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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양쪽을 다 미워하는 아이
팔월의 땡볕 아래 들녘의 초록빛은 날로 짙어져가 두꺼운 융단의 질감을 드러냈고, 줄기줄기 이어져 나가고 있는 산들도 진한 초록빛 치장으로 그 모습이 겨울산에 비해 한결 부드럽고 포근해 보였다. 햇빛을 받아마셔 나날이 초록빛으로 살쪄가는 모든 곡식의 잎이나 나뭇잎들마저 한낮의 땡볕 아래서는 후줄근하게 맥을 놓았다. 그런데 땡볕이 더 뜨거워지게 풀무질이라도 하듯이 지치지 않고 기세를 높이기만 하는 것이 있었다. 매미떼였다. 매미들은 초록빛 숲그늘 속에서 땡볕의 빛줄기들로 베짜기라도 하듯 신명나는 떼울음을 목청껏 뽑아대고 있었다. 개구리들의 떼울음이 여름밤을 장식하는 자연의 노래라면 매미들의 떼울음은 여름낮을 장식하는 노래였다. 개구리들의 떼울음이 어둠 속에서 바글바글 끓어넘치면 농부들은 매캐한 모깃불연기 속에서 풍년을 이야기하고는 했다. 개구리 번창은 제비가 새끼들을 많이 까는 것과 함께 반가움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들이 번창하는 만큼 해충의 피해가 줄어드는 까닭이었다. 한낮의 땡볕 아래서 오히려 생기 돋아나는 생명이 매미라면 또 그만큼 싱싱한 몸짓을 무수한 빛의 반짝거림으로 그려내는 것이 미루나무였다. 다른 나뭇잎들이 모두 풀죽어 꼼짝을 하지 않는데도 미루나뭇잎들은 깨소금 쏟아지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끝없이 하는 것처럼 수도 없이 많은 빛가루들을 반짝반짝 쏟아내고 있었다. "바람도 한점 웂는디 워째 저 키다리나무넌 혼자서만 이파리럴 살랑살랑 떨어내쌓고 그런당가?" 예닐곱 살 먹은 아이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반짝거리는 미루나무 잎들은 바라보며 자기네보다 서너 살쯤더 먹은 형제간이나 이웃아이들에게 묻고는 했다. "금메...... 즈그 맘대로 허니라고 그렇겄제머......" 언제나 엉거주춤하고 막연한 대꾸일 뿐이었다. "저것들이 풍이 들어 쳇머리 흔드니라고 그러는 거이다." 할머니나 어머니의 대답이었다. 사람은 늙어서야 풍이 드는데 미루나무는 작어서부터 풍이 들어버리는 것일까? 할머니나 어머니의 대답도 아이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주지 못했다. 아이들은 그 의문을 풀지 못한 채 나이를 먹어갔고, 미루나무는 으레 그러는 것이라 여기게 되었고, 그 다음부터는 미루나뭇잎들의 반짝거림을 건성으로 보아넘기고 말았다. 다른 나뭇잎들과 달리 미루나뭇잎은 광택이 나면서도 감나뭇잎이나 동백나뭇잎처럼 두껍지 않고 얇고 가벼운데다 줄기와 잎을 잇는 마디가 길고 연한데, 특히 잎 가까운 부분의 연하기가 아이의 속살 같아 미세한 바람에도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잎들은 제각기 팔랑거리는 것이고, 그때마다 윤기나는 이파리들은 햇살을 되쏘아내고 있었다. 나이 몇 살 더 먹었다 하나 아이들은 이런 까닭을 알 도리가 없었고, 어른들도 미루나무가 생계에 직결된 벼나 보리가 아닌 이상 잎이 방정막게 까불어대는 까닭을 굳이 캐려 하지 않고 무심하게 보아넘겼던 것이다.
"야! 인자 해걸음이 다 되얐응께로 전쟁놀이 한바탕 허자." 한 아이가 풋감꼭지를 팽개치며 당차게 몸을 일으켰다. "그려, 그려, 한바탕 오지게 허자!" 나머지 다섯 중에 세 아이가 팔을 뻗쳐올리며 좋아라 했고, 다른 두 아이는 시무룩한 채 눈알만 느리게 굴렸다. "야, 느그 둘이는 워째 똥 집어묵은 상호냐? 안허겄다 그것이여!" 처음의 아이가 두 팔을 허리에 척 올리며 소리쳤다. "아니여, 아녀. 전쟁놀이가 재미진디 혀야제." 머리에 버짐이 핀 아이가 움츠러들며 빠르게 말했고, "우리 둘이넌 맨날맨날 지기만 허는 국방군만 시킴스로......" 윗도리를 걸치지 않은 아이가 얼버무리며 입술을 내밀었다.
"그려서, 못허겄다 그것이여!" 처음의 아이가 두 아이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허리에 올려진 팔이 곧 날아갈 것 같은 기세였다. "아녀, 아녀. 나넌 아녀." 머리에 버짐이 핀 아이가 눈을 치뜬 채 고개를 웅크려박았고, "딱 한 분만이라도 인민군을 시켜도라 그것이제." 윗도리를 입지 않은 아이가 불만을 씹듯이 입안에서 구르는 말을 했다.
"하 씨발눔, 놀이에 끼주는 것도 고마워라 안허고 바래는 것도 많네. 니가 인민군이 되고잡을라먼 느그 아부지가 그런 드런 행투럴 허지 말었어야제. 니 아조 우리 놀이에서 싹 빠지고 잡냐? 니 혼자서만 놀게 우리가 싹 돌려놔뿔끄나?" 처음의 아이가 노려보고 있었다.
"아녀, 나가 잘못혔어." 윗몸을 드러낸 아이의 얼굴이 구겨지며 고개가 떨구어졌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내뿜는데 따라 갈비뼈들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가 제 모습으로 돌아갔다. "느그 둘이는 국방군." 처음의 아이는 팔을 뻗치며 결정을 내렸고, "느그 셋이서 제비뽑기!" 고개를 돌리고 다른 세 아이들에게 말했다. 세 아이는 서로 국방군을 안 뽑을 자신이있다는 듯 눈을 빛내며 고개들을 끄덕였다. 처음의 아이는 아이들한테서 서너 발짝 옮겨 등을 돌리고 쪼그려앉았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집어들어 당산나무그늘이 짙게 드리운 땅바닥에다 제비뽑기판은 그리기 시작했다. 제비뽑기를 할 세 아이는 제각기 반 주먹쥐듯 오그린 네 손가락의 두 번째 마디에 침을 칙칙 칠해보거나, 두 손바닥을 엇잡아 그것을 다시 안쪽으로 한 바퀴 돌려 만들어낸 손 사진기를 한쪽 눈 찡그려붙이고 들여다보며 점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옆에서 다른 두아이는 풀이죽은 채 한 아이는 개미들을 발로 잉끄려대고 있었고, 다른 아이는 강아지풀 줄기를 뽑아자근자근 씹어대고 있었다.
