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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3대 기녀 시인 설죽을 찾아서(이원걸 : 문학박사)
청암정의 만추 서정
이원걸, [조선 3대 기녀 시인 설죽](167수 완역), 도서출판 성심, 2020.
조선 3대 기녀 시인 황진이-매창-설죽
이원걸(성균관대학교대학원 한문학과 박사과정에서 한국한문학 전공. 문학박사)
에서 논문 부분인 [조선 3대 기녀 시인 설죽]을 발췌한 내용입니다.
1. 머리말
설죽은 조선조 안동권역 봉화 유곡에서 여종으로 태어나 시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기녀 시인의 역사를 보면, 삼국시대 이전에는 별로 알려진 이가 없다. 고려 때 우돌․동인홍이 있다. 조선조에 황진이․매창․승이교․일지홍이 유명하다. 새로 발굴한 자료에서 설죽을 황진이․매창과 동등한 기녀 시인으로 부각시키고 있어 주목된다.
때문에 그간의 설죽 연구 성과를 종합해 그의 실체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 설죽 관련 연구는 ‘해제’, ‘시 번역’, ‘시 분석’이 있다. 이어 그녀의 ‘생장 배경 및 관기로 지냈던 것 정도’로 파악되었다. 평소 설죽의 행적을 정리하면서 늘 그녀의 행적이 황진이와 매우 흡사하다고 생각했지만 제한된 자료로 그 이상 해명하지는 못했다.
최근 설죽 관련 문헌 조사와 현지답사를 하면서 새로운 자료를 확보함으로써 ‘설죽의 진면목’을 파악하는 주요한 단서를 찾아내었다. 흥미로운 것은 봉화 지역에서 찾아낸 자료는 설죽이 ‘여종 출신의 시인’임을 강조한 반면, 새로 찾은 타 지역 자료에서는 설죽을 ‘황진이나 매창과 동등한 기녀 시인’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구한말 시선집詩選集에는 설죽이 여종 출신으로, 특출한 시인 기녀였다고 분명하게 기록했다. 이는 설죽에 대한 평가를 집약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실제 설죽은 빼어난 미모․뭇 남성의 마음을 다루는 말솜씨․탁월한 시적 재능․돋보이는 가창력 등을 한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는 신분상 여종이기에 계층 신분 격차가 분명했던 당대에 서녀 출신 황진이․매창처럼 소외받는 계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탁월한 문예․예능적 재질․타고난 미색을 발산할 길이 없었다. 이에 그녀는 타고난 신분 질서 체제로의 순순한 복종을 거부하고 문예와 미색을 마음껏 발휘하는 기녀의 삶을 선택했다. 그래서 설죽은 황진이․매창과 함께 조선조 걸출한 기녀 시인으로 명성을 남겼다.
그간의 연구 성과와 설죽의 행적을 추적하여 전라도․충청도․서울 등지를 답사한 결과와 전국 유명 도서관에서 발굴한 새 자료를 종합하여 기녀 시인 설죽의 실체를 구성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구전 자료와 문헌 자료를 최대한 활용한다. 충재 종가와 봉화 권씨 문중에서 입수한 구전 자료와 새로 찾은 자료는 설죽의 실체 접근 과정상 매우 유용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설죽은 황진이․매창과 함께 조선조 3대 기녀 시인으로 부각될 것이다.
눈의 무게로 휘어진 대나무
'설죽'의 의미를 간파해내야 한다. 설죽에게 '눈'은 '낭만'과 '순백'의 그것이 아니라 '신분 제약'과 예술적 재능의 발산을 저해하는 '시대 장벽'이었다. 설죽은 자신의 삶 전체를 짓누르는 '눈'의 무게를 이겨내면서 독자적 예술 경지를 구축해간 위대한 예인이었다.
2. 천부적 재능을 키워준 석천 권래
설죽 문예 성취의 제고를 위해 그의 행적을 가능한 재구성해야 한다. 그녀의 성장 비밀은 충재 집안의 고문서나 관련 문서 등을 추적해 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중세의 시대적 여건으로 보아, 여종의 성장 배경과 행적을 자세히 기록해 두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이다. 다행히 그의 행적을 극히 간략히 정리한 「설죽사적雪竹事蹟」과 166수의 시를 추적해 엮을 수 있다. 생장 근거의 시는 다음과 같다.
강남에 가을비 쓸쓸히 내리고
하늘 멀리 병든 신세 눈물만 나와요.
안동의 고향 집에 가질 못하니
꿈길로 석천 서쪽에 가고 싶어요.
객지에서 병마에 신음하는 여인의 고향에 대한 향수가 반영되어 있다. 설죽은 예속된 삶을 살기에 고향 방문이 쉽지 않았다. 어려운 현실 장벽을 꿈을 통해 이루어 보기로 했다. 꿈길로 고향을 찾아가겠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 설죽이 생장했던 곳이 경북 봉화 유곡의 석천정사 서쪽이란 것이 판명된다.
설죽은 경북 봉화 유곡에서 태어나 충재冲齋 권벌權橃(1487-1547)의 손자 석천石泉 권래權來(1562-1617)의 시청비侍廳婢로, 아리따운 미모와 재치 있는 말솜씨 및 글재주와 가창력이 뛰어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이러한 그녀의 재주를 아낀 석천 집안 어른들은 그에게 틈틈이 시를 짓거나 문장을 구사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설죽은 총명하여 금방 글을 깨우치고 시문 짓는 법도 익혔다. 근거를 보기로 한다.
설죽은 어려서부터 영리하여 귀여움을 받음→ 설죽은 선비들이 공부하는 것을 옆에서 들으며 배 움에 대한 마음이 간절했음→ 권씨 문중 어른들이 여종 설죽에게 글공부를 하도록 허용함→ 틈 틈이 문장 짓는 법과 시 짓는 방법도 학습시킴→ 설죽은 재주가 빼어나 시도 잘 짓고 가창력도 좋았다.
이처럼 설죽이 타고난 문예적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봉화 유곡 권씨 문중의 따뜻한 인정에 의해 가능했다. 그녀가 여종이라는 신분을 따지지 않고 지닌 재능을 간파하고 이를 길러준 권씨 문중의 인간적 배려는 퍽 감동적이다. 이러한 정신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선조인 충재의 인품에 근거한다. 충재의 인격미가 드러나는 제가의 평을 보기로 한다.
