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4.25. 부활 제 4주일. 둔포성당. 유낙준모세주교.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한10:11).”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요한10:17).”
양들을 돌보는 사람- 그리스도인
죽기까지 양들을 돌보는 사람이 예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성공회 성도는 “예수님의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람입니다(요한10:15).” 목숨을 바치는 이만이 “목숨을 다시 얻게 될 것입니다(요한10:17).” 목숨을 바치니 목숨을 다시 얻게 됨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에게 부활의 삶을 보여 주고자 예수님의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신앙생활을 하고자 원합니다. 주님을 찬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이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3:16).” 사랑은 목숨을 내놓는 것입니다. 목숨을 내놓는 것처럼 살아야 사랑하는 삶이 됩니다. 그러니 사랑은 목숨걸고 사는 것입니다. 목숨을 거는 것은 마음문이 열려야 가능합니다. 빈자에게 동정하는 마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드러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진리로 살지 않고 하느님 앞에서 확신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마음보다 훨씬 크시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서 떳떳하면(1요한3:20),” “구하는 모든 것을 다 하느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습니다(1요한3:22).” 그리스도의 명령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1요한3:23).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1요한3:24).” 믿음은 우리가 확신에 찬 틀을 세우게 되고 성령은 우리를 창조적인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베드로의 믿음과 바우로의 성령에 이끌린 삶은 우리의 목숨을 하느님께 바치게 합니다. 작은 우리 마음으로 큰 마음이신 하느님을 재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소인이 어찌 대인의 마음을 알 수 없듯이 믿음의 정도가 약한 사람이 믿음의 경지가 높은 사람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세상은 믿음이 아니라 세상의 트랜드를 읽어 세상의 풍조를 이끄는 이가 리더가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믿음과 성령으로 인하여 조화를 이루는 삶을 세상에게 보여 줍니다. 세상은 물질과 돈과 권력을 모두 동원하여 야망을 채우려 하지만 교회는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여 사랑으로 서로 너그러움으로 살게 합니다(에페4:2).”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에페4:3).” 성령이 내 안에 계셔야만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1베드5:5).” 소인은 이익을 탐하지만 대인은 순전한 기쁨 마음으로 양들을 돌봅니다(1베드5:2 참조).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야망을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하느님께 순종하고자 성령에 이끌림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힘을 집단의 이기심을 채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시는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한 사람의 온전한 목숨을 바치는 삶을 따르게 됩니다. 리더는 세상 것을 모두 동원하지만 목동은 자신의 한 몸을 밤새 양을 돌보는데 바칩니다. 짐승을 틀이라는 체계에 가두는 일보다는 인간을 성령에 의탁하게 하는 돌봄이 가득한 공동체를 하느님이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에 젖은 사람은 목숨을 내놓고 사는 사람입니다.
카리스마는 ‘하느님한테 받은 능력과 재능으로 은총, 은사’라는 뜻으로 하느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겸손과 온유와 인내에 젖은 사랑의 너그러움으로 채워진 삶일 때 성령에 이끌리고 나 자신은 성령에 복종하는 카리스마를 입은 삶이 될 것입니다. 결국 카리스마 charisma를 입은 사람은 리더쉽 leadership과 활로워십 followership이 결합된 삶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세상은 앞서서 이끄는 리더쉽만을 말하지만, 교회는 진리에 목숨을 걸고 순종하는 활로워십을 포함시킵니다. 성령에 젖은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지체부자유자가 성한 몸이 된 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힘입어 된 것입니다(사도4:10).” “이분께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사도4:12).” 성령에 젖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핵신언어가 구언입니다. 성령에 젖은 우리 성도들의 입에서 나올 가장 핵심단어가 구원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성령에 젖은 사람은 구원받을 삶을 살게 됩니다. 교회는 그렇게 성령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의 공동체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와 함께 복을 주시는 하느님(시편103:4)”이 성공회 안에 머무십니다. 우리 안에 머무시는 “사랑이 넘치시는 하느님(시편108:8)”이 “우리에게 복을 가득채워 주시어 독수리 같은 젊음을 되찾아 주시고자 하십니다(시편103:5).” “하느님은 나의 돌보시는 목자이십니다(시편23:1).” 그러니 우리도 하느님의 어린 양들을 돌볼 책무가 주어진 것입니다. 사목자와 사제와 성도들이 할 일은 돌보는 일입니다. 돌봄총회, 돌봄시노드, 돌봄공의회가 코로나-19시대에 가장 필요한 의회이어야 합니다. 우리를 돌보시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세상을 하느님의 힘과 사랑을 가지고 성령에 젖어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합니다. 아멘.
