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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권공 신도비명〔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權公神道碑銘〕
하늘이 나라를 사랑하면 반드시 그 나라를 보우하고자 하지만기기(氣機)가 변천함에 따라 상사(常事)도 있고 변고(變故)도 있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므로 기기가 바야흐로 변고에 머물러 있을 때엔 하늘도 이를 어쩌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하늘은 반드시 걸출하고 탁월한 인물을 내어 그것을 바로잡게 하는데, 이 걸출하고 탁월한 자는 마주한 상황도 불행이고 큰 책임을 짊어진 것도 역시 불행이다. 하늘도 어쩌지 못하는 것을 사람의 힘으로 그치게 할 수 있겠는가. 오직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하늘이 자기를 낳아 준 의미를 저버리지 않아야 할 뿐인 것이다. 이는 하늘과 사람이 서로 의존하는 의리이긴 하나, 그 심정 또한 괴롭다고 하겠다.
숙종 기사년(1689, 숙종15)에 수상(首相)이었던 이는 권공(權公) 휘(諱) 대운(大運)이다.이보다 앞서 공은 원임 좌상(原任左相)으로서 당인(黨人)들의 모함을 받아 장기(瘴氣)가 서린 바닷가에서 10년간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다.그러다가 기사년에 경종(景宗)이 이미 2세가 되어 상이 원자(元子)의 호칭을 정할 때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자들을 내쫓고 조정(朝政)을개기(改紀)하여 도배(徒配) 중에 있던 공을 기용해 영의정에 제수하였다. 그런데 공이 조정에 돌아오자마자 나라에 변고가 생겨성모(聖母)가 장차 손위(遜位)하려 하였다.그때 공이 제신(諸臣)을 이끌고 상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선대비(先大妃)께서 친히 명문가에서 간택하여 상의 배필로 삼으셨으므로 명위(名位)가 지극히 중한 데다가, 신 등이 10년 동안 모후로 섬겼으니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상이 몹시 노하여 발로 어안(御案)을 차니 어안이 공의 사모(紗帽)에 부딪혔다. 그런데도 공은 아뢰기를 “죽을지언정 결코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한층 더 노하여 이르기를 “어서 물러가라, 어서 물러가라.”라고 하였다.
그날 저녁 상이 간신(諫臣) 박태보(朴泰輔)를 국문하자공이 서둘러 들어와 아뢰기를 “박태보가 올린 소장(疏狀)으로 어찌 옥체를 고생시켜 친히 신문(訊問)까지 하십니까.”라고 하고 또 아뢰기를 “낙형(烙刑)은 법형(法刑)이 아닙니다.”라고 하여 눈물을 흘리며 대내(大內)로 돌아가기를 청하니, 상이 공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대신에게 정국(庭鞫)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공은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고 바로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기를 “바라건대 박태보에게 사형을 면해 주어천지의 살리기 좋아하는 덕을 보이십시오.”라고 하니, 상이 사형을 감하여 원지(遠地)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얼마 뒤 상이 대신에게절목(節目)에 대해 의논하라고 명하자 공은 또다시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고 차자를 올리기를 “바라건대 상께서는 그 명호(名號)를 존속시키고 그 의물(儀物)을 그대로 두어 온 나라 신민(臣民)들의 여망을 위로해 주십시오.”라고 하니 상이 몹시 질책하였다. 이윽고상이 또 중외(中外)에 교서(敎書)를 반포하자공은 끝내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고 탄식하기를 “내 다시는 국사(國事)에 참여하지 않겠다.”라고 하고는 상소하여 매우 강력히 사직을 청하였는데, 공경(公卿)들이 날마다 공의 집으로 찾아와 나오라고 설득하여도 꿈쩍하지 않았으며근시(近侍)들이 연이어 찾아와 상의 뜻을 전하며 타일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공은 4, 5십 차례나 정고(呈告)하였는데, 상이 특별히 도승지를 보내어 궤장(几杖)을 하사하므로 사은(謝恩)을 위해 한 번 나갔다가 곧바로 돌아왔고, 세자(世子)의 위호(位號)가 정해지지 않아 사람들이 답답해하고 걱정하므로 경오년(1690) 여름에 한 번 조정에 나아가 서둘러 대례를 거행할 것을 청하고는 예가 이루어지자 곧바로 돌아왔으며, 갑술년(1694) 봄에 상이 손수 쓴 서찰을 내렸을 때 서찰 속의 글 뜻이 매우 간절하므로 또 한 번 조정에 나아가 연석(筵席)에 나갔다.