공은 평소에 화기가 훈훈하였으니, 비록 부리는 사람이나 비천한 종이라도 두터운 은혜로 대우 했다. 규문 안에서는 엄하지 않았으나 두려워해서 감히 사이에서 이간질하는 자가 없었다. 여종 이 소반을 들고 오다가 넘어져 국이 공의 옷을 더럽힌 일이 있었으나 화를 내지 않았다. 평소 지낼 때 화기가 훈연하여 비록 천한 노복이라도 은덕으로 대했다. 그러나 국가의 대사나 사 변에 관한 일에 임해 의로운 빛이 얼굴에 드러났고 앞장서서 일을 맡았으니 맹분이나․하육 같은 용사라도 결단력을 따르지 못할 것이다.
충재의 미덕과 선비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충재는 집안 하속을 엄하게 대하지 않았다. 충재의 내면에 인간애가 듬뿍 채워져 있다는 점을 말해 준다. 충재는 여종이 국을 들고 오다가 옷에 쏟아도 이를 나무라지 않았다. 반면에 그는 공적인 입장에 섰을 때에는 강직하고 과단한 선비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충재의 인간 존중 정신이 후손들에게 계승되어 설죽의 재능을 키워주는 근저로 작용되었다.
이러한 충재 후손들의 배려로 사장될 뻔했던 설죽의 천재적 문예가 빛을 발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설죽의 시를 모아 당시 봉화 ‘유곡삼절酉谷三絶’로 알려진 원유遠遊 권상원權尙遠(1571-?)의 [ 백운자시고白雲子詩稿 ] 말미에 필사해 두어 주옥같은 설죽의 시 166수가 전해진 것이다. 여종의 재주를 신장시켜주고 시를 후세에 남겨준 충재 후손의 온정과 배려는 인상적이다. 설죽의 문예적 재능을 높이 산 석천 권래의 미담은 스토리텔링 가능성을 열어준다.
설죽은 뛰어난 미모와 재치 있는 언어 구사․가창력 및 시 창작의 재주가 출중해 문인과 예인의 자질을 구비했다. 하지만 그녀는 ‘종’이라는 신분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는 재색을 펼칠 수 없는 시대적 제약을 받았지만 이를 벗어날 기회를 모색하였다. 설죽은 평범하게 여종으로 살기를 거부하고 담찬 인생을 찾아 나섰다.
설죽 시문학 세미나(2014.9.27)
3. 주체적 자각에 따른 예인의 길 선택
그녀가 빼어난 미색과 글재주, 타고난 끼와 노래 솜씨를 지녔지만 이를 발산할 수 없는 처지였던 점은 황진이의 경우와 같다. 황진이도 설죽처럼 재주와 미색․예능적 재질을 겸비했지만 ‘서녀’라는 신분의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황진이는 당대 사회 체제의 순응을 거부하고 스스로 기녀의 삶을 선택했다. 그는 예술과 문예를 발산키 위해 구각을 깨트리고 새 인생을 개척한 여성이었다. 설죽이 선택한 삶의 방식도 황진이와 다를 바 없다.
설죽은 출가할 나이가 되어 타고난 신분에 따라 동격의 신분 계층에 합류되기를 거부했다. 충재 종가 18대 종부의 구전 자료를 보기로 한다. 설죽의 인생 역전을 도와준 봉화 유곡 권씨 문중의 미담이다.
설죽은 퍽 영리하여 총명하여 많은 귀여움을 받았음→ 설죽이 15세 무렵이 되자, 집안에서 노비 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주선함→ 설죽은 한사코 시집을 가지 않겠다는 소신을 분명히 밝힘→ 시집 가기 전날 밤에 먼 곳으로 도주하여 보름이 지난 뒤에 돌아옴→ 평소 설죽의 재주를 아끼던 집안 어른들이 설죽을 용서하고 받아줌→ 설죽은 노비에게 시집을 가지 않고 권래의 시청비로 지내 게 되었음→ 한양․전라도 등지에서 객지 생활을 하다가 임종 무렵에 봉화 석천으로 돌아왔다.
이를 통해 매우 주요한 정보를 얻는다. 첫째, 설죽의 주체적 인생 선택 의지를 파악할 수 있다. 둘째, 설죽의 예인적 삶을 터 준 권씨 문중의 배려이다. 문중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는 신빙성 있는 단서이다. 집안에서는 설죽이 출가할 나이가 되자, 적합한 배필을 찾아 주려고 했다. 이는 동일 계층 간 결합의 의미로, 설죽을 남자 종에게 시집보낸다는 말이다.
그런데 설죽은 이를 수용할 수 없었다. 그는 애당초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집안에서 주선하는 혼례를 한사코 거부하고 급기야 보름 동안 가출을 감행했다. 문헌 자료에 의하면, ‘설죽은 열여섯 살 무렵에 몸을 숨기고 달아나 국내 명산대천을 노닐었다.’고 했는데, 이는 종부의 구전 자료와 일치한다.
이는 당시 여건으로 보아, 목숨을 내건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설죽은 죽음을 불사하고 예인의 삶을 살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설죽의 이러한 주체적 여성 형상화는 여성 인물 야담에서 많이 발견된다. 이러한 여종의 저돌적 행위를 용납한 충재 후손의 배려와 인정이 돋보인다. 설죽의 무모한 행동은 신분 질서가 뚜렷했던 당대에 상전의 명을 거부한 행위로 도저히 용서될 수 없는 소행이다. 하지만 평소 설죽의 문예적 자질과 어여쁜 행동을 보아 용서를 받고 석천의 시청비로 지냈다. 이런 일화 역시 충재 집안 전통인 인간애 실천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설죽의 행동에 유의해야 한다. 설죽은 타고난 신분에 따라 동격의 신분층에 시집을 가서 평범하게 지아비를 섬기며 사는 것을 거부했다. 그래서 그녀는 문예적 감성을 발휘하면서 재주와 끼를 발산하는 ‘예인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 바로 양반가 첩이 되거나 기녀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선택 역시 황진이의 경우와 같다.
설죽은 황진이와 같은 기녀의 자질을 모두 갖췄다. 첫째, 뛰어난 미색과 가창력, 둘째, 천부적 시적 재능, 셋째, 황진이나 매창이 서녀 출신의 딸인 것처럼 설죽도 여종 출신이라는 점이다. 설죽은 도리어 황진이나 매창보다 하위 계층이다. 이는 한국문학사상 유례가 없는 사례이다. 그래서 설죽은 시인 묵객․선비들과 시를 창수하며 문학과 풍류를 누리는 삶을 선택했다.
이러한 설죽의 바램은 석전石田 성로成輅(1550-1616)를 만남으로 시작된다. 설죽의 기녀 입문 이전에 석전의 계실繼室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설죽의 진로를 도와 준 이는 주인으로 모시는 석천 권래였다. 설죽의 예능적인 재능을 인정하고 이를 계발하도록 도와준 충재 후손의 인간적 배려와 예술적 안목은 깊은 감동을 준다.
