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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1: 6-10 오직 하나밖에 없는 복음 ( 2 )
반면에 루터는 23절을 주석하면서 처음부터 “즉 믿음이 오기 전에”를 “복음과 은혜의 때가 오기 전에”라고 설명함으로써 칼빈과 같은 교리적 접근보다는 구원사적 접근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24절의 헬라어 원문 παιδαγωγὸς ἡμῶν γέγονεν εἰς Χριτστόν(‘파이다고고스 헤몬 게고넨 에이스 크리스톤’)은 현대의 번역 성경들에서나 주석들에서 오늘날 대체로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몽학선생이 되었다”는 의미로, 즉 율법의 한시성(限時性)을 말하고 있는 의미로 번역되고 있다.
그런데 루터와 칼빈이 주석할 때 원문과 함께 기본적으로 사용한 본문인 제롬의 라틴어 번역 성경(Vulgata)은 “paedagogus noster fuit in Christum”으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우리 구절을 주석하면서 παιδαγωγός(‘파이다고고스’)에 본래적인 감독자와 한시적 직임의 의미 외에 교육자의 의미까지 부여하여 사용하였다. 우리의 두 종교개혁자들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와 비참함과 저주 상태를 깨닫고 좌절, 겸비, 두려움을 느끼고 은혜와 그리스도를 소망하도록 몰아가는 기능을 한다는 이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라틴어의 paedagogus는 ‘선생’을 뜻하는 다른 전문용어들(예: magister, praeceptor, doctor)이 별도로 있었지만 당시 paedagogus가 본래적 의미가 희석되고 (오늘날의 전문적 ‘교육자’의 의미는 아닐찌라도) 이미 ‘교육자’의 의미로도 쓰이고 있었던 사실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그런데 칼빈은 주석에서 paedagogus를 grammaticus(‘언어선생’)로 이해하여 교사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주면서 설명하고 있는 반면에, 루터는 같은 단어를, “교육도 하며 (매를 가지고) 징계도 하는” Zuchtmeister (‘쭈흐트마이스터’)의 의미로 이해하여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칼빈은 3: 24-25에서 ‘율법’이라는 단어를 자주 ‘의식(법)(ceremoniae)’의 의미로 이해하며 율법의 예비적 및 임시적 성격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칼빈은 의식적 및 계율적 성격의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폐기된 것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삶의 규칙과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은 폐기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반면에 루터는 같은 구절을 주석하면서 몽학선생의 엄격성을 강조하며 채찍으로 징계하는 교사 모티프를 율법에 대한 비유어로서의 몽학선생 개념에 집어넣어 설명한다. 그럼으로써 루터는 율법이 한시적이며 과거시대에 속한 것이며 믿음과 그리스도와는 관계가 없는 대상임을 강조한다. 루터는 이렇게 선언한다. : “믿음은 율법이나 행위가 아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붙잡는 확신이다.” “내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는 한에 있어서, 율법 역시 나에게서 떨어져나갔다.”
5. 결론
루터와 칼빈의 신학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며 당시와 교회 역사상의 모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세계교회에 큰 축복이었고 또 현재에도 그렇다. 한편 그들의 신학사상 중 오늘날에 와서 평가할 때 위대한 장점들이 드러나며 또한 결점과 실수와 부족 또한 드러난다.
물론 평가하는 자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결과가 나타나게 되겠지만. 본 논문에서 루터와 칼빈의 율법관을 그들의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특히 2: 16과 3: 19-25의 주석을 비교하면서 특징을 살펴보았다. 필자가 나름대로 평가해보기로는,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 가운데 주신 율법에 대하여 칼빈에 비하여 루터가 훨씬 바울신학적인 깊고 날카로운 혜안을 가지고 바른 설명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칼빈의 율법관의 약점은 성경 계시로서의 율법과 구원사적 계획에 따라 주신 ‘옛 언약’ 내지는 ‘계명’으로서의 율법을 정확하게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반면에 루터는 율법과 복음, 율법과 은혜, 율법과 믿음, 율법과 그리스도 간의 구별에 대한 깊고 확실한 복음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점에서 장점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또 한편에서 본 논문에서 다루지 않은 중요한 관련 주제는 믿음과 행함(윤리, 세계관), 행함과 성령, 행함과 심판, 행함과 성화가 되겠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루터보다는 칼빈이 훨씬 깊고 균형잡힌 깨달음을 제시해줄 수 있다고 필자는 나름대로 판단한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세계교회에 위대한 선물로 주신 두 종교개혁자들의 정신과 사상들을 더욱 깊이 그리고 균형감각을 가지고 비교·연구함으로써 더욱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오성종교수의 논문에 대한 논평
합신 조병수 교수
본 논문은 논자가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여 진술했더라면 훨씬 훌륭한 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논자의 개인사정으로 말미암아 이처럼 글의 완성도가 떨어지게 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계획과 달리 2: 16과 3: 19-25에만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참조 2쪽).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더 여유 있게 시간을 드려 귀한 논문으로 완성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진다.