아, 우리 왕조는 명의(名義)로써 나라를 세웠으니 기사년(1689)의 일은 천수(天數)의 변고이다. 박공(朴公)이 간언하다가 죽은 경우는 충(忠)과 열(烈)에 해당하는 일임에는 분명하나 이는 그래도 언론(言論)을 맡은 자의 직분인 것이다. 그에 반해 대신(大臣)의 경우는 나라가 있으면 함께 있고 나라가 망하면 함께 망하는 법으로, 그 책무가 말 한마디로 목숨을 버려 훌륭하다는 칭송이 자기에게 모이게 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반드시 지극한 정성을 쌓는 데 힘써 차분하게 임금을 일깨워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간신(諫臣)을 처형하려 할 때엔 소명하여 살게 해 주었고, 절목을 의논하게 할 때엔 굳게 나아가지 않는 한편 소장을 올려 의리(義理)를 밝혔고, 교서를 반포할 때엔 이전과 마찬가지로 또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상이 한번이나마 깨닫기를 기대하였으며, 그런데도 끝내 그렇게 되지 못하자 사직도 청하고 휴가도 청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승의 직책을 맡은 5, 6년 동안 업무를 살핀 기간이 몇 달도 채 되지 못하였는데 그로써 천하 만세에 자신의 마음을 밝힐 수 있었으니, 상이 시종일관 공을 버려두지 않은 것은 그것이 하늘의 뜻인지라 어찌하겠는가. 공이 처한 상황을 비록한기(韓琦)와 부필(富弼)이 마주했다 하더라도 이 밖에 의를 지킬 다른 방도는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세상에서 “기사년의 수상(首相)”이라는 말로 공을 헐뜯고 모함하려는 자는 당인(黨人)이 시기와 질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공이 수립한 게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자일 것이니, 공에게 무슨 흠이 되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김춘택(金春澤)의 은옥(銀獄)이 발생하였는데, 옥사(獄事)가 갖추어지자 일의 기미가 일변하여 당인들이 또다시 세력을 부려 공이 기사년의 일에 대해 힘써 간쟁하지 않았다고 하여 해남(海南)에 유배 보냈다.
당초 공은 젊은 시절부터 큰 뜻을 품어 집안일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서책에만 전념하였다. 인조(仁祖) 임오년(1642, 인조20)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고, 효종(孝宗)이 세자로 입학할 적에 설석(設席)으로 선발되었는데 이는 사림의 여망이었다. 그 공로로 인하여 금오랑(金吾郞)에 제수되었다. 이즈음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가 마침 옥사를 처리하고 있었는데 공을 가리켜 말하기를 “우리가 앉은 이 자리는 훗날 이 사람의 자리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러 번 천직하여 호조의 낭관이 되었는데, 호조 판서 원공 두표(元公斗杓)가 공을 몹시도 중히 여겨서 아전이 어떤 일로 아뢸 때마다 번번이 말하기를 “권 원외(權員外)가 있으니 나를 귀찮게 말라.”라고 하였다.
기축년(1649, 효종 즉위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낭관으로 이배(移拜)되었다가 곧이어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김자점(金自點)을 논핵하여 멀리 유배를 보내도록 하였다.중간에 병조 낭관이 되었다.
경인년(1650)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3년이 지난 뒤에 사서(司書), 지평(持平), 문학(文學)에 연이어 제수되었고, 곧이어 홍문관에 선발되어 수찬(修撰), 교리(校理)에 제수되었다. 추천으로 이조에 들어가 좌랑(佐郞)이 되고 헌납(獻納)으로 천직되고 이조 정랑(吏曹正郎)으로 승진하였다. 부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해 통진 현감(通津縣監)이 되었는데,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백성들이 비석을 새겨 잊지 않겠다는 마음을 담았다. 부교리(副校理)로서 명을 받들고 호남(湖南)을 염찰(廉察)하고, 복명(復命)한 뒤엔 사인(舍人)으로 승진하고, 집의(執義), 응교(應敎), 사간(司諫)으로 천직되었다.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연경(燕京)에 갔으며, 돌아와서는 태복시 정(太僕寺正)에 제수되었다. 그동안 겸임한 것은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 한학교수(漢學敎授), 서학교수(西學敎授), 문학(文學), 필선(弼善)으로, 한 관직에 여러 번 제수된 경우가 매우 많았다.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효종은 공에게 몹시도 관심을 기울여 공이 옥당(玉堂)에 입직할 때 마침 날이 무덥자 액정서의 하례를 보내제호(醍醐)를 하사하고 이르기를 “어떻게 견디고 있는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특별한 은전이었다.
무술년(1658)에 동부승지에 제수되고 형조 참의와 병조 참지를 역임하였다.
경자년(1660, 현종1)에 우승지로서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여 양주 목사(楊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이듬해에 도백(道伯)의 뜻에 거슬려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임인년(1662)에 우승지로서 다시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여 풍덕 부사(豐德府使)가 되었는데, 1년 뒤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갑진년(1664)에 승정원에 연달아 재직하였는데 그사이에 예조 참의가 되고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발탁되었으며 형조 참판과 도승지를 역임하였다.
을사년(1665)에 추천으로 개성 유수(開城留守)에 제수되었다.
병오년(1666)에 평안도 관찰사로 이배되었는데, 이때 북사(北使)가 국경에 들이닥쳐 전임 관찰사가 직무를 계속 맡게 되자 공 역시 개성 유수를 계속 맡게 되었다.
정미년(1667)에 대사간에 징배(徵拜)되어 강직하게 논계(論啟)하다가 시의(時議)에 거슬려 외직으로 나가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다. 공은 앞서 개성 유수를 맡고 있을 적에 토호(土豪)를 법으로 다스리고 재물에 대해서는 마치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멀리하였었는데, 관북(關北) 지방의 토호들을 다스릴 때에도 털끝만큼도 취하는 것이 없었기에 백성들의 칭송이 개성에 있을 때와 똑같았다.
기유년(1669)에 내직으로 들어와 호조 참판, 예조 참판, 동지의금부사가 되었다.