설죽 문화 콘텐츠 개발 세미나(2017.10.29)(청암정)
4. 첫 연인 석전 성로와의 로맨스
석전은 어려서부터 영리하여 관례가 끝나자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의 문하에서 배워 시를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21세인 1570년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이른 시기부터 벼슬길에 나가는 것에 대한 부담을 느꼈고 결국 이를 단념했다. 그는 청년기에 인왕산 아래 살면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송강 문하에서 수학한 탓에 그의 아들 정기명鄭起溟․정종명鄭宗溟․정진명鄭振溟․정인명鄭仁溟과 교유하였다. 황정욱黃廷彧 문하에도 배워 그의 아들인 황혁黃赫과도 친분을 쌓았다. 40세에 아내를 여의고 외롭게 살았다. 첫 딸은 조영趙嶸에게 출가했고, 둘째 딸은 스승 송강의 장손자인 정운鄭沄에게 출가했다. 이로 보아 성로와 송강의 관계는 남달랐다고 볼 수 있다. 송강도 평소 성로에게 여러 수의 시를 보냈는데, 술로 허송세월하지 말기를 당부했다.
이후, 성로는 맏사위 조영에게 의지해서 살았다. 조영은 시와 필법이 뛰어난 선비였다. 평소 술을 좋아하여 장인 성로와 의기가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석전은 1590년경에 선영先塋이 있는 강화도에 머물렀는데, 서인 계열의 문사들과 깊은 교류를 갖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강화도에는 정철을 비롯한 서인 계열의 인물이 많이 머물렀다. 이런 연유로 석전은 당대 서인계 문인들과 교류를 긴밀히 해 나갔다. 그와 교류했던 인물은 권필權韠․송연宋淵․조찬한趙纘韓․정백창鄭百昌․심광세沈光世․황신黃慎․장유張維․이정구李廷龜 등으로, 당대 목릉성세穆陵盛世를 대표하는 문인들이다.
이 당시 성로는 40세 이전이었는데, 강화에서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고 시를 짓고 술 마시는 흥겨움을 누렸다. 이로 보아 성로는 강화도에서 4년 이상 머물러 지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어 43세인 1592년에 임란이 발생하자, 사위 조영과 함께 전라도 영광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49세가 되던 1598년에 모친상을 당해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그가 거주지로 택한 곳이 서호西湖 지역인 양화강楊花江 주변이었다. 53세인 1602년에 사위 조영을 한양 서호로 보내 집을 짓게 하여 당호를 ‘삼일당’이라고 했다. ‘서호’는 한양의 마포에서 양화나루까지의 한강을 말한다.
성로는 앞으로 한강이 흐르고 집 뒤에 바위가 있는 곳에 초가를 세워 만년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당시 서호 인근에는 정치경제적으로 이유로 몰락한 이들과 권벽과 권필 부자, 유몽인 등의 지식인들이 집을 정하고 살았다. 이 무렵, 방외적 삶을 살고자 했던 석전이 서호에 거주지를 정한 것은 시대 분위기상 자연스러운 것이다. 당시 성로는 권필․이안눌․조위한․조찬한 등 그와 친분이 깊은 이들이 서호 일대에 모여 시와 술을 즐긴다는 소문도 익히 들었을 것이다.
서호는 목릉성세 우리나라 문화사에서 주요한 공간이다. 원래 서호는 경관이 좋아 유흥이 끊이지 않았다. 서호에는 희우정喜雨亭․망원정望遠亭․담담정淡淡亭 등의 이름난 정자가 많아 중국 사신들이 오면 한강을 유람하고 이곳에서 잔치를 벌이는 것이 관례였다. 당시 석전은 강화도에 살면서 권필에게 이러한 사실을 전해 듣고 서호로 집을 옮기기로 결심했을 것이며, 이듬해 54세 되던 1603년에 서호로 이주해 왔다.
당시 그는 서호에 거주지를 마련하고 사위 조영과 함께 살았다. 그가 굳이 강화도를 떠나 서호로 이주하게 된 원인은 스승 정철의 정치적 실각이다. 이에 따라 성로는 세상과 절연하고 양화진에 작은 초가를 짓고 가난하게 살았던 것이다. 즉, 성로는 스승 정철이 1592년 12월에 강화도에서 우거하다가 생을 마치자, 벗인 석주石洲 권필權韠이 그랬던 것처럼, 모순 현실 앞에서 시와 술로 시름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세상에 더 이상 연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스승 정철이 없는 강화도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졌다. 아울러 도성이 가까운 인왕산 아래로 돌아가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이 무렵 그가 거주지로 택한 곳이 서호 지역인 양화강 주변이었다. 그는 이 무렵, 양화강 어귀에 띠 집을 짓고 만년까지 살았다. 석전은 이 무렵에도 권필 등과 시를 창수하며 교유했다. 석전은 특히 안동 출신인 석주 권필과 절친했다. 당시 권필은 부친 권벽權擘(1520-1593)을 따라 봉화 유곡酉谷의 청암정靑巖亭을 내왕했다. 이에 권필은 석전과 함께 봉화 유곡의 청암정을 방문했다.
청암정 게판시 가운데 권벽이 지은 시에 아들 권필과 동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권벽이 아들 권필을 대동해 청암정을 내왕했다는 기록이다. 말하자면 석전은 벗인 권필의 중매를 통해 설죽과 인연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석전은 이 당시 나이가 56세 무렵이었다. 양화진 근처에 집을 마련하고 산 지 2년쯤 뒤였다. 당시 석전은 상처한 지 16년 정도 지난 때였다.
설죽과 석전의 첫 만남이다. 석전이 청암정에 왔을 때, 설죽도 그 자리에 함께 했다. 56세의 석전과 16세 설죽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당시 정황으로 보아, 주인 석전 권래가 설죽을 의도적으로 배석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좌객들은 설죽에게 내방객인 석전의 생전 「만시」를 짓게 하였다. 그녀가 만시를 지어 좌중을 울리게 한다면, 석전의 시침侍寢을 허락한다는 것이다. 이에 설죽은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성로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였다.
적막한 서호의 초당문은 닫혔고
주인 잃은 봄 누각에 벽도향 흩날리네
푸른 산 어디에 호걸스런 뼈를 묻으셨나요
무심한 강물만 말없이 흘러갑니다.
설죽의 만시는 좌중의 심금을 울려 석전을 비롯한 좌객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였다. 이 당시 설죽은 새로운 인생을 모색하던 시기였는데, 석전의 만시를 지음으로써 40년 연상 석전과 묘한 인연이 시작되었다. 매창이 40세 연상인 유희경과 인연을 맺었던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이로 인해 그녀의 시적 명성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제 설죽은 상처한 지 16년이 된 석전의 계실이 되었다. 말하자면, 석전과 설죽은 시적詩的 동지로 만난 것이다.
