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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29장 1절-30장 24절
야곱 가정을 세우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은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가서 그의 어머니의 오라비인 라반을 만나는 것과 라반의 딸인 레아와 라헬 그리고 그들의 종으로 있던 자들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 나아가 네 명의 아내를 통해 자녀를 낳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내용 속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상관없는 내용들을 보게 됩니다. 우선 야곱이 사랑한 사람은 라반의 두 딸 중 동생인 라헬입니다. 그러나 라헬을 얻기 위해 7년 동안 일했지만 라반은 동생인 라헬을 아내를 준 것이 아니라 언니인 레아를 줬습니다. 이유인즉슨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이 자기네 지역에서는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풍습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만약 그런 풍습이 있었다면 7년 동안 일하면서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혹 그런 풍습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분명 라반은 야곱을 속인 것이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라반의 악함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라반은 하나님의 약속과 상관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나타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문에 구별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구별된 모습이 있는가 하면 전혀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라헬이 아닌 레아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지만 레아가 아닌 라헬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라헬을 얻기 위해 다시금 7년 동안 일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한 남편이 한 아내를 취하는 데 있습니다. 모세는 창세기 2장에서부터 이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기록된 율법이 있지는 않았지만 양심의 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알리신바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야곱에게 그런 지식의 명확함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몰랐다고 해서 핑계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때문에 한 사람이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한 명이 아니라 또 다른 아내를 얻기 위하여 다시금 7년을 일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야곱은 두 아내를 얻게 되는데, 여기서도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야곱이 레아가 아닌 라헬을 사랑하여 두 자매 사이에 시기와 질투로 싸우게 되고 경쟁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쟁 속에서 그들의 여종을 야곱의 아내로 삼게 만듭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자녀들의 이름을 보시면 그런 경쟁심이 잘 나타납니다. 간단히 말하면 야곱이 자기 집을 떠나오면서 벧엘의 하나님을 만났지만,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그와 함께 하시면서 그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겠다는 말씀을 들었지만, 이후 그의 행보를 보면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행보들로 가득하더란 것입니다. 즉 여전히 점과 흠과 죄악만을 내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거나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감정과 인간의 방식대로 행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점과 흠과 죄악 가운데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바로 맨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약속하셨던 말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말씀, 동일한 말씀을 다른 표현으로 이삭에게, 그리고 야곱에게 말씀하신 것의 성취를 보여주는 첫 걸음을 내딛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이 라헬을 얻기 위해 일하였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레아를 주셨다고 할 때 레아만으로 열 두 아들을 주실 수는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에 대하여 어떤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은 능히 이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기를 즐겨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을 섞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죄가 나타납니다. 점과 흠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런 점과 흠,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점과 흠, 죄악이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내용을 연속적으로 살펴보고 있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건 자체는 달라지고 있습니다. 지난주까지가 에서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 일을 보았다면 오늘 본문 이후 몇 장은 라반과의 관계, 그리고 아내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 속에서 알리시는 하나님의 크신 뜻은 어떤 면에서 반복성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은 끊임없이 점과 흠과 죄악을 내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점과 흠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시면서 약속하신 바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보겠는데, 우선 1절 이하 3절을 보시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었다가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 여기서 동방 사람의 땅이란 가나안 땅을 기준으로 해서 동방에 위치한 곳을 의미합니다. 큰 지역으로 보자면 메소보다미아라는 곳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는 평상시 우물을 큰 돌로 덮어두다가 양 떼에게 물을 먹일 때만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놓는 일이 있었는데, 야곱이 도착했을 때는 양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서 우물을 중심으로 양 세 떼가 누워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에게 라반을 아는지에 대해 묻게 됩니다. 4절 이하 8절을 보시면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하란에서 왔노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이르되 아노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이르되 평안하니라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야곱이 이르되 해가 아직 높은즉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삭의 짝을 구하기 위하여 그의 종을 그의 고향으로 보내었을 때 하나님께서 순조롭게 만나게 하신 것처럼 야곱 역시 라반을 아는 사람들을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야곱이 우물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디서 왔는지 묻습니다. 이때 야곱이 ‘내 형제여’라는 표현을 쓰는데, 본래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당시 용인된 관습에 따라 인사할 때 이렇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즉 낮선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부를 때 ‘내 형제여’라고 부르는 것이 전혀 낮선 인사법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들에게 라반을 아는지 묻자 라반을 안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평안하다는 것, 그리고 곧 있으며 라반의 딸인 라헬이 양을 몰고 올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렇게 그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라헬이 양을 몰고 오게 되면서 라헬을 만나게 되고, 라반을 만나 거기에서 거주하게 됩니다. 9절 이하 14절을 보시면 “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동안에 라헬이 그의 아버지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더라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버지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 됨을 말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버지에게 알리매 라반이 그의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며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말하매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여기서도 우리는 당시 용인된 관습을 볼 수 있는데, 분명 야곱은 라헬을 처음 봅니다. 