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능성신(何能成身) 어떻게 자기 몸을 능히 이루어 보존할까? -이상호(소소감리더십연구소 소장)- 1) 산다는 것은?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생태적이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먹는 것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고, 일하는 것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다. 즐기는 것도, 공부하고 경쟁하는 것도, 권력을 가지려 안간힘을 쓰는 것도 모두 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인간의 삶은 다른 생명체의 삶과는 달리 여기에 문화와 윤리 등등을 가미한 것일 뿐 아닐까? 인간의 삶은 다른 생명체의 삶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공동체적 삶을 살아간다. 그 공동체적 삶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상하기 힘든 만큼의 영향을 주고받는 삶이다.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투쟁한다. 그리고 어떤 삶은 주변과 상관없이 자신만을 위한다지만, 그 삶에도 타인이란 존재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어떤 삶은 자기 삶을 위해 타인의 삶을 짓밟기도 하고 어떤 삶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타인의 삶을 지켜준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다른 동물들의 삶과는 달리 강력한 협력과 투쟁이 공존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몸 하나를 보존하는 일도 자신에 국한해서만 생각할 수 없다. 어떤 삶이든 그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몸을 보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끝내 자신의 몸을 보존하지 못하면 죽음이 다가오며 목숨이 붙어 있어도 비참한 삶이 도사린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자신의 몸을 보존하는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사람들이 몸을 보존하는 일은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지켜지기도 하고 파괴되기도 한다. 전쟁통에 목숨을 잃는 것도 사회적인 맥락의 일이며, 이번 이태원 압사 사고도 사회적인 맥락의 일이다. 조선 시대에 역적의 누명을 쓰고 형장에서 사라진 선비들도 사회적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인간이 자신의 몸을 보존하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어떤 이는 몸을 보존하기 위해 밤낮으로 운동을 하고, 어떤 이는 운동보다 쉬기를 좋아한다, 어떤 이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하고, 사랑을 나눈다. 어떤 이는 흥분하고, 어떤 이는 치열하리만큼 타인을 비방한다. 또 어떤 이는 영양제를 과잉섭취한다. 사람들은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 관심과 인정, 명성과 인기, 성공과 권력에 대한 욕망에도 집착한다. 그러다가 잘못하여 그 몸이 무너져 내린다. 그것은 모두 정상을 벗어난 과욕으로 인한 것이다. 여기서 몸은 삶이다. “온 세상을 벌어드린다 해도 제 목숨에 손해를 본다면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마태복음 16:26)”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삶에 있어서 사람들은 목숨을 위한답시고 목숨에 손해를 입히는 경우가 무수하다. 2. 공자가 말하는 성신(成身)의 방법 일찍이 공자는 몸(삶)을 위해 성신(成身)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군주나 선비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해당한다. 그러나 특히 군주와 선비들에게 성신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들의 성신은 일반 백성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신하지 않은 군주와 선비가 나라를 다스릴 때 그 나라는 위태로워진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신(成身)이란 몸을 이룬다는 것인데 몸은 마음과 신체 모두를 지칭한다. 