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그의 나라를 구하라
누가복음 2:15-31
제복기(渧福奇)
체부동교회(體府)
人有諸求而最先要求者耶蘇也. 人之所要者何也? 一健康人則致富勞力而不健則不能致也. 不健而後欲用藥得健而亦不能也. 人以耶蘇不關於健康而甚不可也. 醫學及衛生皆必要於健康, 而醫師多會於都會, 不在於農村何故也? 民衆皆在於農村, 而醫師不在於農村何也? 不去者欲多得錢也. 然醫生犧牲其身而欲往農村者, 皆主之精神也. 世之欲救支那之災民而信者皆出金救之, 特美國監督出四十萬円以救之, 而官吏不許, 監督往問之. 答曰人民可多半死無妨云, 此何故也? 無主之精神故也. 會爲健康事業, 而出金者多也. 吾監理會出百萬円假量, 設醫校設醫院, 吾朝鮮二十九處病院入院患者, 近半無料患者也. 投七百円施之也. 此皆主之精神也. 且養成農村醫師及看護師, 不有奉仕精神則何能致此也. 佛敎欲自救爲計, 深入金剛山, 自保其身, 吾敎會爲此不幸者而施惠, 何其大也. 朝鮮本一大問題富源也. 人民之貧乏甚於印度者有矣. 人曰耶蘇有何關於經濟乎? 但福音事業而已云, 예수교 但望天堂而爲後世而已云, 此甚誤解, 主曰來世傳羊豊盛而尤豊盛云, 貧者不能思靈的, 敎人數比前減縮. 何故? 有多種然人民多念慮故不能思靈的. 有衣食之慮故敎會不能振興, 天堂之說人豈悅聞乎? 吾注意於經濟可也. 此經濟問題非耶蘇則不能振興也. 今勞働者甚苦楚, 勞働之後所得不過幾十円也. 교회於此問題, 無所用乎? 往工場勞働其狀況何如? 女子亦往焉, 幼兒亦往焉, 農夫亦苦勞不堪也. 問日本人之農民, 得穀多於朝鮮, 此何也? 교회亦有關係, 一般不能知農學而査經會時亦講農學可也. 農土亦不足故亦可用山坂可也.
사람이 구하는 것 중에서 제일 먼저 요구하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사람들이 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건강한 사람은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건강하지 못하면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건강을 잃은 뒤에 약을 복용하여 건강을 얻으려고 하지만 이루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건강에 대해 관여하지 않으신다고 하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의학이나 위생(衛生)은 건강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의사는 도시에 많이 모여 있고, 농촌에는 별로 없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민중(民衆)이 모두 농촌에 있는 데도 농촌에 의사가 없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농촌으로 가지 않는 것은 돈을 많이 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의사가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농촌에 가려고 하는 사람은 주님의 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중국의 이재민(罹災民)을 위하여 신자들이 돈을 내어 구하려고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미국 감독이 사십만 엔을 갹출하여 그들을 구하려고 하자 관리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감독이 가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중국에 인구가 많아서 반쯤 죽어도 무방하다’고 하였답니다.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의 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때마침 건강사업을 위하여 돈을 내 놓은 분이 많습니다. 우리 감리교회에서도 백만 엔 가량을 내 놓아서 의술학교를 설치하고 병원과 의원을 세웠습니다. 우리 조선에 있는 스물아홉 곳의 병원에 입원환자의 절반 가까이가 무료 환자였습니다. 그곳에 7백 엔을 보내주었습니다. 이 모두 주님의 정신입니다.
농촌에 의사와 간호사를 보내려고 양성을 하고 있는데, 이 또한, 봉사정신이 없으면 어찌 이 일이 이루어지겠습니까? 불교(佛敎)는 자기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하여, 금강산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는데 이는 자신을 보존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와 같이 불행한 이웃을 위하여 은혜를 베풀고 있으니, 얼마나 큰일을 하는 것입니까?
조선이 본래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부자가 되는 일입니다.
백성들이 가난해서 물자가 모자라는 것은 인도보다도 심한 형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가 경제에 무슨 상관이 있는가? 다만 복음 사업뿐이라’고 합니다. 또 ‘예수교는 다만 천당만 바라보고 내세를 위할 뿐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는 매우 큰 오해입니다.
가난한 자가 영적인 생각을 가질 수 없으면, 교인의 수가 감축하게 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여러 원인이 있겠으나 백성들의 염려가 많기 때문에 영적인 일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입고 먹는 의식(衣食)의 문제에 대한 염려 때문에 교회가 떨쳐 일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 하니, 천당에 대한 이야기를 어찌 즐겁게 듣겠습니까? 그러므로, 경제에 주의하여 뜻을 두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지만, 경제문제는 예수님이 아니고는 진흥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노동자는 고초가 매우 심합니다. 그들은 노동을 하고 난 뒤의 소득이 몇 십 엔에 불과합니다. 교회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서는 할 일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공장에서 노동을 하는 그 상황은 어떻습니까? 여자도 공장에 가고 소년도 공장에 가고 갑니다.
농부도 노동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 사람인 농민에게 물었더니 조선에서보다 곡식을 많이 수확한다고 합니다.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 일은 교회에도 관계가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농학(農學)에 대해 알 수가 없습니다. 사경회(査經會)를 할 때 농학을 강의하는 것이 옳습니다. 농토도 부족하므로 산비탈을 이용하는 것이 옳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