그러나 라헬에게 입 맞춥니다. 이것은 당시 문화가 이런 인사법으로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바울도 보면 그의 서신서에서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다만 전혀 모르는데도 아무나에게 입 맞출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라헬이 자기의 친척인 것을 확인하고서 입 맞추는 순서로 되어 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더불어 야곱이 라헬에게 입 맞추고 난 뒤 소리 내어 울었다는 표현은 드디어 만났다는 기쁨과 안도의 눈물인 동시에 그 동안 있었던 여러 가지 힘든 일들에 대한 서글픔의 눈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는 집을 떠나오게 될 때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았습니다. 속여서 복을 빼앗은 것처럼 있지만 결국 아버지인 이삭은 야곱을 축복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벧엘이라고 칭한 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복을 약속하셨고,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실 것임을, 그리고 그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임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 앞에서 하나님께 예배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안식과 평안함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간혹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우리의 마음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베푸신다면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죽음을 앞두고도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붙잡으실 때는 그런 죽음도 두렵지 않게 하시는 일들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방식으로만 역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에 대해서도 알지만,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들도 많습니다. 어떤 면에서 믿음의 연약함이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야곱의 상태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뵈옵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로 있지만,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로 있지만, 그런 경험이 힘든 여정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의 자리로 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한번의 경험으로 인생 자체가 바뀌는 것을 바라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한번에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평생을 두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어 가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지만 그 한 번의 경험이 견고한 믿음의 상태로 올려놓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힘들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라반의 딸 라헬을 만나게 되면서 안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계속해서 외삼촌 라반을 만나서 자신에게 있었던 모든 일을 말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모든 일 속에 자신이 형 에서를 속인 것까지 다 말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보편적 본성으로 보자면 자신의 점과 흠에 대해서는 숨겼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형 에서가 가나안 여인을 취하여 부모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는데, 제게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여기까지 보낸 것으로 말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쨌든 야곱이 모든 일을 말하였을 때 라반은 그가 자신의 혈육임을 확인하고서 함께 한 달을 거주하게 됩니다. 한 달 후 라반은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의 일을 봐 주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하면서 품삯을 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만큼 야곱은 라반을 위하여 성실하게 일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실함에도 불구하고 외삼촌으로부터 사기라고 할 만한 일을 당하는데, 7년 동안 일한 대가로 자기가 좋아하는 라헬을 아내로 맞을 것을 약속했지만 결국 좋아하지도 않는 레아를 아내로 맞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금 7년을 라반을 위해 섬기게 되는, 그리고 그 결과를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 15절 이하 30절을 통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라반이 그 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라반이 또 그의 여종 실바를 그의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라반이 또 그의 여종 빌하를 그의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
17절에 보면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땁다는 말이 나오는데, 둘을 대조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시력이 약했다는 것은 시력이 나쁘다는 의미보다는 눈이 아름답지 못했다는 그런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약하다는 말이 부드럽다, 섬세하다는 뜻도 있기 때문에 레아의 눈이 매우 섬세하거나 부드러운 눈을 가졌다는 뜻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런 눈은 심성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여 레아의 심성이 매우 부드럽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때는 대조보다는 각각의 장점을 나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분명한 것은 지금 야곱이 사랑한 사람은 레아가 아니라 라헬이라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 해석을 따른다면 마음의 부드러움보다는 외모가 빼어난 라헬을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반의 속임으로 인해 라헬이 아닌 레아를 아내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7년을 봉사하여 라헬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라반이 어떻게 야곱을 속일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인데, 당시 풍습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부의 정결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당시 신부는 얼굴을 가린 채 혼방으로 인도가 되었는데, 라반의 경우 그것을 이용하여 라헬이 아닌 레아를 들였기 때문에 속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단 야곱이 라헬을 좋아한 것, 그러나 섭리 속에서 레아를 아내로 얻었다가 다시금 라헬을 얻게 된 내용 속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아한 모습에 이끌리어 아내를 택하게 되는 자라도 이성이 항상 우의에 놓여 있어서 들뜬 정욕을 지배하고 있기만 한다면 꼭 죄를 짓는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야곱이 언니 되는 레아를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동생 라헬을 아내로 원했을 때는 아마 방종의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야곱은 또한 제 눈의 욕망에 굴복하여 레아의 미덕을 과소평가하였다. 이것은 비난 받을 만한 자제력의 부족이다. 훌륭한 성품을 제일 중요시해야 하는데 미모만을 이유로 아내를 고르는 자는 다 이와 마찬가지이다.”
