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경주 남산. 경북 경주시. 산 행 일 : 2010. 7. 10.(토) 산행코스 : 상서장 ~ 해목령 ~ 금오정 ~ 사자봉 ~ 금오산 ~ 이영재 ~ 봉화대 ~ 백운재 ~ 고위산 ~ 백운암 ~ 천룡사터 ~ 틈수골 (능선산행으로 약 5시간쯤) 산행참가 : 19명. <산행지도>
한여름 대낮의 뙤약볕도 피하여 짧게 산행을 하고자 100대 명산의 한 곳인 경주 남산 산행을 계획했다. 무박 산행지로는 짧고, 따로 떨어져 있어서 다른 산과 연계하기도 어렵고 하여 미뤄 두었던 백대명산 중 한 곳을, 모처럼 힐링을 하자는 회원들의 요구에 따라 '문화재 창고'라고 일컬어지는 경주 남산에서 평소와는 다르게 여유로운 산행을 즐겨 보기로 한다.
<경주 남산(慶州南山, 468m)> 경북 경주시의 남쪽을 둘러싸고 남북으로 솟은 산으로, 신라 때는 부처님이 하강하여 머무는 영산으로 추앙되었다. 발딛는 곳마다 문화재라 할 정도로 불적지(佛蹟地)가 많기로 유명한 산이다. 금오산(金鰲山)이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는 북쪽의 금오산과 남쪽의 고위산(高位山, 494m)의 두 봉우리 사이를 잇는 산들과 계곡 전체를 통칭해서 '남산'이라고 한다. 금오산 정상의 높이는 468m이고, 남북의 길이는 약 8㎞, 동서의 너비는 약 4㎞이다. 지형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이면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정상을 이룬 직삼각형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북으로 뻗어 내린 능선에는 상사암(想思巖)·해목령(蟹目嶺)·도당산(都堂山) 등의 봉우리가 있고, 남으로 뻗은 능선에는 높이 495m의 고위산이 있다. 남산의 지세는 크게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뉜다. 동남산 쪽은 가파르고 짧은 반면에, 서남산 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긴 편이다. 서남산의 계곡은 2.5㎞ 내외이고, 동남산은 가장 긴 봉화골(烽火谷)이 1.5㎞ 정도이다. 동남산과 서남산에는 각각 16개의 계곡이 있고, 남쪽의 2개와 합하여 모두 34개의 계곡이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유적의 숫자로 보면 서남산 쪽이 동남산보다 월등히 많다. 이 계곡들에는 석탑·마애불·석불·절터 등이 산재해 있다. 또한 남산은 신라 사령지(四靈地) 가운데 한 곳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에서 모임을 갖고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남산에 얽힌 전설과 영험의 사례가 풍부하고 다양하다.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태어난 곳이 남산 기슭의 나정(蘿井)이며, 불교가 공인된 528년(법흥왕 15) 이후 남산은 부처님이 상주하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존숭되었다. 신라 헌강왕 때는 남산의 산신이 현신해 나라가 멸망할 것을 경고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한 어느 날, 남산의 신이 왕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는데, 좌우 사람들은 보지 못하였으나 왕만이 홀로 이것을 보았다. 왕은 스스로 춤을 추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그 형상을 보였던 것이다. 산신은 나라가 장차 멸망할 줄 알았으므로 춤을 추어 그것을 경고했던 것이나,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祥瑞)가 나타났다고 하여 방탕한 생활이 더욱 심해졌던 까닭에 나라는 마침내 멸망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전설은 신라인의 산악숭배에 있어서 남산이 특히 호국의 보루로서 존숭되었음을 알려주는 사료 가운데 하나이다.
상서장 앞 주차장에 도착하여, 울산에서 5시까지 오기로 한 손점장을 기다리며 쪽잠을 청하다가 일어나 산행 준비를 한다.
경주 남산의 정상에서 북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의 초입에 최치원(崔致遠)의 상서장(上書莊)이 있는데,
오늘의 산행은 상서장을 출발하여 남북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금오봉과 고위봉을 올랐다가, 서쪽 틈수골로 하산키로 한다.
상서장(上書莊) 안내판.
담장 너머로 본 상서장 내부 전경.
꼭두새벽에 눈을 떠 준 것만으로 대견하다.
울산에서 근무 중이던 손점장이 도착하고,
상서장 우측의 소로로 들어서며 경주 남산 산행을 시작한다.
상서장과 담을 맞대고 자리한 인가 옆으로 이어진 등로로 들어서니,
금오봉까지 4.7km라는 이정표가 있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인가에는 진돌이만 께어나 인기척에 화답한다.
새벽안개가 어스름한 소나무 숲으로 호젓한 오름길이 이어지더니,
우측 능선에서 이어오는 수레길 수준의 주능선길에 합류하여, 좌측으로 이어진 금오봉 방향의 오름길을 따른다.
우측으로 일성왕릉 방향 갈림길을 지나고,
절골 갈림길을 지난다. 경주 남산에는 문화재가 산재한 골짜기가 34개나 있는데, 각 골짜기 마다 산재한 문화재에 따라 이름이 붙어있다.
<경주 남산 절골> 절골(寺谷)은 상서장에서 남산리로 가는 문천가에 양지마을이 있고, 그 동편에 절터가 있다. 논둑의 주춧돌로 보아 규모가 컸던 절로 보이며, 목탑지가 남아 있다. 이 목탑지는 황룡사구층목탑지·망덕사목탑지·사천왕사목탑지 등과 함께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유지이다. 이 밖에 삼층석탑으로 보이는 탑재들이 땅속에 매몰되어 있는데, 옥개받침이 5단으로 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8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경주 남산성터에 도착한다.
경주 남산성 안내판.
부처바위골(불곡) 갈림길을 지난다.
