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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50
마태복음 6장 9-13절
지난 시간까지 십계명에 대하여 살폈는데, 십계명은 한 마디로 우리의 신앙과 삶의 규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데 있어 우리가 행하고 금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으로서 모든 이웃에 대하여 우리가 행하고 금해야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죄와 비참함에서 구속함을 받았다고 할 때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믿음에 합당한 열매란 없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 열매란 십계명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물론 십계명 전체를 완전히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의 계명도 우리는 완전히 지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여전히 부패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순종하도록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알리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요리문답 115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평생토록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을 더욱 더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과 의를 더욱 진지하게 구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을 깨닫고 우리의 의가 되시고 우리의 거룩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늘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완성되기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더욱 새롭게 되도록 끊임없이 수고하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거룩이 되신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게으르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열심을 가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런 열심조차 늘 점과 흠으로, 부족함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순종하도록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령께서 은혜를 베푸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요리문답은 기도에 대한 부분으로 넘어갑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전체 구조로 생각해 보면 죄와 비참함에서 우리를 구속하셨다고 할 때 구속하신 그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고 할 때 율법에 대한 순종을 가르칩니다. 여기서 십계명에 대한 해석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에 대한 순종을 할 수 없는 우리의 모습 때문에 기도할 것을 가르칩니다. 여기서 주기도에 대한 해석이 있습니다. 결국 죄와 비참함에서 우리를 구속하셨다고 할 때 우리의 마땅한 감사는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는 율법에 대한 순종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알고 늘 기도하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말씀에 대한 순종과 기도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거룩은 바로 이 두 가지를 주된 방편으로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5)고 전합니다.
그럼 기도란 무엇인가? 요리문답이 기도에 대한 정의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살핀 바 있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기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제98문. 기도는 무엇입니까? 답.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요16:23)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시32:5-6, 단9:4) 하나님의 긍휼을 감사드리며(빌4:6)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요일5:14) 우리의 바램들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시62:8).
일단 기도는 누구에게 하는 것인가?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모든 만물의 창조주시요, 섭리자이시며, 또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좀 더 풀어 설명하면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79문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해야 합니까?” 오직 하나님만 마음을 살피시고(왕상8:39, 행1:24, 롬8:27), 요구를 들으시고(시65:2), 죄를 사하시고(미7:18), 모든 소원을 이루실 수 있고(시145:18,19); 유일하게 믿을 분이시고(롬10:14), 경건한 예배로 경배 받으실 분입니다(마4:10). 예배의 특별 부분인 기도는(고전1:2) 모든 사람에 의해 다른 그 누구도 아닌(롬10:14)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합니다(시50:15).”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드린다고 할 때 중보자 없이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사실 창조주와 피조물 자체만 해도 그 간격은 너무나도 큽니다. 거기에 인간은 죄를 더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불결한 인간의 간격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간격보다 더 크게 만들었습니다.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부르실 때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르십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결코 우리의 어떤 기도도 하나님께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으로 반드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그럼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소요리문답은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죄에 대한 고백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감사입니다. 셋째 우리의 바램들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십계명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우리는 십계명을 통해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죄됨을, 우리의 연약함을, 우리의 부족함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죄에 대한 고백을 한다고 해서 모든 죄에 대한 고백을 하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죄에 대한 고백을 할 때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도 사실은 은혜이지만, 모든 죄를 고백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감사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런 감사와 함께 우리의 바램들을 하나님께 간구하게 됩니다. 다만 우리의 바램이라고 할 때 십계명과 어긋나서는 안 되는데,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바램이어야 합니다.