이제 설죽은 유곡의 부모 형제를 떠나 재능과 끼를 마음껏 발산하는 인생을 출발한다. 설죽이 석전에게 매료된 것은 시인 석전을 사모했기 때문이다. 다음 시가 이를 증명한다.
남산 잠령은 산수 중 으뜸
석전 당신은 시인 중 최고
서로 만나 취하기도 전에
양화진에 달이 진다오.
석전이 설죽을 아낀 데에는 설죽이 다방면에서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시재를 지녔기 때문이다. 설죽 역시 석전을 시인으로 존모했다. 이후 그녀가 석전과 화답한 시 작품은 25수로, 전체 작품의 1/8에 해당된다. 시를 통해 사랑을 고백하거나 때로 신세를 한탄하고, 부재의 임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을 표현하였다. 특히 서호정에서 그와 함께 지냈던 추억을 회상하면서 회한의 정을 표현한 시가 많다.
이와 함께 석전이 설죽과 시적으로 긴밀하게 교유했던 흔적이 문집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이 당시 설죽은 석전뿐만 아니라 선비․문인들과 폭넓게 시를 창수하면서, 탁월한 시적 재능으로 명성을 떨쳤다. 설죽의 유연한 삶의 방식은 황진이의 경우와 같다. 이후 설죽은 석전의 노년기에 십년 동안 함께 살았다. 관련 시를 보기로 한다.
십 년 동안 한가히 석전과 사귀어
양자강 머리에서 늘 취했더니
오늘 떠난 임 찾아 홀로 가니
옛 섬엔 백빈향만 가득 남았어요.
설죽은 첫 정인 석전이 별세하자 그와의 애정은 종결되었다. 이 무렵, 설죽은 고향에 들렀다. “십년 고생을 하다가 이처럼 늦어, 오늘 돌아오니 일마다 그릇 되네. 홀로 뜰에 서나 사람 뵈질 않고, 부서진 창 먼지 낀 집에 거미줄만 걸렸네.”라고 했는데, 십년간 타향살이를 하고 온 감회를 표현했다. 석전 사후, 설죽의 행적은 전라도와 충청도 등지에서 파악된다.
이후 설죽은 황진이처럼 풍류와 낭만을 따라 자유분방한 기녀의 삶을 이어간다. 설죽은 이제 특정인에게 매인 몸이 아니므로 본격적인 기녀의 삶을 시작한다.
설죽 시문학 세미나(2014.9.27)
5. 완산 호서 기녀 시인 활동과 「백마강회고」 시 작자
이후 그녀의 행적은 전북 완산에서 발견된다. 이 당시 설죽은 전라도 등지의 기녀로 활동했다. 완산 관아에서 관기로 지낼 때 지은 시를 보기로 한다.
벌레 소리 멈추자 등잔불도 꺼지고
주렴엔 흐릿하게 새벽안개 흘러요
고향 땅 그 어디 쯤 일까요
하늘엔 반달만 창가에 떠있네.
벌레 소리가 멈추는 시점에 내면 깊이 잠재된 향수가 일어나 창가의 반달을 보며 고향을 그리는 서정을 그려내었다. 전북 운봉 태수에게 보낸 시에서도 서로 취하길 기약하며 술을 마시고 즐기는 풍류 서정을 표현했다. 운봉은 남원군에 소속된 운봉현으로, 현재 행정 구역상으로는 운봉면이다. 이런 자료를 통해, 설죽이 이 당시 전라도에 거주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어 설죽은 호서 지방에서 기녀로 활동했던 자료를 보기로 한다.
「방석전고거」. 취죽은 권씨 집안 여종이다. “일찍이 십 년 동안 석전과 노닐면서 양자강 어귀에서 취한 게 몇 번이던가. 오늘 떠난 임 찾아 홀로 가니, 가을 강가에 흰 개구리 밥 붉은 여뀌만 가득하여라.”
「춘사」. 취죽은 호서 기녀이다. “봄단장 서둘러 끝내고 거문고 튕기니, 주렴에 붉은 햇살 가벼이 차오르네. “밤안개 짙은 끝에 아침 이슬 흠뻑 내려, 동쪽 담장 아래 해당화 울고 있어요.”
이 자료 [해동시선]은 일제 강점기 때 이규용이 편찬한 시선집이다. 승려와 여성의 시는 각 체의 맨 끝에 두었는데, 설죽의 「방석전고거」와 「춘사」라는 제목의 「춘장」 시 두 수를 실어두었다. 이 시의 작자 설죽은 권씨 집안 여종 출신으로 호서 기녀였음을 분명히 밝혔다. 이 문헌이 일제 때 편집된 것임을 감안한다면 신빙성 있는 자료이다.
이어 해명하고자 하는 것은 연대 미상 여성의 한시 중 「백마강회고」의 작가 고증이다. 이에 대해 지금까지 답보 상태이다. 그런데 금번에 발굴한 자료를 통해 이 시의 작가가 설죽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또 추향과 취선이라는 기생도 모두 시를 잘하였다. 취선의 호는 설죽이다. 그녀의 「백마 강회고」 시에, “저물녘 고란사에 닿아, 서풍에 홀로 누대에 오르네. 용은 간데 없고 강 은 만고에 흐르고, 꽃은 지고 없는데 달은 천추에 비치네.” 하였고, 「춘장」 시에서 “봄 단장 서둘러 끝내고 거문고 튕기니, 주렴에 붉은 햇살 가벼이 오르네. 밤안개 짙은 끝에 아침 이슬 흠뻑 내려, 동쪽 담장 아래 해당화 울고 있어요.”라고 했다.
이덕무는 이 시의 작가가 기녀 시인 설죽이라고 했다. 이덕무는 ‘시기詩妓’라는 항목을 설정하여 역대 기녀이며 시인으로 활동했던 여류 시인을 총괄 정리했다. 여기에 설죽을 거론했으며, 그녀의 대표작 「춘장」도 소개했다. 시에 회고적 서정성이 토로된다. 역사 현장 고란사에서 느끼는 역사 회고 정서를 담아낸 우수한 역사회고시로 평가된다. 설죽의 시 창작 수준을 고려할 때, 이 정도의 작품은 충분히 지을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녀가 호서 지방 기녀로 활약을 했고, 관련 자료에서도 이처럼 분명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의 작가가 설죽임이 확실하다.