여러분, 서두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법은 한 남자가 한 아내를 취하는 것입니다. 근친상간에 대해서는 창세기의 내용 속에서 적용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다소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보면 이복 누이를 아내를 취하였고, 이삭의 경우도 가까운 친척과 결혼한 것으로 있습니다. 지금 야곱도 그러합니다. 맨 처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그리고 그 이후 태어나는 자녀들이 있다고 할 때 그들 안에서의 결혼이 없다면 사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다 멸망하고 노아의 식구들 외에는 살아남은 자가 없었던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번성하게 된 것은 그들 안에서의 결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는 것처럼 근친상간의 경우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한시적으로 열어놓으신 것으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복 누이와 결혼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고, 사촌 혹은 육촌과 결혼하는 일이 모세 이전에는 허락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남자가 한 아내를 취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에 대한 내용을 기록할 때부터 모세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바로 이런 측면에서 야곱이 한 아내 외에 다시금 다른 아내를 취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 아니라 자기의 본성을 따른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야곱이 얻고자 한 아내는 언니가 아닌 동생 라헬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7년 동안 일했습니다. 한 달을 머무는 동안 성실했다면 자기가 좋아하는 라헬을 위해서는 더더욱 성실하게 일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힘든 일이 분명하지만 7년을 며칠처럼 여겼다고 말할 정도로 감사한 마음으로 섬겼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된 것이 아니라, 외삼촌 라반의 속임으로 말미암아 언니인 레아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입니까?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비록 내가 라헬을 얻기 위해서 7년 동안 노력했지만 하나님의 뜻은 라헬이 아니라 레아이기 때문에 거기에 순복하는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한 남자가 한 아내를 취해야 한다고 할 때 자기가 사랑한 여인은 라헬이지만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뤄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거기에 항복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어떻게 합니까? 항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합니다. 이것이 문제인 겁니다.
혹은 레아와의 결혼이 정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방의 동의 없이 결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레아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아내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좋아하는 쪽은 라헬이었기 때문에 라헬과도 결혼하게 되는데, 결국 두 아내를 얻음으로 그 가정은 시기와 질투, 경쟁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으로 있습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방향은 내 생각대로의 방향이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내 생각대로의 방향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 생각대로의 방향으로 인도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거기에 항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대로 우리를 이끄실 때 비록 그 길을 좋아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걸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주장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어떠합니까? 야곱과 같은 자세를 취하는 것이 수두룩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쪽은 라헬이기 때문에 레아와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라헬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모습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 없다면 내가 좋아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지금 당장 주지 않지만 그렇게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얻게 하는 방식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원하는 쪽이 막혔기 때문에 이 길은 무조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지만 그 길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다면 우리는 그 길이 우리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야곱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나아간 결과 한쪽은 남편의 사랑을 바라는 자로, 또 한 쪽은 남편의 사랑을 받는 자로 있어서 그들 사이에 시기와 질투로 싸우면서 경쟁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녀를 낳게 되는 과정 속에서 잘 나타나는데, 우선 31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고 말씀합니다. 야곱의 사랑을 받는 쪽은 라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레아에게 먼저 자녀를 주십니다. 야곱 입장에서는 라헬을 통해 자녀를 낳았으면 하는 바람이 클 것입니다. 나중에 보면 라헬을 통해 낳아 아들 요셉을 편애하게 되는데, 그만큼 라헬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 말은 레아에 대해서는 전혀 사랑을 주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라헬보다 레아를 더 생각하셨습니다. 실제로 보십시오. 라헬은 언제 임신합니까? 맨 나중에 임신합니다. 열두 명의 아들 가운데 11번째와 12번째 아들을 낳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11번째 아들에 대해서만 나오고, 이후 창세기 35장에서 베냐민을 낳고난 뒤 죽게 됩니다. 라헬을 사랑하였지만 자녀를 낳기까지는 그만큼 오랜 시간 기다려야 했고, 레아에 비해서는 자녀가 많지 않았습니다. 자녀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고 할 때(시127:3) 하나님께서는 라헬보다 레아에게 더 많은 복을 주신 것처럼 나타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레아를 통해 자녀를 주시는데, 창세기 29장 32절에서 35절이 그 내용입니다.