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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서 崔載瑞
石田耕造 ・ 石田耕人 , 1908~1964
시인 ・ 소설가 ・ 평론가
1908년 2월 11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호는 석경우(石耕牛), 필명은 학수리(鶴首里) ・ 상수시(尙壽施) ・ 석경(石耕) ・ 석경생(石耕生) 등이다.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4월 경성제국대학예과 문과에 입학해 1928년 3월 수료한 후, 같은 해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해 1931년 3월 졸업했다. 같은 해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해 1931년 3월 졸업했다. 같은 해 4월 대학원에 진학했다. 1931년 7월 첫 논문「미숙한 문학」을『신흥』제5호에 발표했다. 1933년 3월부터 1934년 3월까지 경성제국 대학 법문학부 강사를 지냈다. 1933년에 경성제국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런던대학에서 공부했다 이후 보성전문학교와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수를 지냈다. 1937년 12월 합자회사 인문사를 설립해서 대표로 취임했다. 1938년 6월 평론집 『문학과 지성』(인문사)을 발간했다.
1939년 2월 임화 ・ 이태준 등과 함께 황군위문작가단을 발의했고, 3월 14일 황군위문(皇軍慰問) 문단사절(文壇使節) 위문사 후보 선거일에 실행위원으로 활동했고, 4월 황군위문작가단 장행회에서 경과보고를 했다. 10월 조선문인협회가 만들어질 때 발기인과 기초위원을 맡았다.『인문평론(人文評論)』을 창간해서 1939년 10월부터 1941년 4월까지 편집인 겸 발행인을 지냈다. 1940년 9월 만주국 민생부가 주최한 만주문화건설공작강연회에서 순회강연을 했고, 11월 30일부터 12월 10일까지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총후사상운동을 위한 문예순회강연에 연사로 참여했다.
1941년 8월 조선문인협회 간사로 선임되었으며, 1942년 9월 상임간사를 맡았다. 1941년 9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1년 일제는 총력전을 명분으로 모든 잡지를 통폐합해 친일어용잡지인『국민문학』을 간행했는데, 11월부터 1945년 5월까지『국민문학』의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았다. 1942년 1월『국민문학』이 주최한 ‘일미(日米) 개전과 동양의 장래’ 좌담회에 참석했다. 같은 해 인문사 창립기념사업으로 실시한 징병제실시기념 논문현상모집에서 심사위원을 맡았다. 같은 해 6월 조선문인협회 주최로 경성 부민관에서 열린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에 참석했다. 9월 조선문인협회 문학부 평론부회 회원을 지냈다.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상임이사, 6월 평론수필부 회장을 맡았다. 같은 해 4월 일본 남방종군작가와의 교환회(交驩會)에 참석했다. 5월 일본 작가 가토 다케오(加藤武雄)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문인보국회 주최 내선작가교환회에 참석했다. 7월 2일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일본 저명 잡지사 편집장으로 구성한 조선시찰단과의 간담회에 참석했다. 같은 달 17일 일본 문인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 하야시 후사오(林房雄)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문인보국회 주최 내선작가교환회에 참석했다. 8월 25일부터 9월까지 도쿄(東京)에서 열린 제2차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조선대표로 참가했다. 이 대회에 참가한 뒤 “전쟁의 한복판에서 그처럼 대대적인 문학적 회합이 두 번씩이나 열렸다는 것은 정말 세계에 자랑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소감을 밝힌 「대동아 의식의 자각 ―― 제2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서 돌아와서」라는 참관기를『국민문학』1943년 10월호에 발표했다. 이 글에서 “대동아전쟁을 하나의 큰 건설전”이라고 규정하면서 “동아 10억의 참다운 결속”을 주장하고 “조선은 일본의 거울”이 됨으로써 “조선문학은 2천 7백만 조선인만의 문학이 아니라” “1억 국민, 아니 대동아 민족 10억을 위한 문학”이 될 수 있다고 강변했다. 같은 해 10월 조선군이 주도하는 제2차 보도연습에 참가하기 위해 호남에 내려갔다. 11월 5일부터 14일까지 ‘출진학도격려대회’의 개최를 주도하는 한편 직접 강연을 했다. 1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조선문인보국회 주관 결전소설 및 희곡 현상모집에서 심사원으로 활동했다.