문제는 이 시가 설죽의 시집인 [ 백운자시고]에는 편입되어 있지 않은 점에 있다. 설죽 관련 자료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봉화 쪽의 문헌 자료에서는 설죽이 기녀로 활동했다는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봉화의 문헌에는 설죽이 봉화 유곡 권문의 여종 출신으로, 우수한 시인이었던 점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에 타지방 출신의 문인이나 학자들에 의해 설죽이 기녀 시인이었다는 점이 특기되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봉화 쪽에서는 설죽이 기녀로 활동했던 흔적을 문헌으로 남기는 것을 주저했던 것 같다. 이와 함께 설죽 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이 시가 누락되었을 수도 있다. 이 시의 작가가 설죽이라는 점을 한말 시인 장지연도 다음처럼 명시하고 있다.
“저물녘 고란사에 닿아, 서풍에 홀로 누대에 오르네. 용은 간 데 없고 강은 만고에 흐르 고, 꽃은 지고 없는데 달은 천추에 비치네.” “봄 단장 서둘러 끝내고 거문고 튕기니, 주 렴에 붉은 햇살 가벼이 차오르네. 밤안개 짙은 끝에 아침 이슬 흠뻑 내려, 동쪽 담장 아 래 해당화 울고 있어요.” 취선의 호는 설죽이다.
[대동시선]은 1918년에 장지연張志淵(1864-1921)이 우리나라의 역대 시가를 모아 엮은 시선집이다. 장지연은 이 책에서 설죽의 「백마강회고」․「춘장」 시를 소개하였다. 취선의 호가 설죽이라고 기록하였다. 이를 통해 설죽은 호서 지방에서 기녀 시인으로 폭넓게 활동했으며, 작자 미상으로 알려진 「백마강회고」의 작가가 설죽이라는 점이 분명히 확인된다. 다만 이 시가 봉화에서 수집한 설죽의 166수에 편입되지는 못했지만, 타 지방 문인과 학자들에 의해 설죽이 호남 지방에서 기녀로 활약했던 행적이 또렷하게 부각되어 있다.
그러므로 설죽의 실체를 파악하려면 후자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구한말 학자들에 의해 설죽은 여종 출신이면서 호서 지방의 걸출한 기녀 시인이었던 점이 강조되고 있다. 시기적으로 가장 후대 학자들에 의해 설죽의 행적이 이처럼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와 함께 작자 미상의 「백마강회고」 시의 작가도 설죽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실제 그녀는 전라도 등지에서 20년 세월을 보내며 다양한 인물들과 교유하며 지냈으며, 백마강에서 지은 시도 남겼다. 그렇기 때문에 「백마강회고」의 작가가 설죽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후 설죽의 행방은 한양에서 발견된다.
설죽 예술제(2019.10.8)
6. 한양 생활과 만년의 귀향
다음은 한양에서 고정랑을 만나 지은 작품이다. 당시 설죽이 한양에 살았던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이십 년 전 남국에서 만났던 벗님
오늘에야 한양에서 만났어라
고운 집에 촛불 켜고 술잔 기울여
정담 주고받아 즐거운 모임 흥겹구나.
이 시에서 ‘이십 년 전에 남국에서 만났다는’것은 당시 설죽이 전라도 등지에서 지낼 때 그와 만났던 사실을 증명해 준다. 이처럼 설죽은 호남․호서와 한양 등지를 오가며 다양한 인사들과 교유를 지속해 나갔다. 이 무렵, 관악산에 올라 봄 경치를 표현한 시가 많은 이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이처럼 그는 전라도와 충청도 기녀를 거쳐 한양 명사들과 교유하다가 한때 재상의 첩이 되었다. 이 당시 설죽은 최소한 46세 쯤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양에서 지낼 때에도 고향은 늘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관련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관악산 앞에 기러기 날아가고
나무엔 저녁연기 감겼네
가을 다 가도록 소식 없어
고향 바라보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
시각적 이미지와 향수 서정이 배합되어 있다. 이후 설죽은 만년에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왔다. 충재 종부의 구전 자료에 의하면, 설죽은 한양과 전라도 등지에서 객지 생활을 하다가 봉화 유곡으로 돌아와 생을 마쳤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설죽은 충재 후손들의 배려에 의해 새 인생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인의 삶을 열어준 주인 석천과 봉화 유곡은 지울 수 없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고향 유곡은 미천한 자신의 재주를 아껴 키워준 고마운 분들이 계시고, 부모와 형제자매가 살고있는 땅이기에 향수를 반영한 시가 많다.
일련 시에는 석천을 사모하고 향수와 혈육을 그리는 서정을 담고 있다. ‘한죽’․‘칠송’․‘초선’은 설죽의 남녀 동생으로 모두 시문에 능했다. 칠송과 운선은 동명이인으로 설죽의 막내 동생인데, 설죽은 막내 동생을 유달리 사랑했다. 그와 주고받은 시가 19수이다. 객지에서 지내는 슬픔과 향수, 아우를 그리는 동기간의 우애를 담고 있다. 설죽에게 칠송은 마음으로 의지하는 대상이었다. 시에 혈육을 그리워하는 정을 담았다. 고향의 부모도 그립기는 마찬가지였다.
여러 해 떠돌며 눈물 흘렸는데
고향엔 늙으신 부모님 계시네
간 밤 서리에 기러기 떼에 놀랐더니
하늘 멀리 소리 끊겨 대오마저 끊겼네.
타향에서 많은 고초를 겪어 부모가 그리워 숱한 세월 동안 향수로 지낸 면모가 투영되어 있다. 설죽은 주인 석천에 대한 애정도 강렬했다. 그녀는 일찍이 “상전께서 도성에 들어가신다면 저는 죽어버릴 지 몰라요!”라고 했는데 석천공의 벼슬이 지체된 것은 실제로 취선의 행동 때문이었다는 에피소드도 남아있다. 다음 시는 상전 석천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는데, 미천한 자신의 재주를 인정해 이를 발휘하도록 배려해 주었기에 그에 대한 사모의 정념을 평생 지울 수 없었다.
적막한 병풍 속에 비단 장막 드리우니
남긴 옷에 임의 체취만 남았어라
평생 노래하며 춤추리라 생각했지
오늘처럼 이별 아픔 있을 줄 몰랐네.
설죽은 애당초 여종의 소박한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비첩의 삶을 누리는 것이 행복하리라고 믿고 가족과 친지를 떠나 객지에서 살았다. 그러나 막상 고향과 혈족을 떠난 그녀에게 가족과의 별한이 이처럼 깊을 줄 미처 몰랐다고 고백하였다. ‘평생 노래하며 춤추리라고 생각했다’는 데서 ‘권래의 시청비로 살아갔다면 더 행복했으리라’는 여운을 보여준다. 시의 전면에 가족과의 결별에 따른 아픔이 담겨 있다.