<경주 남산 부처바위골(불곡)> 부처바위골(불곡, 佛谷)은 남산의 동쪽 기슭 인왕리에 있다. 계곡 입구 산기슭에 두 곳의 절터가 있지만, 주춧돌·기왓장 등이 산재해 있을 뿐 별다른 유적은 없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올라가면 큰 바위가 있으며, 보물 제198호 경주남산불곡석불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높이 3m, 너비 4m의 자연암석에 약 1.2m 깊이로 감실(龕室)을 만들고 불상을 조각하였다. 얼굴 모습은 단아하여 여성적인 느낌을 주며, 두 손은 포개어 좌선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옷자락은 두 무릎 밑까지 길게 늘어져 있고, 의문(衣紋)의 조각수법이 매우 세련되어 있다. 이 불상은 조각의 기법으로 보아 단석산의 자연석굴과 석굴암 인조석굴의 중간단계로 보고 있다. 이 부근에서는 삼화령석조미륵삼존상(三花嶺石造彌勒三尊像)을 연상시키는 여래상이 발견되었는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오른손은 위로 쳐들고, 왼손은 밑을 향한 감실의 불상과 거의 같은 시대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레길 수준의 호젓한 숲길을 따르는 백두들.
평소에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두꺼비도 자주 눈데 띈다.
처음으로 암릉이 나오며,
가야 할 금오봉이 저만치로 가늠된다.
남산 일주도로와 만나고,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남산일주도를 따른다.
좌.우로 포석정과 통일전 방향 갈림길에서 금오봉 방향으로 진행한다.
<경주 남산 포석골> 원래 부흥골(富興谷)이라 하였는데, 포석정이 있기 때문에 포석골(鮑石谷)이라고 하였다. 포석정 뒤 계곡 일대를 가리키는데, 전체 길이는 2.5㎞에 이른다. 사적 제1호인 포석정지(鮑石亭址)는 성남이궁(城南離宮)터라고도 한다. 이궁이란 별궁이란 뜻이며 왕과 귀족들의 놀이터로서, 개울가에 솟은 바위에 돌 홈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하고, 그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주고받게 하였다. 그러나 경애왕이 이 곳에서 후백제의 견훤에게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면서 신라는 끝을 맺게 된다. ≪삼국유사≫에 헌강왕이 이 곳에 왔다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9세기 이전부터 포석정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포석정 뒤 계곡의 산정 부근에는 황금대(黃金臺)가 있다. 그곳에는 10m가 넘는 높은 바위들이 줄이어 있는데, 그 바위 빛이 짙은 누른색을 띠며 빛나고 해질 무렵에는 금빛으로 빛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전하는 말로는 이 일대가 선사시대의 주거지였다고 한다. 또한 선각의 마애여래상은 연꽃 위에 앉아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으며, 전체 높이는 1m, 무릎너비 86㎝, 어깨넓이는 40㎝이다. 곡선이 강조되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또한 석탑이 있는 등성의 고갯길에는 사리탑이 있다. 2기의 탑신이 무너져 내려앉아 있는데, 한 변의 길이가 66.7㎝로 아무런 장식도 없다. 지붕돌의 꼭대기에는 보주형이 있을 따름이다. 이 계곡의 정상에는 상사암이 있다. 이 바위의 중앙에는 감실이 있고, 그 밑에 높이 80㎝, 너비 35㎝의 작은 석불이 있다. 머리 부분은 없어졌고 두 손은 통인(通印)이다. 전체 모습이 배리의 삼체석불과 흡사하다. 그 곁에는 남근석(男根石)이 있는데, 이곳에는 1856년에 새긴 글씨가 남아 있다. 즉, 누구누구가 이곳에서 기도를 하여 아들을 얻었다는 내용으로서 민간신앙의 대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바위에는 부처의 형상을 한 자연석이 있다. 포석골의 대표적인 절터로는 창림사지(昌林寺址)가 있다. 현재 귀부와 석탑이 남아 있으며, 탑은 도괴되었던 것을 1970년대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귀부는 신라 때의 것으로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원래 거북이 두 마리가 있었는데, 그중 한마리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거북의 등에 신라 명필 김생(金生)의 글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에는 비신과 거북의 머리가 모두 없어졌다. 이곳에서는 목 없는 비로자나불상이 발견되었는데,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경주 통일전(慶州 統一殿)>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南山洞)에 있는 통일기원 전각으로, 삼국통일의 정신과 화랑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이를 이어받아 나라의 정신적 지주로 삼기 위하여 조성한 전당이다. 1977년 박정희 전대통령의 지시로 건립하였다. 전각 안에는 태종 무열왕, 문무대왕, 김유신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회랑에는 통일을 향한 격전의 현장을 보여주는 기록화를 길게 전시해놓았다. 이밖에도 넓은 경역 곳곳에 삼국통일기념비와 태종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장군의 사적비 등이 세워져 있다. 호국영령의 뜻을 기리는 장소여서 초·중등학생들의 통일이념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남산 칠불암과 전망대로 오르는 등산로도 설치되어 있다.
남산일주도로를 따르는 백두들.
금오정 갈림길에서 150m 비켜나 있다는 금오정을 다녀오기로 한다.
도로를 벗어나 능선길을 잠시 따르면,
나무가 아닌 시멘트로 지어진 금오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금오정에서 바라본 금오봉 모습.
금오정 앞에는 금오정에 대한 설명은 없고 경주 남산에 대한 설명판만 있다.
살짝 당겨본 금오봉 모습.
금오정을 뒤로하고 금오봉 방향으로 잠시 진행하면 상사바위가 나오는데, 상사바위는 멀리 떨어져서 봐야 한다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냥 바위 덩어리일 뿐이다.