1943년 4월에 발간한 평론집『전환기의 조선문학』으로 1944년 2월 ‘국어문학’ 총독상을 수상했다. 1944년 8월 17일 조선문인보국회가 주최한 적국 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신문학의 구상’이란 연제로 연설했다. 같은 해 9월 24일부터 이듬해 2월경까지 국민동원총진회(國民動員總進檜)의 발기인과 상무이사를 지내면서 연사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국민동진회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별동체로 6개월간 전의(戰意) 양양과 전시근로동원운동을 전개했다. 1944년 10월 5일 노무동원협력과 민중의 전의 양양을 위해 평양에 파견되었으며, 같은 달 18일 ‘성전 찬양 및 학병 참가’를 독려하기 위해 개최된 국민동원대강연회에 참가했다. 12월 14일에는 응징사(膺懲士) 가족위안대회에 참가했다. 1945년 2월 17일부터 18일까지 지방순회 근로간담회에 파견되었다. 모두 국민동원총진회가 주최한 행사들이다. 12월 1일부터 3일까지 만주예문(藝文)협회 주최 전국결전예문회의에 조선문인보국회 대표로 참가했다.
1945년 1월 대화동맹(大和同盟)의 처우감사 총궐기 전선대회에서 ‘철(撤)하라 내선일체(內鮮一體)’란 연제로 연설했다. 같은 해 2월경 일본 신태양사가 주관한 제 6회 ‘조선예술상’ 문학부문 심사위원과 조선연극문화협회가 주최한 ‘국어극 각본 현상모집’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6월 8일 조선언론보국회 발회식에 발기인으로 참여해서 선언문을 낭독했고, 상무이사로 선임되었다. 같은 달 16일 조선인 전사자 기요하라(靑原) 오장의 유족을 방문했다. 7월 7일 조선언론보국회가 주최한 본토결전부민대회(本土決戰府民大會)에서 선언결의문을 낭독했다. 같은 나라 국민총력조선연맹을 대체해서 결성된 전국 조직인 조선국민의용대의 총사령부에 참여(參與)로 참가했다. 같은 달 18일 대일본흥아회 조선지부 연구조사위원을 맡았으며, 19일 조선언론보국회 주최 ‘본토결전과 국민의용대 대강연회’ 연사로 평안남도에 파견되었다. 7월 23일 국민동지회의 발기인과 역원, 8월 3일 조선문인보국회의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1940년 6월호『인문평론』에 종일전쟁을 옹호하기 위해 쓴「전쟁문학」은 친일적 글쓰기로 전환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최후로 전선의 병사들이 총후(銃後)의 우리를, 그 중에서도 더욱이 다음 세대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기대를 걸고 있는가. 그들의 전장의 신념이란 결국 조국의 다음 세대가 그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행복스러워지라 하는 신뢰심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명심하지 않아서는 아니 되리라고 생각한다.”고 전쟁의 당위성을 역설한 뒤, “전쟁이라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초월한 생활세계에 있어선 모든 체험이 비범하달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능력을 최대한도로 발휘시키고 인간성을 그 최고의 경지에까지 고양시킨다는 의미에 있어서 우선 그것은 보고될 가치가 있”으며, “이러한 엄숙한 체험”에 대해 “인위적인 혹은 예술적인 가공을 하기 전에 우선 그것을 소재 그대로 받아들이는 겸허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그렇게 해야 되는 이유로 “그것이 전쟁에 희생된 용사들에 대한 총후국민으로서의 의미”이며 “장래의 진실하고 위대한 전쟁문학을 창조하는 데도 밑바닥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여 전쟁문학의 가치를 한껏 높이고 있다.
『인문평론』1940년 7월호의 ‘일지사변 삼주년 기념’ 기획 특집란에「사변 당초의 나」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제목처럼 중일전쟁 3주년을 맞아 회고하는 수필이다. 전쟁 소식을 듣고 그 감회를 솔직하게 기록한 이 글의 말미에는 “이튿날 눈을 뜨자마자 일장기의 범람이었다. 특별열차가 물론 정차도 할 리 없는 촌락 소역에도 일장기는 나부끼고 숲속의 농가에도 일장기가 벽에 붙어 있었다. 더욱이 논도랑에서 어린애를 안은 젊은 여인이 질주하는 열차를 향하여 기를 내휘두르며 만세를 부르는 정경은 참으로 눈물겨웠다. 이리하여 나는 전쟁 속의 한사람이 되었다.”라고 침략전쟁을 긍정하면서 전쟁동원선전에 협력했다.