이는 신세를 한탄하는 내면 표현으로 이어진다. “주렴과 등불 긴 밤을 짝했고, 화로의 남은 연기 향기처럼 피어오르네. 평생 한스럽긴 청루객에게 몸 맡겨, 울며 지내는 제 가슴만 타요.”라고 했다. 여인 설죽의 내심이 비쳐지고 있다. 비첩의 생애가 슬프고 가슴 저민다는 것이다. 이 표현 속에는 복합적 정한이 담겨 있다. 평범한 여성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 못한 채 구속된 삶을 살아가는 여인의 아픔이 그것이다. 몸을 가벼이 허락하여 비첩으로 살아가는 현실이 너무 슬프다는 것이다. 이는 동기간이라야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표현이다.
이러한 심리 정서는 결국 설죽이 타향에서 보내는 삶에 대한 한계 표출과 함께 고향을 그리워하는 내밀한 심리를 반영해 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죽은 인생의 마무리 단계에 와서 예술 재능을 키워 예인의 길을 걷도록 배려해 준 석천을 사모했고 결국 봉화로 돌아와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설죽은 회귀본능을 따라 자신을 성장시켜준 어머님 품 같은 유곡으로 돌아와 지난 세월을 반추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는 탁월한 재능과 끼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소질을 발휘할 수 없는 신분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기녀의 삶을 선택해 호방한 천재 여류 시인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내면 깊숙이 주인 석전에 연모의 정과 고향에 대한 애정을 잠시도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7. 조선조 3대 기녀 시인으로 공인
문헌 자료에서는 당대 설죽이 훌륭한 기녀 시인으로 활약했던 점을 특기하고 있다. 설죽을 기녀로 강조한 자료를 보기로 한다.
얼현은 안동 권모의 여종이다. 재주와 미색이 있고 시에 능했다. 자호를 취죽이라고 했다. 그녀가 지은 「추사」 시에, “물빛 같은 하늘에 달도 푸른데, 나뭇잎 바스락거리고 살며시 서리 내려요. 열 두 난간 누대에서 홀로 잠을 청하니, 공연히 병풍 속의 원앙이 부러워요.” 라고 하였고, 「방석전고 거」에서는 “일찍이 십 년 동안 석전과 노닐면서, 양자강 어귀에서 취한 게 몇 번이던가. 오늘 홀 로 임 떠난 곳을 찾으니, 가을 강가에 흰 개구리밥 붉은 여뀌만 가득하여라.” 라고 했다.
두 작품은 모두 [기아]에 실렸는데, 「추사시」 작가를 ‘기생 취선’이라고 기록했기에 우선 무명씨로 기록한 다. 세상에 취죽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아 애석하다. 얼현은 안동 권모의 여종으로, 재주와 미색을 겸했으며 시에도 능했고 자호를 ‘취죽’이라 했다. 이 자료에서는 「추사시」와 「방석전고거」 두 수의 시를 소개했다. 그런데 이 두 수의 시는 [기아]에 실렸다고 언급하였다. 그런데 「추사시」의 작가를 ‘기생 취선’이라고 기록했다고 전한다.
수촌水村 임방任埅(1640-1724)은 당시까지 설죽의 행적을 자세히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 취죽이 기녀 설죽이라는 점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일단 「추사시」 작가를 무명씨로 처리하면서, 취죽의 이름을 알 수 없어 애석하다고 했다. 이를 통해, 취죽이 기녀로 활약한 사실이 당대에 널리 유포되었던 사실이 입증된다. 이 근거는 다음에서 확정된다.
“봄 단장 서둘러 끝내고 거문고 튕기니, 주렴에 붉은 햇살 가벼이 차오르네. 밤안개 짙은 끝에 아침 이슬 흠 뻑 내려, 동쪽 담장 아래 해당화 울고 있어요.” 취선은 기녀로, 호는 설죽이다.
[대동시선]에는 설죽의 「춘장」 시를 실었다. 설죽의 시 가운데 여타 시선집에 가장 빈번하게 실린 것이 「춘장」이다. 그리고 이 시의 작가를 기녀 설죽이라고 간명하게 기록해 두었다. 이어 이수광의 기록을 보기로 한다.
기녀 취선의 호는 설죽인데, 시에 이르기를, “봄단장 서둘러 끝내고 거문고 튕기니, 주렴에 붉은 햇살 가벼이 차오르네. 밤안개 짙은 끝에 아침 이슬 흠뻑 내려, 동쪽 담장 아래 해당화 울고 있어요.” 라고 했다. 또 다른 시에서, “물빛 같은 하늘에 달도 푸른데, 나뭇잎 바스락거리고 살며시 서리 내려요. 열두 난간 누대에서 홀로 잠을 청하자니, 공연히 병풍 속의 원앙이 부러워요.”라고 하였다.
이수광은 ‘기녀 설죽’이라고 또렷하게 기록했다. 이어 그녀의 시 「춘장」과 「추사」 두 수의 시를 실어두었다. 이로써 설죽이 기녀로 활동한 것이 입증되었다.
다음 두 자료에서는 설죽을 황진이에 버금가는 조선조 걸출한 기녀 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고려 때 용성의 창기 우돌과 팽원의 창기 동인홍은 모두 시를 잘 지었지만 시가 전해지지 않는다. 본조의 송 도 기생 황진은 절색에 시도 잘하여 스스로 이르기를, “화담 선생과 박연폭포가 나와 함께 송도의 삼절이다.” 라고 하였다. 그녀가 하루는 땅거미가 질 때 비를 피하려 어느 선비의 집을 찾아 들었더니, 그 선비가 환히 밝은 등불 밑에서 그녀의 너무도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 속으로 도깨비나 여우의 넋이 아닌가 하고 단정히 앉아 [옥추경]을 계속 외웠다. 황진이는 그를 힐끗 돌아보고 속으로 웃었다. 닭이 울고 비가 개자 황진이 그 선비를 조롱하여, “그대 또한 귀가 있으니 이 세상에 천하 명기 황진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거요. 내가 바로 그 황진이라오.”하고는 뿌리치고 일어나니, 그 선비는 그제야 뉘우치고 한탄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또 추향과 취선翠仙이라는 기생도 모두 시를 잘하였다. 취선의 호는 설죽雪竹이다. 그녀의 「백마강회고」 시에, “저물녘에 고란사에 닿아, 서풍에 홀로 누대에 오르네. 용은 간 데 없고 강은 만고에 흐르고, 꽃은 지고 없는 데 달은 천추에 비치네.” 하였고, 「춘장」 시에서는, “봄단장 서둘러 끝내고 거문고 튕기니, 주렴에 붉은 햇살 가볍게 차오르네. 밤안개 짙은 끝에 아침 이슬 흠뻑 내려, 동쪽 담장 아래 해당화 울고 있어요.”라고 하였다.