<상사바위> 거대한 두 개의 바위가 국사곡 산정에 서 있는 상사바위에는 애달픈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옛날 국사곡 어귀에 외로운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집안 식구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 버리고, 할아버지는 혼자 살았다. 할아버지는 외로움을 참기 어려워 가끔 식구들 무덤으로 찾아가서 울었다. 그래도 허전하긴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는 동네 아이들을 보면 손자를 보는 듯 귀여워하였다. 동리 아이들도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따랐다. 그중에서도 이웃집에 사는 피리라는 소녀를 퍽 귀여워하였고, 피리도 할아버지를 극진히 따랐다. 할아버지가 80세를 넘었을 때 피리도 자라서 어느덧 꽃다운 처녀가 되었다. 피리는 철이 들면서 외로운 할아버지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맛있는 음식 등을 할아버지께 갖다 드리며 기쁘게 해 드렸다.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고마운 사람이 피리였다. 어느 해 봄 피리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늘 시중을 들어주던 피리가 없으니 못 견디게 쓸쓸하였다. 다시는 못 올 줄 알면서도 피리를 기다렸다. 어느 날도 방안에 앉아 피리를 생각하고 있는데 살그머니 문이 열리면서 그토록 그리던 피리가 들어오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너무나 반가워 '피리!' 하고 외치며 일어섰으나 그것은 환상이었다. 할아버지의 눈에는 피리의 환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뜨면 천장에 있고, 이불을 쓰면 이불 속에 있고, 눈을 감아도 눈 속에 나타나서 피리가 생글생글 웃고 있는 것이었다. '피리!'하고 할아버지는 크게 외쳐 보고는 머리를 설레 설레 흔들었다. 그저 자식처럼 귀여워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남성으로서 처녀 피리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안되지? 안돼' 할아버지는 머리를 저었다. '이제 며칠 안가서 낙엽처럼 질 몸이 꽃봉우리같이 피어나는 피리를 사랑하다니 안될 일이지' 하고, 중얼거리면서 다짐해 봐도 헛일이었다. 피리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느새 뱀처럼 기어나와서 혀를 날름거리며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피리를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양심과 피리를 아내로 삼겠다는 욕심이 머리 속에서 쉴새없이 싸우고 있건만 끝내 무서운 욕망이 할아버지의 마음을 다 차지하고 마는 것이었다. 어느날 할아버지는 국사곡 산정에 올라가서 피리가 이사 간 마을을 멀리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나무에 목을 메어 죽어 버렸다. 할아버지의 혼은 그곳에 큰 바위가 되어 피리가 살고 있는 마을을 늘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 후 피리는 무서운 꿈을 꾸게 되었다. 눈만 감으면 큰 뱀이 몸을 칭칭 감고,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덤벼드는 것이었다. 몸부림을 치며 깨어나면 그것은 꿈이었으나 너무나 소름 끼치는 무서운 꿈이었다. 그 무서운 꿈은 한 번만 꾸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으면 또다시 되풀이되고 하니 피리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몸은 점점 쇠약해져서 볼품없이 되어 가는데 동리 사람들 사이에는 수군수군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피리를 생각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그리워하던 생각이 상사뱀이 되어 피리를 찾아오는 거라는 이야기였다. 오랫동안 밤잠을 자지 못하여 괴로움에 지쳐 있던 피리가 어느 날 몽롱하게 잠이 들었는데 몸을 감고 있던 뱀이 할아버지로 변하면서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아 죽어 버렸는데 죽어서도 잊혀지지 않아 피리 아가씨를 괴롭히고 있으니 용서해 주시오. 살았을 땐 죽을 길이라도 있더니 이제 죽었으니 죽을 길도 없구료."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힘없이 국사곡으로 들어가 바위가 되어 자기를 바라보고 서 있는 꿈을 꾸었다. 피리는 자기를 생각하다가 죽은 할아버지가 죽어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피리는 조용히 일어나서 할아버지가 힘없이 가던 길을 따라 국사곡으로 들어가서 정상에 서 있는 그 바위에 올라섰다. "할아버지, 인간세상에서는 나이 때문에 소원을 못 이루었으니 나이를 아니 먹는 바위가 되어 원한 맺힌 소원을 풀어 드리겠습니다."하고 바위에서 뛰어내렸다. 피리의 영혼은 또 하나의 바위가 되어 큰 바위 옆에 나란히 섰으니 세상 사람들은 이 바위를 가리켜 상사바위라 한다. 지금 큰 바위 부분에 붉게 보이는 반점이 있으니 그것을 피리의 핏자국이라 한다.
상사바위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
상사바위에서 남쪽 멀리로 고위산쯤이 조망된다.
팔각정터 갈림길로 돌아 나와 금오봉 방향으로 진행하면,
사자봉 정상이 나오는데, 정상에는 '남산관광일주도로준공비'라 쓰인 비석이 있다. 포석정에서 통일전으로 연결된 일주도로(1966년 건립) 개설을 기념하여 세워진 비석이다.
팔각정터에 도착하여 아침식사를 하기로 한다.
사자봉에서 지근거리에 있는 팔각정터에 둘러앉아 아침식사를 한다.
팔각정터에서 아침식사를 마친 백두들은 금오봉 정상을 향해 출발한다.
팔각정터에서 본 가야 할 고위산 방향.
지나온 금오정 방향 능선 모습.
살짝 당겨보니 금오정이 뚜렷하다.
주변으로 조망이 시원한 팔각정터를 뒤로하고,
사자봉 정상으로 돌아 나와 인증을 한다.
돌아본 북쪽 금오정 방향 능선.
가야 할 남쪽 고위산 방향.
금오봉 정상 모습.
일주도로 금오봉 갈림길에서 200m 떨어져 있는 금오봉 정상으로 향한다.
금오봉으로 오르는 등로는 데크목으로 표장이 되어 있다.
금오봉 정상에는 '금오산'이라 쓰인 커다란 정상석이 있고, 남산과 망산의 유래가가 적힌 안내판이 있다.