본 논문은 갈라디아서에 진술된 바울의 율법 언급 가운데 대표적으로 몇 곳을 선별해서 루터와 칼빈이 어떻게 이해했는지 다루고 있다. 본 논문에 의하면 이 두 종교개혁자의 율법관 차이는, 칼빈이 성경계시의 통일성에 준해서 말하는 반면에 루터는 율법과 복음의 대조를 부각시키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것은 본 논문이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것(2쪽)이기 때문에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본 논문에서 더 밝혀진 것은 없다.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문제를 토의한 견해들을 참조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실제로 칼빈과 루터의 율법관은 이미 많은 학자들에게 주목을 받아왔다(예를 들면, D. MacLeod, "Luther and Calvin in the Place of the Law"[1974]; E. A. Dowey, "Law in Luther and Calvin"[1984]). 그러나 본 논문에서 이런 견해들은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본 논문과 관련하여 이 외에도 몇 가지 아쉬운 점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본 논문이 잘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칼빈의 갈라디아서는 분량이 매우 적기 때문에 율법관을 충분하게 서술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칼빈의 율법관을 논할 때는 갈라디아서 주석 외에도 그의 다른 저술들을 더 참조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율법에 대한 견해를 자세히 피력했다(2권 7-11장). 여러 저술들을 상호 비교했더라면 칼빈의 율법관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쨌든 본 논문은 율법관과 관련하여 칼빈과 루터를 비교함으로써 종교개혁자들의 다양한 견해를 보게 해주었다는 데서 공헌이 있다. 이와 같은 논문을 통해서 현대적인 시각에서 율법관을 이해하기 전에 종교개혁시대의 견해를 접촉하여 눈이 밝아진 효과를 얻는다. 어느 시대(현대 또는 종교개혁시대)가 더 정확하게 성경을 이해하는가는 아무도 쉽게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오성종교수의 논문에 대한 논평
최갑종 교수 (백석대학교, 신약학)
오성종교수의 논문, “칼빈과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의 율법관”(이하 ‘논문’)은 매우 시기적절한 논문이다. 왜냐하면 그의 논문은 최근의 바울신학연구에 있어서 가장 열띤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율법문제”를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샌더스(E. P Sanders), 던(James D. G Dunn), 라이트(Tom Wright)에 의해 주도 되고 있는 “새 관점의 바울운동”((The New Perspective on Paul, 이하 ‘새 관점’)은 전통적으로 이해되어 왔던 바울의 율법관은 물론, 바울의 충실한 해석자로 알려진 루터와 칼빈의 율법관에 대하여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였다.
새 관점에 따르면 바울 당대의 유대교는, 루터와 칼빈이 생각한 것처럼 율법을 지켜 그 공로나 선행으로 의와 구원에 도달하려는 "율법주의"(legalism)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에 의해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신분 유지를 위해 기쁨으로 율법을 준수하려는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이었다. 사도 바울이 유대교의 율법을 비판한 것도, 율법이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하는 의와 구원의 수단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유대인과 이방인을 서로 분리시키는 종교적, 사회적 장벽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루터와 칼빈은 그들 당대 로마 캐토릭교회의 공로주의사상을 1세기의 유대교를 이해하는 열쇠로 잘못 사용함으로써, 유대교의 율법은 물론, 바울의 율법관까지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래서 새 관점은 루터와 칼빈의 안경 없이 1세기의 바울과 유대교를 바르게 보는 새 관점의 운동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과연 새 관점의 주장처럼 루터와 칼빈이 바울의 율법관을 잘못되게 이해하였는가?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율법관은 물론, 바울 당대 유대교의 율법관을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바울서신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한편으로 모세의 율법(할례 및 유대교의 절기 등)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함께 일종의 구원론적 의미를 주려고 했던 유대주의자들의 거짓 된 교훈을 반박하기 위해, 또 다른 한편으로 이들의 거짓 된 가르침에 유혹을 받고 있는 갈라디아교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전파한 그 복음에 머물도록 설득하기 위해, 율법과 복음, 율법의 행위와 믿음, 율법과 약속, 율법과 그리스도, 율법과 성령, 율법과 크리스천의 삶 등에 관한 자세한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갈라디아서가 바울의 율법관은 물론 바울 당대 유대교의 율법관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루터와 칼빈의 갈라디아서 주석은 그들이 과연 바울의 율법관을 바르게 이해하였는지, 아니면 새 관점의 주장처럼 바울의 율법관을 왜곡시켰는지를 판가름 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비록 오 교수가 자신의 논문에서 새 관점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이 논문을 쓸 때 바울의 율법관과 관련된 현금의 상황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오 교수가 이 논문을 통해서 현금의 상황이 불러일으킨 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변을 주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 교수는 자신의 논문의 목적을, 1535년에 출판된 루터의 [갈라디아서주석]과 1548년에 출판된 칼빈의 [갈라디아서주석]에 나타나 있는 “서신의 중심사상”과, “2: 16, 3: 19-25의 주석”을 중심으로 루터와 칼빈의 율법관을 서로 비교 검토하는데 둔다(pp. 1-2). 오 교수는 갈라디아서주석을 중심으로 루터와 칼빈의 율법관을 서로 비교 검토하면서 양자 사이에 공통점은 물론 차이점도 발견한다.
