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일곱 가지 성품(言七個性)
마태복음 5:1-16
3월 22일 (저녁)
僉位若聞於此七性中擇之則何擇也? 八節之言最要緊也. 心不潔則七福不能得也. 金富者非罪人也, 心富者卽罪人也. 主言富者不能入天國, 心富者不能察自己, 心貧者能察自己. 心貧者甚謙, 欲學爲大人, 心貧者如幼者, 哀痛者何也? 卽心有罪也. 覺罪之時卽哀痛, 但以利(다니엘)被捕于他國, 自己以全國之罪被捕, 故爲宦者入宮中, 爲博士爲大臣, 然心有大痛者何? 卽爲自國之罪, 故自服于神殿, 故但以利所願, 卽成於自己, 築城建殿七十年後, 卽成事. 摩西亦以靑年爲人備須. 吾朝鮮人則有何性也? 未有爲罪人祈禱者, 而俗言四寸買土腹痛云. 聞他人有罪誹笑. 如此能受福乎? 假令自己無罪, 然國人有罪, 先祖亦有罪, 이샤야曰 吾生在口汚人中甚痛也. 吾當爲他人有淚可也. 其次溫柔者何也? 心不潔. 溫柔者何也? 主曰 我溫柔也. 至黙示之我獅子也. 女子養夫溫柔, 男子溫柔則臨死以女手搖之, 主若無溫柔而已, 則必死於婦人之手, 而今死於架上者, 獅者之心也. 主曰手犯罪剔去, 目犯罪則抉去云, 果溫柔而已則能斷行此乎? 心不潔則能義乎? 余心勇而若飢則無力, 樂義如渴者何也? 女子若得金則, 必問其夫曰 此金當從何處而得乎? 若無此義, 則不能入天國. 義有兩說, 非但爾義也, 又爲義受通云, 行義必受通, 爲義受通者福矣. 不然者非義人也. 非信者, 非善人, 非覺者也. 某敎會敎人犯罪, 欲黜敎則他敎人皆曰 人人淸潔可也. 猶大亡國何故也? 吾世人若言人罪, 則己罪必露, 主目犯淫女至主前, 主曰 無罪之人以石擊也, 人人盡出去, 吾聞某學生, 入淸料理, 盜來다마(구슬?), 甚無義也. 其次 慈悲也, 心有慈悲則不害人物. 某幼人捕鼠, 以油灌尾注火, 鼠不勝火氣跳梁, 慈悲非但人也, 亦施於物可也. 如此者心潔者而後, 可有此物. 某宗敎勿殺生, 捕虱入竹筩, 而入一村乞粮, 而人不給粮者, 則怒目辱之, 甚無慈悲也. 其次以身與人也. 某宗敎能見死人於昏暗之中, 能見死人云, 忘死人可也. 何故不願見死人? 吾母老而夢夫翌日心痛, 吾願父不現可也. 神顯無時, 歐羅巴敎會, 有甲乙兩人愛一女, 甲乃取女居之, 一日甲乘船旅行, 聲聞破船揭新聞, 乙乃同取此女, 故敎會嫁夫取婦不爲病. 甲不死而乘船至故鄕, 至其家則有妻有子女又友人, 再三思之我當何以處之, 乃逃至一山中, 乃思曰 我有子女而不願顯容者何也, 神之顯現有何益也? 神顯亦無益也. 今校外生聽講而卒業, 然不如在校生成就者何也? 吾人在家讀經而知經之意, 然主以肉身降世, 爲人傳人學主也. 如眞接在校成就者也. 舊約時未有完全敎人, 余家幼子, 睡而復起母以手撫之, 兒啼之時余以手撫之, 則兒復起坐, 妻更以手撫之則睡. 神顯如此, 神無聲而余心安, 神無形而心始安. 今耶蘇寫眞行于世者, 非在世寫之也, 信者中見聖經而寫之也. 見神者何也? 卽心潔者也. 心潔而後, 具此諸福也. 아보래함夫妻, 皆見神而後, 改名離名, 未見神之前, 種種犯罪, 至얍북江見神而改名. 摩西見神而後得律法, 古代先知皆見神而大變化. 世之光何也? 卽良心也. 良心卽社會之光也. 吾信者爲社會之光後可受福. 某敎人飮曰願恕, 某敎人吸煙曰願恕焉, 此其良心, 先覺其羞. 某竊盜見物而取之, 初則戰兢不能者何也? 卽良心之發也. 諸人逆其良心也犯罪. 何者爲社會之良心也? 卽見神者也. 卽有良心也. 魔於汚人至焉, 主前不能至焉. 無利己之心者, 能愛讐者, 能見神也. 思想精潔而後可見神也.
여러분은 이 일곱 가지 성품 중에 어느 하나를 고른다면 어느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8절의 말씀이 가장 요긴합니다.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면 일곱 가지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돈 부자는 죄인이 아니고, 마음의 부자가 바로 죄인입니다. 주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의 부자는 자기를 살피지 못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라야 자기를 살피고 겸손합니다. 대인이 되려면 마음이 가난한 어린 아이와 같아야 합니다.
애통하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마음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죄를 깨달을 때 바로 애통하게 됩니다. 다니엘이 다른 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는데 그것은 온 나라의 죄 때문에 잡혀간 것입니다. 그래서 내시로서 궁중에 들어가 있기도 했고, 사물을 널리 아는 박사로서 대신(大臣) 노릇도 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아픈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는 성을 쌓고 궁전을 세운 지 7십년 뒤에 성공하였습니다. 모세도 청년으로서 남을 위해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조선 사람은 어떤 성품을 가졌습니까? 죄인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이 죄를 지면 비웃습니다. 이렇게 하여 복을 받겠습니까? 이사야는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 있어야 됩니다.