2021.4.25. 부활 제4주일. 둔포성당. 유낙준모세주교.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지키라(1요한3:23).”
착한 목자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양들을 키우는 농장이 한국에는 많지 않지만, 영국이나 미국과 호주에는 양들을 돌보는 농장이 많습니다. 최근에 한국에서 양고기 요리할 때 냄새 나지 않게 하는 요리법을 소개하는 방송을 보았는데 양고기를 한국인들도 이젠 많이 먹는 듯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양떼와 목자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아버지에서 목자의 이미지를 찾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돌보았기에 목자의 삶을 삽니다. 위대한 다윗왕은 이새의 막내아들로 아버지의 양떼를 돌보다가 불려와 사무엘예언자의 기름을 받습니다. 이렇게 구약성경의 리더들은 양떼를 돌보는 목자처럼 사람들을 돌보는 리더로 서게 됩니다.
목자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양들을 이동시키면서 마실 물과 풀이 많은 장소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늑대나 사자나 곰이나 도둑으로부터 양들을 지키는 역할을 목자가 합니다. 이렇게 목자가 양들을 치듯이 목자가 사람들을 돌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시편23편은 하느님을 목자로 비유하셨습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The Lord is my shepherd; I have everything I need(시편23:1).” 하느님의 우리의 목자일 때 우리는 모든 필요를 다 지니게 된다는 시입니다. 완전하지 않은 불완전한 인간이고 불완전한 인생이고 부족한 인류임을 누구보다도 다 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부족한 우리를 채워 주시고 우리를 풍요롭게 살게 하시는 목자 하느님이십니다.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십니다(시편23:2).” 우리를 초원서 놀게 하시고 물을 마시게 하시는 하느님이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여정을 통해 선함과 은총을 느끼게 해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렇게 시편 23편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종교인이 아니어도 좋아하는 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명의 돌봄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양들의 공동체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가족공동체를 떠올립니다. 양들의 목자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 가족을 보호하시는 하느님을 떠올립니다. 그렇게 구약성경의 리더는 목자이미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한 가족의 식구로 여기시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는 착한 목자이다(요한10:11)” 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느님은 모세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나를 너희에게 보낸 이는 너희들의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이시다(출애3:15).” 그렇게 모세를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보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요한복음에서 “나는...”이 7번 묘사를 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문이다.”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생명의 부활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나는 착한 목자이다.”고 묘사를 합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양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을 생명을 희생하기까지 하는 목자입니다. 늑대, 사자 곰들로부터 지키는 목자입니다. 위험한 개나 포수로부터의 보호가 아닙니다. 루가복음 15장에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는 이야기가 나옵니다(루가15:4 참조). 이어서 잃어버린 은전과 잃어버린 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양을 찾듯이 아들을 찾는 목자의 이미지가 양에게서 사람에게로 이동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양으로 여겨 우리를 돌보시고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삶일 때 우리는 착한 목자의 돌봄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를 중심으로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단 한분이시고, 잃은 양을 반복적으로 찾아다니시는 한 분이시고, 우리보고 따라오라고 대담하게 우리를 부르시는 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이셨듯이 이제는 우리가 목자로 양들을 우리가 돌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하려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정성을 들이는 목자가 우리이어야 합니다. 목자는 양들의 필요를 다 아시기에 우리가 목자로 양들을 돌본다면 우리가 양들의 필요를 채워야 합니다. 마치 하느님이 우리의 필요를 다 아셔서 채워 주셨듯이 말입니다.
양과 목자와의 관계를 절대적인 신뢰관계이어야 생명을 유지하게 됩니다. 개인적이고 자치적인 현대인에게는 서로 관계를 맺고 돌보는 관계를 어색해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 홀로 살 수 없습니다. 관계를 맺는 것을 알아서 관계를 맺어가면서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양들은 선한 목자인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알아야 합니다. 양들이 겸손해야 목자인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사는 길과 필요한 것조차 모르는 양들이 바로 우리들이기에 예수님이 꼭 필요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에게 우리의 마음문을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를 하면 예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 음성대로 따라야 우리가 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라 하여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