참고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저자인 우르시누스는 기도에는 두 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간구와 감사가 그것입니다. 간구란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필요한 축복들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요, 감사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바 은덕들에 대해 감사를 드리고 그것들을 높이 기리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죄에 대한 고백이 빠졌다고 해서 죄에 대한 고백을 인식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간구 안에서 죄에 대한 용서까지 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이어 열거하는 기도의 종류를 통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데, 우르시누스는 기도의 종류로 네 가지를 말합니다. 첫 번째는 악한 것들을 물리치기 위한 기도이고, 두 번째는 선한 것들을 위한 기도이고, 세 번째는 다른 이들을 위한 기도이고, 네 번째는 받은 바 은덕과 물리쳐진 악들에 대한 감사로 구분합니다. 악한 것을 물리치고 선한 것을 위해 간구한다고 할 때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죄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르시누스는 계속해서 사람과 장소의 정황에 따라 공적인 기도와 사적인 기도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하면서, 특별히 공적인 기도에 대한 설명에 있어 교회의 공적인 집회를 주관하는 사역자가 인도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보시면 왜 우리에게 기도가 필요한지를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개혁신학을 하는 우리에게 더더욱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그리고 섭리를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기도에 대하여 소홀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바 전체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 때문에 저것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했지만 ‘고르반’이라고 해서 하나님께 성별하여 바쳤다는 것으로 부모에게 해야 할 의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작정하셨다고 할 때 작정의 내용 안에는 결과만이 아니라 그 결과에 도달하도록 하는 과정도 정하셨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기도하지 않아도 작정대로 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맞지만 한편으로는 틀리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으로 맞다는 것은 작정대로 된다는 말 자체는 맞습니다. 작정하시면 반드시 작정하신 대로 됩니다. 그러나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작정 안에서 어떤 수단을 두시면 반드시 그 수단을 통해 작정하신 바를 이루신다는 것 때문입니다. 수단 없이 이루시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하나의 예가 있는데, 어거스틴의 견인의 은총이라는 책에서 소개되는 내용입니다.(어거스틴의 은총론4, p.493). 어떤 수도원에 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사람이요, 해야 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의 비난에 대하여 그가 어떤 말로 대꾸하느냐 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수도사에게 어거스틴이 어떤 말을 했느냐? 한편으로는 옳지만 한편으로는 옳지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옳은가? 하나님의 작정대로 된다는 차원에서는 옳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상관없이 우연히 되는 일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작정에서 벗어난 일은 없기 때문에 작정대로 된 것이라고 한 말은 옳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옳지 못하다고도 말했는데, 그것은 진리의 도움을 받아 선하게 사용해야 할 것에 대하여 선하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악하게 사용했다는 점에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있다면 그런 지식과 이해가 선하게 사용해야 되는데, 오히려 자신의 죄를 하나님의 작정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 양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면 작정이라는 내용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것은 진리를 선하게 사용하지 않는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라는 수단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신 바를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그 명령에 순종함으로 감사를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 기도가 필요한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16문입니다.
116문. 그리스도인에게는 왜 기도가 필요합니까?
답.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의 가장 주요한 부분이기 때문이요(시50:14-15, 116:12-19, 살전5:16-18),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와 성령을, 오직 마음으로 탄식하며 쉬지 않고 구하며, 또한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자들에게만 주시기 때문입니다(마7:7-8, 눅11:9-13).
앞에서도 말했지만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셨다고 할 때 구속하신 그 은혜에 대한 감사의 부분 중 하나가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우리에게 명하셨습니다. 즉 기도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께서 친히 기도를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50편 15절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까지 권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내 상황이 기도해야 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표현은 시간적으로 24시간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 어느 때나 늘 하나님을 의뢰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필요성을 생각하게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가? 둘째, 우리의 필요와 결핍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것은 창조주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즉 무죄의 상태일 때도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가 필요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죄의 상태에서 죄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는 더더욱 우리의 구원자가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육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적인 모든 것이 누구로부터 오느냐?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런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서 어떻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특히 마태복음 7장에서 기도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가르치기도 하십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 기도해야지만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9-11) 이때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은 무엇인가?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 11장에서는 성령이라고 가르칩니다(눅11:13). 나중에서 설명하겠지만 분명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뿐 아니라 육적인 것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하는 자들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고자 하시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요리문답이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와 성령을 오직 마음으로 탄식하며 쉬지 않고 구하며 또한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자들에게만 주시기 때문에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께 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이런 저런 은사들과 그 은사들에 대한 어떤 결과들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구하지 않아도 주시는 것 아닙니까? 물론 육적인 것에 한해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구하지 않음에도 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실 만큼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마5:45). 그러나 저들은 믿음, 회개, 회심, 죄 사함, 중생 등 택자에게 만 고유하게 주어지는 것들은 결코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들이 받은 육적인 선물들은 그들의 구원에 기여하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그들의 멸망을 도울 뿐입니다.