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여기 보면 네 명이 아들을 낳게 되는데, 그들의 이름을 통해 우리는 야곱 가정의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 이름이 르우벤입니다. ‘벤’이라는 단어는 아들이라는 뜻으로 그 이름의 의미가 ‘보라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남편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했지만, 그래서 괴로움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나를 생각하시어 아들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제는 남편이 나를 사랑하지 않겠는가 라는 의미로 르우벤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둘째 이름에서 우리는 여전히 남편인 야곱이 레아를 사랑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둘째 이름이 시므온이기 때문입니다. 그 뜻은 ‘들으심’입니다. 첫째를 낳고 난 뒤 이제는 사랑을 받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구하게 됩니다. 내가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를 간구한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이름을 지었던 겁니다.
셋째 이름은 레위입니다. 그 뜻은 ‘연합함’입니다.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할 것에 대한 기대와 소망으로 이렇게 지은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두 명의 아들을 낳았지만 여전히 연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얼마나 레아에게 사랑을 주지 않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넷째 이름은 유다인데, 그 뜻은 ‘찬송함’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인데, 그만큼 아픔이 컸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레아를 생각하시어 첫째부터 넷째까지 아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레아에게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바로 그런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네 아들을 낳고는 그의 출산이 멈추게 됩니다.
이런 레아를 보면서 라헬은 시기하게 됩니다. 창세기 30장 1절을 보시면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어떤 면에서는 한 사람이 아닌 두 명의 아내를 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이런 내용을 통해 나타난다 할 수 있습니다. 재미난 것은 자식을 낳는 것이 사람에게 달린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린 일임에도 불구하고 라헬이 언니에 대한 시기심으로 인해 떼를 쓴다는 데 있습니다. 자식을 낳게 하지 않으면 죽겠다는 말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남편을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하나님을 향해 분노를 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 야곱은 노를 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2절을 보시면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야곱은 분명 라헬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떼쓰듯 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야곱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한번이 아니라 언니 레아가 자녀를 낳을 때마다, 그리고 자녀의 수가 더해질수록 더 야곱을 쪼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성을 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야곱은 자식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두 아내를 두는 일에 있어서는 무지함이 나타나고 있지만, 또 이런 면에 있어서는 정확한 하나님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반면 라헬은 그런 지식이 전혀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남편에게 책임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답답한 심정에서 그렇게 말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요구에 대하여 야곱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어느 정도 신앙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이런 야곱의 말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옳습니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 임신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 신앙인의 정당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라헬은 기도하기보다는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인간의 방법을 동원하게 됩니다. 바로 자기의 여종으로 있던 자를 아내로 주어 자신을 대신하여 아들을 낳게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자기 만족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종인 빌하를 아내로 주어 아들을 낳게 하는데, 그 내용이 3절 이하 8절입니다.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그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빌하가 임신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라헬이 이르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임신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빌하를 통해 낳은 첫 번째 아들의 이름은 단입니다. ‘억울함을 푸심’이라는 뜻입니다. 즉 지금 라헬은 언니가 자녀를 낳은 것에 대하여 억울해 하고 있는 겁니다. 야곱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알겠는데, 그 사랑의 결실이 전혀 없습니다. 반면 레아에게는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억울해 합니다. 답답함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빌하를 통해 자녀를 낳기까지 하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의 억울함을 푸셨다고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물론 하나님이 그런 의미에서 주셨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또한 라헬이 하나님께 호소했다고 하면서 자신의 호소를 들어주셨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기도라는 종교적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전혀 하나님 지식과는 상관없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입니다.