<남산(南山)과 망산(望山)의 유래> 옛날 경주의 이름은 '서라벌(徐羅伐)' 또는 '새벌'이라 했으며, 새벌은 동이 터서 솟아오른 햇님이 가장 먼저 비춰주는 광명에 찬 땅이라는 뜻으로, 아침 햇님이 새벌을 비추고 따스한 햇살에 봄,여름,가을,겨울 계절의 변화가 아름답고 온갖 곡식과 열매가 풍성하여 언제나 복된 웃음으로 가득 찬 평화로운 땅이었다. 이 평화로운 쇠벌에 두 신(神)이 찾아왔다. 맑은 시냇가에서 빨래하던 처녀가 두 신을 보았다. 검붉은 얼굴에 강한 근육이 울퉁불퉁한 남신과 갸름한 얼굴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 예쁜 웃음이 아름다운 여신이었다. 두 신은 아름답고 기름진 쇠벌의 경치를 둘러보더니 남신이 입을 열어 "우리가 살 곳은 바로 이 곳이로구나!" 하고 외쳤다. 너무나 우렁찬 외침이 새벌의 들판을 진동할 때, 강가에서 빨래하던 한 처녀가 너무 놀라 "저기 산 같은 사람 봐라!"라고 해야 할 것을, "산 봐라"하고 소리를 질려버렸다. 비명에 놀란 두 신이 발길을 멈추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다시는 발을 옮길 수 없었다. 처녀의 외침으로 두 신은 그 자리에서 굳어 움직일 수 없는 산이 되었는데, 소원대로 이곳 아름답고 기름진 새벌에서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여신은 남산 서쪽에 아담하게 솟아오른 망산(望山)이 되었고, 남신은 장엄한 남산(南山)이 되었다. 두 신이 변해 이루어졌다는 남산과 망산은 지금도 나란히 정답게 솟아있다. 망산 곁에는 젊은 산인 벽도산과 선도산 등이 있다. 이들은 젊음을 힘으로 해서 얌전한 망산을 쉴 새 없이 유혹한다. 그래도 망산의 머리는 언제나 남산 쪽으로 향하고 있으니 망산의 절개가 변치 않는 한 쇠벌 처녀들의 순결도 변치 않는다고 딸을 가진 쇠벌의 부모들은 언제나 망산을 바라보면서 한시름 덜고 살아오는 것이다.
남산과 망산에 대한 전설을 읽으며 선인들의 풍부한 상상력에 공감하는 백두들.
경주 남산 금오봉 인증.
금오봉을 뒤로하려니 비파골의 전설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보인다.
<경주 남산 비파골> 용장골에서 경주 쪽으로 700m 지점에 비파마을이 있다. 비파골(琵琶谷)에는 네 곳의 절터와 4기의 석탑 터가 남아 있다. 이 계곡에 석가사(釋迦寺)와 불무사(佛無寺)를 세운 것은 692년이다. 효소왕이 진신석가(眞身釋迦)가 현신한 것을 알지 못하고 희롱을 한 뒤 뒤늦게 깨닫고 석가가 사라진 자리에 불무사를, 진신석가가 산다고 한 비파바위 아래에 석가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비파골의 전설> 비파골은 이름만큼 아름다운 바위계곡이다. 마을 이름도 지금까지 앞비파, 뒤비파 등 비파마을로 불리고 있다. 남산 금오봉 정상에서 서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인데 길이가 약 2㎞로 이어지는 계곡과 능선이 대부분 바위로 형성돼 있다. 이 계곡에는 네 곳의 절터가 있고 4기의 석탑재가 남아 있는데, 그 모양이 특이할 뿐 아니라 옛날부터 전해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 더욱 흥미롭다. 신라 32대 효서왕 6년 서라벌 동쪽 교외에 망덕사라는 절을 세우고 낙성식을 올리게 되었는데 임금이 친히 행차해 공양을 올렸다. 그때 몸차림이 누추한 못생긴 중이 와서 임금께 청하기를 “빈도도 재에 참석하기를 바랍니다”라고 청했다. 임금은 마음이 언짢았지만, 말석에 참석하라 하고 재를 마치자 그 중에게 조롱조로 “비구니는 어디에 사는가. 돌아가거든 국왕이 친히 불공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 하고 비웃듯이 중을 바라보았다. 중도 웃으면서 “예 잘 알았습니다. 남산 비파암에 있습니다. 임금님께서도 돌아가시거든 진신석가를 공양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하고 몸을 솟구쳐 구름을 타고 남쪽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임금은 놀라고 부끄러워서 산에 올라가 그 날아간 방향을 향해 수없이 절하고 신하들을 보내어 진신석가를 모셔오도록 했다. 신하들은 비파골 안에서 지팡이와 바리때가 바위 위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진식석가 부처님은 바리때와 지팡이만 남겨두고 바위 속으로 숨어버렸던 것이다. 효소왕은 할 수 없이 비파암 아래 절을 짓고 석가사라 이름하여 진신석가 부처님께 사죄하고 숨어버린 바위에는 불무사라는 절을 지어 없어진 부처님을 공양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일연 스님이 이곳에 와보고 '두 절은 있는데 바리때와 지팡이는 없어졌더라'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신라시대의 토속신앙과 불교신앙이 합작으로 이루어진 예술이라는 해석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다시 일주도로로 내려서서 통일전 주차장 방향으로 진행한다.
우측으로 용장골 갈림길을 지난다.