먼저 양자 사이의 주요 공통점을 살펴보면, 루터와 칼빈은 다 같이 다음의 사실을 받아들인다.
(1)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선한 의지의 표현이다.
(2) 율법, 혹은 율법에 따른 선행은 결코 의와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의와 구원의 수단이다.
(3) 율법은 시민적, 사회적 용도, 곧 율법이 죄를 억제하는 기능과 함께, 신학적 용도, 곧 율법이 죄를 보여주고 죄인 됨을 깨닫게 하여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게 하는 몽학선생의 긍정적 역할을 가지고 있다.
(4) 율법은 그 전체(루터)나 부분(의식적, 계율적 성격의 율법, 칼빈)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되었다.
다음으로 양자의 주요 차이점을 살펴보면,
(1) 율법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루터는 성경을 “율법”(‘명령’)과 “복음”(‘약속’)으로 나누고, 성경에서, 그것이 구약에 있든, 신약에 있든, 사람에게 지킬 것(‘능동적 의’)을 요구하는 모든 것을 “율법”으로, 반면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것을 사람들이 믿음을 통해 받아들이도록 제시되고 있는 모든 것(‘수동적 의’)을 “복음”으로 본다.
따라서 루터에 따르면 “율법”과 “복음”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와 반위관계가 있다. 반면에 칼빈은 루터보다도 율법을 훨씬 더 포괄적으로 이해하여 율법을 복음과 똑같이 하나님의 은혜언약의 한 부분으로 본다. 양자의 차이점은 그 본질에 있지 않고, 그 주어진 양식과 시대적 차이, 곧 율법은 옛 언약으로, 복음은 새 언약으로 주어진 점에 있다. 따라서 양자는 서로 반위관계가 아닌 상호보완관계에 있다.
(2) 루터는 율법이 그 용도에 있어서 시민적, 신학적, 도덕적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율법 자체를 시민적, 의식적, 도덕법 등으로 나누지는 않는다. 그가 2: 16의 주석에서 “율법의 행위”를 의식적 율법에 한정시키지 않고 율법 전체와 관련시키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반면에, 칼빈은 율법의 용도에서는 물론 율법 자체를 시민적, 의식적, 도덕법으로 나누고, 본래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졌던 의식적, 시민적 율법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폐지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십계명을 위시한 도덕적 율법은 결코 폐지되지 않고 항구적으로 유효하다고 본다. 칼빈이 2: 16의 주석에서 “율법의 행위”를 거부한 것도 의식적 율법의 거부이지 율법 자체의 거부는 아니다.
(3) 루터는 율법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리고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게 하는 신학적, 영적 기능을 완수함으로써, 그 기능이 완전히 중지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율법이 결코 복음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칼빈에 따르면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도 여전히 신자의 유효한 삶의 규율이 된다.
(4) 4: 19의 주석에서 루터는 율법과 복음의 반위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율법의 중보자를 모세로 본다. 반면에 칼빈은 율법과 복음의 상호보완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율법의 중보자를 모세가 아닌 그리스도로 본다. 즉 시내산 언약 때 이미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적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칼빈에 있어서는 옛 언약(‘율법’)과 새 언약(‘복음’)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는 본질적인 일치가 있다.
오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루터와 칼빈의 율법관을 서로 비교 검토한 다음 율법에 관한 한 루터가 칼빈보다 바울을 더 정확하게 보았다고 결론을 내린다.
