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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자기 증거
본문 <요5:30~38>
성경은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을 ‘죄로 죽은 자’라고 규정합니다. 죄로 죽었다라는 말은 ㅎ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내지를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ㅎ님이 바라시는 선과 의를 행할 수 없는 자라는 의미에서 ‘죽은 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기 주제를 모르는 인간들은 ㅎ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팔을 걷어 부치고 열심을 냅니다. 이게 죄로 죽은 자신의 어떠함을 모르는 인간의 영적인 현주소입니다. 성경은 이런 악인을 총칭해서 너희 아비는 마귀니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자기 가능성을 가지고 율법을 행하여 스스로 구원을 따내겠다는 자들을 사단, 마귀새끼라고 말합니다.
지난 주 말미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했지요. 십자가 복음이 들려지면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와,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는 자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일컬어 생명의 부활이고,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고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을 심판의 부활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이란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복음을 믿지 않으면 그 자는 이미 심판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요3:18>에서 이미 언급하심..(같이 읽고,...) -> IX를 믿지 않는 것이 곧 심판이라는 것임.
왜냐하면..이어짐(19~21절까지 읽으면서)
-정죄는 이것이니(심판의 이유가 이것): 빛이 왔으되 자기 행위가 악함으로 빛(IX)보다 어두움을 사랑한 것(이게 심판의 이유임), 자기 행위가 악하다는 말은(주의/ 윤리 도덕적인 악행을 말함이 아니다. 세상과 성경의 관점은 다름. 십자가가 기준/ 세상적으로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는다) 그러므로 여기 악한 행위란 자기 의를 가지고 내심 뿌듯해하고 자랑하는 자들을 말한다. 자기존재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사는 자들이 악인들이다.
이들이 복음을 믿지 않기에 이미 심판으로 죽은 자들이라는 말이고, 복음을 영접한 자들은 죽은 자리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들입니다. 이게 주님의 심판이고 구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죽은 자와 산자를 심판하여 갈라낸다고 하니까, 유대인들이 그 심판을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당신이 무슨 근거로 심판자라고 말하는지 그 증거를 대 보라고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36절에서, 자신이 하는 일이 그 첫째 증거요, 둘째는 하나님이 증거해 주고 있다고 합니다(36절 다시~) 그런데 문제는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최소한도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을 내 세워야 한다는 법이 있습니다.
(신19:15)..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증인제도는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인하여 애매하게 사람을 해(害)하는 일을 막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법정에선 반드시 2~3명의 증인의 증거를 채택하도록 되어 있고, 증인은 본 사실을 그대로 증거 하여야 합니다. 한명이 아니고 2~3명이 이어야 하고, 그리고
만약 위증을 하였다는 것이 탄로가 나면 그 사람도 동일한 범죄자로 취급당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서 증인의 증거는 진실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그 증인도 누구나가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합당한 증인이어야 하겠지요.
자기들끼리 짜고 하는 증인은 증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 할 수 있는 보편성을 벗어나, 이해되지 않는 증인을 내 세우면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원칙으로 보면 지금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내어 놓는 증거(증인)는 얼토당토 않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예수님이 자기가 하는 일이 자기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과, 또한 하나님이 자기를 증거해 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유대인 앞에서 ‘내가 심판자다’ 그럽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웃기고 있네! -네가 어떻게 심판자인데?
그 증거를 대 봐라?.. 증인을 내 세워 봐라!..(이러는 거지요.)
이에 예수님이 그래!, 그럼 증인을 대지!
그러곤 내가 하는 일이 증거이고 하나님이 증인이다! 라고 합니다.
이걸 누가 수긍하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수용하겠습니까?
덮어놓고, 예수님의 말이라고 하니 무조건 ‘옳겠거니’ 하지 말고,,
우리가 2천 년 전 유대인들과 예수님이 쟁론하는 그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고 본문을 본다면 말이지요...
누구 말에 동의하겠습니까?
유대인의 말에 동의하지 예수님의 말에 동의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는 신(神)이요! 라고 하였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당신이 신(神)이라는 증거가 무엇이요!