개미를 밟아죽이고 있는 머리에 버짐 핀 아이는 마름 허출세의 막내아들 수돌이었고, 강아지풀 줄기를 씹어대며 갈비뼈가 심하게 드러났다, 가라앉았다 하도록 거친 숨을 쉬고 있는 것은 노덕보의 아들 창성이었다. 그리고 제비뽑기판을 그리고 있는 것은 김복동의 아들 용국이었다. 허출세는 지주의 착취를 도왔을 뿐만 아니라 악질적으로 중간착취를 일삼은 행위 때문에 벌써 붙들려 들어가 있었다. 서인출네 마름 오동평이도 같은 혐의를 벗어날 수 없었고, 군내의 마름들은 그 반동성을 조사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덕보는 서운상을 상대로 한 소작권찾기가 가망이 없어 보이자 좌익한 작인들의 소작을 뺏는 기회를 틈타 동료들에게 등을 돌기고 윗손을 써 딴 소작을 얻어부친 파렴치행위 때문에 동네사람들 앞에서 톡톡히 망신을 당해야 했다. 뒷손을 쓰게 된 경위를 낱낱이 까발려야 했던 그 일은 동네사람들 말로하자면 "똥바가지 뒤집어쓴 망신"이었고, 강동기의 말로 하자면 "자아비판"이었다. 노덕보가 당한 망신은 회정리 삼구의 당산나무 아래서 벌어진 취초의 자아비판이기도 했다 .노덕보가 망신을 무릅 써가며 자신이 남모르게 저지른 비행을 거짓말하지 않고 다 털어놓았던 것은 그렇게 해야만 잡혀들어가는 것을 면할 수 있어서였다. 노덕보는 옷을 하나씩 벗어나가 마침내 발가숭이가 되는 것 같은 그 곤욕을 치른 다음 분명 잡혀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본인과 아내는 물론이고 아이들까지 기죽고 주눅이 들게 되었다. 그의 아들 창성이는 용국이가 뻐기는 꼴을 대할 때마다 뇌꼴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개자석, 심으로 헌다면 식은죽 묵긴디, 즈그 아부지가 인민위원회에 나댕긴다고......창성이는 붉은 완장을 두른 용국이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분함을 씹었고, 먹고 살려고 그랬다지만 남부끄러운 짓 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우와, 인배가 국방군이다아!" 제비뽑기를 한 두아이가 한꺼번에 소리쳤고, 다른 한 아이는 "피이___" 하며 눈을 흘기고 돌아섰다. "우리 셋이는 영용한 인민소년돌격대다! 느그 셋이는 반동 국방군이다. 지금부텀 요 당산나무 뺏기 쌈얼 시작헌다. 시작은 쩌그 양쪽 밭두렁서부텀이다." 용국이의 지시에 따라 두패로 갈라진 아이들은 당산나무의 그늘을 벗어나 햇빛 속으로 나섰다.
"자앙백산 줄기줄기 피어어린 자우욱......" 인민소년돌격대 쪽에서는 여맹을 통해서 배운 노래를 기운차게 불러대고 있었다. 그런데 국방군 쪽 세 아이는 맥빠진 걸음을 옮겨놓고 있을 뿐이었다. 곧이어 국민학교 삼사학년짜리들의 전쟁놀이가 시작되었다. 그들이 입으로 땅!땅! 총소리를 내며 목화밭에 몸을 숨기고, 밭고랑을 기고 하면 열을 올리고 있을 때 한무리의 사람들이 동네어귀로 접어들고 있었다. 긴 그림자들을 끌며 걷고 있는 그들이 산역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는 것을 누구나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들 사이에 새 삼베의 누른빛이 유난히 눈에 띄는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끼여 있는데다, 남자들은 연장을 들었고 여자들은 함지박이나 소쿠리 같은 것을 이고 있었다.
그들은 정현동 사장의 살해사건에 연루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었다. 오년형을 언도받고 징역살이를 하던 열한 명 중에서 아홉이 돌아온 것은 며칠 전이었다. 그건 온 동네가 깜짝놀랄 만한 뜻밖이고도 큰 일이었다. 동네사람들은 삽시간에 모여들어 그들을 에워쌌다. "긍께 머시냐, 인민군헌테 밀레갖고 후퇴럴 험스로 감옥소 안에서 총질이 시작되얐는디, 좌익헌 사람덜이 갇힌 감방에다 대고 총알얼 막 쏴질러 뿌렀구만이라. 근디, 우리 겉은 일반죄수가 갇히는 방이 모지래는 통에 박샌허고 조샌이 좌익헌 사람덜 방에 섞이는 바람에 변통이 생기고 말았당께요." 살아돌아오지 못한 두 사람 집에서 곡성이 터져올랐고, 다른 아홉집에서는 살아돌아온 기쁨을 애써 감추어야 했다. 다음날로 두 집의 가족들은 시체를 찾으러 목포로 떠났다. 아홉중에서 세 사람이 대표로 뽑혀 함께 나섰다. 그러나 시체는 운구할 수가 없었다. 총을 맞고 죽은데다 날씨가 더워 시신은 너무 험하게 상해 있었다. 화장을 해서 뼈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 뼈를 묻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들몰의 김종연네나 그곳의 김복동네가 그러했듯이 그들 아홉도 아무런 이의 없이 볽은완장을 차게 되었다. 그림자도 슬픔에 젖은 듯 그들의 뒤에 길게 끌리며 고샅으로 사라진 다음 리단위 인민위원회에서 집집마다 새로운 통보가 전해졌다.
"내일 아칙 열시에 남국민핵교 마당에서 인민재판이 열린께로 짬내서 나가보도록 허씨요." "인민재판이어라? 인공허고첨 열리는 것이제라?" "그러제라." "근디, 재판받을 사람이누구다요?" "금메, 다 싯이라는디, 둘언 몰르겄고, 남치기 하나가 삼봉이랍디다." "워메! 글먼 삼봉이럴 쥑인다 그 말이요?" "고것이야 나가 워찌 알겄소. 재판이 열려봐야 알일이제." "아, 재작년 시월에 인민재판허는 것 보고도 그리 태평헌 소리 허고 앉었소? 그때 봉림 김부자말고 살아난 사람이 워디 또 있습디여?" "그때 죽은 것덜이야 다 죽을 만헌 제겐덜 아니였습디여? 김부자가 살아났대끼 삼봉이도 살아날란지 워찌 알 것이요." "지발 존 일 헌다고 삼봉이는 살아났으먼 쓰겄소. 잘못이야 모타진 새경 한파수에 안 내줄라고 헌 이춘삼이가 잘못혔제 삼봉이가 잘못헌 것이 머시가 있소. 삼봉이 잘못이 있다먼 기운이 너무 씨서 이춘삼이럴 패대기친 것뿐이제라. 죽이잔 것도 아니겄고, 벌떡증 일어나는 성질 못 참아 딱 한분 패대기친 것인디, 죽기야 이춘삼이 지눔 맘때로 혀뿐 것 아니겄소. 사람이 그리 허망허니 뒤진다면야 누가 쌈판 아니라 씨름판이라도 지대로 벌리겄소. 이춘삼이가 행투 고약시럽고 느자구웂이 헝께 귀신이 딱 종그고 있다가 삼봉이가 패대기럴 치자 옳다꾸나 이춘삼이 숨통에 찰싹 달라붙어뿐 것이요." "금메 그 말 한분 찰방지게 아구가 맞기는 허요. 근디, 서운상이란 사람맹키로 빙신이나 되얐으먼 몰르겄는디, 아조 죽어뿌렀이니 고약허덜 않소." "삼봉이 그 심덕허고, 장개도 한분 못 가보고 죽기넌 너무 시퍼렇고 억울헌 나인디. 같은 편인디 워찌 잠 살려내는 쪽으로 안허겄는게라?" "금메 말이요, 그리만 됨사 을매나 좋겄소. 군당위원장님이 원체로 엄허고 강단져논께로 워찌 될란지......" "그럼스로도 인정이 있다고 안 그럽디여?" "긍께 그 대목얼 믿고 일이 잘 풀리기럴 바래야제라. 낼 꼭 나와야 허요잉?" "하먼이라, 삼봉이가 걸린 일인디 우리 동네사람덜이 싹 다 나가야제라." 회정리 삼구 사람들은 거의 가 지삼봉의 일을 걱정했다.