“필자가 나름대로 평가해보기로는,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가운데 주신 율법에 대하여 칼빈에 비하여 루터가 훨씬 바울신학적인 깊고 날카로운 혜안을 가지고 바른 설명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칼빈의 율법관의 약점은 성경계시로서의 율법과 구원사적 계획에 따라 주신 ‘옛 언약’ 내지는 ‘계명’으로서의 율법을 정확하게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반면에 루터는 율법과 복음, 율법과 은혜, 율법과 믿음, 율법과 그리스도 간의 구별에 대한 깊고 확실한 복음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점에서 장점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오 교수의 논문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하여야 하는가? 필자는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 루터와 칼빈을 평가하는 방법론 문제와 관련하여, 둘째, 갈라디아서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율법관에 관하여, 셋째, 신자의 삶에 있어서 율법의 효용성문제에 관하여.
먼저 첫 번째 문제를 생각해보자. 오 교수는 루터와 칼빈의 율법관을 서로 비교 검토한 다음 루터가 칼빈보다 바울의 율법관을 더 깊이 이해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과연 그런가? 오 교수의 지적처럼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이 칼빈의 갈라디아서주석보다 부피가 더 크고, 율법에 대하여서도 보다 더 자세하게 말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부피의 많음과 긴 설명이 부피의 작음과 간략한 설명보다 필연적으로 더 우월하다거나 더 정당하다는 것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루터와 칼빈의 율법관을 서로 비교 검토할 경우 우리는 텍스트 그 자체의 분석과 함께 반드시 그 텍스트가 쓰여 진 저자의 역사적 정황과 의도 역시 중요하게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사실 루터와 칼빈의 갈라디아서 주석은 연대적으로 적어도 15년의 차이가 있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로서 갈라디아서 주석을 통하여 당대 로마 카토릭교회의 공로주의적 구원관을 반박하기 위해 율법과 복음의 반위관계를 강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면, 칼빈은 종교개혁신학을 정립하여야 할 입장에서 루터의 율법과 복음의 이분법이 가져올 폐단, 이를테면 신자의 윤리적 삶의 경시문제를 가능한 한 줄이기 위해서 율법과 복음의 상호관련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다. 그럼으로 우리가 바울과 야고보의 역사적 정황을 고려하지 않고 양자를 단순하게 비교하여 우월성을 논할 수 없는 것처럼, 루터와 칼빈의 단순비교를 통해서 어느 한쪽의 우월성을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둘째, 루터와 칼빈은 갈라디아서에 나타나는 바울의 율법관을 바르게 이해하였는가? 오 교수는 율법과 복음의 반위관계를 강조하고 있는 루터의 해석이 율법과 복음의 상호연관성을 강조하는 칼빈의 해석보다 바울의 율법관을 보다 더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 오 교수가 자신의 주장의 근거를 2: 16, 3: 19-25의 주석부분에만 둔다면 오 교수의 결론이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유대주의자들의 율법관을 비판하면서 복음과 율법의 반위관계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해서 말한다면 루터가 칼빈보다 바울의 율법관을 더 잘 반영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신칭의문제를 직접 거론하는 3-4장에서는 유대주의자들을 공격하면서 복음과 율법의 반위관계를 부각시키지만, 신자들의 삶의 문제를 거론하는 5-6장에서는 오히려 율법과 성령, 율법과 그리스도와의 제휴관계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 교수도 자신의 논문에서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지만 믿음과 행함, 행함과 성령, 행함과 심판, 행함과 성화의 영역에서는 칼빈이 루터보다도 훨씬 더 깊고 균형 잡힌 깨달음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필자가 볼 때 루터와 칼빈이 바울의 율법관을 제시하면서 개인구원 및 구원역사적 관점(루터)과 언약적 관점(칼빈)을 뛰어넘어 바울의 율법관의 골격을 형성하고 있는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관점까지 확대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셋째, 율법은 신자의 삶에 있어서 여전히 유효한가? 오 교수의 지적처럼 루터는 율법이 신자의 삶의 유효한 규율이 된다는 점을 강하게 반대한다. 루터는 율법을 신자에게 유효한 삶의 규율로 받아들일 경우 그가 한사코 고수하려는 이신칭의교리가 위협되고 또다시 로마 카토릭교회의 공로주의를 끌어들이는 위험이 있다고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율법 대신 성령을 신자의 삶의 원리로 제시한다.