빌하를 통해 두 번째 아들을 주시는데, 그 이름이 납달리입니다. 그 뜻은 ‘경쟁함’입니다.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여기서도 종교적 외형은 갖추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라헬은 언니와 경쟁하여 이겼다는 의미로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뜻으로 주셨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은데, 라헬은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신앙의 깊이가 더해져 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있는 내용 속에서는 사실 신앙의 깊이를 논할 수 있는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있지만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내용으로는 전혀 있지 않습니다. 온통 자신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해석할 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레아와 결혼하고 난 뒤 라헬과 결혼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입니다. 그런데 라헬의 경우는 자신의 여종으로 있던 자로 아내로 주게 됩니다. 합법적 결혼이라 할 수 없는 일을 자행하고 있는 겁니다. 당시 문화 속에서는 합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닌 겁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인간의 뜻, 인간의 방법이 가득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녀들을 통해 낳은 자녀들이 이스라엘의 시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점과 흠과 죄악밖에 내놓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의 약속하신 바를 이루어가시며 선을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이후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라헬의 이런 행동에 대해 이제는 레아가 자극을 받아 동일하게 행합니다. 자신의 출산이 멈춘 것을 깨닫고 자신의 여종으로 있던 실바를 야곱의 아내로 주어 자녀를 낳게 하는데, 9절 이하 13절이 그 내용입니다. “레아가 자기의 출산이 멈춤을 보고 그의 시녀 실바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더니 레아의 시녀 실바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으매 레아가 이르되 복되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 레아의 시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레아가 이르되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라헬보다 레아를 먼저 생각해 주신 것을 생각한다면 굳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자신에게는 네 아들이나 있습니다. 동생이 여종을 통해 둘을 낳아 이제는 이겼다고 말할지라도 숫자상으로만 보자면 자신의 아들이 더 많습니다. 전혀 동요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레아는 하나님의 은총을 잊은 것처럼 행동하는데, 동생이 취한 방법을 그대로 취하게 됩니다. 시기심, 질투, 그리고 비교하여 그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종인 실바를 야곱의 아내로 주게 됩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두 아들을 낳게 되는데, 첫째 이름이 갓입니다. 그 뜻은 ‘복됨’입니다. 라헬이 앞서 경쟁해서 이겼다고 말했지만, 레아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에게 복을 주고 계시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지은 것입니다. 이름 자체로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처럼 하지만, 거기에는 라헬에 대한 경쟁심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아셀인데, 그 뜻은 ‘기쁨’입니다. 라헬에 비해 하나님께서 더 많은 아들을 주신 것에 대한 기쁨을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도 종교적인 외형을 가지고 있지만 순순한 그런 의미에서 이름을 지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14절 이하를 보면 합환채와 관련된 내용인데, 합환채는 식물입니다. 아가서 7장 13절에 의하면 향기를 뿜어내는 식물로 표현하고 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 식물을 먹으면 불임 여성들의 수태력을 증진시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합환채를 레아의 첫째 아들인 르우벤이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머니인 레아에게 주는데, 이것을 라헬이 본 것입니다. 라헬은 레아에게 있는 합환채를 요구하게 되는데, 자신의 불임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만약 그것을 준다면 대신 남편 야곱이 언니와 동침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하면서 그렇게 요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 속에서 레아가 다시금 임신하여 두 아들 및 한 명의 딸을 낳게 되는데, 14절 이하 21절이 그 내용입니다. “밀 거둘 때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이르되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 하니라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이르되 내가 내 시녀를 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 레아가 다시 임신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이르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하고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의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
여러분, 합한채가 불임 여성에게 좋은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불임 여성에게 좋을 수 있다 하더라도 창세기 30장 2절의 내용은 변치 않는 사실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달리 말하면 합한채가 임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지 만 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보면 불임으로 인해 의사들과 상담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불임으로 있다가 임신을 하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없는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임신하게 되는 일이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착각은 어디 있느냐 하면 유효성이 하나님께만 있는데, 소위 먼 원인 가까운 원인이라고 할 때 외형이 가까운 원인으로 말미암아 결과 되는 일이 있다 보니 가까운 원인에게도 유효성이 있는 줄 아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가까운 원인은 유효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약 먹는 걸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에게는 약을 먹을 때 낫게 되는 일이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낫지 않는다고 할 때 약 자체에 유효성이 있는 것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평균적으로 더 많이 낫는다는 데 사람은 유효성을 두지만, 100%가 아닌 이상 거기에 유효성이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먼 원인에게만 유효성이 있습니다. 즉 유효성의 주인은 하나님께만 있지, 사람에게, 피조물에게 있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레아를 통해 다시금 아들을 낳게 되는 내용 속에서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자신을 통해 네 명의 아들을 낳았고, 또 자기 여종을 통해서도 두 명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만족하고 있지 않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런 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데, 두 명의 아들을 더 주십니다.