「징병제 실시의 문화적 의의」(『국민문학』 1942년 5・6월 합병호)에서는 “조선에서 징병제가 포고된 근본적인 의의는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서 반도 2천 4백만을 고굉(股肱)이라고 믿고 하셨다.”라고 천황의 시혜인 점을 강조하면서 징병의 “영광의 감격”에 참여하기를 촉구했다. 징병제가 실시됨으로써 “반도인은 확실하게 그리고 영구히 조국 관념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반도인의 자질이 급격히 향상되어지리라고 생각”하며, “반도인의 지위가 비약적으로 향상되리라는 것이 명백하다.”고 확신하면서 내선일체의 견고한 확립을 위해 “조선인이 진실로 황국신민이 됨으로써 대동아공영권에 있어서의 지도적 민족”이 되어 줄 것을 당부했다. 1943년 4월에 발간한 평론집『전환기의 조선문학』중「징병제 실시와 지식계급」에서는 “반도인이 일본에 대하여 조국 관념을 가질 유일한 길은 제국 군인이 되어 직접 국토방위의 임무를 맡는 것 이외에는 없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만일의 경우에 자기의 피를 흘려, 아니 가장 사랑하는 자식의 목숨까지도 바치는 데서, 비로소 진정한 조국 관념이 생긴다.”고 하면서 “징병제 실시가 반도인에게 확실한 조국적 신념의 기간을 부여한 것”이라고 징병제 실시의 의미를 부여했다.
조선군사령부가 1943년 5월 29일부터 6월 4일까지 실시한 제1차 보도(報導)연습에 참가한 뒤, 그 경험담을 작품화한 「보도연습반」(『국민문학』1943년 7월호)을 발표했다. 이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보도연습반 훈련에 참가한 인물들이 부르는 군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늘을 대신해 불의를 쳐부수자, 층맹무적의 우리 병사는, 철조망도 두렵지 않다, 세워라 영광의 일장기”라는 내용의 군가는 궁극적으로 “뱃속까지 완전히 황국신민이 되지 않은 자는 군대에 들어가서도 비참할 것”이라는 말과 연관되면서 조선인의 철저한 황국신민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렇게 되어야만 “젊은 조선의 모습이 이곳에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고 기대하면서 전쟁 중인 일본군대가 조선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매일신보』1943년 8월 4일자에 「징병 감사와 우리의 각오」를 발표했다. “황군은 천지의 정의와 인류의 공도(公道)를 지키는 유일한 실력”이기 때문에 “황군의 일원이 되어 세계의 사악을 걷어치워 버리고 도의적 세계질서를 건설하는 성전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 반도 청년으로서 다할 수 없는 영광”이니, “목숨을 반도에 받은 자 모름지기 신명을 던져 이 대어심(大御心)에 봉답(奉答)치 않아서는 아니 되리라고 깊이 맹서”했다. 조선에 시행된 징병제를 환영하며 선동하고 있는 이 글은 이렇게 끝난다. “이 때를 당하여 황군의 일원으로서 중심적인 지도세력이 된다는 것은 거듭 말하거니와 반도가 일찍이 갖지 못했던 영광이다. 그 중에서도 직접 군인이 되어 역사의 활(活)무대에 등장하는 청년은 참으로 세기의 선사(選士)라 할 수 있다. 이 감격과 이 영광을 가슴 깊이 새겨 넣고 감히 그 지닌 바 사명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를 조선의 부형(父兄)은 커다란 사랑과 동시에 깊은 정성으로써 기원한다.”