경술년(1670)에 묘당의 천거에 의해 발탁되어 호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내국(內局)에서 병을 보살핀 공로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신해년(1671)에 나라에 대기근이 들고 역병으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일까지 겹치자 공이 진휼 정사를 통솔하여 매일 관복을 입고 출근하여 청사에 앉아 수척하고 헐벗은 이들에게 음식을 먹였다. 또 음식을 먹인 수천 수백 명 중 역병에 감염된 자가 과반이나 되어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가 관청에 가득하고 역병의 기운으로 코가 막히고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는데, 공은 몸소 그들을 살피기를 몇 달이 넘도록 한결같이 하면서도 한 번도 병가를 내지 않았으니,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이를 은덕으로 여기고 있다. 여름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이때 공은 예순의 나이였음에도 집상(執喪)의 예를 더욱 엄격히 하였다. 복상을 마치고서는 영릉(寧陵효종의 능)을 개봉(改奉)하는 일을 감독하였고, 얼마 후 형조 판서와 도총관(都摠管)에 제수되었다.
갑인년(1674)에 인선왕후(仁宣王后)의 국장례(國葬禮)를 감독하였고, 일을 마친 뒤에 북사의 접빈사(接賓使)가 되었다. 국장(國葬)에서 수고한 것으로 인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자급이 오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제수되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관하였으며, 좌참찬, 우참찬, 예조 판서에 이배되었다. 공이 형조 판서로서 신병을 이유로 사직할 적에 상이 태의(太醫)를 보내어 약을 하사하고 진찰하게 하였는데, 이러한 예법은 삼공(三公)의 경우에 비견되는 것이었다.
이에 앞서 현종(顯宗)이기해년(1659)에 이루어진 방례(邦禮)가 잘못이었음을 깨닫고는 대신과 삼사(三司)에게 이 일에 대해 함께 논의하도록 명하였는데, 일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승하하였다. 이에 숙종(肅宗)이 선대왕의 뜻을 계승하여 예를 그르친 신하들을 내쫓았는데, 이로써 공이 병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제수되었고 곧이어 좌의정으로 승진하였으니 실로 숙종 1년인 을묘년(1675)의 일이었다. 이 당시미수(眉叟) 허 선생 목(許先生穆)은 등급을 뛰어넘어 의정부에 들어가고윤휴(尹鑴)는 이조 판서가 되었었는데, 수상(首相)허적(許積)이, 상이 마음을 비우고 윤휴의 말을 들어주는 것을 보고는 윤휴와 서로 깊이 결탁하여 국정을 전횡하였다. 그러나 공은 반드시 그것이 실패하리라는 것을 알고는 매우 깊이 우려하였다. 그리하여 윤휴가 북벌에 대한 의론을 과감히 펼치자 공은 “헛된 명분을 무릅쓰다가 실제의 화를 입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라고 하고, 윤휴가 선왕의 제도를 어수선하게 변경하자 공은 “인심이 매우 불편해한다.”라고 하고, 윤휴가 또 허적과 함께만과(萬科)를 시행하여 용맹한 무사(武士)들을 널리 선발하자고 의견을 내놓자 공은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으니 서둘러야 할 것은 무사가 아니다. 후일 반드시 큰 환란이 닥칠 것이다.”라고 하고, 허적이 평소 군사의 일을 좋아하여 윤휴와 함께 체부(體府도체찰사부)를 설치하자고 의견을 내놓자 공은 “특별한 이유 없이 중병(重兵)을 만들어 임금이 머무는 도성에 부(府)를 설치한다면, 이보다 상서롭지 못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하는 등 일이 있을 때마다 번번이 상 앞에서 논쟁하여 조금의 용납도 하지 않았다. 이에 윤휴가 상소하여 공이 대계(大計)를 저해한다고 비난하였으나 공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공이 일찍이 상사(上使)의 자격으로 연경(燕京)에 갈 적에 입궐하여 상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이어 아뢰기를 “북벌은 때에 맞지 않은 일이고 만과는 잘못된 계책이니, 원컨대 상께서는 행하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그런데 돌아올 때 만과가 이미 시행되었고, 이에 격분한 나머지 눈을 부릅뜨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이 도성에 넘쳐났다. 그 후에 과연 멋대로 횡행하여 제어할 수 없게 된 상황이 하나같이 공이 우려한 대로였다.
정사년(1677)에고묘(告廟)를 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났는데,이는 방례(邦禮)가 바로잡혔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적은 의견을 달리하여 상에게 아뢰기를 “상께서 만일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대간(臺諫)의 계사(啓辭)가 절로 그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나아와 아뢰기를 “고묘를 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대신이 임금에게 대간의 말을 듣지 말라고 권하는 것은 훗날의 폐단과 관계됨이 적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한편, 물러 나와서는 허적을 책망하기를 “상이 국사를 공에게 전적으로 맡겼는데, 어찌 나라를 망치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 당시 허적의 서자인 허견(許堅)이 간사하고 패악하여 나라 안에 원성이 들끓고 있었는데도 허적은 이를 깨닫지 못하였다. 이에 허미수 옹이 상소하여 허견을 논핵하고 이어 그 아버지까지 언급하면서 준엄하게 잘못을 지적하니 상이 노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의론은 공의 종제(從弟)인 판서공(判書公)권대재(權大載)와 그의 아들 권해(權瑎)가 기실 그 상소문을 도와서 지었다고 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상에게 아뢰어 그들을 유배 보내게 하였다. 이 당시는 조정이 청류(淸流)와 탁류(濁流)로 분열되어 허적을 따르는 이들을 ‘탁(濁)’으로, 미옹(眉翁)을 높이는 이들을 ‘청(淸)’으로 부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은 “진신(搢紳)들은 아마 내부의 분열로 멸망을 초래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정승의 직책을 매우 간절하게 사양하였는데, 이에 체차되어 판중추부사에 부직되었다.