<경주 남산 용장골(茸長谷)> 용장골[茸長谷]은 고위산과 금오산 사이의 계곡으로서 남산에서 가장 깊고 넓은 계곡이며, 만물상(萬物相)이라 불릴 만큼 경관이 수려한 곳이다. 유적으로 보아 18개 소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름이 전하는 곳은 용장사 한 곳뿐이다. 용장사의 약사여래상과 불두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안치되어 있으며, 삼층석탑은 보물 제186호로, 석불좌상은 보물 제187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층석탑은 용장사터의 동쪽산맥 위에 솟아 있으며, 높이는 4.5m의 작은 탑이다. 신라탑의 전형으로 석가탑의 양식을 답습하였다. 단지, 다른 점은 하층 기단이 없고 직접 자연암석에 상층기단을 세운 점이다. 이것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표현한 슬기로서, 지형적 특성을 잘 살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동편 계곡에 석탑의 지붕돌이 흩어져 있으므로 역시 삼층석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애여래좌상은 삼층석탑 밑의 10m 암벽에 결가부좌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기법이 사실적이면서도 밑부분의 연꽃무늬 때문에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불상이다. 높이 1.9m, 너비 1.1m이다. 보물 제187호인 여래좌상은 삼륜대좌불(三輪臺座佛)이라고도 한다. 하대석은 직육면체인데, 윗부분을 다듬어서 둥글게 새겼으며, 그 위로 3층의 원형 대좌를 만들고 결가부좌인 불상을 안치하였다. 머리 부분이 없어져서 불상의 명칭을 확정 짓기 어려우나 승려상이라는 설과, 보살상·불상·미륵불상이라는 설도 있다. 전체 높이는 4.6m이며, 넘어져 있던 것을 1923년에 복원하였다. 이 용장사에는 신라 경덕왕 때의 고승인 태현(太賢)과 조선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유가(瑜伽)의 대덕 태현은 용장사에 살면서 그 절에 있는 미륵불의 석조 장륙상(丈六像)을 예배하였다. 태현이 불상을 예배하면 불상도 또한 태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고 한다. 또, 김시습은 만년에 이 곳에 머무르면서 ≪금오신화 金鰲新話≫를 저술하였으며, 죽은 뒤 사당을 금오산의 남쪽 동구(東丘)에 세웠다고 한다. 이밖에도 용장골에는 18곳의 절터가 있고, 산꼭대기에는 자연석에 복련화(覆蓮華)를 새긴 대좌 1기와, 비를 세웠던 비대석 1기, 삼층폐탑 등이 있다.
용장골 안내판.
경주 남산 등산로 안내판.
용장골 갈림길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어느 쪽으로 가서 뭘 볼 것인지를 고민하는 백두들.
일주도로를 따라 잠시 더 진행하니, 우측 용장골 건너편으로 고위봉이 보이고,
고위봉 우측으로 황발봉도 조망된다.
삼화령에서 본 고위봉 방향 조망 안내도.
길 옆에는 삼화령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삼화령(三花嶺)> 삼화령은 '삼화수리'라고도 하는데 수리는 높은 곳을 의미하며 남산에는 세 곳 수리가 있는데 금오봉과 고위봉, 그리고 두 봉우리의 삼각형 위치에 해당하는 이 곳 봉우리를 합하여 삼화령이라 불렀다. 삼화령(三花嶺)은 신라 시대의 화랑(花郞)이 기예를 닦던 장소이자, 미륵 사상이 융성했던 곳이다. 선덕여왕 시절 생의 스님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나를 따라오라'하며 남산 남쪽 골짜기에 데리고 가서 풀을 묶어 놓으며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나를 파내어 고개 위에 안치해 주시오"라고 했다. 다음날 그곳에 가 보았더니 꿈속처럼 풀을 묶어 놓은 곳이 있었다. 생의스님은 땅을 파 미륵불을 발견하고 삼화령 꼭대기에 모셔놓고 그 자리에 절을 지어 공양하였다. 또한, 이 곳이 미륵의 성지였음을 밝혀주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3월 3일에 경덕왕이 신하들과 함께 귀정문의 누각에 나가서 이르기를, 뜻과 예절을 갖춘 승려를 데려 오라고 하였다. 이때 검소한 옷을 입은 승려 한 사람이 남쪽에서 오고 있었는데, 왕은 그를 보고 기뻐하며 누각 위로 불러 영접하였다. 승려가 들고 있는 삼태기 속에는 다구만이 가득하였다. 왕이 그 이유를 물으니 “소승은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달여서 남산 삼화령의 미륵 세존께 드리는데 오늘도 차를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삼화령이 미륵불과 인연이 있는 곳임이 밝혀졌으며, 경주 남산성 부근에서 삼화령과 관련된 석불 3존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 경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미륵 세존이 있었다는 삼화령의 위치와 석불 3존에 대한 존명 등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아 이를 추측하는 다른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도로 위쪽의 바위봉이 삼화령 일까?
우측 건너편 능선에는 '용장골삼층석탑'이 보인다.
<용장사 삼층석탑> 용장골에 들어서서 동북쪽 산봉우리를 쳐다보면 흘러가는 구름이 걸릴 것만 같은 높은 봉우리 위에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서 있는 것이 용장사 탑이다. 기단 밑에서 삼층 지붕까지 4.5m밖에 안 되는 작은 탑이지만 용장사터의 가장 장엄한 위엄을 나타내는 유물이다. 탑의 모양은 신라 석탑에서 흔히 보이는 석가탑 형식으로 유일하게 다른 것은 하층 기단이 없고, 바위산 위에 직적 상층기단을 쌓은 점이다. 이 탑은 계곡에서 약 200m나 되는 높은 바위산을 하층 기단으로 삼고 그위에 상층 기단을 쌓고 옥신과 옥개를 얹어 삼층탑을 쌓았으니 하층 기단인 바위산은 바로 8만 유순되는 수미산(須彌山)이 되는 것이다. 바위산 산정은 사왕천(四王天)이며 상층 기단은 도리천인 것이다. 그 위층은 구름 위에 뜬 여러 부처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일찍이 무너져 있는 것을 1922년 다시 건립하였는데, 당시 조사에 의하면 2층 몸돌 상부에 한 변이 15Cm 정도의 방형 사리공이 잇었다고 한다. 상층 기단에 기둥이 셋으로 된 것과 옥개 받침이 4단인 것으로 보아 신라 사람들이 수미산을 동경하던 9세기 초에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당겨본 용장골 삼층석탑 모습.
좌측 아래 통일전 방향으로 이어가는 일주도로를 두고, 우측의 칠불암 방향 능선길로 들어선다.
갈림길 이정표.
경주 남산의 금오봉과 고위봉 사이의 안부인 이영재를 지난다.
이영재 이정표에는 우측 용장마을 방향 갈림길이 표시되어 있다.
고위봉 방향 능선 오름길에 돌아본 금오봉 방향.