이는 자기를 수양함으로 세상에 나아가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기의 마음과 행동이 이치에 어긋나지 않도록 수련하여야 하며 그 기운을 살려 세상에 선한 영향을 끼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유가에서 말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자기를 다스리는 학문, 자기 수양)을 통해 위인지학(爲人之學- 세상 사람들을 교화하고 선을 베푸는 학문)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기초는 위기지학에 있다. 그 성신에는 마음의 수양만이 아니라 몸의 수련까지 포함한다. 공자가 성신하는 방법을 강조한 것은 그러한 맥락이라 여겨진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몸을 망가뜨리고 파멸시키는 것은 운동이나 영양의 문제에 의한 것보다는 사회적인 관계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중에 특히 인간이 가진 협력과 투쟁이란 본능적인 특징 때문이기도 하다. 협력의 기질이 잘 발휘되면 몸을 보존하기 쉽고 투쟁의 기질이 지나치게 발휘되면 몸을 상하게 한다. 그런데 그 대부분은 관계의 잘못과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잘못의 중심에 자기 마음과 행동을 다스리는 문제가 도사린다. 이 중심에 자기 다스림 즉 수양이 있다. 공자가 애공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애공이 공자에게 말했다. “감히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성신(成身) 할 수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무릇 자신의 몸가짐이 외물(外物)에 지나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몸을 이루어 보존한다는 것은 천도(天道)에 합치되도록 하는 것, 그 이상은 아닙니다.” 애공이 또 물었다. “군자는 어찌하여 천도를 귀하게 여깁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그것 즉 천도의 그치지 않음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해와 달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서로 따라서 돌지만 그치지 않는 것이 바로 천도입니다. 막히지 않고 영원히 갈 수 있으니 이것이 곧 천도이고, 아무런 작위(作爲)가 없으면서도 만물이 이루어지니 이것이 바로 천도이며, 이미 이루어진 것을 밝혀주고 있으니 이것이 천도입니다.” 애공이 말하였다. “과인이 어리석고 어두워 그대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있군요. 말씀해주십시오.” 공자가 얼굴빛을 고치고 공경히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하였다. “어진 사람(仁人)은 외물(外物)을 벗어나지 않고, 효자는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진 사람이 어버이를 섬기기를 하늘을 섬기듯이 하고, 하늘을 섬기기를 어버이를 섬기듯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효자가 자신의 몸을 이루어 보존하는 것입니다.” 애공이 말하였다. “과인이 이러한 좋은 말을 듣고도 뒷날 죄를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니 어찌하지요.” 공자가 대답하였다. “임금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이는 신의 복입니다.” 公曰 敢問何能成身이니잇고 孔子對曰 夫其行己不過乎物을 謂之成身이니 不過乎合天道也니이다 公曰 君子何貴乎天道也잇고 孔子曰 貴其不已也니 如日月東西相從而不已也가 是天道也며 不閉而能久가 是天道也며 無爲而物成이 是天道也며 已成而明之가 是天道也니이다 公曰 寡人且愚冥하니 幸煩子之於心하노이다 孔子蹴然避席而對曰 仁人은 不過乎物하고 孝子는 不過乎親이라 是故로 仁人之事親也如事天하고 事天如事親하나니 此謂孝子成身이니이다 公曰 寡人旣聞如此言이나 無如後罪何니이다. 孔子對曰 君子及此言하니 是臣之福也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 卷1 대혼해(大昏解) - 위에서 애공이 공자에게 물은 성신(成身)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신의 수양을 이룸으로 몸을 보존하는 것을 일컫는다. 자기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수양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수양을 이룬다는 것은 마음과 신체 모두를 맑고 바르게 한다는 것이다. 군주가 덕이 부족하고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백성을 선으로 다스리지 못하는 것은 성신하지 못한 탓이다. 성신하지 못함은 마음과 몸이 맑고 바르게 되지 못한 것이며 그렇게 되면 자기 몸을 보존하지 못한다. 성신하지 못한 군주는 신하와 백성으로부터 신의를 잃고 쫓겨날 수 있다. 