그 다음으로, 온유는 무엇입니까?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고 온유한 것은 무엇입니까? 주께서 ‘나는 온유 하니라’고 하셨고, 요한계시록에는 ‘사자(獅子)같은 영물로’ 나타내시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사자의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손이 범죄 하거든 그 손을 찍어 내버리고, 눈이 범죄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온유뿐이었다면 이같이 단행할 수 있었겠습니까? 마음이 청결하지 아니하면 의롭다 하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용감하지만 만일 굶주리면 무력해 집니다.
‘의를 사모하기를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이 하라’고 하신 것은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여자가 만일 금을 얻었다고 하면 반드시 그 금이 어디서 났는지 그 남편에게 묻기를 ‘이 금은 어디서 났습니까?’하여야 합니다. 이런 의로움이 없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의로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다만 네가 의로울 뿐 아니라 또 의로운 일을 하여 하나님과 교통함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의로운 일을 행하면 반드시 교통함을 받으니 의로써 교통함을 받으면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신자도 선인(善人)도 각자(覺者)도 되지 못합니다.
어느 교회의 교인이 범죄를 하여 교회에서 축출하려고 하니 다른 교인이 ‘청결하면 그만 입니다’라며 반대했습니다. 유대나라가 망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남의 죄를 탓하려고만 하면 자기의 죄가 반드시 드러나게 됩니다. 주님께서 간음한 여자를 지목하며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였더니, 사람들이 모두 떠나 버렸습니다. 내가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학생이 중국요리 집에 들어가서 구슬을 훔쳐 왔다고 했습니다. 이는 매우 의롭지 못한 일입니다.
그 다음은 자비입니다. 마음속에 자비심이 있으면 사람이나 사물을 해치지 않습니다. 어떤 어린이가 쥐를 잡아 그 꼬리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더니 쥐가 뜨거워서 대들보 위로 뛰어 올라갔다고 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마음은 사람에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시 사물에도 베풀어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해진 후에라야 이러한 자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어느 종교에서는 살생을 하지 말라고 하여 이를 잡아 대통에 넣었다고 합니다. 그런 반면 마을에 들어가 양식을 구걸하다가 양식을 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화를 내며 욕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은 자신의 몸을 남에게 주어야 합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어둠 속에서 죽은 사람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죽은 사람은 잊는 것이 옳습니다. 늙으신 우리 어머니는 꿈에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를 보면 그 다음날 마음이 아프다고 합니다. 나도 아버지께서 나타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도 나타나실 때가 없습니다.
유럽의 한 교회에 갑(甲)과 을(乙), 두 사람이 한 여자를 사랑하다가 갑이 마침내 그 여자와 결혼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갑이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났는데 그 배가 파선되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그래서 을이 그 여자를 자기 부인으로 맞이하여 동거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들이 부부가 된 것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이 죽지 않고 고향에 돌아와 자기 집에 들어가 보니, 집에는 자기 아내와 자식들이 그 친구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 마침내 산속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내게 자녀가 있어도 내가 나타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귀신으로 여긴 사람이 나타났다고 무슨 도움이 될 것입니까? 아무 도움도 줄 수가 없다’고 하였답니다.
정식으로 등록된 학생이 아닌 교외생(校外生)이 청강(聽講)을 하고 졸업하였는데 학생들과 성취도에 있어서 못 따라가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집에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의 뜻은 알지만 주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과 사람을 통해 주님을 배우도록 한 것 같이 진실한 접촉은 학교 내에서 성취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온전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 집 어린 아이는 잠을 자다가 일어나려고 하면 그 어미가 손으로 어루만져주면 다시 잠이 듭니다. 그 아이가 울 때 내가 만져주면 아이는 다시 일어나 앉습니다. 그러나 내 아내가 다시 쓰다듬어주면 그냥 잠이 듭니다.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아도 내 마음은 평안해 집니다. 하나님의 형체가 없어도 마음이 비로소 안정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사진으로 알려진 것은 세상에 있을 때의 사진이 아닙니다. 신자 중에 <성경>을 보고 그 모습을 상상으로 그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 자는 누구입니까? 마음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깨끗하여야 이와 같은 여러 복을 갖추어 받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부부는 모두 하나님을 뵙고 나서 본래의 이름을 버리고 개명했습니다. 하나님을 보기 전에는 종종 죄를 지었는데 얍복강에 이르러 하나님을 뵙고 나서 개명하였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을 보고 난 뒤에 율법을 얻었습니다. 옛 선지들은 모두 하나님을 보고 난 뒤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세상의 빛은 무엇입니까? 바로 양심입니다. 양심은 바로 사회의 빛입니다. 우리 신자는 사회의 빛이 되고 난 뒤에 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교인은 술을 마시면서 ‘용서를 구합니다’라고 하고, 또 어떤 교인은 담배를 피우면서 ‘용서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이는 그 양심이 먼저 그의 부끄러움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어느 절도범은 물건을 보면 훔쳐 가지고 가서 처음에는, 두렵고 조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곧 양심에서 우러난 마음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들은 그 양심을 거스르며 죄를 범합니다. 무엇이 사회의 양심이 됩니까? 바로 하나님을 본 사람이 바로 양심이 있는 자입니다. 마귀는 사람을 더럽히려고 가까이 다가오지만 주님 앞에는 가까이 오지 못합니다. 이기심이 없는 사람이 원수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을 뵈올 수 있습니다. 사상이 알차고 청결한 후에라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