우측 용장골 방향으로 쌍봉(태봉이라고도 함)도 지척으로 보인다.
칠불암봉을 향하는데 암릉 구간이 나타난다.
암릉의 바위들이 둥글둥글하여 진행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고, 자칫 지루해지려는 육산 능선길에 아기자기 재미를 한층 더한다.
커다란 전망바위에 올라서 돌아본 금오봉 방향.
금오봉 방향 파노라마.
둥글둥글 바위들이 있는 능선을 따르면,
앞쪽으로 가야 할 칠불암봉이 나타나고,
우측으로 용장마을 방향 갈림길이 있는 용장골 갈림길을 지난다.
갈림길에서 직진의 칠불암 방향으로 진행한다.
칠불암봉 칠불암 갈림길에서, 직진의 고위봉 방향 능선을 두고, 좌측 아래에 있는 칠불암을 다녀오기로 한다.
칠불암봉에서 조망을 즐기는 백두들.
예쁜 소나무도 함께 조망을 즐긴다.
봉화골 건너편으로 바람재 능선이 시원스레 조망된다.
우측 고위봉 방향의 능선 모습.
<경주 남산 봉화골> 봉화골(烽火谷)은 동남산에서 가장 깊은 계곡으로, 입구에서 4㎞ 지점에 칠불암과 신선암·봉수대 등이 있다.
칠불암봉에서 칠불암을 향하는 백두들.
신선암에서 내려다본 칠불암 모습.
바위 절벽에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도착.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神仙庵 磨崖菩薩半跏像)> 봉화골 정상인 칠불암봉에서 기기묘묘한 암석들을 밟고 내려오면 험한 절벽에 몇 사람이 앉아서 쉴 만한 평평한 자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멀리 남산리가 내다보이고, 아래쪽이 칠불암이다. 이 자리에서 조금 내려가 오른쪽으로 난 좁은 절벽길을 따라 20m쯤 들어가면, 동쪽으로 돌출된 바위면을 다듬어서 배 머리 모양으로 얕게 감실을 파고 이를 광배 삼아 형상을 두껍게 새긴 마애불이 나온다. 감실의 높이는 2.3m, 폭은 1.3m이며, 그 안에 조각된 보살상은 높이 1.4m 정도이다. 보살상은 바위 전체가 앞으로 굽어진 형태에 맞추어 약간 앞으로 구부린 자세인데 조금도 어색함이 없다. 보살상의 머리에는 보관이 씌워져 있고 보관의 끈은 어깨까지 드리웠으며 법의가 부드럽게 나부끼고 있다. 복스러운 얼굴에는 자비가 넘쳐흐르고 눈은 가늘게 떠서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하다. 얼굴은 이목구비가 정제되어 균형을 이루고 있으나, 두 볼이 처져 비만한 모습을 보인다. 머리카락은 어깨 위까지 늘어져 둥글게 뭉쳐 있다. 신체는 어깨와 무릎 폭이 넓어 안정된 모습을 보인다. 보상화를 쥔 오른손과 엄지와 검지손가락을 맞댄 왼손을 가슴에 붙였는데 중생의 제도를 비는 듯하다. 오른발을 대좌 밑으로 내리고 왼발은 대좌 위에 올려 유희좌의 모습을 하고 있다. 대좌 밑에는 구름이 연화처럼 새겨져 있어서 마치 보살이 구름을 타고 있는 듯하다. 대좌는 옷자락이 대좌를 덮고 있는 상현좌로서, 옷주름이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다. 발 밑에는 움직이는 듯한 구름을 새겨 전체 불상에 생기를 불어넣으면서 이 보살상이 천상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신체적인 양감이 강조된 조각 기법과 섬세한 세부 표현, 장식성의 경향이 돋보이는 점으로 미루어 이 마애보살상은 전성기 통일신라의 조각 양식에서 조금 지난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다른 마애불과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바위에 구멍을 내고, 전실을 쳤던 흔적이 남아 있다. 보물 제199호이다.
마애보살반가상 모습.
마애불 앞은 예배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만을 남겨두고 바로 아래가 낭떠러지 절벽을 이루고 있다. 보살상 앞에 앉아 앞을 내다보면 세상이 소나무 숲 아래로 아득하게 보이고, 마치 부처와 같이 하늘에 떠 있는 느낌이다. 어쩌면 자연과 종교를 이렇게도 잘 어울리게 만들었을까. 부처님의 세계는 오르기 힘든 곳, 그러나 한번 오르고 나면 이처럼 멋진 곳인가 보다.
마애보살반가상을 뒤로하고 돌아나오면,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을 돌아나오니, 문화유적 탐방로 안내판이 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암릉길을 조금 내려서면,
칠불암 마애석불이 있는 칠불암에 도착한다.