1943년 8월 1일부터 조선에서 징병제가 실시되자 그 감회를 적은 「징병서원행 ―― 감격의 8월 1일을 맞이하며」(徵兵誓願行 — 感激八の月一日を迎へて,『국민문학』1943년 8월호)를 기고했다. “하늘처럼 어버이처럼 받들어 모시고 있는 천황 폐하 스스로가 ‘부탁한다’고 말씀하신” 징병제이니 “감격이라 할까, 감분(感奮)이라 할까, 아무튼 우리는 신명을 바쳐 이 대어심(大御心)에 보답해야 한다고 마음속 깊이 맹세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서원”이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1944년 1월호『국민문학』에 발표한 소설 「수석(遂石)」에서도 학병 동원에 적극적으로 응할 것을 선동했다. 학도출진(學徒出陳)의 대명령(大命令)이 내려 화자는 급조된 학도선배단(學徒先輩團)의 일원으로 경상북도로 선전 ・ 선동차 파견되었다. 열차에서 만난 기골이 장대한 79세의 노인은 전시체제에서 물자부족으로 다시 필요하게 된 부싯돌에 대해 언급했다. 또한 노인은 포수(砲手) 출신으로 젊을 적 일본수비대가 처음 들어왔을 때 그 모습을 부러워했는데, “우리 손자도 이렇게 전쟁에 나가 코쟁이들 높은 콧대를 꺾어 놓는다고 생각하면, 지는 비로소 선조님들 낯을 대할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든다.”고 대미 적개심을 고취시키고 있다.
국민정신의 원론적인 입장을 주장한 「문화이론의 재편성」을 『매일신보』1941년 1월 14일자에 발표했다. 여기서 “이성의 신을 숭배할 뿐 그 외 일체의 권위를 허용치 않는” “문화주의의 청산”을 주장하면서 국가 본위의 문화이론 건설을 주창했고, 「새로운 비평을 위하여」(『국민문학』1942년 7월호)에서는 “일본적인 사고방식을 실천하고, 일본의 이상을 추구함으로써 일본정신을 현양하여 가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국민문화는 국민 전체에 통일을 주고 국민적 단결을 더욱 공고케 만드는 문화가 아니어서는 아니 될 것”이라고 천명하면서 전환기의 바람직한 문화이론에 대해 논한 「전형기(轉形期)의 문화이론」을『인문평론』1941년 2월호에 발표했다. 이 글에서 “문화의식과 생활전통의 ‘경사로운 결혼’은 새로운 국민문화가 맞아야 할 가장 중대한 동시에 가장 즐거운 계급일 것”이며, “국민 전체가, 실로 절대 다수의 농민과 극소수의 지식인이 더불어 즐겨 할 만한 건전하고 의미 깊은 문화를 건설한다는 것은 국민문화가 가져야 할 최대의 곤란이 동시에 가장 보람 있는 사업”이라고 평가하면서 일본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국민문화 건설이 시급한 과제임을 강조했다. 일본정신에 바탕한 국민문화 건설은 곧 문학의 역할로 이어진다.『인문평론』1941년 3월호에 발표한「문학정신의 전환」에서는 “금번 전쟁은 우리가 즉시적인 전환을 행해야 할 것을 경고하는 동시에 그 전환의 목표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해득할 수 있”다면서 “문화의 국민화”를 주창함으로써 친일문학론인 국민문학론으로의 전환을 촉구했다.
『문장』과 『인문평론』을 폐간하고 1941년 11월 창간한『국민문학』의 주간을 맡으면서 친일문학론을 노골적으로 표명했다. 이 잡지는 “국체관념의 명징, 국민의식의 양양, 국민사기의 진흥, 국책에의 협력, 지도적 문화이론의 수립, 내선문화의 종합, 국민문화의 건설” 등을 구호로 내건 친일문학 혹은 친일문화의 산실이었다. 『국민문학』 창간호에 쓴 「국민문학의 요건」에서 국민문학은 “단적으로 말하면 유럽의 전통에 뿌리박은 이른바 근대문학의 한 연장으로서가 아니라, 일본정신에 의하여 통일된 동서의 문화 종합을 터전으로 새롭게 비약하려는 일본 국민의 이상을 담을 대표적인 문학으로서 금후의 동양을 이끌고 나갈 사명을 띠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국민문학론이 일본정신을 담은 이론적 틀임을 강조했다. “국가의 존망이 걸려 있는 비상시에, 문학이 쾌락의 수단에서부터 번연히 그 본래의 윤리적 사명으로 되돌아올” 것을 요구하며, “동양 신질서의 건설이며 대동아공영원의 확립”이 “인류사에 신기원을 그을 대이상일 것이므로 반드시 국민의식 속에 체계화” 될 수 있도록 작가는 “국가적 사명감에 눈을” 떠야 한다고 강변했다.