쫓겨나는 것은 곧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어떻게 성신할 수 있느냐’는 애공의 물음에 공자는 외물(外物)에 지나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것이 곧 천도(天道)라는 것이다. 공자는 천도를 따라야 능히 성신(成身)할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외물(外物)은 나 외에 나에게 접촉되는 세상의 모든 객관적인 일들 즉 세상의 모든 일과 사물이다. 지나치지 않는다는 것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과유불급(過猶不及)과 중용을 이루는 것이다. 공자는 그 외물과의 접촉에서 천도에 합치되도록 하는 일이 곧 성신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천도란 우주의 법칙이며 삶의 정상적인 이치이다. 말하자면 이(理)이다. 그것은 해와 달이 함께 돌며 운행하지만 충돌하지 않고 서로 보완하듯이 끊임없이 귀하게 여기며 화합하고 상생하는 것이다. 이를 성리학적으로 풀어보면 세상의 모든 외물은 대립물이다. 해와 달도 대립물이며, 사람과 사람도, 남자와 여자도 대립물이다. 밤과 낮도 대립물이며, 물과 불도 대립물이다. 세상에 대립물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 대립물은 밀고 당기며 다양하게 대립하지만, 서로 존중하며 운행되기에 세상은 빛이 돌고 성장하며 함께 공존하고 생육하며 창조된다. 서로 존중하고 공존하는 곳에서는 막힘이 없으며 막임이 없어야 영원히 운행될 수 있다. 영원히 운행되는 천도를 지키는 사회는 평화로운 이상사회이다. 이를 위해선 대립물인 모든 외물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지나치지 않으며 서로에게 주어진 법칙을 지켜야 한다. 인간 사회에서 그것은 도리이며 책임이다. 그것을 잘 지키는 것이 곧 인(仁)이며 인을 실천하는 것이 천도를 이행하는 일이다. 그러나 대립물이 서로 간에 탐욕이 넘치고 지나치면 길을 이탈하여 투쟁이 발생한다. 탐욕은 정상적인 범위와 방향을 벗어난, 즉 천도를 벗어난 과잉 욕망이다. 그것은 마치 기관차가 정해진 선로를 따라 운행되어야 하는데 다른 길을 가므로 탈선하거나 다른 열차와 충돌하는 것과 같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는 늘 탐욕이 지나치면 투쟁이 발생한다. 탐욕이 지나치다는 것은 서로의 길을 이탈하여 상대에게로 향한다는 것이며, 상대를 극멸(剋滅-상대를 이기고 멸망시키는 일)하고 자기만 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향함은 서로 간의 충돌로 이어진다. 따라서 투쟁이 발생하는 곳에는 다른 대립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존중하지 않는다. 그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도리와 의무를 저버린 것 즉 길을 이탈한 것이다. 탐욕이 지나쳐 대립물을 존중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음이 지나치면 대립물의 투쟁이 극에 달한다. 투쟁이 극에 달할 때는 사멸(死滅-죽음과 멸망)이 나타날 뿐이다. 그것은 대립물의 공존에 부여된 이치인 이(理 ) 즉 천도의 법칙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仁)을 저버리는 일이다. 인(仁)을 저버린 세상, 인(仁)을 저버린 사람은 절대로 성신(成身)할 수 없으며 투쟁 속에서 사멸(死滅)할 뿐이다. 공자가 간접적으로 애공을 부추겨 말한 인인(仁人)은 어진 사람이다. 어진 사람은 성신한 사람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그 어진 사람은 우선 외물을 벗어나지 않은 사람이다. 이는 천도를 지키며 인간의 도리와 의무를 충실하게 행하는 사람이다. 거기에는 친함과 믿음과 존중이 존재한다. 애공을 에둘러 인인(仁人)이라 칭찬했다. 예로서 효자가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은 그 친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친함의 기본은 어버이와 자식 간에 주어진 질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데 있다. 우리는 그것을 효라 하며 효는 바로 천도이며 천리(天理)로서의 이(理)이다. 뒤에 이어진 예는 생략되었지만, 부모와 자식 간에는 친함이란 효와 자애가 구축되듯, 세상의 모든 외물 간에 도리와 의무로 질서가 구축될 때 모두가 친함이 관계가 구축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공자의 말을 다 듣고 난 애공은 ‘오늘 좋은 말씀을 들었는데 나중에 그 말씀을 모두 몸으로 실천하지 못할까 걱정이라고’ 한다. 이는 겸허를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신하로서의 복(福)이라 하였다. 내가 상대에게 무엇을 말했을 때 귀담아 들어주고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말한 사람은 복을 느낀다. 그것이 복이 되는 것은 외물이 화합 상생하는 것과 같다. 3. 대립과 투쟁이 난무하는 세상 여당과 야당은 서로 대립물의 관계이며 노사 간도 대립물의 관계이다. 