레아를 통해 낳은 자식의 순서로 하자면 다섯 째 이름이 잇사갈인데, 그 뜻은 ‘값’입니다. 18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내 시녀를 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지은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보상하셨다는 그런 뜻인데, 엄밀하게 말하면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어떤 행동에 따라 보상하듯 행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사람의 어떤 행동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자유로우신 분이십니다. 어디에 매여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여섯째 이름은 스불론인데, ‘거함’이라는 뜻입니다. 20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통해 여섯 아들이나 낳았기 때문에 이제는 남편이 나와 함께 살 것이라는 뜻에서 이렇게 지은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여전히 야곱의 마음은 라헬에게 가 있고, 라헬과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나에 관해서는 이후 디나와 관련된 사건 때문에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데, 야곱에게 다른 딸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의 족보를 보면 모든 사람을 다 기록하고 있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여자의 경우는 기록에서 제외되는 경우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다른 딸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디나의 경우는 이후 안타까운 일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미리 기록해 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레아와 라헬의 여종인 빌하와 레아의 여종인 실바로부터 10명의 아들을 낳고 난 뒤 하나님께서는 라헬을 생각하시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한 명의 아들을 주시는 것으로 기록합니다. 22절에서 24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앞서 자신의 여종인 빌하를 통해 두 명의 아들을 낳았을 때 억울함을 푸셨다, 경쟁하여 이기게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그의 마음 가운데는 여전히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으로 인하여 부끄러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라헬을 생각하시어 아들을 주셨는데, 이름을 요셉이라 하였습니다. 그 뜻은 ‘더함’이라는 뜻입니다. 부끄러움을 씻으셨으나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또 다른 아들을 더하시기를 원한다는 마음으로 요셉이라 하였던 겁니다.
이런 기도에 응답하셔서 나중에 베냐민을 낳게 되지만, 숫자상으로 비교해 보면 라헬은 자식의 복은 그렇게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레아가 남편 야곱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레아에게 더 많은 아들을 주십니다. 반면 라헬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합니다. 그러나 자식이 없다는 것으로 인하여 레아를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그리고는 경쟁하게 됩니다. 그 결과 이미 두 아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한 것이지만, 더더욱 파괴하게 되는 지경에까지 가게 됩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온통 인간적인 내용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점과 흠, 죄악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물론 종교적인 모습을 갖추기도 합니다. 기도하기도 하고 기도에 응답 받은 것처럼 있어서 감사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신앙의 열매로서 나타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종교적 명분만 있을 뿐, 참된 경건의 내용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런 인간의 점과 흠과 죄악 속에서도 하나님은 야곱에게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여줍니까? 선택의 은혜가 사람의 공로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가 사람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비록 점과 흠이 있어서 점과 흠만 보자면 선택하실 수 없고 구원하실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기뻐하시는 것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루시되 인간처럼 죄를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상관없이, 그러나 인간의 죄악 속에서 자신의 선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내 놓는 것을 보십시오. 무슨 선한 것이 있습니까? 혹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온통 공로주의적 사고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정당한 신앙의 내용을 따라 공로주의를 거절한다면 우리로부터 나오는 모든 선한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로부터 나오는 것은 남아 있는 부패성으로 말미암아 온통 죄와 관련된 것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통해서도 자신의 약속을 성취해 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로마서 11장의 표현처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라고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불어 “...그에게 영광이 세세이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모든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내가 받을 영광은 하나도 없고, 오직 하나님 홀로 영광 받아 마땅하다는 마음으로 그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