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문관(無門關) 사십육칙(四十六則)
간두진보(竿頭進步)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본칙(本則) 역(譯)
석상 화상이 말했다. 백 척 장대 끝에서 어떻게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인가? 다시 옛 사람이 말했다. 백 척 장대 끝에 앉은 사람은 비록 도(道)에 들어 왔으나 아직 참된 것은 아니다. 백 척 장대 끝에서 모름지기 한 걸음 더 나아가야 온 우주에 온 몸을 드러낼 것이다. 石霜和尚云, 百尺竿頭如何進步. 又古德云, 百尺竿頭坐底人, 雖然得入未為真. 百尺竿頭須進步, 十方世界現全身.
평창(評唱) 역(譯)
무문이 말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몸을 뒤집을 수 있다면 어느 곳에선들 존귀하다 불리지 않겠는가? 비록 그러하다 하더라도, 말해보라! 백 척 장대 끝에서 어떻게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인가? 허어! 無門曰 進得步, 翻得身, 更嫌何處不稱尊. 然雖如是, 且道, 百尺竿頭如何進步. 嗄.
송(頌) 역(譯) 게송으로 읊다.
정수리 위의 눈을 감아버려서 저울의 첫 눈금을 잘못 읽는다면, 아낌없이 목숨을 버릴 수 있더라도 한 장님이 뭇 장님을 이끄는 것이다. 頌曰 瞎卻頂門眼, 錯認定盤星. 拚身能捨命, 一盲引眾盲.
사족(蛇足)
간두진보(竿頭進步) 공안(公案)을 선사는 석산경제(石霜慶諸) 선사(禪師)다. 선사는 담주도오산(潭州道吾山) 원지선사(圓智禪師)의 법을 이었다. 이 공안에서 고덕(古德) 스님은 남전선사(南泉禪師)의 문하(門下)의 장사경잠(長沙景岑)을 말한다. 석상이 말했다. 백척 장대 끝에서 어떻게 한걸음 더 나갈것인가? 다시 옛 사람이 말했다. 백척 장대 끝에서 앉은 사람은 비록 도에 들어왔으나 아직 참된 것은 아니다. 백척 장대 끝에서 모름지기 한 걸음 더 나아가야 온 우주에 온몸을 드러낼 것이다. 본칙(本則) 전문(全文) 내용이다. 선불교(禪佛敎)에서는 백척간두(百尺竿頭)는 향상일구(向上一句)를 말한다. 옛부터 향상일구(向上一句)는 천성부전(千聖不傳)이라고 했다. 그 많은, 성인(聖人)들도 입도 뻥끗, 못한다는 말이다. 자내증(自內證) 체득처(體得處)라 말을 해도 먹고 마셔본 사람의 깨닫는 사람의 경지이지 먹어보지도 않고 보지도 않는 사람은 모른다는 말이다. 부처님께서 60명 아라한 비구와 함께 전법 선언과 함께 전도행각(傳道行脚) 길에 나선 것이, 향상일구(向上一句) 소식(消息)과 함께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이다. 부처님도 깨닫고 나신 후에 45년간 입이 쓰도록 고주알, 미주알 하셨지만, 최종 말씀은 한 자도 설 한 바가 없다고 하셨다. 이것이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 향상일구(向上一句) 소식(消息)이다. 여기서 석상선사가 말한다. 백척 장대 끝에서 어떻게 한걸음 더 나갈것인가? 백척간두에 앉아만 있으면 잠든 것과 같다. 고요 적정에 안주(安住)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한 발 내딛고 걸으라고 했다. 그 장대 꼭대기에서 걸으라면 떨어져 죽으란 말인가? 그런 말이 어디 있나? 향하로(向下路)로 내려오란 말이다. 상구보리(上求菩提) 했으면 하화중생(下化衆生) 하란 말이다. 하화중생(下化衆生)이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다. 자내증(自內證) 구경처(究竟處)에 안주(安住)만 하고 있으면, 안된다는 말씀이다. 심우도(尋牛圖)에서 반본환원(返本還源)이 (百尺竿頭)라면 진일보(進一步)는 거리로 나가는 입전수수(入廛垂手) 중생제도(衆生濟度)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45년간 입이 쓰도록 고구정녕(苦口叮嚀) 하셨다. 고구정녕(苦口叮嚀) 설법(說法)이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다. 평생 수행한답시고 비상(砒礵) 같은 시주 밥 얻어먹고 토굴에 홀로 앉아 소승(小乘)마냥 안주(安住)하는 것을 질타(叱咤)하는 공안화두(公案話頭)이다. 마음에 새겨볼 화두다.
화옹송평(和翁頌評) 역(譯)
백척의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내 걷는 것, 향상로길 끝의 공안 화두일세! 스스로 마음 자성불(自性佛)을 깨달았으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시주 밥 갚는 일일세! 百尺竿頭進一步 公案話頭向上路 自內體證自性佛 下化衆生飯價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