『국민문학』 1942년 5・6월 합병호의 「편집후기」에는 『국민문학』의 일본어 잡지로의 전환에 대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는데, “조선어는 최근 조선의 문화인들에게는 문화의 유산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고민의 종자였다. 이 고민의 껍질을 깨뜨리지 못하는 한, 우리들의 문화적 창조력은 정신의 수인(囚人)이 될 뿐”이라고 말해 한글 사용에 대한 고뇌의 일단을 드러냈다. 「조선문학의 현단계」(『국민문학』1942년 8월호)는 “반도의 문화인들은 시대를 잘 깨닫고 대승적 문화의식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와 동시에 내지 동포가 또한 큰 도량을 갖고 신참 조선문학을 포용하며 너그럽게 그것을 길러 주는 이해와 열의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호소하는 글이다. 또 이 글에서 조선작가가 더 이상 한글로 글을 써서는 안 되며 향후 글쓰기는 국민문학이므로 당연히 “국어(일본어)로 쓰이는 것이 원칙”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집필자는 내선인 공동”으로 될 것이며, “독자는 반도 2천만이 아니라 1억의 전국민이며 10억의 대동아 제 민족으로 되는 것이 그 이상(理想)”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조선문학은 멸망하기는커녕, 새로운 조건의 출현으로 오히려 크게 그 규모가 확대될 것”이라면서 조선문학이 멸망한다는 “절망론”은 “보수적인 조선문학관”에서 나온 그릇된 생각이니, “창조적 능력을 살려서 신일본 문화 건설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당부했다.
1942년 5월 일본문학보국회 결성 소식을 접하고 그 소감을 피력한 「문학자와 세계관의 문제」를『국민문학』1942년 10월호에 발표했다. 이 글은 크게 네 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 “지금 우리가 참여하고 있고 총력전에서 요청되고 있는 것은 단지 국내 제 세력의 일원적 총합뿐 아니라, 과거의 정치 ・ 경제 ・ 문화 내지 세계관의 전면적 청산과 새로운 시대의 기둥이 될 역사적 원리의 창조”라는 것, 둘째 “문예는 정치의 도두가 아니라 높은 뜻에서 정치 그 자체”라는 것, 셋째 대동아전쟁은 “미 ・ 영적 세계관과의 일대 결전”이라는 것, 넷째 “일본 문화의 순수성과 세계성에 대하여 조금 자신을 가져도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에서는 문학자가 진정한 일본적 세계관을 수립하여 성스러운 임무를 스스로 짊어지고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1943년 4월에 “나 자신이 일본 국가의 모습을 발견하기에 이르기까지의 혼의 기록”인 『전환기의 조선문학』을 발간했다. “먼저 가버린 아들 강의 영전에 이 책을 바친다.”면서 “네가 죽었을 때 나는 막 태어난『국민문학』을 너의 추억과 함께 키워가기로 결심했다.”는 자서(自序)의 내용으로 봐서 조선문학의 ‘국민문학’화를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을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는 그동안 견지해오던 국민문학의 성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글 14편이 실려 있다. 이 가운데 신체제와 문학」에서는 “1940년 11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문에보국강연대’의 일원으로 서선(西鮮)지방의 각 도시에서 행한 연설”로 “오랫동안 구미제국의 제국주의에 지배되어 발전을 저해당했던”동양을 “해방하여 진정으로 자주적인 동양을 만들어야”하는데 “그것을 잘 이뤄낼 수 있는 것은 우리 일본”이라면서 “팔굉일우의 대이상”을 “대동아공영권의 확립이라는 역사적 위업 속에서 실현”하자고 강조했다. 