일찍 떠오른 팔월의 해는 오전 아홉시쯤에는 벌써 불볕으로 변하고 있었다. 남국민학교운동장으로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었다. 운동장가를 빙 둘러가며 무성한 잎을 드리우고 있는 플라타너스나무 그늘 아래는 발디딜 틈이 없이 사람으로 차 있었고, 그늘 차지를 못하게 된 사람들은 조회대 앞에서부터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밀려드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제각기 떠들어대는 왁자지껄한 소리들이 운동장을 부풀리고 있었다.
"와따메, 머 묵자고 날 더운디 저리 꼬약꼬약 밀어닥치는지 몰르겄네?" 일찌감치 그늘을 차지하고 앉아 담배를 말던 한 남자가 교문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넘 말허고 앉었네. 자네넌 멀 묵자고 나앉었능가?" "허 그 사람 벽창호시. 나야 그늘 차지나 혔응께 귀경을 지대로헐 참이제만 인자 들오는 사람들이야 땡볕에 푹푹 익을 참인디, 워쩔 심판이냐 그것이네." "자네 말허는 뽄새가 똑 못된 지주눔 심뽀로시." "거 먼 소리여?" "아, 그늘 차지혔으먼 가만히나 있을 일이제 워째 넘 복장 긁는 소림나 허냔 말이시. 저 사람덜도 다 속에 맺히고 꾀인 것이 있는디다가, 참말로 인공시상이 지대로 터잡은 것 보자고 나오는 것인디, 떡허니 그늘 차지허고 앉어서 허는 자네 소리 들으먼 에진간히 좋아라 허겄네. 자네 심뽀라는 것이, 괴기반찬에 쌀밥 배터지게 묵고 나서 개떡 묵는 작인보고, 고것을 무신 맛으로 묵냐고 허는 못도니 지주눔 심뽀허고 같으다 그것이네." "워따, 사람얼 비혀도 워찌 그리 못된 디다가 비허고 긍가? 사람이 무참혀서 워찌 고개 들겄능가?" "긍게로 말 씸벅씸벅 허덜 말어." "아이고 알겄네. 근디 말이시, 참말로 인자 인공시상이 지대로 터럴 잡을랑가?" "경상도 부산꺼지 뺏을 날이 낼모레고, 농지개혁도 금방 새로 실시헌다고 허니께 그리된 것으로 봐야 안허겄는가." "그리 되면 피난간 지주고 유지덜언 다 워찌 되는고?" "되갚음 당해야제워째." "사람덜이 저리 몰키는 것도 인공시상에 바래는 것이 많기 땀세 그러는 것인디, 근디, 차등 웂는 공평헌 시상얼 참말로 끈허게 맹글어나갈랑가?" "믿어야제. 그간에 염상진이란 사람이 해온것을 보먼 믿어도 손해날 것이야 머 있겄다고." "그리만 됨사 우리 농새꾼들이야 머럴 더 바래겄어. 식구수에 따라 공평허게 농토 배당받고, 지 논에 지 농새지어 지 새끼덜 배뜨시게 믹이고 갤치는 시상만 된다면야 무신 소원이 또 있겄어." "고런 미꼬미가 커간께로 날이 지내갈수록 사람덜 맴이 인공 쪽으로 열리는 것 아니겄는가." "재판받을 사람이 누구누군지 누가 아요?" 운동장 가운데서 손차양을 만들고 선 중년남자가 광고라도 하듯 큰 소리를 질렀다. "음마, 활동사진 볼라고 자리잡고 앉어서 그 이약 허라는 것 맹키로 싱건 소리시?" 어느 여자의 야물딱진 목소리였다. 사람들의 웃음이 터져나왔다.
"와따, 말에 고물 묻을 성불러 그리 초라니 방정으로 말얼 받는다냐? 뉘집 메누린지 몰라도 시엄씨 콧두레 열 분도 뀌겄다." "아이고 메 뉘집 남정넨지 몰라도 지집 가심에 불화로 시무 개는 올렸겄다." 다시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에이 재수대가리 웂이, 그 주딩이 방정맞기는...... 백여시가 따로 웂네." 남자가 혀를 차대며 자리를 옮겼고, "하이고 워짤끄나, 저리 눈치코치도 웂음스로 그려도 남자꼭지라고 여자 무시허고 헛방구 뀔지는 아네. 저런 삼시랑이 인공시상이 멋이고, 인민재판이 먼지나 알고 여그 나왔는지 몰르겄네." 여자는 한 치도 지지않고 대거리를 해댔다. "히히히, 여수댁 입심에 저 남정네가 잘못 낚인 것이제. 하여튼지간에 입심만으로 허자먼 자네야 영축웂이 여맹위원장깜이랑께로." 옆에 선 여자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요봇씨오, 인자 입덜 봉허씨요. 시작허요." 어느 남자의 목소리였다.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은 인민위원회 발족식 때보다도 훨씬 많았다. 그 사람들 틈에 송경희도 섞여 있었다. 그녀는 천리길을 걸어오며 쌓인 굶주림과 노독으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열흘이 넘게 앓아 누워 있다가 일부러 몸을 일으킨 것이다. 어떤 꼴들을 하는지 똑똑히 보아둘 작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운동장에 나와 차츰 기가 질리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몰려드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그녀는 어떤 구체적인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건 인공치하라는 달라진 체제에 대한 느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한테서 느끼는 감정이었다. 사람들 사이를 흐르고 있는 기분은 자기와는 정반대였던 것이었다. 무식하고 무지렁인 줄만 알았던 그들은 속으로는 겉과 전혀 다른 딴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결론이었다. 그 확인 앞에서 두려움과 공포는 절망이 되었다. 그전과 같은 세상은 다시 안 올지도 모른다...... 이 절망감을 그녀는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친애하는 벌교인민 여러분! 위대한 당과 인민의 이름으로 지금부터 반동분자와 해당분자에 대한 인민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재판을 받을 반동분자는자칭 멸공단 단장이었던 윤태주, 그리고 청년단 단원이었던 오칠성 둘이며, 해당분자로 지삼봉 하나입니다. 그럼 첫 번째로 인민위원장 동무의 발언이 있겠습니다. "마이크를 타고 나오는 이지숙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하게 운동장 전체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조회대 앞에는 센 사람이 각기 팔이 뒤로 묶인채 세워져 있었다. 인민위원장으로 조회대에 오른 사람은 남국민학교 교감이었다. 그는 서민영 다음에 교섭이 이루어져 위원장을 맡게 된 것이다. 읍민들이 갖는 신망도는 서민영에 미치지 못했지만 사회개혁의지를 가지고 교육자의 품위를 지킨 점이 그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하대치는 부위원장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에에, 친애하는 인민 여러분, 지금은 혁명의 깃발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펄럭이고, 따라서 삼천만 동포의 가슴마다에도 혁명의 열기가 끓어넘치고 있습니다. 인민이 주인이 되고, 인민이 세우는 인민의 나라를 위해 혁명을 수행하고 있는 이 시기야말로 혁명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가차없이 없애야 하는 중대한 때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볼때에, 멸공단이란 테러단체를 만들어 혁명전사의 가족들에게 사적 보복행위를 자행하여 인명살해까지 범한 윤태주의 반동행위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 인민을 탄압하고 괴롭힌 경찰의 앞잡이로 혁명사업을 방해하고 인민생활을 갈취하는 파렴치 행위를 일삼아온 청년단에서 행동대로 날뛴 오칠성의 반동적 죄과도 절대 용서될 수가 없습니다. 끝으로, 혁명은 무질서를 자행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사적 감정을 푸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미리 선전했음에도 불구하고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할 민청원의 입장에서 사적인 이유로 살인을 저질러 당이 정한 신성한 규율을 파괴한 지삼봉의 해당행위도 그냥 용서될 수 없는 중대사입니다. 혁명의 올바르고 빠른 성취를 위해서는 이런 반당적 반동적 행위자들은 가차없이 처단해야된다는 것을 당과 인민 앞에서 주장하는 바이올습니다. "인민위원장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조회대를 내려갔다. 운동장에 빽빽하게 찬 사람들은 모두가 죽은 듯이 조용했다. 운동장 가득 햇빛만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두번째로, 군당부위원장 동무의 발언이 있겠습니다." 안창민이 조회대로 올라왔다. 그는 사람들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휘둘러보고나서 안경을 밀어올렸다. "친애하는 인민 여러분, 지금 우리는 여기에 무엇하려고 모였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구경하려고 나왔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혁명을 하기 위해, 해방되기 위해 여기 이렇게 햇볕아래 모여있는 거입니다. 혁명은 무엇입니까? 살기 좋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해방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못살게 굴었던 모든 악독한 인간들을 쳐 없애고 우리가 주인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멸공단장 윤태주와 청년단원 오칠성은 바로 그 악독한 인간들 중의 하나씩입니다. 인민을 피흘리게 한 그들은 이제 자기들의 피를 흘려야 할 차례를 맞은 것입니다. 당과 인민의 이름으로 마땅히 처형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이 정한 규율은 엄격히 지켜져야 합니다. 혁명을 수행하는 동안에는 특히 더 그러합니다. 한 사람이 규율을 어기면 열 사람이 본받고, 열 사람이 본받아 잘못 행동하면 백 사람이 또 뒤따르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결국 혁명은 이룩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민청원 지삼봉 또한 죄값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말을 마친 안창민이 사람들을 휘둘러보고는 조회대를 내려갔다.
