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무엇을 드릴까요? : 박조준 목사 (고전 16: 1-4, 고후 8:1-15)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매우 높은 경지의 사상과 신학을 논하면서 앞으로 올 세계에서의 생에 대해서 논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16장에서는 가장 실제적인 문제를 가장 실제적인 방법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공통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대개 첫 부분은 교리적인 것을 말하고 나중에는 실생활에 대한 것을 말씀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무슨 일을 하는 데는 원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원리만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실제 생활이 따라야 합니다. 집을 지을 때 정확하고 세밀한 설계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설계도에 의해서 집을 지어야 합니다. 설계도만 있고 집을 짓지 않으면 그 설계도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너무 고상하여 올라갈 수 없는 사상도 없으며 너무 미미하여 잊어버리게 되는 관리상의 실제 문제도 없습니다. 바울은 신학적인 사색은 잘하지만 실제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손을 못 대는 몽상가는 아닙니다. 그의 머리는 구름 속이나 구름을 뚫고 훨씬 더 높이 올라갈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발은 언제나 굳은 대지를 굳게 짚고 서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헌금에 대한 문제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것은 바울에게 매우 관심이 큰 문제였습니다.
옛날 헬라 세계에서는 ‘에라노이’라고 부르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불행한 자리에 이르게 되거나 돈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 친구들이 모여서 그를 도와주기 위해서 돈을 무이자로 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회당에는 돈을 거두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책임이 있는 직분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외국에 나가서 사업을 잘 해서 돈을 많이 벌은 사람이 사람을 보내서 예루살렘 성전을 위한 헌금과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한 구제금을 전해 주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사실 교회가 돈을 모아서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은 교회의 일체를 보여 주는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고 말하는데, 하나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부분도 같이 고통을 느끼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바울은 언제나 다른 사람이 당하는 어려움에 같이 참여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렇게 하는 것은 기독교의 실제적인 교훈을 실천하는 한 방법이었습니다. 이렇게 헌금을 전하는 것으로써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가 하는 것을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바울의 편지를 보면 헌금을 나타내는 말이 여러 가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령, ‘로기아’라는 말을 썼는데 이것은 특별 헌금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카리스’라는 말도 썼는데 자유로운 선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예물입니다. 비록 아무리 큰 액수라고 해도 억지로 하게 한 것이 아니고,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각자가 내야 할 헌금 액수를 정해 준 일이 없습니다. 바울은 각자의 경제적인 형편에 따라서 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돈 많은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큰 부담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헌금은 각자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할 것이지 절대로 억지로 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코이노니아’란 말을 썼는데 이 말은 성도의 교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나누어 가지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무엇을 가질 수 있을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줄 수 있을까?’하는 데 있습니다. 어떤 때는 ‘디아코니아’란 말을 썼는데 이것은 봉사를 의미합니다. 영어로 집사를 ‘deacon’이라 하는데 이것은 디아코니아의 유사어인 ‘디아코노스’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봉사자’란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한계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몸으로 봉사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돈이 대신 가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의미의 낱말을 사용했습니다. ‘프로스포라’라는 말도 사용하는데 제물과 희생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곤궁한 자리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곧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는 심령을 바치는 것 다음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최고의 제물은, 어려운 자리에 있는 형제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헌금을 합니까? 헌금으로 구원을 삽니까? 아닙니다. 헌금은 적선과도 같은 것입니까? 그런 것은 더욱 아닙니다. 그러면 헌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이 감사의 마음이 없을 때 헌금의 의미는 없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7절에 보면 “믿음이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했습니다.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성경에 보면 ‘감사하라’는 말씀이 얼마나 자주 나옵니까? 시편 116편 12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의 근본 정신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대하여 만분지일이라도 보답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상한 것은 작은 은혜는 기억하지만 은혜가 너무 커도 잊어버리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캄캄한 방에 불을 켜 주는 사람이 있으면 감사해 합니다. 그러나 매일 아침 하나님께서 밝은 햇빛으로 비춰 주시는 것을 보면서 감사드리는 분이 얼마나 됩니까? 병원에서 많은 돈을 내면서 산소 호흡을 합니다만 순간순간 돈도 내지 아니하고 호흡하고 있는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큰 은혜일수록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동방의 의인 욥은 가산이 넉넉하고 훌륭한 자녀 10남매를 두었고 세상적으로 볼 때도 부족한 것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모든 재산을 스바 사람, 갈대아 사람에게 다 빼앗기고 훌륭한 자녀 열 명은 맏형 집에서 즐기고 있다가 대풍이 몰아치며 집이 무너져 다 죽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욥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이 고통을 무엇으로 다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에 보면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야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어린애는 감사한 것을 잘 모릅니다. 주면 의례히 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여기면서 받아 가집니다. 주면 좋아하고 안 주면 섭섭해합니다. 믿음도 기도하고 구하는 것을 보면 그 성숙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 어린 사람은 기도를 시작만 하면 “주여, 주시옵소서” 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성숙하게 자라면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을 믿습니다. 들어와도 나가도 복이 되는 것을 믿습니다.
얼마 전에 제 아들 애가 와서 자기 사업을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저런 어려움이 있는 데 특히 재정적인 어려움에 부딪칠 때는 부모님이 좀 도와주셨으면 하는 생각도 들지만 부모님이 그럴 형편이 못 되니 어떻게 간신히 넘기는데 넘기고 나면 그게 도리어 감사한 생각이 듭니다. 그 어려운 고비에 부모님께 재정 여유가 있어서 도와주면 일은 쉽게 풀릴는지 모르지만 그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자라지 못할 거예요. 저는 부모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는 것이 너무 감사해요. 저도 제 자식을 그렇게 키울 거예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옆에서 들으면서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드렸는지 모릅니다. ‘아, 우리 애가 이젠 많이 자랐다.’ 나이는 어리지만, 사업을 하면서 어려움이 많겠지만 한번도 부모가 도와주지 못해서 고생한다는 불평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처럼 열심히 하니까 잘될 것을 기대합니다.
