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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9일 주일 설교
성경 이야기의 구슬을 꿰어라
1~5회 설교 정리: 형상, 성전, 바벨론, 죽음, 보혈
고린도전서 13:11
내가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
설교를 위한 묵상
12월 첫 주일부터 나는 ‘성경 이야기의 구슬을 꿰어라’ 라는 주제로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다. 이 설교는 톰 라이트의 강연을 기초로 한 것이다. 모두 11개의 주제로 이루어져 있다. 그 동안 나는 다섯 개의 주제를 다루었다. 그 주제들은 성경 이야기를 꿰는 실과 같이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들이다. 이 다섯 개의 주제들은 성경을 읽을 때 기억할 시놉시스와 같고 모든 이야기를 해석하는 기준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성경이 하나의 책으로 묶인 이유는 단지 경전이라서가 아니라 그 안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생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많은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주제를 읽어낼 것인가 하는 것은 설교자와 신자들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이 관점과 통찰력을 얼마나 바르고 명확하게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기독교 신앙은 시대와 세상에 적실성을 갖춘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희미하거나 왜곡된다면 기독교회는 세상을 선도하는 등불이 되지 못하고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성경 이야기는 무엇을 들려주는가? 나는 몇 년 전부터 성탄절이나 부활절 같은 절기 예배 때 연합예배에 참석하여 다른 목회자들의 설교를 듣는다. 그때는 그 절기에 대하여 설교자가 어떤 의미부여를 하는지를 잘 볼 수 있는 기회다. 그때마다 느끼는 점은 절기의 의미를 설명하는 각 사람에게는 성경 전체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어떤 틀(FRAME)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틀이 바로 내가 말하려는 실(THREAD)이다.
나는 이전의 다섯차례 설교에서 성경 이야기의 핵심을 다섯 가지로 소개했다. 그 키워드는 형상, 성전, 바벨론, 죽음, 그리고 보혈이다. 이 주제는 각각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다: (1)인간의 존재의미, 그리고 (2)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3)하나님의 계획에 반대하는 원수, 그리고 (4)죽음을 몰아내기 위한 하나님의 회복프로젝트, 나머지 하나는 (5)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나는 이 다섯 개의 주제를 간단하게 요약하면서 그 핵심을 다시 정리하고 제시함으로 강조할 것이다. 때로는 전체를 모아 놓고 함께 볼 때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성경 이야기도 그런 것 같다. 배운 바를 복습하고 되새김질해 보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
설교 개요
1. 성경 이야기를 해석하는 틀, 프레임
2. 형상 –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3. 성전 –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
4. 바벨론, 죽음, 보혈
① 바벨론 – 하나님의 원수는 누구인가?
② 죽음 –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회복 프로젝트
③ 보혈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5. 나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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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 이야기를 해석하는 틀, 프레임
안녕하세요? 2024년도 성동구 목회자들과 공직자들의 성탄축하예배가 성탄절 다음 날 옥수교회에서 열렸습니다. 이 예배에서 왕십리교회의 맹일형 목사님은 ‘낮은 자로 오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의 이야기로 소개하는 설교였습니다. 성경본문은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8절까지였습니다. 그 본문은 예수님의 겸손하심을 본받으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그 설교를 들으면서 성탄절의 의미에 대한 다양한 해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이 날에 설교자들은 어떤 주제로 설교를 했을까요? 그 설교는 어떤 내용을 담은 것일까요? 서울의 주요 교회 성탄절 설교 제목을 찾아봅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이영훈 목사님은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는데, 그 주요 내용은 겸손하게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섬기셨듯이 우리도 이웃을 돌아보고 나누는 삶을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맹일형 목사님의 설교와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분당우리교회의 이찬수 목사님은 '목자들에게 들려진 평화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낮고 천한 일을 하고 있던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전해진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복음은 목자들에게 기쁨이었으며 그들의 눈이 열렸으므로 천사들이 전해준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님도 맹일형 목사님과 같은 본문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제목은 ‘함께 예수님의 마음을 품읍시다!’입니다. 두레교회의 김진홍 목사님은 성탄의 의미에 대하여 설교하였는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세상의 역사는 바뀌었으니 예수님을 모시고 살자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 설교에는 두 과학자가 등장하는데 한 사람은 무신론자 아인슈타인, 또 한 사람은 경건한 과학자 파스칼입니다. 그 두 삶을 비교하면서 신앙의 삶을 살자고 권면하는 것이 김진홍 목사님의 금년 성탄절 설교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성탄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그 의미를 다양하게 제시하는 설교들을 봅니다.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구원자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담긴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고 낮은 자들을 가까이하셨으며 그들에게 소망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주님을 믿고 따르자는 메시지가 성탄절 설교의 공통된 주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지난 성탄절에 저도 임마누엘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했습니다. 저의 설교를 들을 때도 여러분들은 제가 다른 목회자들의 설교를 들을 때와 마찬가지로 생각을 해보실 수 있습니다. 저 설교자는 이 이야기를 어떤 틀 속에서 풀어주는가? 