"끝으로, 군당위원장 동무의 발언이 있겠습니다." 염상진이 뚜벅뚜벅 조회대로 올라섰다. 그는 똑바로 서서 한동안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큰키가 더 커 보였다. "친애하는 인민 여러분, 여러분들께서 이렇게 많이 모이신 것은 바로 혁명을 이루고자 하는 뜻이 여러분들의 가슴속에서 저어 해만큼 타오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모든 중요한 발어은 인민위원장 동무와 군당부위원장 동무가 했습니다. 저는 두 동무의 발언에 전적으로 찬동하면서, 반동분자 윤태주, 오칠성 그리고 해당분자 지삼봉을 총살형에 처함에 있어서 인민 여러분들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조옿소오!"
어디선가 외침이 터져올랐다.
"좋소, 죽이씨요!" 외침이 이어지며 박수소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먼, 윤태주 저눔은 악질이여." "오칠성눔부텀 쥑여라아." "총알 아까운디 대창으로 죽여뿌러." 이런 외침들이 여기저기서 터지고 박수소리가 물결을 이루며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당중앙의 지령에 따라 염상진은 가급적 인민재판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의 인민재판은 민청원 지삼봉의 살인사건을 다루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였다. 사람들은 누적된 계급적 원한과 군경한테 입은 여러 가지 피해를 사적으로 마음대로 풀 수 있는 것이 "인민해방"이라고 오해하는 경향이 많았고, 군내에서도 그런 행위가 벌써 몇 군데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특히 야산투쟁에서 남편이나 자식을 잃은 가족들이 원수를 갚겠다고 나서는 것은 당에 대한 적지 않은 압력이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입장을 더없이 곤궁하게 만드는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직원이 사적 감정으로 벌인 살인을 방치할 수도, 더구나 옹호할 수도 없었다. "인민해방"은 무질서가 아니라 엄격한 질서의 진행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야했던 것이다. 도당에서 질서회복을 계속적으로 강조하고 있었다.
송경희는 그런 사람들 속에서 이를 앙다문 채 조회대에 버티고 서있는 염상진을 노려보며 박수를 따라서 치고 있었다. 혼자 박수를 치지 않았다가는 금방 반동으로 찍힐 것 같았던 것이다. 그녀는 억지로 박수를 치는 것만큼 염상진을 향해 증오를 내뿜고 있었다. 저 숯장수 아들놈이 감히 어디서, 저놈은 교활한 여우다. 천하고 더러운 것이 어쩌다 대가리를 잘못 타고나서 세상을 어지럽히고, 무식한 것들은 저런 교활한 놈들한테 박수나 쳐대며 이용당하고있는 것이다. 저놈의 연극으로 귀한 사람들이 벌써 얼마나 죽어갔나. 아니, 어머니가 성일이를 멀리 피신시키지 않았더라면 동생도 윤태주처럼 또 저놈 손에 죽었을 것이 아닌가. 저원수를 어떻게 죽여 없애나. 하느님, 저놈한테 벼락을 치십시오, 당장 벼락을 치십시오. 그녀는 아버지를 생각하고, 성일이를 생각하며 증오감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민청원이란 것들은 성일이를 찾아내려고 벌써 서너 차례나 집뒤짐을 했던 것이다. 멀리 떠나지 않고 집안에 숨어 있었더라면 영락없이 윤태주 꼴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운동장의 사람들이 반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제각기 양쪽으로 팔을 붙들린 세 사람이 서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살려주시오, 내가 잘못했소. 우리 재산 다 기부헐 팅께 한번만 살려주시요오." 윤태주는 고개를 뒤로 돌려 목놓아 부르짖으며 발버둥을 쳤다. "워메에 나가 죽일란 거이 아니였당께라아. 살려줏씨요오, 나 잠 살려줏씨요오. 나넌 원통허요오." 지삼봉이 몸부림을 쳐대며 울부짖고 있었다. 청년단원 오칠성만이 묵묵히 끌려가고 있었다. 세 사람은 아름드리 플라타너스에 하나씩 묶여졌다. 그리고 수건으로 눈이 가려졌다. 운동장은 싸늘한 침묵에 덮여 있었다. 어느 나무에선가 매미가 울어댔다. 세 사람을 향해 아홉 사람이 총을 겨누었다. 다섯은 파란 견장을 붙인 인민군이었고, 넷은 빨간 완장을 찬 민간인이었다.
"발사!" 치켜올렸던 팔을 내리치면서 외친 것은 하대치였다. 총소리들이 운동장의 침묵을 흔들었고, 세 사람의 목이 푹 꺾이면서 몸뚱이도 처져내렸다. 사람들이 말없이 교문을 빠져나가기시작했다. 큰 물결이 흐르듯하는 움직임이었다. 박수를 쳤던 열기가 침묵으로 바뀌어 있었다.
"거 인민군 어깨에 붙은 표식이 워째 뻘건 것에서 퍼런 것으로 변했는고?" 학교가 멀어져서야 어느 남자가 옆사람에게 물었다.
"표식이 변헌 것이 아니고 사람이 서로 바꽈진 것이시.""그려? 하먼, 그 표식이 워찌 달븐고?" "뻘건 표식언 쌈얼 전문으로 허고, 퍼런 표식은 그 뒷감당얼 전문으로 헌다데." "글먼 군인허고 순사허고 차인갑제?" "어이, 말귀 한분 볽네."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끊어졌다. 빨간 견장의 인민군들은 보위성 소속으로 전투부대원들이었고, 파란 견장의 인민군들은 내부성 소속으로 치안담당원들이었다. 그들은 기본임무에 따라 며칠 전에 교체되었던 것이다.