장가가고 시집가서 애들을 낳고 살면서도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가 좀 주면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쓴 오이 보듯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육체는 자라서 애는 낳았지만 성숙하지 못해서 그럽니다. 여자는 결혼하여 첫 아이 낳아 키워 보면서 어머니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성숙의 체험입니다. 얼마나 감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얼마나 성숙한 사람이 되었느냐 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고마움을 알고 감사를 표현할 수 있을 때 성숙한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더구나, 즐거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기쁨의 표현이며 진실한 인간의 표시입니다. 현대인은 물질의 노예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수입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생산이 삶의 의미와 일치됩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돈 벌레는 있을지 모르지만 참인간은 없습니다. 비인간화된 기계는 있을지 모르지만 참된 삶을 즐길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참된 인간은 자신의 삶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 삶의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우리의 죄 사함을 받은 기쁨의 외침이며 감사의 고백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 놀라운 감사를 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감사를 넘치게 할 수 있는 마음의 기쁨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햇빛을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에게나 골고루 비추십니다. 의로운 사람에게만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 불의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로마서 5장 7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놀랍습니다. 이렇게 크시고 풍성하십니다. 이 사랑을 생각할 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고 감사함을 넘치게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악도 선용하시며, 실수도 선용하셔서 더 놀라운 일을 이루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만 입으로도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 대하여 감사를 다할 수 없습니다. 그 중에도 우리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구원에 대해서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사실 죄의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누가 건지시고 살려 주셨습니까?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누구의 은혜입니까? 우리의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옮기시며, 우리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 소망까지 주신 하나님에게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왜 감사합니까? 돈 잘 벌고, 건강하고, 생각하고 계획하는 일이 잘 되어서 감사합니까? 그것은 현대의 물질주의의 유물론적 사고를 넘어서지 못한 것입니다. 신약 성경 어디를 보아도 물질적인 것 때문에 감사한 곳은 한 곳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감사가 물질적인 것과 결부될 때 복음은 장사 속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는 기복주의의 물질적인 종교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물론과 기독교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감사의 조건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죽었던 영혼이 구원받은 놀라운 사실에 있습니다.
이렇게 감사한 마음이 가득한 사람은 자연히 봉사와 희생을 가져옵니다.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은 찬송을 불러도 감격한 마음으로 힘있게 부릅니다. 말씀을 들을 때도 간절한 마음으로 아멘으로 받습니다. 헌금을 드릴 때도 정성으로 피묻은 주님의 손위에 감격과 감사로 드립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온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눈먼 것, 상한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이나 부족하고 결핍된 상태에서 바치게 될 때 그 예물은 열납되지 않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병신된 제물은 바치지 아니했습니다. 수족이 부족한 제물은 드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 드릴 때도 이런 정신으로 드려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보면 송아지가 제발로 걸어서 제단에 나아가게 했습니다. 몰고 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제물의 자발성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보면 재미있는 일은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은 새와 들짐승이지 물고기를 드린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물고기는 산 채로 제단까지 올라갈 수가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물고기는 제단까지 오기 전에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명을 하나님께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원하여 드리는 것을 받으십니다.
더구나 종기 있는 제물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교만의 종기가 있으면 하나님이 받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받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교만의 종기를 제해 버려야 온전한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상처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부에 어떤 흠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섬기는데, 상한 것을 드릴 수 있습니까? 사람도 상한 것을 받으면 기분이 좋습니까?
어느 목사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성탄절에 어느 양품점을 경영하는 교인이 와이셔츠를 하나 선물로 가져왔는데 펴 보니까 진열장에 오랫동안 놓아서 누렇게 바래서 입을 수 없게 된 것을 가져 왔더래요. 아무리 목사지만 누렇게 바래서 못 쓰게 된 것이야 입을 수 있어요? 못 입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그런 것을 준 것을 생각하니 차라리 받지 않은 것만 못하더래요. 사람도 이렇게 마음이 안 좋은데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정성 없이 드리는 예물을 받으실 때 기뻐하실까요?
말라기 1장 8절에 뭐랬어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최상 중에서 최상을 드려야 합니다.
장신대 학장이신 맹용길 박사님이, 신학생을 보낼 때 좋은 사람을 보내 주셔야 훌륭한 목사를 키워 낼 수 있는데, 사람되라고 신학교에 보내는 사람이 많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는 덜된 사람이 사람되는 곳이 아니라고 해요. 대학도 1차, 2차 다 떨어지면 “신학대학이나 가라”고 합니다. 못 입게 된 와이셔츠를 선물로 주는 사람이나 무엇이 달라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받으실까요?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한국교회를 축복하실까요?
저는 어떤 때 길 모퉁이를 지나다가 마른 명태 하나, 밥 한 그릇 길가에 차려 놓은 것을 보면서 속으로 웃습니다. 그래도 저것 먹고 복 달라고 차려 놓았겠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마귀가 볼 때 비웃을 정도는 아닙니까? 어떤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붓던 나드 기름은 그 값도 비싸려니와 그 여인에게 있어서는 최상의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자세가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의 만 분의 일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간절한 마음, 정성 어린 심정으로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받으실 줄 믿습니다.
무엇을 하나님께 드릴까요? 마음을 드립시다. 정성을 드립시다. 사랑을 드립시다. 최선의 것을 드립시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넘치는 축복을 더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