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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8장 37-47절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됨으로 자유함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다, 다시 말해 동의한다는 차원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는 자, 단지 동의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 말씀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여기고 따르면서 순종하는 자,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요, 그가 진리를 알게 됨으로 자유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자유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관련된 것으로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가 죄의 종으로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모든 인류가 죄의 종이라고 할 때 죄에 종에서 자유함을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거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통해 진리를 알게 될 때 죄의 종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조차 자신이 죄의 종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말할 뿐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실상을 드러내시되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임을 말씀하십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을 때 누구도 돌을 들어 치지 못한 것을 염두 해 둔다면 누구도 예외 없이 죄를 짓는다는 것이고, 죄를 짓기 때문에 그들은 죄의 종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것을 인정하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죄가 무엇인지 알고 있고, 또한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얼마든지 그들 스스로 율법에 순종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죄 문제도 그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 것과 같습니다. 이런 저들에게 “너는 죄인이다. 죄의 종으로 있다.”고 말한다면 누가 그 말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이 죄의 종임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진리를 말씀하시는, 그리고 진리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의 종으로 있던 자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기 위해서는 자신의 본래 상태가 죄의 종으로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예수님께서는 37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3절에서 저들이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할 때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강조했는데, 그 말을 받아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로마서 9장 6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9:6-8) 즉 이스라엘에게서 났다고 해서 모두가 이스라엘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씨라고 해서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라 불릴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마엘은 분명 아브라함의 씨이지만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닙니다.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모두 아브라함의 씨라고 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은 육신을 따라 난 자요, 다른 한 사람은 약속을 따라 난 자입니다. 쉽게 말해 육적 이스라엘이 있다면 영적 이스라엘도 있다는 것입니다.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들 모두가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들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은 분명 혈통으로 볼 때 아브라함의 자손이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안다고 말씀하실 때 그런 의미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그들이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들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을 무엇으로 나타내시는가?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한다는 말씀으로 나타내십니다. 31절과 32절에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지만 지금 너희 안에는 내 말이 거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말에 대하여 믿는다고 말하지만 내 말이 너희 속에 거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내 말에 거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계속해서 진리의 말을 너희에게 하고 있지만 믿는다고 하는 너희는 계속해서 내가 말하면 말할수록 나를 죽이려고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내 말에 거하지 않기 때문에 너희 속에 진리가 없으며, 진리가 없기 때문에 너희는 여전히 죄의 종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어떻게 진리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특히 예수님께서는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고 한다고까지 말씀하시는데, 지금은 믿는다고 하지만 결국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지 않을 때 그런 믿음조차 저버리고 예수님께 대하여 적대적으로 돌아설 것까지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요한복음 8장 마지막 절에 가시면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요8:59) 그런데 이런 일들은 가시적 교회 안에 전혀 없는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6장 4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6:4-6) 놀랍지 않습니까?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도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도고 타락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택자의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말씀은 아닙니다. 한번 택하신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 때문이라도 반드시 구원을 완성하고야 마십니다. 때문에 지금 히브리서의 말씀은 엄밀하게 택자가 아닙니다. 택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도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이 그러한 자였습니다. 왕이 되기 전에는 매우 겸손한 자로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선지자들처럼 예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되고 난 뒤 교만해졌습니다. 그의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조차 가볍게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데 순종하지 않는 자로 나타났습니다. 즉 참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타락하게 되고, 타락함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게 되는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럼 무엇으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야 합니까? 지난주 주일 오후 그리고 수요일에 이와 관련해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마태복음 7장 20절은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말씀합니다. 16절부터 읽어드리면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마7:16-19) 당연히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참된 믿음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라고 할 때 그 가지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가지로부터 나오는 열매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열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선하다면 선한 열매요, 그가 거룩하다면 거룩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믿음의 열매는 성령의 열매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물론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는 여전히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패한 본성에 어울리는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경우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 열심만 앞세우면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나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참된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참된 믿음을 심겨주셨다면 그의 말씀도 우리 안에 거하며 또한 그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부패한 본성에 어울리는 열매를 맺는 그 자리에 머물도록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회개하도록 만듭니다. 회개하여 다시금 돌이키도록 만듭니다. 우리의 마땅한 자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고,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모습이 있는지를 점검하셔야 합니다. 말씀이 들려지고 있고 그 말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시는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둘 중 하나입니다. 