여기서 다시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믿음, 회개, 회심, 죄 사함, 중생 등 택자에게만 고유하다고 할 때 그 모든 것을 구해야지만 받는 것인가? 믿지 않는 자들은 이런 것들을 구하지도 않을 것이고 또한 받을 수도 없지만, 기도해야지만 받는다고 할 때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는 이런 내용들이 우리의 기도가 있어야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사실 기도는 성령의 결과입니다. 성령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그를 사모할 수가 없고, 오직 성령만이 우리 속에서 기도를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주시는 것들은 본질에 있어서 우리의 기도보다 앞섭니다. 그러나 계시된 방식, 다시 말해 성경 기록에 따르자면 이러한 것을 구해야지만 받을 수 있다고 말함으로 기도하게 하심과 동시에 기도를 통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로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르시누스의 설명을 따라 표현하자면 시간적으로 보면 그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과 동시에 그가 우리 속에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동일한 순간에 성령에 대한 사모함을 우리 속에 일으키시고 또한 그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우리 속에 성령에 대한 사모함을 일으키시며, 이러한 사모함을 일으키시는 가운데 동시에 그를 구하고 사모하는 자들에게 그를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왜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기도를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은 우리로 하여금 구하여 받도록 하는 방식으로 역사하길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때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와 관련해서는 그의 은혜와 성령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더욱 구해야 할 것은 육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것들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오직 마음으로 탄식하며 구하라고 설명합니다. 마음이 없는 입술로만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서, 그것 없이는 늘 하나님께 대하여 결핍된 자임을 인식하는 자로서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되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육적인 필요보다 영적인 필요를 더욱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구하지 않고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구원의 첫발을 내디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 하신 자들에게 기도하라고 명하신 것은 기도를 통해 받도록 하셨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요리문답 117문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에 필수적인 것들은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117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들으시는 기도는 어떤 성격을 지닙니까?
답. 첫째로, 그의 말씀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께서 구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들을 마음을 다하여 오직 그분에게만 간구하는 것이요(시145:18-20, 요4:22-24, 롬8:26-27, 약1:5, 요일5:14-15), 둘째로, 우리의 필요와 비참함을 올바로 철저하게 알아서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는 것이요(대하7:14, 시2:11, 34:18, 사66:2, 계4), 셋째로, 우리에게 전혀 자격이 없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대로 우리 주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시리라는 것을 든든히 확신하는 것입니다(단9:17-19, 마7:8, 요14:13-14, 16:23, 롬10:13, 약1:6).
요리문답은 기도에 필수적인 것 세 가지를 말하는데, 첫째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고 할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고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믿음의 조목인 사도신경 해설에 앞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계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도신경이 그러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로 계신데, 그분만이 요리문답이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앞서도 말했지만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섭리하시는 분이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시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요리문답은 그의 말씀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할 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계시한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인데, 그 말은 그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것입니다.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 외에 없습니다. 당연히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 외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할 때 하나님 존재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에 반대되는 것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란 반드시 하나님의 명령 안에서만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똑바로 직시하는 사람은 그가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것에 대한 충만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 역시 계시된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할 때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마음이 없는 기도를 어떻게 기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겉모양만 있거나 외식적인 것으로만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입술에서만이 아니라 진정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 되길 원하십니다.
둘째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할 때 하나님은 완전 그 자체이십니다. 부족함이 전혀 없습니다. 충만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상태로 있는 피조물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부패한 자입니다. 그 말은 본래부터 우리는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자요, 그만큼 부족하고 결핍된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부족함, 결핍을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께 구하겠습니까?
물론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다고 해서 항상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 외에는 없습니다. 당연히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할 때 믿음 안에서 우리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결핍을, 또한 우리의 비참함을 올바르게 철저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한다고 할 때 우리는 철저히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요리문답이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위엄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 앞에 나아가는데 어떻게 우리가 겸손하지 않고 나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즉 우리의 결핍 상태를 인정하는 낮아짐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비참함 가운데 있다고 할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뭔가를 구할 자격은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중보자 없이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연결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중보자를 두게 하십니다. 때문에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알아야만 합니다. 중보자에 대한 지식 없이는 감히 기도할 수도, 기도한다 하더라도 들어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의 결핍과 비참함을 알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지식을 따라 합당한 기도를 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기도에 대하여 들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럼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요리문답 118문입니다.
118문.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무엇을 구하라고 명령하셨습니까?
답. 영혼과 몸에 필요한 모든 것들인데,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에게 가르치신 기도에 담겨 있습니다(약1:17, 마6:33).
그러면서 요리문답 119문은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은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주기도라고 말하는 내용입니다.
119문.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무엇입니까?
답.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6:9-13, 눅11:2-4)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 주부터 살펴보게 될 텐데,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할 때 요리문답 118문은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하나는 영혼에 필요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몸에 필요한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혼에 필요한 것과 몸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반대되는 것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합당한 것,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되는 것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주님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다만 마태복음 6장 주기도에 대한 내용에 이어 다음의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3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영혼의 필요한 것도 구할 수 있고 몸에 필요한 것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먼저냐?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몸의 필요한 것이 먼저가 아니라, 영혼에 필요한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주기도를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을 뜻을 먼저 구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이후 우리를 위해 기도할 것을 알리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야고보서 1장 17절에서 증거 하는 것처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주고자 하시는 분이시고, 그런 분으로 항상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구해야 할 것도 변함없는 분이 주고자 하시는 그것만을 구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 그것이 무엇입니까? 몸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 필요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몸에 필요한 것을 구하되 영혼에 필요한 것을 더욱 구하는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