경신년(1680)이 되자김석주(金錫胄)가 대대적으로 옥사를 꾸며 ‘탁’으로 불린 자들은 연루되어 나란히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청’의 경우엔 아무리 해도 죄에 끌어들일 명분이 없자 마침내 고묘에 대한 논의를 그물과 덫으로 삼아 공을 하동(河東)에 유배시키고 얼마 후 다시 공에게 천극(栫棘)을 가하게 하였다.
계해년(1683)에 민상 정중(閔相鼎重)이 주달하여 연일(延日)로 양이(量移)되었다가 곧 천극에서 풀려났다.
을축년(1685)에 남상 구만(南相九萬)과 정상 재숭(鄭相載嵩)이 합사(合辭)하여 공을 감률(減律)할 것을 청하니, 상이 철원(鐵原)으로 부처(付處)하라고 명하였으나 양사(兩司)의 간쟁(諫爭)으로 인하여 연일에 도로 유배하였다. 그러나 공은 태연하게 이를 개의치 않고 자질(子姪)들에게 원망하거나 탓하는 말을 하지 말라고 경계하는 한편 늘 말하기를 “남아(男兒)가 어디로 간들 제대된 죽음을 맞이하지 않을쏜가.”라고 하였다.
기사년(1689)에 재차 정승이 되었다. 이때 공은 이미 78세로 복어의 등껍질처럼 여기저기 반점이 있는 피부와 학의 깃털처럼 하얗게 센 머리카락으로 흔연히 조정에 나아갔는데, 도성(都城) 안의 사람들이 길을 메우고 모여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는 말하기를 “어진 정승을 나라에서 다시 정승으로 임명하였으니, 우리들은 살게 되었다.”라고 하였고, 상은 사대(賜對)하여 이르기를 “충성스럽고 근실한 대신을 몇 년 동안이나 외방(外方)에 쫓겨나 있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마침내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으며, 그동안 맡은 여러 사제조(司提調)와 도제조(都提調)는 생략한다.
공은 정승의 직무를 맡을 적에 지중(持重)하는 데에 힘쓰고 개작(改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천하에는 본디 일이 없는데, 용렬한 사람들이 소란을 일으키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고, 파면된 정신(廷紳)이 새로 기용되어 의론이 가시가 돋친 듯 격렬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말하기를 “공법(公法)은 무디고 사검(私劍)은 날카로우니, 내 맹세컨대 이욕(利慾)을 좇고 또 좇아 거듭 국사를 그르치는 짓은 하지 않겠다.”라고 하고, 격렬한 의론에 대해선 하나같이 제지하는 한편 옥사를 처리할 때엔 반드시 평번(平反)하여 형벌이 남발되지 않도록 하였다. 사는 집은, 위로는 머리가 천정에 닿고 아래로는 다리를 겨우 펼 수 있을 정도로 협소하였고, 앞마당은 말 한 마리가 겨우 몸을 돌릴 수 있을 정도로 작았으며, 담장은 허물어져 막힌 게 없었고 문은 설치되어 있지도 않았다. 이에 공무로 찾아오는 낭리(郞吏)들이 있을 곳이 없어 모두 골목 어귀에서 둥글게 모여 앉아 말하기를 “재상의 집이 이 정도로 누추했던 게 옛날에도 있었던 일인가?”라고 하였다. 조정에서압반(押班)할 때마다 8자가 넘는 키에 청수한 용모와 하얀 수염과 눈썹의 그 모습을, 백관들은 마치시귀(蓍龜)를 대하듯 우러러보았다. 그러다가중곤(中壼)의 일이 발생하자 공은 세상을 담당할 뜻이 없어 오랜 시간 동안 집에 누워만 있었는데, 그럼에도 온 나라는 공을 의지해 편안해하였다.
갑술년(1694) 봄 어전에 나아갔을 적에 상이 공을 위하여 선온(宣醞)하고는 연구(聯句)를 지으라고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 당에서 오늘 풍운이 합하니/ 一堂今日風雲合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화기가 따스하니태운이 장구하네 / 和氣融融泰運長
하고, 상이 이르기를,
어려운 일이 많으면 노성한 신하가 정히 생각나니 / 多難正憶老成臣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다만 우리 임금 성덕이 새로운 것을 축원하네 / 只祝吾君聖德新
하였는데, 태평 성세의 군신 관계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때에 따라 일어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한 것으로 말하자면 천명(天命)이니, 그것이 공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공이 해남(海南)으로 유배되었을 적에 윤상 지완(尹相趾完)이 상소하여 사면해 줄 것을 청하고 남상 구만이 “기사년(1689)에 올린 소장의 말이 엄정(嚴正)하였다.”라고 하여 이에 상이 방귀전리(放歸田里)하라는 명을 내리자, 대간의 의론이 강경하게 일어나 헌납(獻納) 유봉서(柳鳳瑞), 대사간(大司諫) 윤덕준(尹德駿), 교리(校理) 유득일(俞得一) 등이 따르지 않기도 하고 상소를 올려 구제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평소 공과 뜻을 달리하는 자들로, 공의(公議)가 사라지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병자년(1696)에 대간의 간책(簡冊)이 멈추자 검양(黔陽)에 있는 우거(寓居)로 돌아갔다. 이로부터 세상일에 대해 듣지 않고《자양강목(紫陽綱目)》을 손에 들고 초연히 살아가다가 기묘년(1699) 10월 23일에 졸하니, 향년 88세였다. 졸한 날 저녁에 무지개가 달을 꿰뚫고 큰 별이 남산(南山)에 있던 공의 본가로 떨어졌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이 놀라고 슬퍼하여 하교하기를 “일을 맡긴 지 오래되었고, 청백(淸白)함을 숭상할 만하다.”라고 하고는 특별히 직첩(職牒)을 환급하였다. 그 뒤 다시 승지를 보내어 조문하는 한편 예관으로 하여금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왕세자 역시 궁관(宮官)을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고 1등(等)의 예법을 적용해서 시행토록 하였다. 12월에 부평(富平) 과연리(瓜延里)에 장사 지냈다가 뒤에 인천(仁川) 도정곡(道井谷) 임좌(壬坐)의 언덕으로 천장(遷葬)하였다.