이런 질문을 가지고 설교를 들으면 설교의 핵심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흔히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 주제파악을 한다는 말이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가 같은 성탄절날 다양한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이유는 같은 이야기라도 상황과 처지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편지하기를 자신이 어렸을 때는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았는데 장성한 어른이 되고 나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해석하는 어린 아이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 그 이야기를 해석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같은 이야기라도 또는 같은 사건이라도 삶의 성숙도에 따라서 달리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한 교회가 목회자를 청빙할 때 그 교회는 그 목회자의 설교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목회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경해석의 틀을 가지고 성경 이야기를 해석하여 설교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정하건대 고 조용기 목사님을 모시고 들을 수 있는 설교와 고 한경직 목사님을 모시고 들을 수 있는 설교가 다를 것임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다행하게도 다양한 설교를 들을 수 있는 환경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설교를 들으면서 자신의 신앙에 필요한 메시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우리 모두에게는 공통적으로 성경이 무슨 이야기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져야 하겠습니다. 어린 아이 시절에 가진 이해력으로 어른의 시절을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이단이 활개를 치는 이유는 교인들이 성경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최근에 다루고 있는 설교는 성경 전체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틀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의 구슬을 꿰어라!’는 주제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에 대하여 다룹니다.
저는 지난 다섯 번의 설교를 통해서 성경 이야기가 무엇에 대하여 말하는가를 소개했습니다. 먼저, 저는 성경은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들려준다고 설교했습니다(형상-Image). 그리고 두번째 설교에서 저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떤 곳으로 만들고자 하시는가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성전-Temple). 그리고 세번째 설교에서 하나님의 원수는 누구이며 그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가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은 그 원수의 이름을 바벨론이라고 불렀습니다(바벨론-Babylon). 네번째 설교에서 죽음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죽음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나타난 결과라면 하나님은 이 죽음을 어떻게 회복하시는가에 대하여 설교했습니다(죽음-Death). 그리고 지난 성탄절에 저는 보혈에 대하여 설교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피의 제사를 드리게 하셨고, 예수님은 왜 포도주를 따라 주시면서 자신의 피라고 마시라고 하셨는가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보혈-Blood).
이제 오늘은 이 다섯 가지의 주제를 간단하게 정리하고 요약하겠습니다. 공부한다는 한자어 학습(學習)은 새것을 배운다는 의미와 배운 것을 익숙하도록 반복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의 구슬을 꿰기 위하여 다섯 개의 실처럼 다섯 개의 실마리를 제시해 드렸는데요, 오늘은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2. 형상 –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옛날부터 현자들은 인간에 대하여 여러가지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말한 사람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데 그 안에서 서로 긴밀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저 멀리 여의도의 국회의사당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하나로 연동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갈대처럼 연약하지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대한 존재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사고력 또는 창의력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 인간을 유인원과 구별하여 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지혜로운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 이야기는 인간을 무엇이라고 소개합니까?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을 지으시고 그 인간을 온 세상의 중심인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피조세계에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주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피조세계에 보여줄 때 피조세계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그 모델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이 하나님을 나타낸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나타내셨을까요?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내 주신 하나님은 어떤 모습입니까? 예수님은 스스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약한 사람도 가장 귀한 존재임을 아시고 그렇게 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실하셨고 정직하셨으며 따뜻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권력자들의 부조리를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고 목숨을 위협하는 자들 앞에서도 진실을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모습과 가르침을 본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지고 전수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본보기를 배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 이야기 전체를 배우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사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배우며 동시에 성경의 가르침과 이야기, 그리고 율법 등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임무를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돌보고 가르치는 교회와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 마음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목적을 가지고 사도 바울은 가르치고 본이 되면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친히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린도전서 11:1)고 권면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도 좋습니다.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도 좋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인간의 존재목적에 대하여 들려주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이 세상을 맡아 관리하는 대리인임을 일깨워줍니다. 그것은 인간의 사명과 존재목적에 대하여 들려줍니다. 이것이 성경 이야기의 고유하고 중요한 핵심입니다. 성경을 읽고 배울 때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지음받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3. 성전 –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우리는 이 세상이 조물주의 작품이라고 들었습니다. 