택하신 주의 백성이 아니든가, 아니면 받은바 은혜를 헛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고 생각하면서 권면 드리는 것은 받은바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도록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고 그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점검하시면서 비록 성화에 있어 더디기는 하지만 한 걸음씩이라도 나아지는 삶이 되도록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와서 38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계속해서 말씀하시지만 지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말이 단지 내 말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한다고 말씀합니다. 내 출처는 내 아버지께 있는데, 그가 너희가 믿는다고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내 말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고 내 말에 거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너희는 내 말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내 말에 거하지도 않는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내 아버지와 너희 아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과 저들을 비교해 보자면 예수님께서는 단지 들은 것을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본 것을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의 것을 그대로 말씀하시는 분으로 성부의 뜻을 따라 선지자 직분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반면 저들은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다른 아버지로부터 듣는 자입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44절에서 말씀하시는데, 마귀가 그들의 아비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너희 아비인 마귀로부터 들은 것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선한 말씀에는 귀를 닫고 마귀의 악한 말에는 귀를 기울이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일에 적극적으로 행하는 자들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강퍅함 마음을, 악한 마귀의 거짓에 대해서는 적극성을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저들은 39절 상반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33절에서도 말했지만 저들은 계속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강조합니다. 단지 혈통으로만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그대로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기업이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이 참된 이스라엘이라면, 진정으로 아브라함의 자녀요 아브라함이 그들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으려면 혈통으로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들에게는 그런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9절 하반부부터 40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만약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해야 하지만, 너희는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내용이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그대로 전하는 자일뿐인데, 그런 나를 죽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진리를 거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절하면서 진리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에 나타난 유대인들의 교리를 보면 정확하게 행위구원의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행위구원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혈통도 자리할 수 없고 육정도 자리할 수 없고 사람의 뜻도 자리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가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나타날 뿐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믿어야 한다, 내 말에 거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지금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면서 죽이려고 하는 것은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아버지라고 말하는 아브라함은 어떤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을 보십시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4:1-5)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다 아브라함의 자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행해야 합니다. 그의 인간적인 실수, 그의 인간적인 점과 흠 이런 것들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믿음을 따라 행한 것들을 행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에서는 직접적으로 이런 말씀까지 하십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그렇다면 너희는 어떠한가? 아브라함처럼 나를 보면서 기뻐하는 일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41절을 보시면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해야 하지만 너희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즉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희 아비라는 존재는 44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마귀인데, 아브라함의 행위가 아니라 너희 아비인 마귀를 행위를 따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어떤 뜻인지 저들은 아직 모릅니다. 왜냐하면 밝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신들이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고 말할 때 그것을 부정하듯 말씀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다고 하면서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변호합니다. 음란한 데서 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결코 사생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법적으로 출생한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적법하게 출생한 자들로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하게 상속을 받을 수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앞에서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고 했지만, 여기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한 분 하나님 외에 없다고 말합니다. 즉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은 그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요, 그의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가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언약은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7)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이 혈통으로 이어지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들의 이해는 혈통으로만 보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저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42절과 4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만약 너희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면 너희는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나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를 너희는 사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리를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죽일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내 말을 들을 줄 전혀 모르고 있다.
그럼 왜 내 말을 들을 줄 모르는가? 44절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나의 출처가 하나님 아버지라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난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앞에서 두 번이나 너희의 아비가 내 아버지와 같지 않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이제 노골적으로 드러내시길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행하고 있는 바를 통해 그들을 정의하자면 그들은 마귀로부터 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덧붙이기를 너희는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예로 두 가지를 드는데, 하나는 살인이요 다른 하나는 거짓입니다.
우선 너희 아비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고 말씀하시는데, 맨 처음 모든 만물이 창조된 이후 마귀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해하고자 하는 생각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들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것, 그것이 마귀의 생각이요 계획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사도 베드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그런데 너희가 그런 마귀의 모습과 닮았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의 시작이 그 사실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 죽이려고만 하지 율법을 통해 자신을 비춰보는 이가 없더란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더욱 부드럽게 만들어가야 하는데, 오히려 율법을 통해 잔인해져 가기만 하더란 것입니다. 율법의 모든 내용이 결국 사랑이라는 말로 귀결된다고 할 때 사랑이 커져가야만 하는데, 그런 사랑보다 정죄만 더욱 커져가더란 것입니다.