공의 자는 시회(時會),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고려(高麗) 태사 행(幸)의 후예이다. 고려 때부터 본조(本朝)에 들어서까지 이름난 석학이 대대로 나고 관리가 차례로 배출되어 일국의 망족(望族)이 되었다. 증조(曾祖)의 휘는 상(常)으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동흥부원군(東興府院君)에 추봉되었는데 지극한 효성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조부(祖父)의 휘는 협(悏)으로 예조 판서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고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선고(先考)의 휘는 근중(謹中)으로 사어(司禦)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는 증 정경부인(貞敬夫人)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사평(司評) 이유혼(李幼渾)의 따님이자 집의(執義) 이경중(李敬中)의 손녀이다.
공은 만력(萬曆) 임자년(1612, 광해군4)에 태어났다. 공이 막 잉태되었을 적에대부인이 꿈을 꾸었는데, 해가 중천에 떠 있고 한 어린아이가 그 해 옆에 서서 부채질을 하여 환한 빛이 쏟아져 감히 그 모습을 쳐다볼 수 없었다. 그 뒤 공이 태어나자 등에 남두(南斗)의 형상을 한 여섯 개의 점이 있었다. 이로써 대부인은 공이 필시 매우 귀한 신분이 되리란 걸 알았다.
공은 성품이 차분하고 검소하였으며 밖으로는 온화하였지만 안으로는 확고한 지조가 있었다. 신하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지위에 오른 뒤에도 마치 처자(處子)처럼 스스로 절조(節操)를 지켰고 빈한(貧寒)한 선비처럼 옷을 입었다. 40여 세가 된 이후로는 내실(內室)에 들어가지 않았고, 후부인(後夫人)의 상을 당한 뒤로 첩을 두지 않고 수십 년 동안 혼자 살면서 집에서 기거하되 이를 무덤덤하게 여겼다. 그러다 조반(朝班)의 맨 앞자리에서 홀을 바로잡고 서게 되자, 탁류를 저지할 때엔 드넓은 물결속의지주(砥柱)처럼 흔들리지 않았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논할 때엔촛불로 비추고 수로 계산하는 것처럼 분명하였으며,천시(天時)는 조화롭고 농사는 풍년이 들어 나라 안이 평온할 때엔높은 산이 움직이지 않아도 공리(功利)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것 같았으니,공은 가히 태평성대의 어진 재상이라 이를 만하다.
초취(初娶)는 상산 김씨(商山金氏)로 관찰사 김상(金尙)의 따님이다. 을묘년(1615)에 태어나 갑신년(1644, 인조22)에 졸하였으며 여사(女史)의 행실이 있었다. 후취(後娶)는 단양 우씨(丹陽禹氏)로 진사 우정(禹鼎)의 따님이다. 남편의 뜻을 오직 삼가 받들어 화려한 장식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항상 집안사람들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죽거든 청나라의 비단으로 염을 하지 말라.”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대개부모가 병자년(1636)의 난리 때 죽었기 때문이다.두 부인은 상국(相國)의 묘 앞에 합부(合祔)되었다.
장남은 이름이 위(瑋)로 특별한 재질을 갖추었으나 요절하였고 뒤에 아경(亞卿)으로 추증되었다. 세 사위는 현감(縣監) 신양(申暘), 허담(許湛), 감사(監司) 이운징(李雲徵)이다. 이상은 전처(前妻)의 소생이다. 차남(次男)은 규(珪)로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을 지냈는데 후처(後妻)의 소생이다.
위는 감사 이덕주(李德周)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중경(重經)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참의를 지냈으며, 도사(都事) 이징(李徵)은 사위이다. 규는 목사(牧使) 안필성(安弼星)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고 뒤에 최응건(崔應乾)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서경(敍經)으로 생원(生員)이고, 한준(韓濬)과 심득경(沈得經)은 사위이다. 신양은 1남 1녀를 두었고, 허담은 2남 1녀를 두었다.
중경은 교리(校理) 김환(金奐)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7녀를 낳았다. 아들은 세달(世達)이고 딸은 모두 출가하였다. 뒤에 이만엽(李萬曄)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녀를 기르지 못하였다. 서경은 감사 심중량(沈仲良)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녀를 기르지 못하였고 뒤에 진사 이의홍(李儀鴻)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4녀를 낳았다. 아들은 세욱(世頊)이고 딸은 모두 출가하였다.