고려말의 문인 야은 길재는 노래하기를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도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도서 1:4)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과학은 우주의 크기에 대하여 천문학적인 정보를 알려줍니다. 우주의 광활함에 비하면 우리가 사는 지구는 저울 위의 먼지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자연과 우주에 대한 정보를 많이 쌓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많은 이야기 중에서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듯이 성경 이야기는 이 세상에 대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새로운 안목과 통찰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에 따르면 이 세상은 하늘과 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우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를 말합니다. 성경은 세상을 하늘과 땅으로 이루어진 곳으로서 하늘의 하나님이 이 땅에 생명으로 충만하도록 복을 내리신다고 들려줍니다. 잠시 과학적인 지식은 옆으로 내려놓고 성경이 들려주는 이 세상에 대한 그림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그림을 볼 때 정밀화나 세밀화도 있고 추상화도 있는데 그 두 가지 그림은 각기 독특한 아름다움과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대한 성경의 그림을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땅을 위한 계획을 세우시고 복을 내리십니다. 성경 이야기를 보면, 하늘과 땅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 땅을 비옥하고 충만하게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내려와 이 땅을 번영하게 만듭니다(이사야 55장). 땅의 일은 하늘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은 중요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하늘과 땅이 겹치는 부분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곳은 하늘의 영역과 땅의 영역이 교차하는 곳입니다.
이 중요한 곳을 성경은 에덴동산이나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오셔서 인간을 만나시고 인간과 교제하시며 인간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펼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을 때 그 형상을 두신 곳은 바로 에덴동산이며 성전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명을 받아 이 세상을 관리하고 통치하는 왕 같은 존재입니다.
성경 이야기가 들려주는 이 세상의 모습을 묘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땅에 임하셔서 거룩한 곳을 정하시고 그곳에서 인간을 만나시고 인간에게 복을 주셔서 세상 만물이 복을 받게 하십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번영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성전을 지으라고 하실 때,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범죄하였고 하나님은 그들의 성전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의 몸 안에 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세상에 오셨는데 이제 돌과 나무로 만든 건물에 거하지 않으시고 인격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셔서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에 복을 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안에 하나님이 계시며 항상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고 확신하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교회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성령을 모시고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전을 통하여 제사장들에게 알려지고 그 제사장들은 손을 들어 축복하고 한편으로 세상에 나가서 왕 같은 지도력을 발휘하여 세상을 복되게 할 것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그 후에는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들 안에 성령이 거하시고 자신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심을 믿고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의 역사가 교회를 통하여 세상에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뜻이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질 때 그런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고 예수께서는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대상이며 하나님이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 가시는 주님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대리인을 부르십니다. 그들을 우리는 교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성경 이야기의 독특성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관리하고 돌보는 임무를 맡은 존재로 인간을 소개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신화로 여기고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 이야기를 무시하고 살면 세상은 인간의 존재의미와 이 세상에 대한 아름다운 그림과 상상을 잃어버린 채 황량한 사막 같은 곳으로 바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책임과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은 주인 없는 집과 같고 도둑들이 지나간 집과 같지 않겠습니까? 현재 우리가 사는 지구의 모습이 이와 같다면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이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한 아름다운 그림과 이야기를 다시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4. 바벨론, 죽음, 보혈
나머지 세 개의 주제에 대해서는 조금 더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성경이야기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떤 곳이며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 가시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지혜를 들려줍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런 지혜는 과학이나 역사를 다룬 객관적인 지식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성경을 그들의 관점으로 비판하지만 성경이 들려주는 지혜를 무시하고 살아가는 사회는 바벨탑과 같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① 바벨론 – 하나님의 원수는 누구인가?
성경 이야기에 대한 세 번째 주제는 하나님의 원수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생육번성충만이라는 복을 선언하시고 그렇게 만들어 가시는데 그 계획을 가로막는 세력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세력을 하나님의 원수라고 부르며, 사탄이나 마귀 또는 바벨론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원수인 그들은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의 후예들이며,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늘에 닿을 탑을 쌓아 자기 이름을 내고자 했던 바벨탑 건축자들입니다. 그들은 훗날 바벨론이라는 나라를 이루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린하고 박해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이 원수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무너지고 멸망합니다.
