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가 거꾸로 달렸다.
사진은 떠날때 사진. 처음 들어갈때 가운데 태극기가 거꾸로 휘날렸다.
후쿠야마에서 돌아와 다시 게이힌 제철소에서 계장을 익혀갔다. 후쿠야마를 보기전에는 제철소는 이런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후쿠야마를 보고나니 게이힌은 지옥이었다.
계장과장에게 제선과 압연연수를 시켜준데 대해 고맙다고
했더니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며 웃었다. 협력부서의 계약조항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현장에서 블루칼라들은 화이트 칼라보가 쉽게 니혼고깐의
계장팀과 접촉했다. 말문이 터진 탓도 있지만 한달이상 함께 지내 정이 든 것 같았다. 처음에는 계약을 거론했던 간부들도 모른 체했다. 단지 화이트칼라들의
출입만 삼가 해달라고 했다. 일본 계장요원들은 어떤 면에서 자기가 더 잘 안다는 듯이 서로 경쟁적으로
가르쳐 주었다는 게 우리 블루칼라들의 말이다. 현장에 나갈 때는 제선이던 제강이던 열연이던 데리고 나가
이것 저것을 설명해주었다고 한다. 후쿠야마에서 잠시 본 것은 최신 시설이고 곧 폐쇄할 용광로와 압연공장이지만
처음은 계약 외라고 금지하던 곳을 거의 제한없이 드나들 수 있었다.
매일 작성하는 연수일지가 충실 해졌다. 이 일지가 우리가 돌아가 제철소를 돌리는 하나의 바이블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작성했다.
그럭저럭 니혼고깐의 3개월
연수가 끝나고 떠날 때가 되었다. 떠나기 며칠 전날, 계장과장은
개인적으로 단둘이 식사를 하도록 주선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동경제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본에서는 동경제대 학위증은 약 40%정도는 먹여 살려준다는 것이다. 그는 그간 고생 많았다며 돌아가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사적으로 언제든지 문의하라고 했다. 고마웠다. 평생 계장에 대한 가정교사로 모시고 싶었다.
뒷 이야기지만 중역이 된 후 다시한번 니혼고깐을 방문했을
때에는 이미 정년퇴직을 하셨다고 해서 부탁을 해서 연락을 드리고 정중히 일본에서 식사를 모시고 그때 고마웠다고 인사드렸다.
앞으로 계장팀은 일본의 4대계장메이커인 야마다께 하니웰과 혹신덴기, 그리고 평량기회사와 오수펌프
전문회사인 오발에서 한달 더하고 귀국해야 한다.
마지막달 첫 월요일에 이다나까료를 떠났다. 3개월 정도 있어서 그런지 요장하고도 정이 들었다. 요장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야마다께 하니웰(山武Honey well로 떠났다. 동경주변이라 그리 멀지 않았다. 오전에 후지쓰우처럼 입원식을 하고
오후부터 연수를 했다. 어떻게 보면 후지쓰우나, 요코가와덴기나
같은 코스였다. 우리 직원들은 나름대로 계장인이 되어 강사가 이야기 한 대로 척척 잘 해 냈다. 강사는 연달아 우마이데수네(上手いですね, 잘 하십니다)를 연발했다.
이제 계장 입문코스는 더 이상 필요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다음주는 혹신덴기(北辰電氣)에서 한주간을 지냈다. 야마다께 하니웰이나 마찬가지로 직원들은 실험을
잘해 내었다.
그 다음은 평량기(秤量機)회사였다. 시골로 한시간 이상 달려서 도착한 곳은 아담한 공장이었다. 작은
회사일수록 대우가 좋았다. 연수생대우에서 손님대우를 하는 것 같았다.
식사질도 좋았고 숙소의 편의시설도 상류는 아니지만 호텔만 했다. 여기는 입원식도 없고 서로
만나서 간단한 설명을 하고 바로 현장으로 들어갔다. 평량기라 그래서 가벼운 제품을 측정하는 저울만 생각했는데
기중기도 있고 기계가공시설도 있었다. 주로 산업용 평량기를 제작한다고 했다.
제철산업에서는 몇 십 톤에서 백 수십 톤까지 무게를 잰다. 용광로에서
출선한 용선량도, 전로에서 출강한 조강량도 마지막 열연제품까지 공정마다 철강의 무게를 재어서 실수율을
체크했다. 마찬가지로 판매도 중량으로 판다. 만에 하나 평량기의
오차는 공급자와 수요자와의 신의 문제로 야기된다. 철강은 당시 톤당 최소 500$인데 단위 중량이 적어도 5-30톤 정도이니 그 가격차는 만만치
않았다.
이 무거운 중량을 현재 500원짜리 만한 압전지로 측정한다고 했다. 평량을 하려는 곳의 네 모퉁이에 압전지(押電池)를 설치하고 힘이 균형되게 받을 수 있도록 장치를 설치해서 중량물을 올려놓았을 때 발생하는 전류치로 무게를 계산한다고
한다. 이는 물리적인 계산치와 오차범위가 0.5%미만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만큼 압전지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중량물의 힘을 고루 받을 수 있도록 기계적인 장치제작이
중요해서 언듯 보기에는 기계공장처럼 보였다. 연수는 압전지에서 기계구조물을
설치하는 과정부터 가르쳤다. 기계 구조물을 설치하기 전에 베이스를 놓고 그 위에 압전지를 설치하고 압전지에 힘을 고루 받도록 구조물을
설치해서 조립했다. 구조물이 잘못 설치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도 시험을 했다. 그 차이를 확실히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계장은 전기에서 시작해서
기계까지 다 아울러야 한 시스템이 되었다. 실험실은 1톤부터 50톤까지의 샘플이 많았다. 하나하나 측정할 때마다 기중기로 샘플을
옮겨서 루프를 통해 중량을 측정하고는 이론적인 계산치와 차이가 오차범위안에 들어가는지 확인했다. 이론적인
계산은 철의 비중에다 체적을 곱한 것으로 체적을 측정할 수 있는 물건은 쉽게 이론적으로 계산하지만 1500도에
달하는 쇳물이나 500도가 넘는 길이가 얼마인지도 모르는 열연코일의 체적을 계산할 수가 없다. 그만큼 평량기는 제철산업에서 단단히 한몫을 했다.
