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공 최균(崔均, ?~1174)은 고려전기 말 완산주 수령 박춘령(朴椿齡)의 발탁(拔擢)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양반 반열에 오른 이른바 완산삼최(完山三崔) 중 한 분이다. 사도공은 계속 내직[1]으로 근무했고, 또 승진도 다른 사람보다 일러서 과거에서 성적도 좋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남 문정공(文定公) 최보순(崔甫淳)이 1162년(의종 16) 태어난 것으로 보아 완산삼최 중에서 가장 나이가 적은 것 같고, 대략 1125년(인종 3) 무렵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사도공에 관해서는 『고려사』<열전 최균전>이 있으므로 <열전>을 통해 자세하게 알아보기로 하겠다.
최균은 자가 간유이며 전주최씨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학문이 출중하였고, 인종 때(1122~1146)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차례 전임되어 소부 주부(종7품)가 되었다. 그때 재상 최윤의가 왕의 명을 받들어 문사를 선발하여 의례를 상세하게 제정하게 되었는데 최균이 수석으로 뽑혔다. 최윤의가 병이 들자 의종이 환관을 보내 남기고 싶은 말을 묻게 하였더니 아뢰기를, “신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서 장상에 올랐고, 심지어 자식과 사위들도 모두 요직에 있으니 더 바랄 것 없습니다. 다만 나라를 위해 크게 쓸 만한 인물을 추천하자면 오직 최균뿐입니다.” 하니 왕이 즉시 합문지후(정7품)로 임명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호부 원외랑(정6품)으로 발탁하여 내시[2]에 소속시켰다가, 곧 예부 낭중(정5품) 겸 태자문학(정6품)으로 올려주고 금자[3]를 하사하였다.
금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왕(명종)이 즉위한 까닭[4]을 물어오자, 최균을 접반사[5]로 삼았다. 금나라 사신이 여러 차례 따지고 물었으나 말로 풀어서 밝히는 것마다 조금도 착오가 없었으므로 금나라 사신이 최균의 민첩한 말주변에 탄복하였다.
조위총이 서경(평양)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최균은 동북로 도지휘사가 되어 여러 성을 돌면서 설득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최균이 등주(안변), 화주(영흥) 등 수십여 성을 두루 거쳐 돌아오다가 보룡역에 도착하자, 왕이 이경백을 파견하여 최균에게 임시로 예부시랑(정4품)을 제수하고 병마부사를 맡게 하여 병마사와 함께 서경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최균이 명령을 듣더니 이경백에게 말하기를, “내가 보건대 여러 곳의 성들이 조위총과 연결되어 모두 두 마음을 품고 있으니, 만약 적병이 도착한다면 그들의 향배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명령을 어찌 피하겠습니까?” 라고 하며 바로 화주에 있는 군영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조위총의 부하 장수 김박승과 조관 등이 공격해왔는데, 정부군 낭장 이거가 성문을 열고 적군을 들어오게 하니, 최균과 병마사 대장군 이의 그리고 어사 지인정이 사로잡혔다. 최균이 반란군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적의 괴수 조위총은 항오(사병)에서 시작하여 팔좌(정2품) 직위에 올랐으니, 나라의 은혜가 막대한데도 그 은혜를 잊고 의리를 배반하여 군사를 일으켜 반역을 꾸몄으니 하늘과 땅, 귀신과 사람이 모두 분노한다. 그들의 패망이 멀지 않았는데 너희들이 그 흉악한 무리를 도와 왕의 신하를 잡아 가두었으니 관군이 뒤따라오면 너희들은 모두 가루가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최균이 꾸짖기를 그치지 않았으므로, 최균과 이의 및 막료와 군료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최균은 초서와 예서를 잘 썼으며 글재주와 행정 능력이 모두 뛰어났으나 미처 크게 쓰이지도 못하고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그 이후에 예부 상서(정3품)에 추증[6]되었고 후에 아들(최보순)이 높은 벼슬(중서시랑평장사, 정2품, 부수상)에 오르게 되자 상서좌복야(정2품)를 더 추증하였다. 아들은 최보순과 최보연이며, 최보연은 벼슬이 공부상서에 이르렀다.
사도공은 당최(唐崔)에서 고려 시대 가장 먼저,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른 분으로 3대 계열에서 족보를 만들기 시작할 때 당최 시조(始祖)로 거론되기도 했다. 당시에 이미 사도공계는 한미해지고 말았으므로 문성공계와 문열공계를 중심으로 사도공시조론이 대두되었는데 대체로 문성공계에서는 사도공이 시조일 수 있다고 주장했고, 문열공계에서는 오히려 사도공도 문열공 최순작(崔純爵) 후손일 수 있다고는 주장하기도 했다.
문열공계 최초 대동보(大同譜) 『융경보』를 만든 감사공 최홍한(崔弘僩)은 스스로 토최(土崔)로서 경주최씨 문영공(文英公) 최언위(崔彦撝)가 전주로 옮겨와서 살면서 전주최씨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문영공을 원시조(原始祖), 문열공을 중시조(中始祖)로 삼아서 문정공파보로서 『융경보』를 만들었다. 그러나 감사공 주장이나 기록에는 상당히 문제가 있어서 그대로 믿기는 어려운 부분이 많다. 자세한 것은 문열공계에서 검토하기로 하겠다.
문성공계에서는 사도공시조론이 제법 팽배했던 것 같은데 자세한 고증해 본 결과, 사도공, 문열공, 문성공 세 분을 연결하는 세계표(世系表)가 만들어지지 않았고 결국은 3대 계열로 나누어서 족보를 만들게 되었다. 문성공계 최초 대동보 『강희보』를 만든 감찰공 최세영(崔世榮, 1613~1686)은 『강희보』에 <사도공계 자손록>을 부록으로 첨부하고, <서문>과 <변오고증[7]>을 통해 사도공시조론이 잘못된 것이라고 부정하고 있다.
* 각주 ------------------
[1] 內職. 중앙조정 직책. 성적이 우수하거나 배경이 든든한 사람이 맡는다.
[2] 內侍. 국왕의 각종 정무를 받들기 위해 문신 관료 중에서 선발한 근시 조직.
[3] 金紫. 금인(金印)과 자수(紫綬). 벼슬 높은 사람이 차는 의장(儀章)
[4] 1170년 정중부 등이 무신정변을 일으켜 의종을 죽이고 명종을 옹립했다.
[5] 接伴使.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맡은 임시 벼슬.
[6] 追贈. 죽은 사람의 벼슬을 높여주는 일.
[7] 辨誤考證. 전해오는 내용 중에서 잘못된 부분을 판별하고 고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