「신체제하의 문예비평」에서는 “마치 정치에서 익찬(翼贊) 체제가 채택된 것처럼, 비평에도 국책에의 협력이 요구”된다면서 “문화적이 입장에서 국책을 받아들여 소화하고 선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신체제하의 작가론을 주창했다. 즉 “새로운 비평 임무는 국책 협력에 있다.” 고 단언했다.「새로운비평을 위하여」에서는 문예비평도 “일본적인 사고방식을 실천하여, 일본의 이상을 추구함으로써 일본정신을 현양해 가는 것이 금후의 새로운 길”이라고 주장하면서 “가치 발생의 장으로서의 천황심의 구체적인 현현”을 위해 비평가들이 매진할 것을 주문했다. 「국민문학의 입장」은 1942년 10월 2일 인문사가 주최한 ‘제1회 국민문학강좌’에서 한 강연을 몇 군데 자구를 수정해서 발표한 글이다. 여기서는 국민문학의 유래와 의의, 나아갈 방향 등에 대해 언급했다. 특히 “고도국방국가(高度國防國家) 체제하에서 문학이 가져야 할 책무는 국민통일과 사기고양”이며, “국가 이상의 본질적 가치를 온몸으로 현현하는 것이 일본 국민의 영원히 변치 않을 사명”이니 “황국 신민의 입장이 실제 문예 창작 및 문예 비평에서” 현현되기를 희망했다.「우감록」에서는 “동아에 신질서를 세우고, 세계 신질서의 연원이 되려 하고 있”는 일본이니, 문학은 “이 이상을 체득하여 지도국 일본에 어울리는 문학”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직업과 계급 차별 없이 국민 전반에 즐겁게 읽혀질 수 있는” 국민문학을 만들어내야 하며 작가는 “지식인으로서가 아니라, 국민에게 즐거운 마음의 씨앗을 나눠주는 공복으로서의 사명을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인으로서의 좌등청(左藤淸) 선생」에서는 경성제국대학 영문과 스승이었던 사토 키요시의 사례를 들어 “내선인의 혼과 혼이 한 마음으로 확실하게 결합되어야 할 필요성”과 “반도의 황민화운동이 대규모로 이루어질수록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적 결합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국책협력의 의의를 구체적으로 논한 글로는 「근로와 문학」(『국민문학』1943년 5월호)이 있다. 근로에 관한 정신을 문학이 섭취하는 것은 “문학이 국책에 협력하는 가장 구체적이며 또한 직접적인 길”이라고 제시하면서 문학은 국민에게 “위안과 교양을 주고, 하루라도 속히 훌륭한 황국신민으로 이끌어 올린다는 확고부동한 목표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조선문학에 부하된 중대한 사명”이며, “일한다는 것의 참된 의의와 목적 ―― 나라를 번영케 하고 황운(皇運)을 부익(扶翼)해 받든다는 것의 의의와 기쁨을 고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문학의 지향할 바를 문필보국으로 정리했다. 조선문인보국회의 결성에 즈음해 “평론 ・ 수필부 회원이 모두 한 사람도 남김없이 사상전의 첨병이라는 자각과 기백을 갖도록 해주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낸 「사상전의 첨병」(『국민문학』1943년 6월호)을 발표했다. 이 글에는 비평가의 책무가 구체적으로 적시되어 있는데,”국책의 진의를 국민 대중의 사이에 침투 ・ 이해시키며, 그들(국민 대중)의 총력을 국가 목적에 집결시키는 것이 비평가의 새로운 임무“라고 주장했다.
최재서의 친일문학론은『국민문학』1944년 4월호에 발표한 "받들어 모시는 문학은 천황에게 봉사하는 문학"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받들어 모시는 문학」에 오면 완성 단계에 이른다. “태어날 때부터 만세일계의 천황을 모시고 있는 우리들의 행복은 새삼스럽게 어느 누구에 비길 수도 없이 대견하고 고마운 일이다. 구석구석까지 오직 천황의 거룩하신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오로지 대명을 떠받들고 모시면서 그 거룩하신 품에 안겨서 알차게 즐겁게 이 세상을 지낼 수가 있는 것”이라고 하여 심정적인 동화단계로까지 나아갔다.