하나님의 원수들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특징이 있습니다. '자기중심성'이라는 태도로 살아가는 모든 곳에는 타인과 자기 자신을 죽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 악과 악한 세력에 대하여 성경은 들려줍니다. 그것은 남을 괴롭히는 개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무리를 지어 다른 사람을 학대하고 괴롭히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큰 나라를 만들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이런 악한 존재들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박해를 당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순교를 합니다. 하지만 성경 이야기는 하나님의 원수인 바벨론의 심판을 분명하고 철저하게 들려줍니다. 그 이야기를 마음에 간직한 사람들은 용기를 잃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양심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 이야기가 인간에게 필요한 이유입니다.
만약에 악한 세력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에서 의인들이 일어나지 않거나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그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곳은 황량한 사막이 되고 사람들은 착취와 감금으로 고통을 겪다가 억울하게 죽어갈 것입니다. 인류는 이렇게 처절한 세상을 충분히 겪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류는 하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우리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공생과 함께 번영할 수 있는 공영의 지혜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성경 이야기가 담고 있는 지혜입니다.
② 죽음 –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회복 프로젝트
성경은 죽음에 대하여도 소개합니다. 죽음은 자연의 섭리 가운데서 보면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충만하라는 복을 명하신 것을 생각해 본다면 죽음은 일종의 형벌입니다. 성경은 죽음이 죄의 결과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과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라면 죄를 용서하시고 죄의 결과인 사망을 몰아내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망이 패배하여 쫓겨난다는 것은 부활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 같이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린도전서 15:21~22).
부활의 이야기는 우리의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통찰이며 희망입니다. 우리는 병들고 죽어서 부패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자연의 순리로 받아들이고 사는 것도 삶의 한가지 자세입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이 이 세상을 고치시고 회복하시는 분이라면 우리를 위해 죽음까지도 몰아내시고 만물을 회복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처럼 세상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프로젝트의 완성이 부활입니다. 그런 믿음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끝까지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합니다.
③ 보혈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금년 성탄절에 저는 보혈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에는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보혈을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이 피의 제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고 닦아내는 제도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이 세상을 회복하는 프로젝트를 실행하실 때 인간의 죄와 허물은 장애물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피의 제사를 통해서 인간을 정결하게 하심으로써 인간과 동행하시고 인간과 더불어 일하실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의 보혈은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하시기 위한 방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처음에는 황소나 어린 양의 피로 제사를 드리고 제단을 정결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인간들은 피의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그 일을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일을 자제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피가 아니라 정결한 양심과 착한 행실이라는 것을 예언자들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으니까요. 그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도 없는 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때때로 죄와 허물로 더럽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만찬을 제정하셔서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이라고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구약의 제사에서 짐승의 피가 제단을 덮고 그 주위까지 흥건하게 적시는 것처럼, 이제 성찬식을 통해 마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내면에 있는 양심의 제단을 적시고 정결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게 정결하게 된 우리의 심령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그 프로젝트를 실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성찬식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하며 그것을 잊지 않게 하는 귀한 예식입니다.
5. 나가는 말
우리는 어떤 사람이 신앙인이냐 아니냐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자신이나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교회에 등록했거나 직분을 받았거나 또는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신앙을 가진다는 말은 엄밀하게 말하면 성경이야기를 믿고 그 이야기를 따라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언행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이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신 것과 그렇기에 하나님이 이 세상 만물의 주인이심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신앙인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대리인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하는 사람임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의 믿음은 헛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모든 일을 자기중심적으로 처리하면서 이웃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있어서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 대하여 성경은 잠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은 우리가 욕심이나 두려움 때문에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하지 않는지 돌아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날 그를 다시 살리실 것이며 그때 새롭게 된 세상에서 주님과 더불어 왕노릇 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그의 죽음은 멸절이며 모든 것이 끝나는 자리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의미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하나님의 새 창조는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보혈을 기념하는 성찬식에 참여하면서 그 포도주를 마심으로 예수님의 피로 정결하게 되며 그처럼 정결하게 된 자신의 양심에 하나님이 임하시고 자기 자신은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가 마시는 성찬의 포도주는 단지 작은 분량의 음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식을 마친 후에도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이며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임을 확신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성경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들에 대하여 설교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를 엮어줄 실마리와 같은 주제들입니다. 이 말씀을 주의깊게 듣고 깊이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성경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마치 공기와 같아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공기의 힘을 이용하여 육중하고 거대한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신앙의 힘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