그 증거를 대 보세요! 라고 할 것 아닙니까?
그러자 내가 하는 일이 내가 신(神)이라는 증거이고, 하나님이 내가 신(神)이라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소! 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별 미친 사람 다 보겠네! 라고 하며, 그 사람의 말을 더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의 정당성을 증거 하고자 한다면, 상대방이 알아먹고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의 정당성을 위해 내 세운 증거와 증인은 유대인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유대인들이 받아들일 수도 없는 말을 할까요?
예수님의 이러한 태도를 보면 무슨 숨겨진 의도가 있음을 감지 할 수가 있습니다.
나아가서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나눈 대화를 자세히 관찰하여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설득해서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동의해 달라는 말이 아닌 것이지요.
너희들이 믿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나는 하나님이 보내서 온 아들이며 세상을 심판하는 심판 주! 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간이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홀로 그냥 하나님이세요.
피조물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서 하나님이 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피조물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아요.
다만 하나님으로서 일하고 계시는 것이 하나님을 증거 할 뿐입니다.
만물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 태양계에서 천체의 운행을 보자. 태양을 중심으로 9개의 혹성이 돈다. 그리고 지구의 위성은 달이 있고, 지구는 태양을 자전과 공전을 하며 돌기에, 낮과밤 4계절이 만들어진다. 밤에도 달이 있어 은근한 빛이 비춤(지구~신묘막측),누가 운행?(우연?). 인공위성은 밧데리로.
-정교하고 규칙적으로 운행됨.. 저절로? (뉴턴).. ㅎ님 없으시면 무질서..즉시 파괴될 것
만물에서 ㅎ님의 관심은 오직 자기 백성들임..나머지는 들러리 역할/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난 이후로 ‘아버지가 죽은 자들을 살리심 같이 일하시니 나도 일 한다’라고 하는 말들은 모두가 ‘내가 바로 아버지께서 보낸 하나님이다’라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면 정말 사람이 할 수 있는 영역을 초월한 일들이지요. 아니 38년이나 땅에 붙어살던 사람을 말씀 한마디로 일어나 걷게 하셨잖아요. 이게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능력인가요? 죽은지 나흘이나 지나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려내는 게 사람으로서 가능한 일인가요? 요9장을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을 눈뜨게 하십니다. 그날도 안식일에요.
그럼 이 예수가 누구신가? 정말 ㅎ님의 아들이 아닐까? 주님께 시선을 돌려야 할텐데.. 그런 놀라운 일을 보는 게 아니라, 왜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했느냐? 당신은 이단이 아니냐? 이렇게 딴지를 건다니까요.. 왜 그래요? 율법에 매인 종이되서 못 보는 겁니다. 교리에 잡히고 종교에 잡히면 빛이 와도 빛을 못 알아보지요. 이게 율법을 행하는 자신들을 믿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주님의 일하심을 믿어 영접하는 사람은 생명에 속한 사람이고, 영접하지 않는 사람은 사망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애초부터 유대인들을 설득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설득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가령 죽은 자를 살려 내도 그때만 놀라운데? 대단한데~하고 말지, 믿음으로 연결시키지를 않는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의 이런 태도는 누가 내 백성인가를 찾아내기 위함이지, 설득해서 예수님 백성 만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미 창세전에 영생 받기로 작정 된 자와 아닌 자를 갈라내기 위함입니다.
마16장에 보면,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어보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지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주님 말씀이, 너희들이 내가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안 것은 너희들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려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공부해서 되는 일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심판주이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 하는 그 첫째가 자신이 하는 일이고, 둘째가 하나님이 증인이라고 말한 것은, 유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34절에서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할 생각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만 내가 구원자라는 것을 알리고 싶을 뿐이라고 합니다.
34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證據)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결코 인간들에게 인정받고자 하지 않으십니다.
인정받기 위해 증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바로 너희를 구원할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리고 계신 것입니다. 일종의 선언이지요.
내가 바로 아버지가 보낸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하는 일이란 -죄인을 구원하는 일로서 증거를 삼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주 구약을 통해 자신에 대한 예언을 설명하시곤 했습니다.