그러나 칼빈은 율법을 신자의 삶의 영역에서 배제할 경우 율법을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삶의 규율로 주신 하나님의 의도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무율법주의에 빠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칼빈은 율법폐지론을 한사코 반대하고, 율법이 신자의 삶의 규율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루터가 율법이 신자의 삶의 규율됨을 반대한다고 해서 마치 그가 율법이 신자에게 있어서 전혀 무용(無用)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루터는 신자라 할지라도, 그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의인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기 때문에, 날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성화의 삶을 위하여 율법의 신학적 용도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보았다. 반면에 칼빈이 율법을 신자의 삶의 규율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마치 그가 율법이 칭의와 성화의 힘을 제공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된다. 칼빈은 성령과 믿음 없이는 율법은 신자에게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신자의 삶의 영역에 있어서 율법의 역할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바울은 신자의 삶의 문제를 말하는 갈라디아서 5-6장에서 성령의 목적과 율법의 목적이 서로 배치되지 않고 동일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율법의 주된 목적이 하나님과 이웃 사랑인 것처럼, 성령의 목적도 그러하다는 것이다(5: 14-16, 22-23).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6: 2에서 “서로의 짐을 짐으로써(즉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라고 교훈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는 일, 곧 사랑하는 일은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 인간 자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성령을 따라 살 때만이 사랑을 하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율법을 성취하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 없이는 성령이 추구하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삶의 원리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당위성을 알 수 없다. 바울은 성령이 율법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언약백성의 삶의 규율로 주신 율법의 본래 기능을 회복시킨다고 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리스도의 오심은 율법을 폐지하지 않고 오히려 성취한다는 예수님의 말씀(마 5: 17)을 옹호한다.
이런 점에서 루터와 칼빈은 다 같이 바울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반영하면서 상호보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루터는 신자의 삶의 영역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그리고 칼빈은 율법은 성령을 통해 신자의 삶의 규율로 재 회복된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각각 바울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루터와 칼빈이 바울의 율법관을 잘못 이해하여 후대 교회에 왜곡된 유산을 물러주었다는 새 관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다시 한 번 루터와 칼빈이 그들의 갈라디아서 주석을 통해 바울의 율법관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루터와 칼빈이 바울의 율법관을 왜곡시켰다는 새 관점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밝혀준 오 교수의 노력을 치하하면서 이 논찬을 마치려한다.
1) T.H.L. Parker, “Introduction” in J. Calvin, The Epistles of Paul the Apostle to the Galatians, Ephesians, Philippians and Colossians (Grand Rapids: Eerdmans, 1974), v.
2) A. Tholuck (ed.), Johannis Calvini in Omnes Novi Testamenti Epistolas Commentarii, Vol. 1: Pauli Apostoli Epistolas ad Romanos, Corinthios et Galatas (Halle: Sumptibus, 1834), 532-608. Parker의 영역판 갈라디아서는 117쪽 분량임.
3) 참조: J. Calvin, 『칼빈의 갈라디아서 강해 [상/하]』, 김동현 역(서로사랑, 2000); J. Calvin, Sermons on The Epistle to the Ephesians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73).
4) 그러나 칼빈은 신명기와 욥기를 가지고는 훨씬 더 오랜 기간에 걸쳐 각각 500여회, 150여회에 걸쳐 연속강해설교를 하였다.
5) W. Metzger, “Zur geschichtlichen Orientierung,” in Martin Luther, Kommentar zum Galaterbrief 1519 Calwer Luther-Ausgabe, Band 10 (Gütersloh: Gerd Mohn, 1984).
6) H. Kleinknecht, “Vorwort,” in idem (ed.), in Martin Luther, Luthers Galaterbrief-Auslegung von 1531 (Göttingen: Vandenhoek&Ruprecht, 1987).
7) Luther, Galaterbrief-Auslegung, 13.
8) Kleinknecht, “Vorwort,” 7에서 재인용. Keht von Bor는 루터의 아내 캐테 폰 보라(Käthe von Bora)를 가리킨다.
9) 예를 들면, 루터는 Calwer판 Kommentar zum Galaterbrief 1519 (pp. 82-91)에서 2: 16을 아홉 쪽에 걸쳐 다루면서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고 말하기를, 어거스틴 외에는 이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사상을 충분히 이해한 저술가가 없었으며, 더 나아가 어거스틴도 그의 모든 저서에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은혜의 원수들”인 펠라기우스파와의 논쟁을 할 때만 바른 이해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루터는 2: 16을 주석하면서 내면의 정욕, 마음, 양심과 같은 요소들을 ‘율법의 행위’에 대한 설명에서 자주 언급하는 등 중세의 수도원적 ‘수덕(修德)신학’의 관심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루터는 Galaterbrief-Auslegung von 1531 에서의 2: 16의 주석을 보면 훨씬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 곧 좀 더 깊은 바울신학적 이해가 나타난다.
