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피자 가게에 들렀다. 미리 준비해 놓은 피자 네 판을 받기 위해서였다. 교회 소모임을 우리 집에서 하게 돼 손님 간식용으로 주문해 놓은 것이었다.
피자 한 판 값은 5달러. 대여섯 사람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피자 네 판이 20달러에 불과했다.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서민들이 즐겨 찾는 이유가 바로 착한 가격, 거기에 있을 게 분명하다.
가게 입구에서 한 노숙자가 슬픈 눈빛으로 내게 ‘적선’(積善)을 요구했다. 브래드 피트처럼 잘생긴 백인 남자였다. 그의 과거를 알 수는 없지만, 왜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됐는지 안타까웠다.
피자 포장을 기다리는 사이 그 남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고르세요. 내가 사 드릴 테니까요.”
그는 딱 피자 한 판만 시켰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했다. 음료수는 정중하게 마다했다. 피자 가게 직원과 내 뒤에서 기다리는 손님들이 나를 이상한 듯 쳐다봤다.
내가 그날 추가로 쓴 돈은 5달러. 아무리 내가 힘들게 살아도 그 정도의 ‘호사’를 부릴 여유는 있었다. 한 사람을 살리는 데 쓴 비용이 그것밖에 안 들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내 지인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1,000원짜리 종이돈을 지갑에 가득 채워둔다. 지하철 역 입구에서 적선을 바라는 어르신들이나 장애인들을 만날 때마다 한두 장씩 꺼내 드린다. 그들의 애절한 눈빛을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기가 무척 힘들다고 한다.
“저도 알지요. 그들 가운데 일부는 ‘직업적’으로 그 일을 한다는 걸요. 하지만 그렇게까지밖에 할 수 없는 고국의 현실을 생각하면 모두 다 이해가 돼요. 오죽했으면 그랬겠어요.”
오래 전 내가 한국에서 살 때의 일이다. 부산 출장을 마치고 고속버스터미널로 갔다. 서울행 표를 끊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초라한 행색을 한 할머니가 내 앞에 나타났다. 버스비가 없다며 만 원만 달라고 했다. 나는 두말도 하지 않고 2만 원을 건넸다. 그러자 내 주위에 있던 점잖은 신사 한 분이 이렇게 말했다.
“순진한 사람이군요. 저 거짓말을 믿으시다니….”
나는 그 신사의 애정 어린 비아냥(?)이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내 지갑에는 10만 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근 포털 사이트를 통해 이런저런 글을 읽다가 색다른 글을 만났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게는 상당히 뜻이 깊은 글이었다.
그 글을 내 식으로 풀어본다.
한 노파가 식당에서 손님들을 상대로 적선을 부탁했다. 이유는 이렇다.
“자식이 백혈병에 걸렸는데 돈이 없다. 한 번만 살려 주면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
식당 안에 있던 대부분의 손님은 이 노파에게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한 사람이 지갑을 꺼내 5만 원짜리 종이돈을 내밀었다. 다른 손님들 눈에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식당 주인이 선행자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저 할머니 직업적으로 저러는 사람이에요. 다 거짓말이라고요.”
그 말을 들은 선행자는 웃으며 답했다.
“그러면 더 다행이지요. 자식이 백혈병에 걸리지 않았다니까요.”
그 글을 다 읽고 나는 한동안 흥분된 상태로 있었다. 진짜로 적선의 경지를 아는 사람을 만난 기쁨 덕이었다.
공지영의 단편 소설 ‘부활 무렵’을 읽었다. 힘들게 사는 40대 두 자매의 가슴 시린 이야기다. 파출부(요즘 말로 가사 도우미)로 일하는 동생이 주인집에서 명품 가방을 훔친다. 한 개 두 개를 넘어 열 개가 될 정도인데도 주인은 눈치를 채지 못한다. 주인집 마나님의 허세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결국 동생은 경찰서로 끌려간다. 교회에 ‘잘’ 다니는 집 주인은 절대 용서를 할 수 없다고 한다. 동생 못지않게 간난한 삶을 사는 언니가 빌고 또 빈다.
“한 번만 제 동생을 살려 주세요.”
결국 부활절 무렵, 목사의 중재로 동생은 풀려난다.
소설 중간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꼭 주인공을 향한 말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내가 아는 지인, 내 이웃을 생각하라는 말인 것 같아 더 절절하게 다가온다.
“한번 살게만 해주면 어떻게든 사는 거거든. 한번 살게만 해준다면….”
코로나 19 후유증이 한없이 길게 늘어지면서 때때로 사는 일이 버겁게 느껴진다. 애써 피하고 싶어도 숨을 곳을 찾기가 힘들다. 너나 할 것 없이 다 정신적, 경제적으로 힘든 때라 옆 사람에게 눈길을 돌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만이라도 귀를 쫑긋 세우며 신경을 쓰고 있다. 눈물을 숨기며 미세하게 외치는 누군가의 호소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발 한 번만 살려 주세요. 제발….”
박성기 / 재외동포문학상 수필 대상, 월간중앙 논픽션 우수상. 수필집 ‘공씨책방을 추억함’ 등 3권의 책 펴냄.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