"근디, 거 지 머시라고 허등가, 그 사람은 영 짠허데." 먼저 말을 물었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짠허기사 헌디 워쩔 것인가. 다 지 팔자제." "나 맘으로는 살레줬으먼 또 좋겄드마. 머심살이허다가 인자 한시상 볼 참이었는디." "죽이잔 결정 내린 사람들이라고 속으로야 워째 고런 맘이 웂었겄는가. 큰일얼 해나가잔께 그리 되는 것이제." "그 원통해 험스로 발싸심허든 모냥이 눈에 선허시." "어허, 인자 다 내붙인 옹기시. 담배 한 대 주소."
"어쩔 셈인가?" 손승호가 햇빛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얼마 멀지 않다니까 찾아보고 갔으면 하는데." 김범우의 대답에 손승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난 못 가는데 어쩌지?" "알고 있네." 손승호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김범우를 바라보았다. "염려 말게,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여기까지 오는데도 특별히 까다로운 조사는 없었잖았나." 김범우가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자네 간 큰 거야 보통 이상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너무 자만하는 거 아닐까?" 손승호가 맞바라보며 어색스러운 웃음을 그려냈다. "물론 자네 통행증 덕이야 봤지. 허지만 이런 시골에서 뭐 똑별나게 통행증 조사가 심하겠는가? 가세." 김범우가 먼저 대문 앞에서 돌아섰다. 손승호가 무거운 얼굴로 뒤따랐다.
"자네, 단순한 안부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 손승호는 김범우가 법일이라는 환속승을 굳이 피난지까지 찾아가려는 의중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예사 중은 아니었지만, 통행증도 없는 몸으로 그 사람을 찾아나서는 데는 무슨 이유가 분명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논산에 가까워지먼서 법일의 이야기를 꺼내고, 초행이 아닌 것처럼 집을 찾아가고 한 것이 다 미리 준비된 일임이 분명했다.
"그 묻는 말이 벌써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김범우가 고개를 돌리며 손승호를 쳐다보았다. "그러네." "눈치 한번 빠르군." 김범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뭐랄까...... 그분이 피난을 떠난 게 의문스럽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기도 하고, 그러네." 김범우가 피식 웃었다.
"자네 생각의 동조자를 찾아간다고 말하는 게 더 솔직하지 않을까?" 손승호가 김범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 사람아, 그리 야박스럽게 말하지 말게. 나도 이 선배나 자네처럼 될 수 있다면 더 말할 것 없이 행복하겠어. 난 현실을 기피하자는게 절대 아니네." "글세, 자넨......" 우그랑우과앙콰랑......
"엎드려!" 김범우가 외치며 손승호의 팔을 낚아챘다. 두 사람은 왼쪽 생나무울타리 밑에 처박히듯했다. 쇳덩어리가 맞갈리며 굴러가는 것 같은 비행기의 폭음이 바로 머리 위에서 터졌던 것이다.
"저 쌍녀러 비행기!" 손승호의 입에서 터져나온 소리였다. 저 앞에 저공비행으로 날아가고 있는 네 대의 비행기를 향해 그의 눈은 증오를 내뿜고 있었다. 김범우는 그만 푹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나!"손승호가 얼굴을 휙 돌렸다.
"이 사람아, 자네가 욕을 하니까 영 안 어울려. 아무리 양키들이 미워도 자네 식으로 하게." "화가 치밀면 욕도 하는 거지 내 식이 뭐 따로 있나. 근데, 저것들 왜 저렇게 낮게 떠서야단일까?" "보나마나 어딜 폭격하려는 것 아니겠나? 그만 일어나세, 우리가 이런 꼴을 하고 있는 것도 비행사 입장에서 보면 사실 원시인이나 야만인 짓이거든." 김범우가 바지를 털고 일어서며 쓰게 웃었다.
"무슨 소린가?" "아, 저 호주비행긴가 쌕쌔긴가가 초음속 아닌가. 우리가 소리를 듣고 피했을 때는 이미 비행기는 우리 머리 위를 지나간 다음이란 말일세. 번개칠 때는 태평치고 있다가 천둥소리 듣고 놀라 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치지." "원, 무슨 저런놈에 흉악한 비행기가 다 있어." 손승호가 경직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비행기가 사라진 쪽을 노려보며 내쏘았다. 그때 연속적으로 터지는 폭음이 멀게 들려왔다.
"또 시작이군." 김범우가 담배를 빼들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병신 같은 놈들, 이 손바닥만한 논산에 뭐가 있다고 대낮부터 폭격이야." "그런 말 말게. 일정때부터 논산 성냥 유명한 것 몰라서 하는 소린가? 그게 나무개비 끝에 조금씩 묻히면 성냥이지만 덩어리로 뭉쳐놓으면 폭약이라네. 어디 그뿐인가? 쌀창고도 많은데, 그것도 좋은 공격목표가 되겠지. 그런데, 그런 것들을 여태까지 남겨뒸을 리가 있을까? 어쩌면 인민군 수송차량이라도 어디 감춰져 있다는 정보를 받고 출동했는지도 모르지." "그래, 양키들은 반동첩자들을 사방에 깔아놓고 추접하고 비열하게 전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추접하고 비열하게 전쟁을 한다고? 그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린가? 추접하고 비열하지 않으면, 청결하고 품위있는 전쟁이라도 있단 말인가? 전쟁이 도대체 뭔가? 일단 일어났다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상대방을 무찔러 이기는 게 그 목적 아닌가? 목적이 그런데 추접하지 않고, 비열하지 않고, 잔인하지 않고, 악독하지 않은 전쟁이 어디 있겠나. 전쟁에 이긴 쪽일수록 그만큼 추접하고, 비열하고 잔인하고 악독한 짓 많이 했다는 거 아니겠나. 다만 인간이 교활함으로 그런 추악한 것들을 승리라는 포장지로 싸서 은폐시키고, 또 반대로 미화시키고 하는 거 아닌가. 자네 입장에서는 내 말을 거부하겠지만 말이네. 후퇴를 하면서 적지에 첩자들을 뿌리는 첩보전은 이미 오래된 작전 중의 하나고, 그걸 가지고 상대방을 평가한다는 건 그 기준부터가 잘못되었네. 만약에 말이네, 인민군이 밀리게 되면 적지에 첩자들을 안 박을까? 안 박을 리가 없고, 만약 안 박는다면 그건 양심적이고 신사적인 게 아니라 바보나 천치 같은 짓이 되겠지. 그대 적지에서 활약하는 첩자들을 자넨 뭐라고 부를 건가? 추접하고 비열한 짓을 하는 자들이라고 하겠나? 아니겠지, 사지에서 열렬한 혁명투쟁을 전개하는 영웅적 전사들이라고 할 거 아닌가. 마찬가지로 자네가 추접하고 비열하다고 매도하는 첩자들도 상대방에서는, 북한괴뢰집단을 쳐부수기 위해 용감무쌍하게 싸우는 용사들이되는 거네. 전쟁을 놓고 내리는 판단이라는 건 다 그 모양으로 일방적인 감정의 노출이고, 그래서 아무 의미가 없는 모략 중상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역사상 뛰어나다는 명장들의 작전이라는 것도 자기들 편에서 보니까 위대한 거지 상대방 입장에서 보면 속임수가 대부분 아니던가. 전쟁 자체가 지탄되고 부정되는 것도 다 그 피할 수 없는 전쟁의 속성 때문이 아니겠어?" "자넨 역시 나하고는 출신성분이 달라 유아건강서부터 차이가 나는 모양이군, 여기까지와서도 지치지 않고 그렇게 말할 기운이 남아 있으니." 손승호가 맥풀어진 소리로 말했다.
"미친 소리." 김범우는 웃음을 흘렸다.