10) 이런 점에서 루터의 1519년 주석은 우리의 연구에서 가끔 필요할 때에만 참조하는 의미로 언급하겠다. 루터의 두 갈라디아서주석 Kommentar zum Galaterbrief 1519과 Luthers Galaterbrief-Auslegung von 1531 을 언급할 때 이하에서 우리는 간략하게 각각 ‘주석’과 ‘강의’로 표기하기로 하겠다. 칼빈의 갈라디아서 주석은 간략하게 말할 때 ‘주석’으로 표기하겠다.
11) ‘율법’은 신약에서 일반적으로 헬라어 νόμος로 표시되었는데(몇 곳에서는 이 단어가 다른 의미로 쓰인 예도 있으나), 이 헬라어는 신약에서 모두 193회 나타나고 로마서에 74회로 가장 많이 나오고 다음이 갈라디아서이다.
12) 루터와 칼빈 모두 로마서 주석을 출판한 바 있으나, 루터의 것은 1515/1516년에 로마서를 강의한 내용이어서 종교개혁자로서의 복음 이해가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판단이다. 그러므로 로마서주석에서 두 종교개혁자들의 율법관을 비교·연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13) Calwer 판으로 9쪽 분량: Kommentar zum Galaterbrief, 82-91.
14) 4: 4-5, 5: 1-4, 5: 13-15의 부분은 본 논문에서는 다루지 못하고 다른 기회에 다루기로 하겠다.
15) Luther, Galaterbrief-Auslegung, 20-28. 루터의 ‘강의’의 쪽수는 축소판을 따른 것이므로 실제로는 본 논문에서 지적하는 분량보다 훨씬 길었다. 이하에서 ‘강의’에서의 취급 분량에 대하여 말할 때 마찬가지다.
16) Calvin, Galatians, 3-7.
17) 칼빈이 “의식의 준수(observatio ceremoniarum)”를 말할 때, “의식(ceremoniae, ceremonies)”은 구체적으로 율법 중의 “의식법”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칼빈이 자주 쓴 “의식”이라는 단어를 우리의 논문에서 “의식법”이라고 번역하기도 하겠다.
18) Luther, Kommentar zum Galaterbrief, 46-47. 루터는 같은 주석에서(p. 83) 2:16을 설명하면서 모세의 율법도, 더 나아가 십계명도 인간적 의를 만들어 내는데, 즉 벌을 받을까 봐서 두려움으로 또는 약속된 보상을 인해서 하나님을 섬기며 계명들을 행하는 그런 의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19) 참조: W. Niesel, 『칼빈의 神學』, 이종성 역(대한기독교서회, 1983), 94: “칼빈은 엄격한 의미에서 율법의 폐지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20) Eerdmans에서 출판한 영역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2:16은 두 쪽(pp. 39-40)에 걸쳐 나와 있으나 실제 분량은 한 쪽 이내이다. Tholuck이 편집한 라틴어 갈라디아서 주석에서는 2:16에 대한 설명은 반 쪽(p. 556) 분량이다.
21) 더 나아가 갈라디아서 중 4: 9-11과 5: 2-4, 11-12, 6: 12-13과 특히 2: 14에 나오는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살다”라는 표현들(Ἰουδαϊκῶς ζῆν, Ἰουδαΐζειν)을 참조할 때 그러한 의미의 율법 개념을 생각하게 해준다. 참조: W. Gutbrod, Ἰσραήλ κτλ, in TWNT III, 385; J.D.G. Dunn, Jesus, “Works of the Law and the Curse of the Law (Gal. 3.10-14),” in idem, Paul and the Law: Studies in Mark and Galatians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1990), 215-36; 이한수, 『갈라디아서』(선교횃불, 2006), 213, 233-34.
22) 특히 3: 10-13을 참조할 때 그러하다. 이 부분에서 바울은 신 27: 26과 레 18: 5을 인용하면서 “율법의 행위”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그 구절들은 유대교인이 독특하게 지키는 의식법만이 아니라 포괄적인 율법의 계명들을 가리키고 있다. Dunn의 논문 “Works of the Law” (226-28)은 이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것 같다. 더 나아가 특히 롬 7: 4 - 8: 4를 참조 바람. 바울과 당시 유대인들에게 의식법과 도덕법의 구별이 있는 ‘율법’ 개념은 생소한 것이었다. 참조: W. Gutbrod, νόμος κτλ, in TWNT IV, 1040-50, 1061-63.
