사〉에서 찾을 수 있다. 장지성은 둘째 연 첫 행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탑돌이 후광 속에 기척 없이 오신 대불
“기척 없이 오신 대불”의 은총으로 그림자 없는 세계, 희로애락, 오욕칠정에서 벗어난 세계를 꿈꿀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림자 없는 세계, 희로애락, 오욕칠정에서 벗어난 세계는 물론 지난한 세계이다. 장지성 시인도 이를 알고 있었다. 장지성 시인은 〈겨울 가로수〉 첫째 수 종장을 다음과 같이 끝내고 있다.
“가로수”를 “서성이고 있는” 것으로 본 것이 특이하다. 더구나 ‘겨울 가로수’를. 가로수에 자신의 처지를 투영시킨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유랑”에 끝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수도(修道)에, 용맹정진에 끝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장지성은 〈꽃 진 자리〉에서도 새로운 인식을 펼쳐 보이고 있다. 우선, “꽃핌에도/ 내홍”이 있었으리라는 인식이다. ‘모래 한 알에 우주가 담겨 있다’(블레이크)는 것은 코스모스[질서]로서의 우주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우주의 다른 말이 코스모스이다. ‘한 송이 꽃’도 이러한 우주, 이러한 코스모스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질서의 법칙이 꽃 한 송이를 피우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지성이 특별한 것은 ‘꽃핌’을 질서의 반영이 아닌 ‘내홍’의 반영이라고 한 것이다. 내홍은 내적 “다툼”, 내적 분규, 내적 “시샘”의 다른 말이다. 꽃 한 송이를 무수한 내적 다툼, 무수한 내적 분규, 무수한 내적 시샘의 결과라고 한 것과 같다. 우주가 코스모스의 우주가 아니라 카오스의 우주라고 한 것과 같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과 “먹구름”들을 동원한 미당의 〈국화 옆에서〉처럼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또한 담겨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국화 옆에서〉와 다른 것은 ‘꽃 한 송이’가 외부적 시련의 산물이 아니라, 내부적 시련의 산물이라고 한 것이다. 독창적 인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이 시의 새로움은 “꽃들”의 “아름다”움을 “낙화”에서 본 것이다. 낙화가 없는 꽃들에서 무슨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겠는가. 아름다움은 ‘아름답지 않은 것’에 의해 인식된다고 한 것이다.
〈꽃 진 자리〉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꽃들과 낙화의 관계는 삶과 죽음의 관계가 아니었다. 꽃들은 죽어서 다시 사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꽃 진 자리’에 “도도록한 열매 하나”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장지성 시인은 〈꽃 진 자리〉에서 “죽어도 다시 사는” 진경을 연출해 보이고 있다. ‘죽으면 산다’는 역설을 입증해 보이고 있다. 완전성에 대한 갈망은 이영도 시조문학상 수상작인 〈아지랑이〉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회자정리(會者定離)는 세상의 이치이고, “이별 없”는 곳은 극락정토, 다름 아닌 “이 세상 저 밖”의 이치이다. 이별 없는 극락정토에서 “다시 만날” 때 흘리는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다. 눈물을 “아지랑이”로 은유한 것이 이채롭다. ‘휘발성의 눈물’과 아지랑이는 상호 인접의 관계에 있다.
희로애락, 오욕칠정에서 벗어난 완전한 세계에 대한 갈망은 신작시들 〈길을 가다가〉 〈천수만 시초(詩抄)〉 〈가을 과수원〉 〈우리 집 마당에는〉 〈바둑 두기〉 등에서도 나타난다. 다음은 신작시 〈길을 가다가〉 전문이다.
시인의 주요 덕목 중의 하나는 미하고 세한 세계에 대한 발견이다. 그리고 이 미세한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의미 부여, 혹은 새로운 철학성 부여이다. “볼트 한 개”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조이고 풀리는” 세상의 “이치”를 찾아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연에 볼트가 있었겠는가, 볼트가 끼워져야 완전해진다면 그것이 어찌 ‘자연’이겠는가. “처음엔 이 부품도 없어선 아니 됐을”이라고 한 것은 아이러니로 보인다. 자연은 그 자체로 완전한 자연이었을 것이라는 것에 대한 아이러니로 보인다. 자연은 “한 틈새 오차 없이” 완전했다는 것에 대한 아이러니로 보인다.
특별한 것은 공간이라는 자연의 완전성에 시간이라는 자연의 완전성까지 염두에 둔 것이다. “한 틈새 오차 없이 제 영역을 다스렸을/ 아득히 펼쳐진 세월”이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앞의 〈자정을 지나며〉에서 보여주었던 시간의 불연속성에 대한 고찰을 일견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대한 정신은 자주 모순된 태도를 보이는 법이라고 간단히 다시 부인할 수 있다. 고정된 정신세계가 아닌, 열려 있는 정신세계가 위대한 정신이다.
〈천수만 시초(詩抄)〉, 〈가을 과수원〉, 〈우리 집 마당에는〉에서는 완전성에 대한 갈망에 덧붙여 조화의 세계에 대한 갈망을 보여주고 있다.
① 〈천수만 시초(詩抄)〉에서는 “해미천 갈대숲”을 뿔논병아리, 개개비들, 덤불해오라기들이 나누어 “일층엔 뿔논병아리 이층엔 개개비들/ 삼층엔 덤불해오라기”가 층을 이뤄 산다고 하였다. ② 〈가을 과수원〉에서는 과수원을 “바다”로 비유하여 “햇살”, “바람”, “달빛” 등 자연의 주요 요소들이 한마당 어우러지는 과수원의 완벽한 조화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③ 〈바둑 두기〉에서는 “별들”의 세계를 “바둑” 두는 것에 비유하여 역시 한마당 어우러지는 시골 “하늘”의 완벽한 조화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인간이다. 인간이 빠져 있는 조화, 완전에 대한 세계는 부족한 세계일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브레히트의 다음 시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조화, 완전의 세계는 또한 목가적인 세계이다. 자연과 인간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세계, 이상과 현실이 맞아떨어진 세계가 목가적인 세계이다. 특히 목가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세계를 강조한다. “집”과 “나무” “호수”는 “연기”가 없다면 죽은 집, 죽은 나무, 죽은 호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연기가 표상하는 것은 인간이다. 브레히트는 ‘연기’를 통하여 인간과 집과 나무와 호수가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는 목가적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장지성은 이러한 목가적 세계를 그의 신작시 〈외암리(外岩里)에서--송화댁〉에서 보여주고 있다.
“가을”이 표상하는 것이 “송화댁”인 것이 분명한 것은 “정원수/ 감도는 물”을 ‘가을’ 그 자체가 가져다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송화댁이라는 인물을 장지성 시인은 마치 화룡점정의 마지작 점으로 제시하면서 조화, 완성의 세계를 마무리 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지성 시인은 물론 〈천수만 시초(詩抄)〉의 앞부분에서도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여러 요소들의 합일적 세계를 보여주었다.
“울적”한 세계를 해소시켜 주는 것이 자연의 세계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는 점에서 역시 목가라고 할 수 있다. 목가는 조화, 완전의 세계와 인접의 관계에 있다. 조화, 완전에 대한 갈망은 백수 정완영 선생의 시세계의 특장이기도 하였다(이에 대해서는 박찬일, 〈시조의 고전주의--정완영 시조 전집 《노래는 아직 남아》에 부쳐〉, 《유심》, 2006 겨울호 참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