세달은 시직(侍直) 이협(李浹)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을 두지 못하여 족형(族兄)인 좌랑(佐郞) 세륭(世隆)의 아들 사언(師彦)을 데려다 아들로 삼았는데, 그는 문과에 급제하고 정랑(正郎)을 지냈다. 세욱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익언(益彦)이고 딸은 출가하였다.
사언은 2남을 두었는데 성(偗)과 급(伋)이며 모두 진사이다. 외손과 6대손은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이 작고한 지 벌써 80여 년이 되었지만 묘비를 아직 새기지 못한 까닭에 4대손 사언이 근심하고 불안해하여 비명 짓는 일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공의 맑은 덕과 아름다운 행실은 국사(國史)에 환히 빛나고 있으니 참으로 이른바“위의가 성대히 갖추어져서 특별히 고를 것이 없다.”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기사년(1689)에 수립한 공(功)이 한층 공의 고심(苦心)과 충정(忠情)에 속하는 일인 까닭에 내가 이에 대해서 재삼 뜻을 드러내어 백대 뒤의 사람으로 하여금 하늘이 걸출하고 탁월한 사람을 내는 의도가 본디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는 바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숙종이 왕위에 오르고 / 肅考御極
기사년이 되자 / 歲在己巳
곤유가 기울어지니/ 坤維以傾
하늘이 실로 그렇게 만든 것이네 / 天實爲此
그 당시 정승은 누구였던가 / 元輔爲誰
밝고도 신실한 권공이었네 / 顯允權公
밝고 밝은 저 하늘의 해가 / 明明天日
우리의 깊은 충정을 비춰 주니/ 鑑我深衷
말씀을 드릴 때엔 알기 쉬운 것부터 설명하였고 / 有言納約
소장을 올릴 때엔 속마음을 모두 토로하였네 / 有疏刳肝
훤칠한 큰 키로 / 脩幹有頎
상륜을 떠맡으니 / 擔以常倫
자기로 말미암은 것은 최선을 다했거니와 / 由我者竭
자기로 말미암지 않은 것은 천명이었네/ 不我則天
흰 머리와 붉은 뺨으로 / 皓髮丹頰
늙은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네 / 老淚靡乾
조정에 나아가길 원치 않았고 / 身不願朝
궤장도 편히 여기지 못하였네 / 几杖匪安
밝은 숙종께서는 / 惟明肅考
시종일관 신하를 알아주어 / 始終知臣
환히 빛나는 애절한 윤음으로 / 煌煌哀綸
공의 청백을 가상히 여겼네 / 嘉乃淸白
공이 조정에 있을 때엔 / 公在朝廷
산악이 되었었는데 / 爲山爲岳
공이 황야에서 졸하자 / 公歾荒野
선비와 백성이 모두 눈물을 흘리니 / 士涕民洟
공을 생각해서였을 뿐 아니라 / 匪惟公思
세도에 대한 슬픔 때문이었네 / 世道之悲
붕당들이 입을 놀려 / 朋家弄喙
사실이 아닌 말로 현혹하였으나 / 眩厥非是
공은 웃기만 할 뿐 따지지 않고 / 公笑不辨
백세의 먼 훗날을 기다렸네 / 百世之俟
원기에는 한계가 있으니 / 元氣有限
어디에서 이 같은 분을 얻겠는가 / 何處得來
나의 명문 매우 분명하니 / 我銘孔昭
이것을 새겨 유구한 훗날에 보이노라 / 刻眎悠哉
[주-D001] 기기(氣機):
천지에 운행하는 음양(陰陽) 두 기운의 기틀을 말한다. 성리학의 본체론에 따르면 우주의 근본원리인 태극(太極)은 그 자체로 운동성이 없지만 그와 언제나 붙어 있는 존재인 기기는 스스로 동(動)하고 정(靜)하는 운동성을 가지는데, 기기가 운동하면 태극은 그에 따라 함께 운동하여 세상의 모든 현상과 변화를 만들어 내게 된다. 《近思錄集解 卷1 道體》
[주-D002] 이보다 …… 있었다:
1680년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이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과 함께 역모를 꾸미다가 남인이 정권에서 축출되고 서인이 정권을 잡은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의 와중에서, 권대운이, 양사(兩司)로부터 권간(權奸)을 옹호하고 나라를 그르쳤다는 탄핵을 받고 삭탈되어 영일(迎日)에서 10년간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있던 것을 말한다. 《肅宗實錄 6年 6月 13日, 14日》
[주-D003] 개기(改紀):
정세를 변경하여 새로이 한다는 말로, 여기서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을 가리킨다.
[주-D004] 성모(聖母)가 …… 하였다:
1689년 투기죄를 지었다는 명분으로 숙종의 계비(繼妃)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고 희빈(禧嬪) 장씨(張氏)가 중전에 오른 일을 말한다.
[주-D005] 그날 …… 국문하자:
1689년 4월 25일 박태보가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숙종이 직접 인정문(仁政門)에서 박태보를 국문(鞫問)한 것을 말한다. 이때 박태보는 낙형을 비롯한 참혹한 고문을 받고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끝내 위리안치 처분을 받아 유배지로 가던 도중 죽었다. 《肅宗實錄 15年 4月 25日ㆍ26日, 5月 4日》
[주-D006] 천지의 …… 덕:
생명을 아끼고 살생을 싫어하는 천지의 마음을 말한다.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법관인 고요(皐陶)가 순(舜) 임금에 대해 “무고한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경도(經道)를 잃어버렸다는 비난을 받는 것이 낫다고 여기시어,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백성들의 마음에 흠뻑 젖어들었습니다.[與其殺不辜, 寧失不經, 好生之德, 洽于民心.]”라고 찬양한 데서 유래하였다.