이어서 너희 아비 마귀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가 그 속에 없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 편에 서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지 않는 자, 그래서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그를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하나님의 진리를 혼잡하게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다 줄 수 있는 것처럼 말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지 못하도록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라고 시험합니다. 40일 동안 주리셨기 때문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먹을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한 순간일지라도 말씀보다 먹을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시험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지 못하도록 떡의 유무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떡이 많으면 많은 대로 그것이 올무가 되게 하고, 떡이 적으면 적은 대로 그것이 올무가 되게 해서 우리를 넘어뜨리고 말씀에서 떠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떡에 집중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떡만이 아니라 물질과 명예도 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빼앗아갈 수 있다면 세상의 무엇이든지 줄 수 있는 것처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에서 멀어질 수 있다면 떡은 얼마든지 줄 수 있는 것처럼, 또 떡은 얼마든지 빼앗아갈 수 있는 것처럼 한다는 것입니다.
욥을 시험한 마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욥에게 축복하시니까 잘 믿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시험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외적인 모든 복을 다 빼앗아 감으로 시험하십니다. 마귀의 시험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대한 불신을 가지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더욱 믿음에 견고함 가운데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전에는 귀로만 들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눈으로 봅니다. 바로 여기 있는 겁니다. 즉 같은 시험이지만 하나님은 그 시험을 통해 우리를 세우고자 하신다면,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려 하나님으로부터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공적으로 말씀을 듣는 시간 세상 일로 인해 그 시간을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하는 것 자체가 여러분에게 손해입니다. 다른 것 다 제쳐두고라도 말씀을 듣는 자리를 확보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복입니다.
신명기 13장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신13:1-3) 소위 점을 친다고 할 때 점이 딱딱 맞으면 믿을 수 있는 것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맞다고 해서 거짓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맞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보이고,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그들을 따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이 일을 통해 너희가 과연 하나님만을 사랑하는지 확인하고자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맞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것은 아닙니다. 맞지만 그것이 거짓된 것일 수 있습니다. 맞지만 그것이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로부터 나온 것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사무엘을 불러냈을 때 그가 실제 사무엘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귀의 장난질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 하는 말은 참된 말들이었습니다. 그럼 참된 말들이기 때문에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물어도 되는가? 신명기 13장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것을 말한다고 해서 거기로 가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고, 그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참된 것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시험은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도 시험하기도 합니다.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을 말씀으로 시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시험에 예수님은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너희가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기 때문이다. 너희는 마귀에게서 났기 때문에 오늘 본문 45절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고 말씀하십니다. 마귀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진리만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말하는 나를 너희가 믿지 않는다. 오히려 너희가 따르는 것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를 따를 뿐이다. 그리고 46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혹 내가 진리를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죄로 책잡을 수 있겠지만,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을 수 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내 말에 대하여 죄로 책잡을 수 없다면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너희는 여전히 나를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47절의 말씀을 하시는데,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여러분,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옛적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히1:1-2).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 아버지의 대사이십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할 때 당연히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대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앎으로 자유롭게 된다고 말씀하시지만(요8:31-32) 그런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는 것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묵살할 뿐입니다(요8:33). 이로 보건대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다는 증거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들을 수는 있으나 그 말씀이 너희 마음 가운데 심겨지지 않는 것, 그래서 그 말씀에 대한 순종함이 전혀 없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증거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을 듣는 것입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특별히 사도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때문에 사도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로만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귀로 들은 말씀이 마음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합니다.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처럼 우리의 마음이 좋은 밭으로 있어서 말씀의 씨가 떨어져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물론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 안에는 여전히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패한 본성에 어울리는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성령의 열매보다 부패한 본성에 어울리는 열매를 더 자주 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그의 말씀을 책임지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보다는 불순종하는 면이 있지만, 그의 말씀으로 순종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위협의 말씀이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일이 있지만, 그의 말씀으로 위협하시면 떨면서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면이 있지만, 그의 말씀으로 이생만이 아니라 내생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들려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닙니다. 지금은 무관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그에게 속한 자로 부르셨다면 반드시 그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그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때문에 참된 믿음의 소유자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애가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