23) 비교: Luther, Galaterbrief-Auslegung, 180-206; Calvin, Galatians, 60-67.
24) 이 자리에서는 본문에 대한 현대 주석가들의 새로운 해석들이 무엇이고 종교개혁자들의 주석은 어떤 것들이 문제인지에 대하여 상세하게 논할 수 없다. 간단하게 집고 넘어가기로 한다면: 현대의 주석가들은 ① 3: 19의 τῶν παρβάσεων χάριν (“범죄함을 위하여” 또는 “범죄함을 인하여”)이 목적을 뜻하는지 이유를 뜻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② 같은 절에 나오는 표현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자의 손으로”는 아브라함의 언약에 비하여 율법이 열등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 일반적이며, ③ 22절의 “성경(ἡ γραφή)”을 율법을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은 오히려 드물고 대부분은 전체로서의 성경 또는 특정의 성구를 가리킨다고 보며, ④ 23절의 “율법 아래 매임”과 “갇힘”은 일반적으로 은혜와 종말론적 자유를 주는 믿음과 대조하여 속박하고 억압하는 율법의 부정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표현들로 보며, ⑤ 24절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과 같은, 긍적적이고 적극적이고 복음적인 성격을 율법의 기능에 부여하는 번역은 일반적으로 문맥과 바울의 의도와는 먼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가, 즉 율법의 한시성(限時性)의 의미가 바른 해석이라 보며, 또 ‘몽학선생(παιδαγωγός)’에게서 교육적 기능보다 감독과 감시의 기능을 찾아야 하고 바울은 본문에서 이 단어를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였다고 본다.
25) 칼빈은 그의 『갈라디아서 강해설교(상)』에서 3: 19-20을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역시 율법의 영속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율법을 옳은 것을 가르쳐주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하여 세상의 끝날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들 하나하나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살펴보게 해야 합니다. 정말로 우리 자신의 훈육을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고 아침저녁으로 그들을 암송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514, 523).
26) 예를 들면, 갈 2: 16과 롬 3: 10에 반영되어 있는 시 143: 2, 또는 갈 3: 10에 인용된 신 27: 26 등.
27) 참조: W. Bauer, Griechisch-Deutsches Wörterbuch zu den Schirften des NT (Berlin: Walter de Gruyter, 1971), 329-30; R.Y.K. Fung,The Epistle to the Galatians (Grand Rapids, Eerdmans, 1982), 164.
28) 칼빈의 ‘율법’ 중심적 성경관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한 예를 그의 시편 1편 주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참조: J. Calvin,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vol. 1 (Eerdmans, 1963), 4: “When David here speaks of the law, it ought not to be understood as if the other parts of Scripture should be excluded, but rather, since the whole of Scripture is nothing else than an exposition of the law, under it as the head is comprehended the whole body” (강조: Calvin 자신).
29) 계시로서의 ‘율법’(〓 모세5경, 성경전체)과 시내산 언약으로서의 계명의 ‘율법’ 개념이 동시에 나오는 다음 구절 참조: 롬 3: 20; 갈 4: 21. 대조적인 단어들이 쌍을 이루고 나오는 다음 구절들 참조: 요 1: 17; 롬 6: 14-15; 갈 2: 16, 18-19; 3: 23-24; 5: 4-4, 5: 18 등.
30) 왜냐하면 성경에서 “계시”는 상대적인/절대적인 또는 희미한/명백한 계시라는 계시 개념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장 중의 “믿음”의 영웅들은 믿음은 기독교적 믿음을 뜻하지 않고 노아와 여리고를 칠일 동안 돌았던 사람들과 기드온, 바락, 삼손 등이 가졌던 믿음, 곧 야훼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고 응답을 받았던, 구약적 의미의 믿음이었던 것이다.
31)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개정개역판: 초등교사)” 또는 “was our schoolmaster to bring us unto Christ” (KJV), “was put in charge to lead us to Christ” (NIV)와 같이 번역하는 번역성경과 주석가(예: H. Ridderbos, W. Hendriksen 등)는 드문 편이다. 율법이 약속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한시적, 임시적으로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쪽이 옳다는 사실은 3: 16-25의 문맥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32) 이 라틴어 번역은 헬라어 원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Christum’ 앞에 있는 라틴어 전치사 ‘in’은 장소적인 의미로는 ‘안에, 안으로,’ 시간적으로는 ‘까지, 동안’의 의미가 있다.