[주-D007] 절목(節目):
인현왕후를 폐위한 데 대한 절목을 말한다. 《息山先生續集 卷6 權相國墓誌銘》
[주-D008] 상이 또 …… 반포하자:
1689년 5월 4일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서인(廢庶人)한다는 교서를 반포한 것을 말한다. 《肅宗實錄 15年 5月 4日》
[주-D009] 근시(近侍):
승정원의 승지나 환관(宦官), 사관(史官) 등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승지를 가리킨다. 1689년 10월부터 11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숙종은 병으로 사직한 권대운에게 수차례 승지를 보내어 간곡하게 타이르고 만류하였다. 《肅宗實錄 15年 10月 22日ㆍ28日, 11月 16日》
[주-D010] 한기(韓琦)와 부필(富弼):
모두 북송(北宋)의 명재상이다. 한기의 자는 치규(稚圭), 호는 공수(贛叟),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송나라 인종(仁宗) 천성(天聖) 5년(1027) 진사시에 합격하여 30세에 추밀부사가 되고 가우(嘉祐) 연간에 정승에 제수되었다. 덕량(德量)과 문장(文章), 정사(政事)와 공업(功業)에서 송나라 제일의 정승으로 일컬어진다. 부필의 자는 언국(彦國)이며, 하남(河南) 사람이다. 인종 때 무재(武才)로 천거되었다가 경력(慶曆) 3년(1043) 추밀사가 되어 범중엄(范仲淹)과 함께 경력신정(慶曆新政)을 추진하였고 재상의 자리에 올라서는 탁월한 업무 능력으로 현상(賢相)이라 불렸다. 《宋史 韓琦列傳, 富弼列傳》
[주-D011] 김춘택(金春澤)의 은옥(銀獄):
1694년 김진귀(金鎭龜)의 장자 김춘택이 한중혁(韓重爀)을 비롯한 서인(西人) 자제들과 함께 은화(銀貨)를 모아 폐위된 인현왕후의 복위를 도모하였다는 혐의로 일어난 옥사를 말한다.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민암(閔黯)이 이 사건의 국문을 담당하면서 서인을 일망타진하려고 하였는데, 희빈 장씨의 방자한 행동에 불만이 커져 가던 숙종은 오히려 민암의 처사를 문제 삼아 남인을 대거 정계에서 축출하고 서인을 다시 등용하였다. 이를 갑술환국(甲戌換局)이라 한다.
[주-D012] 권 원외(權員外):
권대운을 말한다. 원외는 원외랑(員外郞)의 약칭으로 낭관(郞官)을 가리키는데, 당시 권대운이 호조 낭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주-D013] 김자점(金自點)을 …… 하였다:
김자점은 인조 재위 동안 숙원(淑媛) 조씨(趙氏)와 결탁하여 영의정에까지 오를 정도로 위세를 자랑하였는데,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곧바로 양사(兩司)로부터 거만하고 사치하다는 탄핵을 받아 홍천(洪川)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孝宗實錄 卽位年 6月 22日》
[주-D014] 제호(醍醐):
오매육(烏梅肉), 사인(砂仁), 백단향(白檀香), 초과(草果)를 곱게 가루로 만들어 꿀에 버무려 끓였다가 냉수에 타서 먹는 청량음료를 말한다.
[주-D015] 기해년에 이루어진 방례(邦禮):
1659년(현종 즉위년) 효종의 장례에 효종의 계모이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가 제기될 때 서인인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이 주장한 기년설(朞年說)이 채택된 것을 말한다. 서인의 기년설에 대해 남인인 윤휴와 허목은 삼년설(三年說)을 주장했다.
[주-D016] 미수(眉叟) 허 선생 목(許先生穆):
허목(1595~1682)으로,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 호는 미수,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경사(經史)와 예학(禮學)에 밝았고 전서(篆書)와 문장(文章)에도 뛰어났다.
[주-D017] 윤휴(尹鑴):
1617~1680.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이다. 예송(禮訟) 때 남인으로 활동하며 송시열 등 서인 세력과 맞섰으며, 숙종 즉위 후부터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까지 많은 개혁안을 제기하고 실행하려 했다. 서인으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탄받고 끝내 처형당했다.
[주-D018] 허적(許積):
1610~1680. 본관은 양천, 자는 여거(汝車), 호는 묵재(黙齋)ㆍ휴옹(休翁)이다.
[주-D019] 만과(萬科):
무과에서 한 번에 1000명 이상의 무사를 선발하던 광취(廣取) 무과를 말한다. 무과는 본래 3년마다 28명을 뽑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국방에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긴급히 무사를 충원하는 방법으로 이 제도가 활용되었다.
[주-D020] 고묘(告廟)를 …… 일어났는데:
1674년 현종의 모후이자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장례에 효종을 장자(長子)로 삼는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되자, 1677년 앞서 효종의 장례 당시 서인의 기년설을 따라 효종을 서자(庶子)로 여긴 사실을 다시 수정하여 태묘(太廟)에 고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난 것을 말한다. 《肅宗實錄 3年 7月 26日, 8月 1日》
[주-D021] 권대재(權大載):
1620~1689.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거(仲車), 호는 소천(蘇川)이다. 아버지는 진사 권위중(權偉中)이다. 1658년 문과 중시에 합격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한 뒤에 호조 판서에까지 올랐다.