마지막 주는 군마껜에 있느 오수(汚水)펌프
전문회사 연수였다. 도오쿄 주변에서거의 3시간을 이동하여
숲 속에 공장이 있었다. 공장에는 태극기가 중앙에 좌우로 일장기와 회사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어, 태극기가 거꾸로 매달렸다’며 직원이 소리쳤다. 고개를 돌려보니 파란색이 위로 빨간색이 아래로
달려있었다. 공장입구에 기다리고 있는 분이 먼 길에 오시느라고 수고하셨다고 인사하는 사람에게 답례대신
태극기가 거꾸로 달렸다고 지적했다. 태극기를 거꾸로 달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명함을 보니 영업부장이었다. 그도 힐긋 태극기를 보더니 붉은색이
위냐고 묻고는 마고또니 못데 교수쿠니 존지마수(誠にもって恐缩に存じます, 대단히 죄송합니다의 경어)하고는
바로 게양대로 쫓아가 태극기를 내리고 바로 달았다. 그러는 사이 공장장이 나왔다. 공장장은 절을 한 열 번쯤 하면서 대단히 죄송하다며 어렵게 어제 저녁에야 태극기를 구해와서 그러잖아도 빨간
쪽이 위인가 파란 쪽이 위인가 하고 망서리다가 도오쿄오 한국영사관에 전화를 했는데 너무 늦은 탓인지 전화가 연결되지않아 의논 끝에 하늘이 푸르러
파란색이 하늘이고 빨간색이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고 실수를 했다는 이야기였다. 웃을 수도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듣고보니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다고 생각도 들지만 마음은 편하지를 못했다. 그때까지 한국에 대한 인식은 일본에서는 건국후 20년이 지났지만 조선으로 각인되어있는게 한국의 인식이었다. 공장장까지 나와서 사과를 하는데 배우러 온 사람들이 이쿵저러쿵할 수도 없었다.
오후부터 연수를 개시했다. 우선 제철소에서 발생하는 오수를 하나하나
열거했다. 제철소의 오수는 그냥 더러워진 물이 아니고 쇠 찌꺼기나 탄가루, 화학물질인 황산이나 염산이 썩인 물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비중이 빡빡한 것부터 희멀건 것까지 있어 각 종류마다 재질이나 임펠라(물을 퍼 올리는 날개처럼 생긴물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도 어떻게 보면 기계 분야인데 가동 중에 발생하는 오수를 퍼서 정화조로 보내는 장치를 조정하는 게 계장 분야이어서
계장에서 다룬다고 했다. 펌프라면 전 직장에서 설계하는 것을 보아서 그런대로 형태를 알지만 오수펌프는
전혀 다른 형태였다. 우선 임펠라부터 타원형으로 생긴 두물체가 맞물려가며 오수를 퍼 올리고 있다. 오수에 작업복 오염도 오염이지만 안전을 위해 고무 옷과 보안경을 주었다. 화기
때문에 석면복을 입다가 둔탁한 고무 옷을 입으니 움직임이 더 둔 해졌다. 일반 오수라면 옷만 버리지만
황산이나 염산인 썩인 경우는 실명도 할 수 있다고 겁도 주었다. 일본에서 마지막 5일을 보내는 것이다.
숙소는 영빈관이었다.
연수 마지막 주라 무언가 좀 기념품을 마련하려고 상가 쪽이기를 바랬는데 워낙 시골 산림속에 있어 기대와는 어긋났다. 그들은 공장이전을 막 마친 상태라 아직 정리가 덜 되었다며 우리가 이 영빈관의 첫 손님이라고 했다. 영빈관이래야 2층에 방이 몇 개이었고 아래층에 회의실과 접견실, 식당이 있었지만 1층은 사방이 유리로 되어있어 밖이 훤히 보여 특이
했다 지금은 통유리벽이 많지만 처음 본 유리 집이었다. 하지만 회의실은 편광유리를
사용해 외부에서는 볼 수 없다고 했다. 학교에서 편광유리를 배웠지만 처음 대하는 것이다.
갑자기 노년에 산림이 우거진 숲 속에 이런 집을 짓고 살아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집을 13평짜리와 20평짜리
두 번이나 지어보았으니 세번째는 이런 집을 지을 생각을 했다.
1972년도도 봄이 다 지난 6월 장장 5개월의 연수를 마치고 계장인이 되어 귀국했다. 당시는 대부분의 공장들이 외국인에 의해 턴키(Turn Key)베이스로
건설되어 대학에서 전공한 이론보다 실무 기술은 그들에게 배워야 할 시기였다. 설비공급사에 기술연수를
가서 배우거나 그때 파견된 기술자들에 의해 배워야 했다.
물론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지만 대학을 졸업한지 8년차에도 기술을 배우지 않으면 선진국 산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