高麗有龍城娼于咄․彭原娼動人紅, 能賦詩而不傳. 本朝松都妓黃眞, 艶色工詩, 自言花潭先生及朴淵瀑布與我, 爲松都三絶. 甞避雨, 黃昏入士人家, 士人於燈影旖旎之中, 見其妖冶, 心知爲鬼魅狐精, 端坐誦玉樞經不絶口. 眞眄睞匿笑, 鷄鳴雨止, 眞嘲士人曰, 君亦有耳, 天壤間聞有名妓黃眞者乎, 卽我是也, 因拂衣而起. 士人悔恨不可及. 又有秋香․翠仙妓, 亦皆工詩. 翠仙號雪竹, 「白馬江懷古」詩云, 晩泊皐蘭寺, 西風獨倚樓. 龍亡江萬古, 花落月千秋. 「春粧」詩, 春粧催罷倚焦桐, 珠箔輕盈日上紅. 香露夜多朝露重, 海棠花泣小墻東. [靑莊館全書](李德懋).
고려 때부터 본조에 이르기까지 간혹 시기詩妓로 명성이 있던 이들을 간략히 기록하여 옛사람들이 시를 채집하여 잃어버리게 않게 했던 뜻에 부친다. 송계 권응인의 [ 패관잡기]에 우리나라 여성의 시를 거론하면, 삼국 시대에는 알려진 이가 없다. 고려 때에 이르러 용성의 창기 우돌, 팽원의 창기 동인홍이 시를 지을 줄 알았다 고 하지만 전해지는 작품은 없다. 그리고 송경 삼절로 유명했던 황진이나 부안 기생 매창ㆍ계생ㆍ추향, 호서 기생 설죽雪竹․취선翠仙, 진주 기생 승이교, 부안 기생 복낭, 성천 기생 일지홍 등은 모두 시에 능하기로 유명하다. 기생이면서 시에 능했기에 간략히 언급해 둔다.
自高麗至我朝, 或有詩妓之可稱者略錄之, 以寓古人采風不遺之義. 權松溪應仁稗官雜記, 東詩, 三國無聞, 高麗只有龍城娼于咄․彭原娼動人紅, 解賦詩云而無傳. 松京三絶黃眞․扶按女妓梅窓桂生秋香, 湖西妓雪竹翠仙, 晉州妓勝二喬, 扶按妓福嫏, 成川妓一枝紅, 皆能詩有名, 而娼妓而能詩, 絶異故略及之. [五洲衍文長箋散稿](下), (李圭景), 卷43, 「華東妓源辨證說」.
위의 자료는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와 그의 손자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내용이다. 이규경은 조부 이덕무가 언급한 내용을 백과사전식 변증문 형식의 글에서 명확하게 밝혔다. 이규경은 조부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정밀한 고정考訂과 변증辨證으로 조선 후기 실학의 영역을 넓혀 ‘백과전서파’로도 불린다. 따라서 그의 변증은 매우 신빙성을 지닌다.
이를 종합하면, 우리나라 기녀 시인으로 삼국시대까지는 유명한 이가 전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고려 때 용성 창기 우돌․팽원 창기 동인홍이 시인으로 알려졌지만 작품은 전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최자의 [보한집]에 이들의 시가 전한다.
먼저, 용성의 관기였던 우돌을 보면, 송학사 국섬에게 준 시에, “일찍이 그대 마음 굳은 줄 알았는데, 나 역시 같이 잘 맘이 애당초 없었지요. 바라건대 하룻밤을 시를 술 마시며, 풍월 읊고 좋은 인연 함께 해주어요.”라고 하였다. 팽원 기녀 동인홍의 시에, “기생과 양가집 규수, 그 마음 다를 게 있나요. 가련한 송백 같은 굳은 절개로, 두 마음 먹지 않기를 맹세하여요.”라고 하였다.
이덕무는 여기서 황진이 관련 일화를 넣었다. 황진이(1520-1560)는 송도의 명기이다. 그와 아둔한 선비의 에피소드를 삽화하였다. 황진이는 송도삼절로 미색과 시에 능한 기녀였다. 비를 피해 선비 집에 들어가 밤을 지샜지만 선비는 요물로 생각했다. 새벽이 되어, 날이 밝아 황진이가 정체를 알리자 선비는 후회했다는 것이다. 미색을 겸비한 황진이와 대조된 촌뜨기 백면서생의 대면에서 황진의 미색 탓에 선비는 요물을 대하듯 그녀를 꺼려했다. 그만큼 황진의 인기가 독보적이었다는 것을 반증한 일화이다.
그녀는 황진사의 서녀였다. 그녀는 첩의 딸로 멸시를 받으며 규방에 묻혀 일생을 헛되이 보내는 봉건 윤리의 질곡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희망하였다. 당시 신분으로서는 이렇게 사는 것이 불가능했다. 오직 한 길 기생의 인생을 사는 것뿐이다. 황진이는 기생이 된 후, 뛰어난 미모․활달한 성격․청아한 소리․예술과 문예적 재능으로 인해 명기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녀와 관련된 일화가 야담 등에 많이 전해진다. 30년 면벽하여 수도하던 지족선사를 파계시킨 일, 서경덕을 시험했다가 그의 학문과 인격에 탄복하여 평생 스승으로 사모한 일화, 종실 벽계수가 황진이와 사귀고자 시도했던 일화나 소세양이 그녀와 30일 동안 동거한 일화, 이사종이 6년 동안 계약 결혼한 이야기 등은 유명하다. 황진이는 이같이 호방한 풍류의 삶을 살다가 사십 전후의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사후, 평안도사로 부임해 가던 임제는 그녀 무덤에 제사를 지내며 시조를 지었다가 파직을 당했다.
다음 호를 ‘추향’이라고도 하는 매창梅窓 이계생李季生(1573-1610)은 조선 선조 때의 기생으로 본명은 향금, 자는 매창이다. 매창은 부안현의 아전인 이탕종의 서녀로 태어났다. 부친에게 한문을 배웠으며, 시문과 거문고를 익혀 기생이 되었다. 그녀는 황진이와 쌍벽을 이룬 기녀 시인이었지만 37세에 요절했다. 사후, 부안 고을 아전들이 1668년에 고을 사람들에 의해 전해지던 시 58편을 목판에 새겨 [매창집]을 간행하였다.
