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자락 동화사 아래쪽 미대 마을에 송담 외선조님(14대조 석담 조 장인) 묘소를 참배하였습니다.(공산터널을 지나 다리 건너 왼쪽 마을)
약 5년 전에 미대 마을을 방문하여 수소문 끝에 하천 쪽으로 오르다 보면, 산 윗자락에 계신다는 말씀을 듣고 올랐으나, 인적이 뜸하여 더 이상 찾을 수 없어서 하산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일 다시 미대 마을을 방문하고 마을회관 인근 주택 촌로께 여쭈었더니, 남편 분께서 인천채씨이며 예전에 종중 일을 보셨으며 안채에 계신다며 안내해 주셨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자초지종 말씀드리고 송담 외선조님 묘소를 방문하고 싶다고 말씀드리니 선뜻하게 안내해 주셨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어르신과 차편으로 10여분 정도 팔공산 자락으로 오르니 재실(齋室)이 있었으며 관리인이 거주하나 출타하였습니다.
대구 동구 내동 산 32에 소재한 묘소는 재실에서 50m쯤 거리의 산등성이에 위치하였습니다.
그동안 문헌이나 종보, 대구 향교를 통한 송담 외선조님의 덕행과 행력을 접하였는데 감개 무량한 마음으로 숙배하였습니다.
광주이문 칠곡파의 중흥은 덕행과 문예가 뛰어나 달성십현(達城十賢) 오르신 송담 할아버지의 고매한 인품에 기반한 것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참고로 문헌에 의하면 송담 선생은 을사사화의 어지러운 정쟁을 보고 출사를 뜻을 접었다고 전합니다.
이후 후학 양성을 위하여 팔공산 연경서원 건립을 주도하였으며, 검단동 금호강변 왕옥산 기슭에 압로정, 소유정을 건립하였으나 압로정만 현존하며 외증손 귀암 이원정 (12대조, 이조판서)의 중건기 현판이 소재합니다.
압로정과 소유정은 뛰어난 풍광으로 유명했던 대구를 대표하는 누정으로 알려져, 부임했던 여러 지방관과 수많은 시인 묵객이 정자를 방문하여 다수의 시가 작품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고려말 안향에서 출발한 성리학은 여러 현인을 거쳐 퇴계 선생으로 이어졌고, 대구 지역은 계동 전경창, 송담 채응린, 임하 정사철, 선생을 필두로 강학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무수한 유학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모당 손처눌 (석담 조의 종고모부) 선생은, 송담 채응린 외선조를 사승 (師承)하였으며, 석담 이윤우 조는 모당과 한강 정구선생을 사승하였습니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미대 마을은 무척이나 평화롭고, 시간이 정지된 아늑한 배산임수의 지형이었습니다.
집으로 향하는 길~문득 350년 전
광이 석담 조와 미대 마을 인천채씨의 인연은 유년시절 이래로 스승이었던 종고모부 모당 선생과의 인연이 조금은 관련하지 않았나 조심스럽게 관련해 보았습니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