<눅 4:16-21>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사야 선지자가 뭐라고 했지요?
성령이 임하면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된다고 합니다.
-38년 동안 병에 포로가 되어 평생 종노릇 하던 사람이 병에서 자유케 된 것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내용이 아니냐, 이 말입니다.
내가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증거해 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걸 보고도 모르는 것은 너희는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란 말입니다.
죽은 자들인 너희에게 내가 뭐가 답답해서 날 좀 알아달라고 하겠느냐 이 말입니다.
난 너희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의 아들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천국 복음을 전하는 이러한 일들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해 준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냐 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인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되고 인정 안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온 세상이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해도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하나님이라는 사실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이 하나님으로 인정해 준다고 해서 기뻐하지도 않고,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속상해 하지도 않습니다. (요2:23~25) 같은 내용 기록(유월절 때 많은 표적..예루살렘이 믿으나 주님은 그들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아시고 의탁치 아니하심. 세상 복이 아니면 배신하는 속성을 꿰뚫고 계심) -이러한 죄인들의 속성을 잘 아시기에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생은 수에 칠 가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사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죄인은 하나님 앞에선 벌레 같은 존재란 말입니다.
마치 우리가 바퀴벌레를 보고 수에 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백, 천, 수억?)
존재 가치 자체가 없는 바퀴벌레가 ‘당신은 인간입니다’라고 해서 기뻐할까요?
또한 인간이 바퀴 벌레에게 ‘야! 너 날 인간이라고 좀 인정해 줘’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인간들에게 증거를 취하지 않겠다는 것은 인간은 바퀴벌레와 같다는 말입니다.
내가 바퀴벌레 같은 너희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을 받는다고 해서 그게 무슨 영광이고 자랑거리겠느냐? 이거지요.
창조주는 피조물로부터 인정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아도 자신이 하는 일로 만족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신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곧 아버지께서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고 있는 증거이므로 만족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알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인간들에게 증거를 받으려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증거를 받고 있으면, 사람들의 증거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것이라면, 설사 누가 나를 이단이다 할지라도 개의치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나를 아들로 인정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아버지의 증거로 가는 곳이지, 인간의 증거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간에 전혀 신경 쓸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평가에 민감하다는 것은 세상에 속한 증거가 됩니다.
성도는 자기 신앙을 남에게 인정해 달라고 할 이유도 없고 또 인정받고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 자신 둘만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자기가 자신의 믿음을 가장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자들이 왜? 목회자나 성도들로부터 자기 신앙을 인정받고자 합니까?
이는 자기 안에 하나님이 주시는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이 믿어지게 하는 새 언약이 새겨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증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조건과 상관없이 단번에 피 흘려주심으로서 다 끝났다는 증거입니다.
성도가 의로워지는 것은 하늘로부터 덮쳐 오는 것이지 인간 쪽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의를 만들어 낼 필요도 없는 완벽한 의가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의의 증거를 성령이 믿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믿게 해 주시는 증거를 가진 성도는, 사람에게서 믿음을 증명 받고자 하지 않습니다.
누가 믿어주든 믿어주지 않든 개의치 않습니다.
자기 안에서 성령께서 믿어지게 해 주시는 그 증거로 인하여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이 증거는 외부에서 보면 독선적으로 보일 수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신앙은 독선적일 수밖에 없어요.
받은 자만이 증거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사도요한은 온전한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요일 4:17-19)>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보세요. 하나님의 사랑은 심판 날에 담대함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심판 날이란? 궁극적으로는 장차 도래할 날이지만, 또 한 면은 마귀의 참소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당신 그걸 믿음이라고 하고 있어! 라고 하면 주눅 들지 말고,
그래요! 나 예수 믿습니다! 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그따위로 신앙생활하면서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라고 물으면 글쎄요? 라고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요. 나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내게 주신 언약을 믿습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성령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걸 온전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 안엔 두려움이 없다고 하잖아요? 내가 ㅎ님을 사랑한 게 아니라 ㅎ님이 나를 사랑한 그 사랑이 온전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하는 겁니다.