33) 본래 헬라어 παιδαγωγός는 노예 중 교양있는 자로서 자유민의 어린 아들을 성년이 될 때까지 학교에 다니는데 데리고 다니면서 감독과 훈육을 하고 기본예절도 가르치는 역할을 맡은 ‘노예수행원(slave-attendant)’ 내지 ‘어린이 인도자(boy guide)’를 가리켰고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διδάσκαλος(‘디다스칼로스,’ ‘선생’)와는 역할이 달랐다. 참조: F.F. Bruce,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Exeter: Paternoster, 1982), 182-83.
34) 루터의 1522년판 독일어번역 중 갈 3:24a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Also ist das Gesetz vnser Zuchtmeister gewesen auff Christum.” 참조: M. Luther, Das Neue Testament in der deutschen Übersetzung von Martin Luther nach dem Bibeldruck von 1545 (Stuttgart: Philipp Reclam, 1989), 517. 독일어 ‘Zuchtmeister’는 ‘(채찍질과 징계를 잘 하는) 엄격한 교사’를 뜻한다.
35) “새 관점”에 대한 장단점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2009년도 [목회와 신학] 5,6월호에 실린 최갑종, “새 관점, 무엇이 문제인가?”와 최갑종, [로마서 듣기] (서울: 대서, 2009)에 수록된 부록, “로마서와 새 관점의 바울연구”(pp. 553-586)을 보라.
36) 샌더스는 그의 책,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Philadelphia: Fortress, 1977), 422에서 “Covenantal Nomism"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그런 다음 (2)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다. 율법은 (3)선택을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4)순종의 요구 사항을 함께 갖고 있다. (5)하나님은 순종에 대해서는 보상하시고, 불순종에 대해서는 심판하신다. (6)율법은 속죄의 수단과, 속죄의 결과로 인한 (7)언약관계의 유지 및 재확립을 제공한다. (8)순종, 속죄 및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언약 안에 머무는 자들은 모두 구원 받게 될 그룹에 속하게 된다. 첫 번째와 마지막 요점에 관한 중요한 해석은 선택과 궁극적인 구원은 인간의 성취가 아닌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이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37)특별히 제임스 던, 박문제 옮김, [바울신학]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3), 490-497; The New Perspective on Paul, revised edition (Grand Rapids: Eerdmans, 2008), 27-28, 213-226을 보라. 그래서 Tom Wright,What Saint Paul Really Said: Was Paul of Tarsus the Real Founder of Christianity? (Grand Rapids: Eerdmans, 1997), 119에서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는 인간이 어떻게 크리스천이 되는 가를 말하는 구원론이 아닌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인가를 말하는 교회론의 관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38)필자 역시 1997년도에 출판한 [바울연구 2]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에 수록한 논문, “루터와 칼빈의 복음과 율법이해”(pp. 118-131)에서 루터와 칼빈의 율법관을 그들이 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주석을 중심으로 자세하게 살펴본 바 있다.
39) 루터는 “율법”과 “복음”의 구분을 “전체 성경해석의 열쇠로” (J. Pelikan&H. Lehman, eds, Luther's Works 35, 237), “모든 기독교교리의 총체로”(Luther's Works 26, 117)로 본다.
40) 칼빈은 그 내용과 용도에 따라 모세의 율법을 은혜언약으로 제시되고 있는 넓은 의미에서의 율법과 엄중한 계명으로 임하는 좁은 의미에서의 율법을 서로 구분한다. 이와 같은 율법의 이중적 정의에 병행하여 칼빈은 복음에 관해서도 율법에 포함되어 있는 넓은 의미에서의 복음과 그리스도 오신 이후 그리스도 안에서만 계시된 새 언약인 좁은 의미로서의 복음으로 나눈다. 칼빈이 율법과 복음의 반위관계를 말할 때는 좁은 의미에서의 율법과 복음을 가리킨다.
41) Cf Luther's Works 26, 156: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 모든 율법은 그것이 시민적 율법이든 십계영이든 완전히 폐지된다. 왜냐하면 그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다.”
42) 원종천 교수도 그의 논문, “성화 진작(振作)을 위한 칼빈의 신학적 진보”, [성경과 신학] 51 (2009), 27-70, 특히 29-62에서 루터와 칼빈이 처한 상이한 시대적 정황이 그들의 율법과 복음 이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43)칼빈은 갈라디아서 3:12의 주석에서 불과 물이 서로 결합될 수 없는 것처럼, 율법에 의한 칭의와 믿음에 의한 칭의는 서로 조화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