<칠불암 마애불상군(七佛庵 磨崖佛像群)> 신선암을 뒤로하고 어럽잖은 암릉을 내려서면 칠불암이 나온다.칠불암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조각되어 있는 사면불과 삼존불을 합한 데서 연유한다. 높은 절벽을 등진 뒤쪽 자연암석에 삼존불이 있고, 그 앞쪽에 네 면에 불상이 조각된 돌기둥이 솟아 있다. 칠불 왼쪽에는 석등과 탑의 부재로 보이는 돌들을 모아 세운 탑이 있다. 절벽 바로 밑에는 삼존불이 조각되어 있다. 본존좌상은 높이 약 2.7m이며 조각이 깊어서 모습이 똑똑하고 위엄과 자비가 넘친다. 대좌의 앙련과 복련의 이중 연화무늬는 지극히 사실적이어서 본존불이 마치 만발한 연꽃 위에 앉은 듯하다. 광배는 보주형의 소박한 무늬를 두드러지게 표현하였고, 머리는 소발(素髮)에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다. 네모진 얼굴은 풍만하여 박진감이 넘치고, 곡선적인 처리는 자비로운 표정을 자아낸다. 목에는 삼도가 없으며 어깨는 넓고 강건하여 가는 허리와 더불어 당당한 모습이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으로 두 손이 유난히 큼직하다. 법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인데, 상체의 옷주름은 계단식이다. 얼굴이 몸에 비해 큰 느낌을 주지만 얼굴 표정은 원만하며 전체적으로 위엄 있는 모습이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본존불의 대좌와 닮은 연화대에 서 있다.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드리우고 감로병을 쥐었으며, 왼손은 팔꿈치를 굽혀 어깨 높이로 들고 있다. 몸은 본존불 쪽으로 약간 돌리고 있으며 구슬목걸이로 장식되어 있다. 왼쪽 협시보살도 연화대좌 위에 서 있다. 오른손엔 연화를 들고 왼손은 옷자락을 살며시 잡아 들고 있다. 두 협시보살은 높이 약 2.1m, 코가 좀 부서져나간 것 말고는 완전한 모습이다. 오른쪽 협시보살이 감로병을 쥐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관세음보살, 본존은 아미타불, 왼쪽 협시보살은 대세지보살로 여겨진다. 삼존불 앞의 사면불은 암석의 크기가 동면과 남면은 크고 서면과 북면은 작은 까닭에 새겨진 불상도 대소 차가 있어 큰 것은 약 1.2m, 작은 것은 70~80㎝ 정도이다. 삼존불에 비해 조각이 정밀하지 못하며 얼굴과 몸체는 단정하나 몸체 아래로 갈수록 힘이 빠진 느낌이 든다. 네 불상 모두 연화좌에 보주형 두광을 갖추고 결가부좌하였다. 동면상은 본존불과 동일한 양식으로 통견의가 다소 둔중한 느낌을 주나 신체의 윤곽이 뚜렷이 표현되었다. 왼손에는 약합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로 생각된다. 남면상은 여러 면에서 동면상과 비슷하나, 가슴에 표현된 옷의 띠매듭이 새로운 형식에 속하고 무릎 위의 옷주름과 짧은 대좌를 덮고 있는 상현좌의 옷주름이 상당히 도식화되어 있다. 서면상은 동면상과, 그리고 북면상은 남면상과 비슷한데, 북면상은 다른 세 불상과는 달리 특히 얼굴이 작고 갸름하여 수척한 인상을 준다. 네 불상의 명칭을 확실히 알기는 어렵지만 방위와 수인이나 인계(印契)로 볼 때, 일단 동면상은 약사여래, 서면상은 아미타여래로 보인다. 풍만한 얼굴, 양감이 풍부한 사실적인 신체 표현, 협시보살들의 유연한 자세는 삼릉골 석불좌상이나 석굴암 본존불좌상, 굴불사터 석불상 같은 불상 양식과 비슷하여 통일신라의 최전성기인 8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200호로 지정되어 있다.
칠불암 마애석불 안내판.
칠불암 전경.
칠불암 마애석불 위쪽으로 신선암이 보인다.
칠불암 앞마당에서 옛 신라인들의 간절함을 다시금 느껴보고,
칠불암을 뒤로하고 왔던 길을 되짚어서 칠불암봉으로 향한다.
다시 신선암 마애석불에 들러서,
봉화골 조망을 바라보며 옛 선인들의 갈구와 희망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해 본다.
칠불암봉 칠불암 갈림길로 돌아 나오니, 스님 몇 분이 소나무 그늘에서 쉼을 하고 있다.
종교가 개인은 물론 국가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며, 그에 따라 어떠해야 하는지를 논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스님들과의 짧은 연을 뒤로하고 호젓한 오솔길을 따느니,
가야 할 고위산이 800m 남았다는 봉화대 갈림길을 지난다.
<경주 남산 봉화골 봉수대> 칠불암 바위등을 타고 정상에 오르면 용장계곡과 갈라지는 분수령이 된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250m쯤 떨어진 봉우리에는 허물어진 축대와 토대만 남아 있는 봉화대가 있다. 축대의 높이는 1.5m, 길이 38m 정도이며, 토대는 25m이다. 이 곳에서 발견되는 기왓조각이나 그릇조각들은 모두 조선시대의 것들이어서 이 유적이 신라 때부터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명활산성이나 선도산성 등과 삼각을 이루는 중요한 요충지임을 감안하면 신라 때부터 봉화대로서의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등로는 능선 마루금을 두고 사면의 우회길로 이어지더니,
백운재를 지난다.
백운재를 지나는 백두들.
고위산 정상 도착.
<고위산(高位山, 494m)> 경상북도 월성군(月城郡) 내남면(內南面) 용장리(茸長里)에 있다. 금오산(金鼇山)의 상봉을 일컫는 이름으로, 신라시대의 천룡사(天龍寺)가 이곳에 있었다. 경주 남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고위산은 고위봉(高位峰)이라고도 한다.
고위산 정상의 이정표.
고위산 정상 증명.
기온이 점차 올라가며 대부분의 백두들은 고위봉 정상부의 나무 그늘에서 쉼을 하는데, 힘들게 버텨온 흔적이 역력한 소나무가 애처로워 보였던지...
고위산 정상부 나무 그늘에서의 짧은 쉼을 뒤로하니, 멋진 바위암봉이 시야에 들어오고,
가야 할 백운암이 내려다 보이고,
우측으로는 천룡골과 오늘 산행의 종착지인 틈수골도 발아래로 내려다 보인다.