앞에서 밝혔듯이 모든 관계가 다 대립물의 관계이다. 그런데 여당과 야당의 투쟁은 극에 달했다. 남과 북이란 대립물의 관계도 투쟁의 극으로 치닫고 있으며, 한일 한중의 외교적 관계도 투쟁과 갈등의 연속이다. 국민도 서로 정치적으로 편을 갈라 상대를 비방하며 투쟁한다. 그렇게 지금 우리 사회는 외물 간의 대립과 투쟁의 연속이다. 이는 탐욕의 지나침이며 상대를 멸(滅)하므로 모두를 독식(獨食)하겠다는 발상이다. 화합과 상생을 위해서는 대립물 간에 이해와 수용 대화와 타협, 비판과 협력이 공존하여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윤석열 정부의 상징처럼 여겨오던 ‘도어스테핑’이 중단되었다. 발단은 MBC 기자의 태도라지만 정부의 대응 또한 대립물에 대한 내침이다. 노사 간도 투쟁의 연속이다. 민노총은 화물연대, 학교, 지하철, 철도 등 총체적인 파업을 선언하면서 정부와 여당을 압박하고 있다. 대장동 수사, 이태원 참사 등 문제들이 갈등으로 치닫고 있다. 이 모든 곳에는 대립물 간에 지켜야 할 질서인 도리와 의무를 버리고 탐욕의 지나침이 도사린다. 그 탐욕의 지나침은 상대의 입장을 멸하고 자기의 입장만 구축하려는 극멸(剋滅)의 마음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설령 상대를 이겨 가졌다 해도 진정한 승리가 아니다. 수많은 상처 속에 남겨진 또 다른 갈등이 존재한다. 그것이 연속되면 국가란 몸도 망가지고 결국에는 각 개인의 삶도 파괴된다. 그것은 모두의 몸을 보존하지 못하고 죽이는 꼴이 된다. 그 중심에는 모든 사람의 탐욕의 문제가 도사린다. 우린 상황을 거기까지 몰고 가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 특히 나라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탐욕의 늪에서 빠져나와 자기의 마음과 몸을 맑고 바르게 하는 노력을 우선하여 천도를 따를 줄 알아야 한다. 모든 국민도 상생과 발전의 창조적인 세상을 위하여 함께 성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4. 오로지 상생과 발전의 세상을 위하여 코로나 19속 사회적 거리 두기 조치가 해제되면서 늦가을 나들이객이 넘쳐난다. 일요일이면 수많은 관광버스가 고속도로를 메운다. 관광버스는 호수를 지나고 강을 지나고 아름답게 물든 산허리를 돌아간다. 그러나 사람들은 버스 커튼을 내리고 차창 밖에 무슨 풍경들이 스쳐 가는지 관심이 없다. 어떤 이는 서로 간에 정치적 이야기로 논쟁을 하면서 혹은 의견 차이로 다투느라 정신이 없다. 어떤 이는 자기가 앉은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불만을 토로한다. 어떤 이들은 논쟁하고 술 마시며 차 안에서 가무를 즐기려 한다. 그런 일이 관광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면 그 관광은 망친다. 버스에는 불편한 좌석도 있고 좀 나은 좌석도 있다. 누군가 좀 불편한 좌석에 앉았다면 누군가는 좀 편한 좌석에 앉게 된다. 관광객에게 중요한 것은 차창 밖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하고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여 소기의 관광을 즐기는 일이며 즐겁고 무사히 돌아오는 일이다. 그 본질을 지키려면 서로 간의 의무와 도리를 지켜야 한다. 우리가 탄 관광버스는 대한민국과 함께 사는 세상이라는 버스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 ~ 1862)는 “우리의 인생이란 영혼의 결실인 육체 때문에 알려진 영혼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지켜야 할 모든 의무는 너 자신에게 완전한 육체를 만들어 주라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겠다.(일기)”고 하였다. 완전한 육체 그것은 영혼과 몸이 맑고 바르게 된 것을 말하리라. 바로 공자가 말하는 성신과 통하리라. 위에서 공자가 애공에게 하능성신(何能成身)을 왜 강조하였을까? 한 나라가 평화롭고 융성하기 위해서는 군주가 성신하여야 하며 관료들인 선비가 성신하여야 한다. 그 성신을 위해 천도를 지키고 따라야 한다, 그 성신의 길은 위기지학(爲己之學)에서 위인지학(爲人之學)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야 대립물로 이루어진 세상은 화합과 상생, 발전과 창조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다 살기 좋고 평화로우며 상생 발전하는 창조적인 세상으로 만들고 싶으면 모두가 성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정치 지도자들은 욕망이 탐욕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필요하다. 그 길만이 우리 모든 사람의 몸을 능히 보전하는 길이 아닐까? 어떻게 능히 성신할까? 탐욕을 버리고 천도를 따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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