손승호의 마음에는 먹구름 같은 우울이 차 있었다. 그 우울은 논산에 이르기까지 한 겹씩 쌓여온 것이었다. 비행기의 폭격으로 긴 다리든 짧은 다리든 성한 것이 거의 없었다. 다리만 끊긴 것이 아니라 길도 수없이 파괴되어 있었다. 철도도 파괴되기는 마찬가지였다. 화물차가 몇 량이라도 세워진 역은 하나도 빠짐없이 폭격을 당해 있었다. 폭격을 당한 화물차량들은 본래의 검은 모습은 간 데가 없이 벌겋게 변한 채 흉하게 찌그러지거나 철로를 벗어나 벌렁 누워 있거나 했다. 그리고 좀 규모가 큰 도시들은 이미 폭격의 피해를 엄청나게 입고 있었다. 그런데도 소리보다 빠르다는 프로펠러도 없이 과상스럽게 생긴 비행기들은 넷씩 짝을 이루어 종회무진 하늘을 날아다니며 폭탄을 퍼붓거나 기총소사를 해대고 있었다. 그 비행기들이 입히고 있는 피해는 전역에 걸쳐 상상보다 훨씬 심했던 것이다. 물자수송도, 병력이동도 밤에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너무나 분명했다. 비행기는 제트기만이 아니었다. 큰 체구로 묵직하게 나는 B 29, 국방색의 폭격기, 둔하게 생긴 수송기, 잠자리비행기라고 하는 헬리콥터, 방정맞아 보이는 정찰기, 하늘은 온갖 미국 비행기들의 전시장이었다. 날이 갈수록 우울이 쌓이는 건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어느만큼 규모를 갖춘 도시를 지날 때는 전황을 확인하고는 했다. 그런데 날이 흘러도 전황은 변할 줄을 몰랐다. 그렇게도 시시각각 변하던 전황은 경상북도 일부를 남겨놓은 채 고정되어 있었다. 그건 비행기가 가하고 있는 피해를 확인하는 것보다 더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김범우의 예상이 맞아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을 떼칠 수가 없었다. 미군이 참전을 한 이상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진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그는 김범우에게 전혀 내색을 하지 않은 채로 혼자서만 속앓이를 했다.
논산역 앞에 이르렀다.
"어떻게 하려는가?" 손승호가 다시 확인하듯이 물었다. "밥때가 다 됐는데 국밥이나 한그릇씩 먹고 보세." 김범우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폭음이 한결 가깝게 들리면서 비행기들이 솟구치고 곤두박히는 모양들이 멀게 보였다. 그들은 국밥집을 찾아들었다.
"아주머니, 여기 국밥 주시고요, 저 비행기들은 어딜 저렇게 폭격 해대고 저럽니까?" 김범우가 물었다. "몰르겄이유, 안직도 불질를 공장이 남었는지유, 닥치는 대로 폭탄 퍼부서대는 저눔에 쌕쌔기만 보면 진절머리가 나느먼유." 주인여자는 머리를 홰홰 저었다.
"저게 미국놈들 비행기란 건 알지요?" 손승호가 끼여들었다. "고것이야 세 살 묵은 아덜도 아는 일 아닌감유." 일손을 놀리는 주인여자의 심드렁한 대꾸였다. 김범우는 손승호에게 눈짓을 했다. 그는 밥집에서 문화선전부원 노릇을 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손승호는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다가 멋쩍게 웃고 말았다. "내가 곧 뒤따라가겠네. 전주까진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까." 혹시 거기 그냥 주저앉는 건 아닌가, 하는 말을 손승호는 참아내며, "괜히 의용군에나 뽑혀나가지 않게 하게." 그가 통행증이 없는 것을 상기시켰다.
"해방전사 되는 것도 괜찮은 방법 아닌가?" 김범우의 느긋한 대꾸였고, 손승호는 먼 데로 눈길을 보냈다. 그들은 국밥을 먹고 곧 헤어졌다. 김범우는 사십여 리밖에 있다는 북소라는 마을로 걸음을 서둘렀다. 서울을 떠날 때 전주까지는 너무 장거리가 되어 통행증을 만들기 어렵다고했다. 통행증을 발급받을 만한 그럴 듯한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한강을 헤엄쳐 건너 손승호와 합류하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그 다음 검문부터는 손승호와 일행이라는 것으로 무사통과가 되었다. 역시 당중앙의 권위는 대단했고, 현지 사람들로 구성된 지방 내무서들은 그런 빈 구석을 가지고 있었다. 김범우는 말로만 들었던 은진미륵을 지나 큰 저수지가 있는 마을이라는 북소를 찾아가고 있었다. 들녘에는 전쟁과는 상관없이 벼들이 푸르게 자라고 있었다. 법일 스님이 피난을 떠났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이해가 될 듯 말 듯하면서 그 이유를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던 것이다. 법일 스님이 이학송의 행동결정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목에서 김범우는 결국 검문을 당하게 되었다. 대창을 들고 나무그늘에 앉아 있던 두 청년이 벌떡 일어나 앞을 가로막았다.
"못 보든 얼굴이구만, 누구시유?" 몸집 큰 청년이 위아래를 훑었다. "북소로 친척을 만나러 가는 길이오." "북소 누군디유?" "북소 사람이 아니고 논산에서 피난온 사람이오." "피난? 그거 반동이네?" 청년이 금방 기색을 달리하며 옆의 청년에게 눈길을 돌렸다. 김범우는 아차 싶었다.
"맞구만, 북소에 피난민은 딱 한 집인디 그 남자가 동네아덜 모아 한문도 갈치고 허는 모양으로, 위원회서 허락헌 걸 보면 반동은 아닌 것 같드먼," "그려?" 처음의 청년이 김범우에게 고개를 돌리며, "통행증 내보이시유." 손을 내밀었다.
"아, 동무들 철저하게 근무하는 걸 보니까 내 기분이 좋소. 난 서울시당 문화선전부에서 사업하던 김범우라는 사람이오. 선전사업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다른 동무 한 사람과 전주로 이동하는 길에 친척을 잠깐 찾아보려는 참이었소. 그런데, 통행증이 함께 끊어져 그 동무가 가지고 갔기 때문에 난 지금 없소." 근무사실을 확인할 길도 없는 것이고, 시골사람들이 통행증이 함께 끊기는 지 어쩌는지 알랴 싶은 생각으로 김범우는 정말 서울시당 문화선전부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둘러붙였다.
"아, 그러시구먼유. 이 더위에 서울서 내려오시느라고 고생이 많으시겄이유. 미처 몰라봤구만유." 처음의 청년이 약간 기죽은 듯하며 반색을 했고, 그 옆의 청년이 그의 옆구리를 질벅이고 있었다.
"가보시지유. 북소가 십리도 안 남었이유." 두 청년이 친근한 웃음을 보내며 길을 비켜섰다.
"고맙소. 그럼 수고들 하시오, 동무들." 김범우는 손을 들어 보이며 청년이 가리킨 길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속으로 웃었다. 자신이 무사통과가 된 것을 좋게 말하면 동지에 대해 무조건 신뢰를 보이는 시골사람들의 단순무구함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상부의 권위에 무조건 굴복하는 전시대적 의식을 아직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교활한 것은 자신이었다. 자신은 그들이 지닌 그런 장단점을 미리 계산해서 역이용했던 것이다. 이름 그대로 커다란 저수지 옆에 붙어 있는 북소라는 마을에서 법일 스님이 피난들어있는 집을 찾기는 너무 쉬웠다. 법일 스님은 집에 없었고, 언젠가 한번 인사를 했던 분이기에 한참 만에 알아보았다.