[주-D022] 김석주(金錫胄):
1634~1684.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사백(斯百), 호는 식암(息庵),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662년 증광 문과(增廣文科)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조 좌랑, 정언, 좌부승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674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가 일어날 때에는 허적 등 남인과 의견을 같이하였다가, 허적이 실각하자 서인과 결탁하여 1680년 왕이 쓰는 장막(帳幕)을 사사로이 사용한 사건을 빌미로 허적 등을 축출하고 이어 허적의 아들 허견이 모역한다고 고변하여 남인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주-D023] 천하에는 …… 뿐이다:
본래 당(唐)나라 때 포주 자사(蒲州刺史)를 지낸 육상선(陸象先)이 한 말이다. 《新唐書 陸象先列傳》
[주-D024] 압반(押班):
백관이 자리할 위차(位次)를 정돈하는 일을 말한다.
[주-D025] 시귀(蓍龜):
옛날에 일의 시비와 길흉을 점치던 시초(蓍草)와 거북이로, 한 시대의 사표로서 모든 의문을 판별해 주는 원로나 국사(國士)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주-D026] 중곤(中壼)의 일:
인현왕후가 폐위된 일을 말한다.
[주-D027] 한 …… 합하니:
임금과 신하가 조정에서 만나 서로 의기가 투합함을 말한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르듯 성인이 나타나시니 만물이 우러러본다.[雲從龍風從虎, 聖人作而萬物覩.]”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주-D028] 태운(泰運):
천지 상하가 막히지 않고 두루 통하는 대운(大運)을 말한다. 《주역》 〈태괘(泰卦) 상(象)〉에 “하늘과 땅이 사귀어 조화로운 것이 태이다.[天地交泰]”라고 하였다.
[주-D029] 자양강목(紫陽綱目):
주희(朱熹)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가리킨다. 자양(紫陽)은 주희의 별호이다.
[주-D030] 대부인:
권대운의 어머니 전주 이씨를 말한다.
[주-D031] 지주(砥柱):
중국 황하(黃河)의 중류에 있는 바위산으로, 세찬 물결 속에서도 우뚝하게 버티고 서 있는 까닭에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절조를 지키는 사람을 비유한다.
[주-D032] 촛불로 …… 분명하였으며:
당나라 한유(韓愈)가 〈송석홍처사서(送石洪處士序)〉에서 처사(處士) 석홍(石洪)의 정밀하고 분명한 식견을 묘사한 표현이다. 《古文眞寶 後集 卷3》
[주-D033] 높은 …… 같았으니:
송나라 소식(蘇軾)이 〈제구양공문(祭歐陽公文)〉에서 구양수(歐陽脩)의 덕을 찬양하면서 “비유하자면 큰 시내 높은 산이 움직임은 보이지 않아도 공과 이로움이 만물에 미치는 것과 같다.[譬如大川喬嶽, 雖不見其運動而功利之及於物者.]”라고 한 데서 유래한 표현이다. 《古文眞寶 後集 卷8》
[주-D034] 부모가 …… 때문이다:
단양 우씨의 아버지 우정은 1636년 병자호란 때 적을 피해 어머니를 모시고 산에 숨어 있다가 어머니를 엄호하려는 목적으로 아내와 함께 자진하여 적의 포로가 되었는데, 길을 가던 중 금강(錦江) 나루에 이르러 아내와 함께 투신자살하였다. 《星湖全集 卷53 禹氏雙節旌閭記》
[주-D035] 위의가 …… 없다:
《시경》 〈패풍(邶風) 백주(柏舟)〉의 “내 마음은 돌이 아니라서 굴릴 수도 없고, 내 마음은 돗자리가 아니라서 걷어치울 수도 없다. 위의가 성대히 갖추어져서 특별히 고를 것이 없다.[我心匪石, 不可轉也. 我心匪席, 不可卷也. 威儀棣棣, 不可選也.]”라고 한 말을 발췌한 것으로,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이 완벽한 경지를 찬양한 것이다.
[주-D036] 곤유(坤維)가 기울어지니:
1689년(숙종15) 인현왕후가 폐위된 것을 말한다. 곤유는 왕후(王后)를 가리키는데, 땅을 지탱하는 밧줄인 지유(地維)와 같은 말이다. 중국의 고대 전설에 따르면 천신(天神)인 공공씨(共公氏)가 전욱(顓頊)과 황제 자리를 놓고 싸움을 벌이다 화가 나서 부주산(不周山)을 들이받자, 천주(天柱)가 부러지고 지유가 끊어져 하늘이 서북쪽으로 기울어졌다고 한다. 《淮南子 覽冥訓》
[주-D037] 밝고 …… 주니:
밝은 지혜를 가진 숙종이 권대운의 충정을 헤아려 주었다는 말이다.
[주-D038] 자기로 말미암은 …… 천명이었네:
한유가 〈당고조산대부상주자사제명사봉주동부군묘지명(唐故朝散大夫商州刺史除名徙封州董府君墓誌銘)〉에서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은 자신이 초래한 것이고, 자신에게서 말미암지 않은 것은 천명이다.[由我者吾, 不我者天.]”라고 한 말을 활용한 것으로, 권대운이 인현왕후가 폐위되는 등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그로 인해 겪은 고초와 고뇌를 천명으로 돌림으로써 그 무엇도 탓하지 않는 덤덤한 태도를 보였다는 말이다. 《昌黎先生文集 卷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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