매창은 사대부들과 폭넓게 교유했지만 유독 친하게 지닌 이는 류희경(1545-1636)과 허균(1569-1618), 이귀(1557-1633)등이었다. 유희경은 매창에게 10여 편의 시를 써주었다. 허균은 매창이 죽자, 「애계랑」 시를 지었다. 매창은 가무와 거문고도 능한 다재다능한 예술인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문헌 자료 [ 청장관전서]와 [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설죽을 황진이․매창에 이어 조선조 걸출한 기녀 시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설죽을 호서 지방의 특출한 기녀 시인으로 주목한 것이다. 그래서 설죽은 송도의 황진이와 부안의 매창과 더불어 조선조 3대 기녀 시인으로 인정된다고 한 것이다. 즉, 한국을 대표하는 기녀 시인으로, 황진이․매창을 거론했는데, 설죽이 3순위에 있다. 그만큼 설죽의 시가 뛰어났으며, 행적 역시 황진이를 답습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조 뛰어난 기녀 시인으로 추천한 것이다.
이는 이덕무는 설죽을 조선 3대 기녀 시인으로 추천함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이어 그의 손자 이규경에게도 이 논리가 그대로 전승되어 변증 과정을 거쳐 확정되었다.
그러므로 설죽은 역대 문헌에서 확증하고 있는 것처럼, 조선조 3대 기녀 여류 시인으로 평가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본다. 황진이의 한시가 8수, 매창의 한시가 58수가 현전하는데 비해 설죽의 한시는 추가 발굴된 「백마강회고」 1수를 포함해 총 167수나 전해진다. 신분상 여종이면서 기녀 시인으로 활약한 이는 유례가 없다.
그런 점에서 설죽은 문예적 성과나 행적을 볼 때, 여느 기녀 시인에 비해 전혀 뒤질 바 없다. 그러므로 설죽은 황진이․매창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조선조 3대 기녀 시인으로 판명된다. 그동안 황진이와 매창에 대한 연구 성과와 다채로운 문화 행사를 통해 황진이․매창의 기녀 시인으로 크게 부각된 것처럼 설죽도 후속 연구와 다방면의 문화컨텐츠 개발과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8. 마무리
여종 출신 기녀 시인 설죽의 행적을 통해, 일개 여종의 인격과 재능을 소중히 여겨 시적 재능과 예술적 감성 및 끼를 발휘하도록 배려해 준 충재 후손들의 인간미가 돋보인다. 여종 설죽에게 글재주가 있음을 알고 시문 짓는 법을 가르친 일, 설죽이 혼사를 거부하고 가출한 비행을 용서해 주고, 예인의 기질을 발휘하도록 성로의 계실이 되도록 길을 열어준 점이나 설죽 사후, 시를 모아 후대에 남긴 일은 귀감이 된다. 설죽이 천재 시인으로 성장하게 뒷받침해 준 주인 석천 권래의 인간애와 예술 존중 정신은 감동적이다. 이에 설죽은 조선조 걸출한 기녀 시인으로 활약했다.
설죽은 권래의 시청비로, 석천 정사 서쪽에서 생장하여 16세 무렵에 석전 성로의 계실이 되어 10년 정도 그와 교유하였다. 석전 사후, 설죽은 20여 년간 전라도와 충청도 등지에서 시인이며 탁월한 기녀로 활동하였다. 이와 함께 그동안 작자 미상으로 알려진 「백마강회고」 시의 작자가 설죽이라는 점도 밝혀졌다. 46세 무렵에는 한양에서 명사들과 교류하다가 한때 재상가의 첩으로 지냈다고도 한다.
하지만 설죽의 객지 생활이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시를 보면, 내면에는 고뇌와 아픔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 설죽은 내내 석천을 사모했고 마음의 고향은 봉화 유곡이었다. 그래서 만년에 고향 석천 서쪽 마을로 돌아왔다. 설죽은 회귀본능처럼 고향으로 돌아와 생을 마쳤다. 봉화 유곡은 그에게 은혜를 베푼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 잡혔기 때문이다.
황진이와 매창이 조선을 대표하는 기녀 시인으로 주목을 받는 만큼 설죽도 그에 버금간다고 이덕무와 이규경은 문헌을 통해 입증하고 있다. 이 외의 문헌을 통해서도 설죽은 충청도․전라도․한양 등지에서 활동한 기녀 시인인 점이 명확히 제시되고 있다. 특히, 설죽의 기구한 삶의 행태는 황진이의 행적과 너무나 흡사하다.
그런 점에서 설죽의 행적을 이들과 비교해 보아도 손색이 없다. 도리어 신분상 여종으로 이처럼 문학적 성취가 큰 점을 감안한다면, 설죽은 한국문학사상 유례가 없는 여류 시인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설죽을 황진이 매창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기녀 시인으로 추천한 만큼 황진이․매창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조선조 3대 기녀 시인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동안 황진이와 매창에 대한 연구 성과와 다채로운 문화 행사를 통해 이들이 조선조를 대표하는 기녀 시인으로 부각된 것처럼 설죽도 후속 연구와 다방면의 문화컨텐츠 개발과 스토리텔링을 거쳐 황진이 매창과 함께 기녀 시인으로 각광받게 될 것이다. 후속 연구와 문화컨텐츠 활성화․스토리텔링으로 설죽의 문학적 위상이 제고되길 기대한다.
(참고 문헌)
(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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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澤堂集](李植)
[石田遺稿](成輅)
[石洲集](權韠)
[梅窓集](李季生)
[冲齋集](權橃)
[玉馬誌](奉化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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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東詩選](張志淵)
[大東詩選](閔百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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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雲子詩稿](權尙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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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걸, 「설죽 시문학 특강」, 장계향 선양회 포럼, 안동시(201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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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봉화송이축제 성황-송이향 따라 봉화향 따라!」, KBN-대한방송(2014.9.29일자)
김경진, 「봉화군/설죽 컨텐츠 개발 계획」, 영주시민(2014.9.13일자)
노창길, 「봉화군 대금에 취한 설죽 청암정에서 만나다」, 큐키뉴스봉화(2017.5.18일자)
하응백, 「설죽雪竹을 아시나요」, 매일신문(2017.11.4일자)
윤희정, 「봉화 여류 시인 설죽의 발자취를 찾아서」, 경북매일(2017.10.27일자)
남효선, 「봉화 설죽시 문화콘텐츠 개발 현장 포럼」, 아시아뉴스통신(2017.10.15일자)
최병호, 「봉화군, 2019 설죽예술제 성료」, 서울일보(2019.10.9일자)
안동MBC TV, 「오래된 약속(174편)」, 설죽 이야기(2020.3.2 방영)
김동룡, 「설죽을 되살리자」, 봉화일보인터넷뉴스(2020.3.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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