"야아야 석구야, 손님 이장님댁에 모시고 가그라." 부인이 평상에 앉아 있는 아이에게 일렀다. 부인의 몸에는 피난생활의 고단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김범우는 아이의 뒤를 따라 비탈길을 내려갔다. 인공치하에서 "이장님댁"이라는 말이 그대로 쓰이고 있는 것이 이상스럽고도 신기하게 여겨졌다. 역시 시골이라서 그런가? 검문하던 청년의 말을 들으면 인민위원회가 분명히 결성되어 있었다.
"너 석구라고 했지? 네가 장남이냐?" "아니요, 작은 아들인디요." 바짝 마른 소년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몇 학년이냐?" 맨발로 걷고 있는 소년은 대답이 없었다. 못 들었나 했다.
"댕기면 이학년이요."소년은 한참 만에 대답했다. 소년이 무슨 말을 묻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처음의 느낌을 김범우는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오. 여기까지 찾아오시다니." 법일 스님은 자신의 손을 감싸잡으며 생각보다훨씬 반가워했다. 김범우는 그분의 엄격하면서도 냉정한 듯한 외모 속에 감추어진 정깊은 마음을 다시 느끼고 있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나야 피난와 있는 몸이니 걱정이 없지만, 김 선생은 그래 어떠시오? 대체 어디서 이리오시는 길이요?" 법일은 상기된 얼굴로 거푸 묻고 있었다. "서울서 내려오는 길입니다." "갑시다. 여기는 마땅찮으니, 저쪽에 얘기 나누기 합당한 자리가 있소." 김범우는 먼저 돌아섰고, 법일은 집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저분이 이장이신가요?" "예, 전에 그랬지요." "지금도 이장님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래요, 평소에 워낙 인심을 사고 살아서 인민위원회 사람들까지 다 그렇게 불러요. 마음에 불심을 지니고 살면 세상이 제아무리 바뀌어도 다 아무 탈 없게 되어 있는 법입니다." 김범우는 그 말이 가슴에 박히는 것을 느꼈다. "김 선생, 덥고 목도 마르실 텐데 여기서 잠시......" 법일은 김범우를 앞서서 우물가로 내려가며 말했다. 그리고 서둘러 두레박을 우물 속으로 던져넣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김범우가 황급히 다가섰다.
"아니오, 아니오. 이건 내가 하는 빈한한 손님대접이니 김 선생은 그저 가만히 계시도록하시오." 법일은 두레박끈을 잡은 채 김범우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잔잔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김범우는 그 웃음의 뜻을 거슬리고 싶지 않아 마주 웃었다.
"자아, 목부터 축이시오." 법일이 물이 찰랑찰랑 담긴 두레박을 내밀었다. "고밥습니다." 김범우는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숨길을 골라가며 마시고 또 마셨다.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이었고, 법일 스님의 빈한하나마 따뜻한 대접을 크게 받아들이고 싶었던 것이다.
"자아, 이젠 낯을 좀 씻으시오." 법일은 물을 부어줄 자세를 갖추었다. 김범우는 사양하지 않고 두레박 아래에다 두 손을 모아 바가지를 만들었다. 두레박의 물이 동이날 때까지 낯과 목을 씻었다. "참 시원합니다. 스님, 너무 황송해서 어쩌지요?" "무슨 그런 말씀을, 이리 찾아주시기까지 하시고서......" 법일이 나직하게 말하며 두레박을 조심스럽게 제자리에 놓았다.
"김 선생, 예비검속 소식 들으시었소?" 법일이 비탈길을 다 올라 그의 집을 끼고 돌며 물었다. "예, 대충 소문은 들었습니다." "그때 순천을 떠나오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영영 이리 만나지 못할뻔했지요. 소식을 듣자니까 순천에서는 아이들까지 다 죽였다고 하더군요." 법일이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까지 했답니까?" "내가 마음을 결정하도록 그때 김 선생이 판단내려주신 것,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무슨......" 예비검속에 대한 이야기를 왜 굳이 꺼냈는지를 깨달으며 김범우는 법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법일은 자기가 밟은 풀을 내려다보듯 고개를 숙인 채 동산 등성이를 오르고 있었다.
그 발에 짚신을 신고 있었다. 동산 마루에 오르자 드넓은 저수지가 눈아래 펼쳐졌다. 산들이 커다란 타원을 그리며 저수지를 에워싼 채 그 그림자를 물에 담그고 있었고, 산 아래로는 북소 같은 마을들이 띄엄띄엄 자리잡고 있었다. "풍경이 참 좋습니다. 그런데, 저기 저 멀리 보이는 곳은어딥니까?" 김범우는 왼쪽으로 아슴하게 보이는 곳을 가리켰다. "거기가 김 선생이 거쳐오신 논산입니다." "아, 그렇군요. 저도 혹시나 해서 여쭤본 것입니다." "이리 앉으십시다. 옹색스런 집보담이야 여기가 더 시원하고, 편안할 겁니다." 법일은 나이먹은 소나무 세 그루가 만드는 그늘에 앉았다. 김범우도 자리를 잡으며, 삼베옷에 짚신을 신고 꼿꼿하게 앉아 있는 법일 스님과 주위 풍경들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저어, 이학송 선배가 지금 해방일보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해방일보요?" 법일이 놀라움을 나타내는 것 같다가 이내 담담한 얼굴이 되며 눈길을 멀리 저수지 끝으로 보냈다. 김범우는 이학송이 행동을 결정하게 된 과정을 차근차근 이야기해 나갔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자신의 심중도 풀려나오게 되었다. "이군이 그렇게 태도결정을 한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귀결인지도 모르겟소. 사회주의에서 한 발 더 내대딘 것이니까요." 법일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스님의 말씀대로 이 선배가 민족적 사회주의를 생각하고 있었다면 언젠가는 혼란을 겪게 될 겁니다. 공산주의는 민족보다는 계급이 우선 아닙니까. 그 차이는 결코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그렇지요." 법일은 잔디줄기를 뽑아 입에 물고 한참을 있다가. "아마 이군은 걸리는 것없이 자유로운 입장이니까 그 문제는 잘 소화할지도 모를 일이요. 문제는 나처럼 종교적 입장에 선 사람들이 난감하지요. 서청에 몸을 상할 대로 상하고, 고향땅을 등지고, 모든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앞에서 피난짐을 싸야 하는 것이 나 같은 사람의 곤궁함이고, 또한 한계겠지요. 그래서 난 애초에 사회주의 개혁사회 정도를 이상으로 삼았던 거구요." 역시 일본유학까지 한 신식 중의 면모를 다시금 확인하면서도 김범우는 그 명쾌함에 야릇한 저항감을 느꼈다.
"만약 공산주의사회가 돼버리면 그땐 어쩌시겠습니까?" 법일은 김범우를 바라보며 먼저 웃음부터 지었다. 김범우는 자신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것 같아 찔끔했다. "공산주의가 그들의 신념이라면 종교로서의 인간인식은 나의 신념이요. 난 그 사회에서 버림받겠지요. 그러나 인간이 물질만으로 해결이 안되는 존재인 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결코 버려지는 것이 아니오." 김범우는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어서 그냥 웃기만 했다. "미군의 참전으로 전쟁이 실패할 거라는 김 선생의 예측에는 일리가 있소. 그리고 전쟁에 이기지 못하면 양쪽에서 무고한 대중들만 끌어내다가 죽인 결과 밖에 안되고, 그건 이념들을 극단적으로 앞세워 민족을 살해한 행위밖에 안된다는 판단에도 동감이요. 허나, 나야 진작에 이렇게 피해 앉아버렸지만 김 선생이 어찌해야 할 지 문제로군요. 나와 또 다른 입장이니 얼른 묘안이 떠오르질 않는군요." "예, 일단 전주까지 가며 더 생각해봐야지요." "아부지이, 진지 잡수시씨요오, 진지." 석구가 뛰어오며 소리치고 있었다.