<경주 남산 천룡골> 고위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흘러내린 천룡골(天龍谷) 계곡에는 천룡사지(天龍寺址)가 있다. ≪삼국유사≫에는 당나라 사신 악붕구(樂鵬龜)가 천룡사에 와서, 이 절이 허물어지면 나라가 망하리라고 예언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절터에는 석탑·석등·주춧돌·귀부(龜趺)·법당터·석조(石槽, 2개)·불상대좌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천룡사는 원래 수리사(水利寺)라고 하였으나 1040년 최제안(崔齊顔)이 중창하면서 천룡사라고 불렀다. 200년 전까지도 이 곳에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밭으로, 일대에 주춧돌·기왓장 등이 무수히 널려 있다. 절터에는 석탑이 부서진 채 방치되어 있다. 그런데 1층 지붕돌에서부터 3층까지의 탑재들만 남아 있다. 현재의 상태로 보아 약 4m 정도 높이의 탑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 현재 머리 부분이 없는 귀부는 사각의 대석 위에 42.7㎝ 높이로 거북을 만들었는데, 그 위에 당석(幢石)을 세웠던 구멍이 패어 있다. 석조는 물을 담아놓는 장치로서 길이 2.4m, 넓이 1.3m의 두 기(基)가 원형대로 남아 있다. 이밖에도 석등·법당터·맷돌, 그리고 고려시대의 절터와 불상대좌(佛像臺坐) 등이 남아 있다. 규모가 매우 컸던 절임을 알 수 있으나, 보존상태는 미흡한 편이다.
능선을 따라 잠시 내려서니, 백운암으로 이어지는 임도가 나오고,
능선 좌측 골짜기에 있는 백운암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따른다.
잠시 임도를 따라 진행하니,
이내 백운암에 도착한다.
천룡골, 틈수골로 내려가야 하지만 먼저 백운암을 둘러보기로 한다. 자료를 보니 백운암에 대한 직접적인 것은 없고, 현재의 백운암 아래쪽에 있는 백운암터에 대한 자료만 검색된다. 아마도 현재의 백운암과 백운암터는 별반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백운암터에 대한 내용을 옮겨 본다. "경주 백운암 사지(慶州白雲庵寺址)는 경주시 남산(南山) 고위봉 아래 백운암(白雲庵)의 아래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절터이다. 건물지의 남쪽과 동쪽에 축대의 일부가 남아 있다. 남쪽 축대는 길이 20m, 동쪽은 10m 정도이다. 건물지 내에는 민묘 1기가 조성되어 있으며, 축대 아래에는 잡목이 우거져 있다. 1994년 주변 경사지를 개간하던 중 팔각연화대좌(八角蓮花臺座)의 하대석 부분과 다수의 와편이 확인되었는데, 하대석은 팔각형에 길이 84㎝, 높이 24㎝로 8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운암 대웅전 모습.
간단히 백운암을 둘러보고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와서 천룡골 방향 하산길에 접어든다.
따르던 임도를 두고, 우측 숲길로 접어들어,
천룡사지 방향으로 진행한다.
천룡사 도착.
<천룡사(天龍寺)> 경북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고위산(高位山) 천룡곡(天龍谷)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며 신라 때 창건되었다. 창건 설화에 따르면, 천녀(天女)와 용녀(龍女)라는 두 딸을 가졌던 부모가 딸들을 위해 이 절을 세우고, 딸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절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토론삼한집(討論三韓集)》에는 `계림 땅에는 딴 곳에서 흘러온 두 물줄기와 거슬러 흐르는 물줄기가 있는데, 이를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가 뒤집혀 가라앉는 재앙이 생긴다’고 나온다. 또 674년(신라 문무왕 14) 명랑(明郞)이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임시로 지었을 때, 이를 조사하러 온 중국 사신 악붕구(樂鵬龜)도 이 절이 무너지면 나라도 망할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이 절은 신라가 망할 즈음에 폐사가 되었다. 1040년(고려 정종 6) 최승로(崔承老)의 손자 제안(齊顔)이 중창하면서 석가만일도량(釋迦萬日道場)을 설치하였다. 그 뒤 조선시대에는 겨우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18세기 말에 폐사가 되었다. 최근 옛 절터 북쪽에 법당과 요사를 중건하면서 절을 복원하였다. 현재 건물로 법당과 요사가 있고, 유물로 삼층석탑과 귀부(龜趺)·석조(石槽)·맷돌 등이 전해진다. 이중 천룡사지삼층석탑은 1991년 복원한 것으로, 보물 제1188호로 지정되었다. 상륜부는 보륜 1점만 남고 모두 소실되어 남원 실상사의 탑을 참조해 복원하였다. 귀부는 거북 모양의 기단부만 남아 있으며, 석조는 가로 3.8m, 세로 1.5m의 크기이다.
젊은 스님이 천룡사에 관한 이런저런 예기를 들려준다.
천룡사 대웅전 모습.
천룡사를 뒤로하고 틈수골로 하산길에 접어든다.
천룡사지 갈림길을 지난다.
천룡사터를 지나는 백두들.
1991년 복원한 천룡사지삼층석탑은 보물 제1188호로 지정되어 있다.
틈수골 입구를 향하는 백두들.
돌아본 고위산 모습.
틈수골 입구 방향으로 진행한다.
빼곡한 대나무 숲을 지나고,
널찍한 수레길을 따라 내려서면,
좌측으로 작은 연못이 있다.
인가 담장에 피어있는 꽃들도 담는 사이에,
틈수골 산행 종점에 도착한다.
너무 일찍 산행이 종료되어 다소 느긋하게 목감을 즐기고,
울주군 두동면의 한우로 유명한 봉계 종점불고기로 이동하여,
뒤풀이 시간을 가진다.
그런데 명성에 비해 고기의 질과 서비스가 영~엉 부실하다.
부실한 식사로 화가 난 백두들이, 다시 경주에 있는 용장골맷돌순두부 집으로 이동하여 다시금 점심 식사를 한다.
백두들에게 수없이 산재한 불적지 탐방은 다소간 생소한 느낌이다. 그래도 백대명산의 하나로 꼽힌 경주 남산의 이모저모를 둘러보았으니, 그동안 경주를 수없이 방문했음에도 한번도 오르지 않았던 경주 남산이었기에 이제는 나름 경주를 제대로 둘러보았노라 예기할 수 있을 듯하다.
너무나 오랜 기억을 더듬어 찾으려니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나마 옛 사진이 남아 있어서 대충의 기록을 남길 수 있어서 다행스럽기 그지없다.
2019. 4. 1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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