믿음 믿음 하면서 뭔가 두려워 한다는 것은 온전한 사랑을 못 받았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만든 사랑을 가지고 속고 있는 것이지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사랑은 안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이어야 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은 언제든지 변해요. 자기 몸에 컨디션 따라서 변합니다.
치매 걸려 보세요. 그땐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말하고 행동하게 되지요.
우리도 만약 늙어서 치매 걸리면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할 수가 있어요.
그러면 지옥 갑니까? (아니지요.)
나를 구원하는 능력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있기 때문이지요.
내가 신앙고백 하는 것으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늘상 하는 말이, 내가 예수 믿으면 지옥가고, ㅎ님께서 믿게 해 주어야 천국에 간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치매 걸려서 날 모른다고 하기 전에는 탈락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치매 걸릴 일이 없으니 우리의 구원은 확정적인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넌 내 것이다! 라고 하면 내가 치매 걸려도 예수님 것입니다.
넌 치매 걸리면 버릴 거야! 라는 것이 새 언약 속에 없어요.
새 언약 속엔 너 치매와 상관없이 구원할 것이다! 라는 것이 들어가 있어요(요13:1)
-요13:1(자기 사람을 끝까지 사랑~ 끊어지지 않는 사랑..엔드리스 러브, 위대한 사람)
새 언약 속엔 인간의 행위가 없어요.
새 언약 속엔 너 살인하면 탈락이야! /너 사기 치면 탈락이야! /너 술 먹으면 탈락이야!
너 바람피우면 탈락이야! 라는 것이 없어요.
이걸 옳거니 라고 오해하고 악용하면 안되겠지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좀 의심해 봐야 합니다.
새 언약 안에 있는 성도는 인간의 행위 때문에 탈락하는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이런 것들로부터 넉넉히 지켜 주십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사라에게 나타나신 ㅎ님이 이삭을 주실 것을 말씀하자 사라가 비웃습니다. 왜냐하면 사라는 이미 경수가 끊어진지 오래 되었거든요.
이처럼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사라의 믿음과 상관없이 이삭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나요? 딤전 3:15보면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말씀)
-즉 이삭을 주셨다는 말은 IX를 믿어지게 해서 구원시킨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구원은 인간의 원함으로 오는 게 아니라 ㅎ님의 택하심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은 나 예수 안 믿을래? 해도 천국 갈 수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천국 보내기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앞에선 인간의 의지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속된 말로 하나님은 한번 한다고 하면 반드시 하는 분입니다.
한 번 결정 된 것은 천지가 쪼개져도 반드시 이루고야 마시는 분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해도 천국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베드로를 선택 했는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 했다고 해서 탈락시킨다면 예수님의 선택에 문제가 있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택은 그 어떤 것으로도 변하지 않아요. 그러니 안심하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베드로 보다 더 악질이었습니다. 마치 추노꾼처럼 예수 믿는 자들을 색출해서 죽음에 넘기던 자였지요. 그런 자도 구원된 것은 택함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나 바울이나 모두가 이 증거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지요.
구원 문제를 가지고 흔들린다는 것은 뭔가 수상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흔들린다고 볼 수밖에 없어요.
자기 행위로 믿음의 증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만들려고 하지 마세요.
성령이 그냥 불쑥 찾아와 믿어지게 해 줍니다.
이렇게 믿어지는 증거는 그 어떤 것으로도 빼앗기지 않아요.
그러나 성령이 믿게 해주시는 이 증거가 없으면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고작하여 만든 증거가 난 착하다, 난 열심을 냈다, 난 기도했다, 난 봉사했다, 난 전도 했다! 라는 것들의 자기가 뱉어낸 행위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죄인이 뱉어낸 부산물에 불과한 쓰레기들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에게서 나온 것을 받지 않습니다.
죄인에게서 나온 것은 그 자체가 이미 부정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행함은 시절을 따라서 변하기 때문에 영원하지도 않아요.
자기 기분에 따라 인간의 행함은 춤추게 되어 있어요.