"가십시다. 가서 찬 없는 보리밥이나마 한술 뜨십시다." 법일이 일어섰다. "참, 생활은 어떻게......" 김범우는 말끝을 맺지 못했다. "아까 그 이장님이 주선해서 서당을 차리고 있으니 난리 중에 호강이지요." 말 끝에 매달리는 헛웃음이 가슴을 파고드는 것을 김범우는 느꼈다. 자신이 한 끼라도 밥을 축내는 것이 큰 폐가 된다는 것을 그는 그때서야 생각했다. 반찬은 다 야채 종류였지만,가짓수가 많았고, 하나하나가 맛깔스러웠다. 부인의 솜씨와 지성이 반찬마다에 담겨 있었다. 김치에 가지나물, 콩나물, 깻잎찜, 부추무침, 호박잎찜, 오이나물이 상을 채웠고, 빈대냄새가 나는 절음식인 고소무침도 놓여 있었다. 텃밭갈이를 알뜰하게 해서 얻을 수 있는 여름한철 반찬들이었다. 절을 떠난 법일스님과 고소무침이 묘한 슬픔을 일으켰다.
저녁을 마치고 다시 등성이로 올라갔다. 날이 어두워지는데 당산나무 아래로 아이들이 모여들고있었다. 얼마가 지나자, 장백산 줄기줄기...... 노래가 펴져나왔다. 야간노래학습이 시작되고 있었다. 김범우는 될 수 있는 대로 부담없는 이야기를 하려고 신경썼다. 정치성을 띤이야기는 서로 힘이 들고 괴로울 뿐이었다. 모기 소리와 풀벌레 소리만 깊을 뿐 어둠 속 그 어디에도 사람의 거처를 알리는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비행기의 위협을 아랑곳하지않는 것은 봉화였다. 짙은 어둠의 복판에서 하나씩의 점으로 찍혀 타오르는 봉홧불은 살아있는 빛이었다. 봉화는 밤에만 오르지 않았다. 낮에는 외가닥이기도 하고 쌍가닥이기도 한 긴 연기가 꼬리를 끄는가 하면, 끊어졌다 이어지고 다시 끊어지고 하는 여러 종류의 연기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초음속 비행기와 봉화, 이건 이번 전쟁의 대조적인 양상의 하나였다. 김범우는 잠자리에 들며 내일 일찌감치 떠나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방 하나에 부엌 하나를 빌려쓰고 있는 처지에 자신은 이만저만 폐를 끼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 곧 떠나야 되겠습니다." 김범우는 아침밥상을 물리며 말했다. "김 선생, 이리 어렵게 만났는데 하루만이라도 더 묵어가시오. 또 언제 만나게 될지도 기약이 없는데." 법일의 간곡함은 말보다는 얼굴에 더 진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저도 그러도 싶지만 전주까지 가야 할 날짜가 너무 촉박해 있습니다. 실은 하룻밤 묵은것도 무리를 한 겁니다." "그러시면 내가 아이들 가르치고 올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주시오. 이리 서운하게 헤어져서야 원, 어쩌시겠소?" "예, 알겠습니다." 법일이 천자문을 들고 바쁜 걸음을 옮기는 걸 보고 김범우는 등성이로 올라갔다.
"아니, 너 석구 아니냐." 김범우는 소나무 아래 혼자 조그맣게 쪼그리고 앉은 아이가 석구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꺾어세운 무릎에 턱을 받치고 두 팔로 다리를 감싸잡은 모양으로 앉아 있는 아이는 무척이나 작아 보였다. 자신의 아는 체에 아이는 힐끔 눈길을 올렸다가 이내 앞만 똑바로 지켜보고 있었다. "왜, 너 야단맞았냐?" 아이는 대꾸가 없었다. "참 똑똑하게 생겼는데, 뭘 잘못했지?" 김범우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옆에 앉으려는 참이었다. "아지씨, 시끄럽게 말어요. 저 쌕쌔기 새끼덜이 우리집얼 폭격헐라고 헌당께요." 아이가 진저리치듯 소리질렀다. "아니, 뭐라고?" 김범우는 그때서야 아이의 눈길이 가 있는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과연 아슴하게 보이는 논산을 비행기들이 폭격하고 있었다. 비행기들은 쌀알처럼 작게 보였고, 그것들이 내쏘고있는 파란 빨간 불꽃들이 연기와 함께 더 선명하게 보였다. 그러나 비행기 소리나 폭음은 아주 감감했다.
"염려 마라, 내 어제 보고 왔는데 느네 집은 아무렇지도 않더라." "고것이야 어지께 일이제라." 아이의 카랑한 소리였고, 김범우는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너 비행기가 폭격할 때마다 이렇게 지키냐?" 아이는 앞만 지켜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이 초롱초롱했다. "너 비행기가 밉겠구나." "순사나 서청사람덜맹키로 밉고 싫어요." "서청사람들?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다 알지?" 김범우는 너무 놀라 아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이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워째 그리 쉬운 것을 몰라라. 우리 아부지럴 죽일라고 헌 사람덜인디라." 김범우는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이의 눈이 더 또랑또랑했다.
"넌 그럼 누가 좋으냐?" "좋은 사람 아무도 없어라. 민청원들도 밉고 싫어요." "왜?" "우리 성을 죽게 팼응께요." "민청원들이 왜?" "노래 못 불른다고라." "그게 무슨 소리지? 어디 차근차근 말해봐라, 아저씨가 못 알아듣겠다." "우리 성은 공부넌 잘혀도 노래넌 통 못 불르는디요, 민청원들이 밤마동 노래럴 갤치고나서 한 사람썩 일어나서 노래럴 허라고 시켰는디, 노래 잘못 불르는 성이 자꼬 틀렸구만이라. 긍께 민청원들이 화럴 냄스로 또 시키고, 성은 겁이 나서 첨보담 더 많이 틀리고, 민청원은 막 소리질름시로 또 시키고, 성은 더 겁나서 더 많이 틀리고, 근디 민청원이 반동새끼라고 험시로 성이 틀릴 때마동 몽딩이로 패기 시작혔당께요. 그래서 성은......" 아이는 주루룩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 그 사람이 나쁘다. 울지 마라, 석구야." 김범우는 아이를 감싸안았다. 방 아랫목에 아파서 누워 있던 큰아들이 떠올랐다. 법일은 그저 예사롭게 좀 아픈 모양이라고 했고, 자신도 그냥 지나치고 말았던 것이다. "아자씨는 워떤 편인디요?" 아이가 울먹이면서 물었다. "석구처럼 아저씨도 아무 편도 아니다." 김범우는 얼결에 말해놓고, 하늘을 향해 허망하게 웃었다. 김범우는 불현 듯 떠나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법일을 다시 만나고, 큰아들을 새롭게 보게 되고...... 김범우는 수첩을 꺼냈다. 큰 결례인 줄 알면서 그냥 떠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다시 뵈올날까지 가내 평안하시길 빌겠습니다.
"석구야, 아저씬 그만 떠나야겠다. 이 편지 아부지께 드리고, 이 돈으로는 형하고 맛있는것 사먹어라. 그리고, 그런 말 아무한테나 하면 안된다." "치이, 나가 바보간디." 아이가 영리한 눈빛으로 웃었다. 김범우는 아이의 손에 편지와 돈을 쥐여주고 쫓기듯이등성이를 뛰어내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