이 밖에도 친일 관련 많은 글을 남겼다.「내선문학의 교류」(『라디오강연강좌』 1939.7.25),「신체제하의 문학」(『경성일보』1940.11.9~11.15),「전형기의 평론계―― 반성과 모색」(『매일신보』1940.11.11~11.14),「전형기의 평론계」(『인문평론』 1941년 1월호),「신체제와 반도 사상계 ―― 문학 신체제화의 목표」(『녹기』 1941년 2월호),「문화의 귀농운동」(『반도의 빛』1941년 4월호),「아들아, 편안히 ―― 망아(亡兒) 강(剛)에게 준다」(『국민문학』1942년 1월호),「금일의 문화문제 ―― 문인기질」(『동양지광』1942년 1월호)「나의 페이지」(『국민문학』1942년 3월호), 「조국관념의자각」(『경성일보』 1942.5.26),「새로운 결의」(『국민문학』1942년 12월호),「서신에서부터 북선으로」(『국민문학』1943년 1월호),「틀이 잡힌 국민문학론」(『매일신보』1943.1.9),「황민의식을 불타게 하라」(『녹기』1943년 3월호),「선전의 효과」(『조선』1943년 4월호),「현대의 동의――지식동원과 계몽」(『춘추』1943년 5월호),「바다에가면」(『경성일보』 1943.5.14~5.15), 「결전문학의 확립 ―― 전의 첨병」(『국민문학』 1943년 6월호), 「신명을 다한다」(『경성일보』1943년 9월호), 「결전하의 급전환」(『문학보국』 1943년 9월호),「결전하의 내지」(『국민총력』 1943년 10월호), 「대동아의식의 자각」(『국민문학』 1943년 10월호), 「결전하 문단의 1년」(『국민문학』 1943년 12월호), 「학도 출진에 대하여」(『국민문학』 1943년 12월호), 「아세아의 해방」(『매일신보』 1944.1.11), 「계속 투입되는 보도진 ――국민총궐기를 위한 정신대 결성」(『국민총력』 1944년 2월호), 「월성군의 종군」(『녹기』 1944년 2월호), 「전투배치의 생활」(『경성일보』 1944.3.24), 「조선의 국어문학」(『홍아문화』 1944년 5월호), 「때 이른 꽃」(『국민문학』 1944년 5・6월호), 「징병과 문학」(『국민문학』 1944년 8월호), 「금년 신인군」(『국민문학』 1944년 12월호), 「고정(古丁)씨에게 ―― 만주국결전예문회의에서 돌아와서」(『국민문학』 1945년 1월호), 「철(鐵)하라 내선일체」(『매일신보』1945.1.18), 「민족의 결혼」(『국민문학』 1945년 2월호) 등이 있다. 좌담 또는 대담으로는 「신체제하의 반도문화를 말한다」(『녹기』1941년 1월호), 「조선문인협회 지방순강(巡講)문인의 보고좌담회」(『국민총력』 1941년 2월호),「일미(日米) 개전과 동양의 장래」(『국민문학』 1942년 1월호), 「문예동원을 말한다」(『국민문학』 1942년 1월호), 「국민문학의 공작정담회」(『매일신보』1941.11.1~11.6), 「조선문단의 재출발을 말한다」(『국민문학』 1941년 11월호), 「대동아문화권의 구상」(『국민문학』1942년 2월호), 「반도기독교의 개혁을 말한다」(『국민문학』 1942년 3월호), 「군인과 작가 징병의 감격을 말한다」(『국민문학』 1942년 7월호), 「북방권 문화를 말한다」(『국민문학』 1942년 10월호), 「국민문학의 일년을 말한다」(『국민문학』 1942년 11월호), 「명일의 조선영화」(『국민문학』 1942년 12월호), 「문화와 선전」(『국민문학』 1943년 1월호), 「평양의 문화를 말한다」(『국민문학』 1943년 1월호), 「군인정신에 대하여」(『국민문학』 1943년 2월호), 「시단의 근본문제」(『국민문학』 1943년 2월호), 「신반도문학에의 요망」(『국민문학』 1943년 3월호), 「농촌문화를 위하여 ―― 이동극단 ・ 이동영사대의 활동을 중심으로」 (『국민문학』 1943년 6월호), 「영화 ‘젊은 모습’을 말하다」(『국민문학』 1943년 7월호), 「국민문화의 방향」(『국민문학』 1943년 8월호) 등이 있다.
해방 후, 1948년 12월 27일과 28일 양일간 시공관에서 열린 민족정신앙양 전국문화인 총궐기대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9년 8월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구속 수감되었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기소유예되었다. 1949년부터 1960년까지 연세대학교 교수, 1960년부터 1961년까지 동국대학교 대학원장을 지냈다. 1961년 동국대에서 「셰익스피어예술론」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이후 사망할 때까지 한양대학교 교수로 지냈다. 1957년 『문학원론』(춘조사), 1961년『최재서평론집』(청운출판사), 1963년『영시개론』(한일문화사)과 『셰익스피어예술론』(을유문화사)을 발간하는 등 영문학의 연구와 교육에 종사하다가 1964년 11월 16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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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황국신민을 설파하며 일본인적 사고방식을 강요한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