마치 롤러코스터 청룡열차 타듯이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러지요.
사단이 너를 밀 까부리듯 한다고!
그래도 안심하라고 하지요.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예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기 때문에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도가 완벽하다고 하면 예수님이 대신 기도할 이유가 없어요.
안되기 때문에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빌고 계신 것입니다.
-<롬8:26/8:33~34> 송사, 정죄(법적 용어, 검사가 이 놈 죄인이라고 기소함, 사단의 기소를 ㅎ님이 다 무죄로 덮어 준다는 말임/ 왜죠? IX의 피를 보시고..이미 죄 값을 지불했기 때문)
천국엔 예수님 행위로 가는 것이지 내 행위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뿌려준 피 때문이지 자기의 열심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지, 내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이 사실을 늘 성도 안에서 증거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증거를 가진 사람은 밖에서 의를 만들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의만 자랑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의를 가진 성도는 사람들의 증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 증거가 없으면 마음은 항상 불안 합니다.
이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서 종교적인 것으로 의를 만들어내고자 노력하게 되는 겁니다.
하늘로부터 덮쳐온 증거가 없으니, 자기가 증거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의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열심과 충성으로 교회에서 점수를 따고자 하는 것이지요.
이 시대 교회 안에서 믿음 있음의 증거는 교회를 위한 충성도 입니다.
육에 속한 목회자들이 교회 충성은 곧 하나님께 충성이라는 공식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복 받고 천국 가려면 이 공식을 실천하라고 가르칩니다.
그 공식대로 살면 그 교회 안에서는 좋은 신앙으로 인정받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누가 잘하나’가 교회 표어가 되고 말았습니다.
신앙생활은 사람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증거로 기뻐할 일도 아니며 슬퍼할 일도 아닌 것입니다.
오직 자기 안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해 주시는 증거를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이것을 (엡3:17)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를 어떻게 마음에 계시게 한다구요?(믿음으로..)
이처럼 신앙생활도 성령이 증거해 주는 확실한 믿음만 있으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성도의 탄생도 ㅎ님 언약이고 성도의 신앙 유지도 언약을 붙잡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언약백성이라고 합니다.
그 언약(약속)이 믿어진다면 굳이 사람들로부터 확인 받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최고의 증거가 지금 내가 예수그리스도가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믿어지고 예수님의 의로 구원 받는 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이지요.
내가 믿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게 해 주시니 믿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믿어서 믿어지는 것은 내 쪽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 수가 있어지지만,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시는 믿음은 내 쪽 상황과는 상관없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예수가 믿어진다는 것처럼 놀라운 기적이 없습니다.
자기가 만든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 행함에 따라 믿음이 춤을 춥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믿음을 가지지 않고 자신이 만들어 낸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주변의 환경에 따라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풍랑이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가시면서 주무실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두려워 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성도가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바다에서는 언제든지 풍랑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풍랑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믿음을 가진 성도는 누가 뭐라고 한들, 어떤 환경이 된다고 한들 전혀 개의치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난 자는 세상을 이기는데 그 이기게 하는 것은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요일 5:4절)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마음속에 하나님이 주신 믿음 있으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이겨 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증거가 세상의 증거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란? 좁게는 사람들의 판단이고 넓게는 마귀의 참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으니 안심하라고 한 것입니다.
<롬8:35-39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기서 열거된 환경(환란, 곤고, 기근, 핍박, 적신, 위험, 칼..)들은 모두가
우리가 세상 살아가면서 당하는 갖가지 아픔들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그리스도에게서, 또한 ㅎ님에게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다시 말) 성도는 자신이 잘못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행위로 언약을 맺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로 맺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는 ㅎ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이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이란? 애초부터 인간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인정하건 하지 않건 예수님의 십자가는 복음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동의와 상관없이 복음 자체로서 능력으로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기백성들의 죄를 도말하셨다는 것을 증거 할 뿐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상관치 않습니다.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고, 거부하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IX게서 하신 일과 ㅎ님의 증거를 압축한다면 십자가 복음입니다.
부디 하나님이 주신 증거로 감사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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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