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실의 하권 제 7편(3-4)
* 7-3:중국 선비가 말한다:
본성에는 반드시 덕성이 있어야 하는데 덕성이 없으면 어떻게 선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군자란 또한 그 ‘원초(性)로 돌아감*’을 말합니다.
*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만약 선이라는 것이 오로지 그 원초로 되돌아감을 말하는 것이라면, 사람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성인입니다. 그렇다면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것”과 “배워서 아는 것”의 구별은 무엇을 말합니까?”
만약 “덕이라는 것이 스스로 우리 (자신)들이 (후천적으로) 새롭게 알아낸 것이 아니고, 단지 이미 있는 것(원초原初)에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미 그것을 상실한 것 (자체)가 크게 죄를 지은 결과 것입니다. 지금 (없어진) 그것을 회복한다고 해도, (그것이 결코) 큰 공덕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실로 두 종류의 ‘선’을 반드시 인정해야 합니다. ‘본성’의 선은 (천부적인) 양선良善이고, 덕행의 선은 나중에 배워서 싸움 습선習善입니다.
무릇 양선良善은 천주께서 원래 창생한 본성本性 생명의 덕성德性이니, 우리 (인간)들은 (그것의 기여한)공로가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공로란 다만 (우리 인간들) 스스로 배워서 쌓아 올린 선(습선習善)에 있을 뿐입니다.
어린아이가 (자기) 부모를 사랑한다면 짐승들도 역시 그 (부모)들을 사랑합니다. 보통 사람이면 - ‘어질든’, ‘어질지 않든’ “졸지에 어린애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다면, 곧 모두 놀라게 됩니다.” 이걸 모두가 천부적인 양良善선일 뿐입니다.
(이런 양선良善만 있는) 짐승들이나 ‘어질지 못한 이들이’, 어떻게 (나중에 쌓아 올린) 공덕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의義를 보면 곧 실천하는 것이 덕행일 뿐입니다.
저들이 혹 (‘의義’)를 실천할 수 없다거나 혹 ‘의義’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면, 덕행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은 처음 태어날 때에는 아무 글자도 써 있지 않는 ‘종이’와도 같다고 말합니다. 또한 아리따운 여인네와도 같습니다. 그녀의 미모는 사랑스럽지만, 모두 그 부모가 물려준 덕성이니 그녀가 ‘자기 식대로’ (쌓은) 덕성이 어여쁨이라고 보기에는 부족합니다.
만약 그녀가 “비단옷을 입고 그 뒤에 홑옷을 더 입은” 뒤에 보았다면 그녀의 (아름다운) 덕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여자가 (스스로 꾸며낸) 진짜 덕입니다.
우리들의 (타고난) 본성이 바탕이 비록 곱더라도 그것을 꾸며줄 (자기가 쌓은) 덕이 없다면, 어떻게 칭찬할 만하겠습니까?
우리 서양 나라의 학자들은 “덕이란 ‘정신적 본성(신성神性)’의 보배로운 의복으로서, 오랫동안 도의道義를 익히고 그것을 실천을 생각함으로써 생겨난다.”고 말합니다.
(덕을) 의복이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입을 수도 벗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즐겁게 선을 행하려는 생각(념念)에서 (덕을) 얻은 것이 이른바 성현聖賢입니다.
선하지 않은 것은 이와 반대입니다. 다만 (인간 스스로 쌓아 올리는) 덕성과 죄악은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의복들입니다. 그리고 오로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 즉 (저희 서양 선교사)들이 말하는 ‘정신(신神)’이 그것을 입을 뿐입니다.
* 7-3: 중국 선비가 말한다:
‘본성’과 ‘덕’을 논의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많지만 그 속에 근원을 밝힌 것으로는, (저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듣습니다. 무릇 ‘불의不義’를 행하는 것은 마치 더러운 우물로써 본성을 물들이는 것과 같으며, ‘의義’를 행하는 것은 마치 화려한 비단으로 그것을 아름답게 드러내 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덕이 닦여지면 본성은 더욱더 아름답게 됩니다. 이것은 진실로 군자가 자기를 수양한 공로입니다. 그러나 또한 (마음) 밖의 일을 힘쓰게 되면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애석한 일입니다. 세속의 (사람들)은 하루 종일 둘레둘레 (사방을) 바라보면서 ‘거짓된’ 보배를 쌓으며 육안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마음에 노력을 다 소모합니다. 그래서 대체로 마음의 눈을 열어서 영원토록 빛나는 ‘마음속 정신’의 진실된 보배를 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매일매일 마음을 졸이고 곤고困苦해 하면서, 임종 때는 애통하고 두려워서 떠는 것이 마치 가축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듯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천주께서 우리들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오로지 덕업에 부지런히 힘씀으로써 언제나 (우리들) 스스로 무궁한 복락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며, 번거롭게 (마음)밖에 (다른 것들)에 의존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닦아 나감을) 포기하고, 도리어 (밖의) 만물이 하는 짓을 행하는 데에 온갖 위험들을 (무릅쓴 채) 쫓아가고 있으니, 누구를 허물하겠습니까? 누구를 허물하겠습니까?
무릇 사람들은 존귀해지고 부유해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기들이 소망한 것을 항상 얻고자 할 뿐입니다. 소망하는 것을 얻는 길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기가 찾아서 얻고자 하는 것이 ‘내 (마음) 안에’ 없는 것을 중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본래 ‘참된 자아(진아眞我)’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해치려는 마음의 ‘해침(해害)’이 진짜 해로움입니다. 사람은 육체(형形)와 정신(신神) 두 가지로써 서로 결합하여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정신의 정교함은 육체를 초월하기 때문에 지혜로운 이는 정신을 ‘참된 자아’로 삼고, 육체는 자기 자신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 여깁니다.
옛날에 ‘야나Yana’란 현명한 신하가 있었는데, 나라를 찬탈한 자에게 부상 당하였습니다. 그는 태연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야나’(를 담고 있는) 도구는 부상시켰지만, ‘야나’는 부상시킬 수 없다.” 이런 사람 이른바 ‘달통한 사람(達人)’입니다.
‘원초(性)로 돌아감*’
성리학에 의하면 세상에 만사만물은 그 자체 내 완전한 이치 즉 ‘천리天理’가 부여되어 있다고 본다. 개개 사물 속에 내재하여 있는 이런 ‘천리天理’를 특히 “본연지성本然之性” 또는 ‘성性’으로 불렀다. 인간도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완전 무결한 성인의 도리가 인간에게 ‘성性’으로 부여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수도修道 또는 도덕적 자기 개발이란 바로 자기에게 천부적으로 주어 있는 ‘본연지성本然之性’에로 복귀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성리학에서는 자기 수양의 이상을 자기의 ‘성性’ 즉 자체의 잠재적 완전성의 복귀를 말하는 ‘복성설復性說’을 주장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중국 선비는 ‘자기의 원초(본성本性)’에로의 복귀를 군자의 도덕 수양의 이상으로 말하는 것이다.
입력:최 마리 에스텔 수녀/20260818/PM 13:10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