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제 1독서 열왕기 상권 21장
묵상 성구: 17절 주님의 말씀이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내렸다.
성구 설명: 독서 말씀을 통해 아합왕을 거슬러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 엘리야 예언자의 일화를 접하게 됩니다. 아합왕은 결국 예언자의 선포에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낮추게 되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생애 내의 재앙을 거두시고 후대로 미루십니다. 이렇게 그릇된 길에서 바른 길로 이끄시는 주님의 섭리는 현재도 지속되는 사안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아합왕처럼 연약합니다. 그릇된 길로 접어들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톨릭 교회의 참된 진리에 자신을 의탁해야 합니다. 가톨릭 교회의 참된 진리에 자신을 의탁할 수 있게 되는 계기와 순간은 바로 선포의 순간이라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저 엘리야 예언자의 일화에서처럼 신약의 우리들은 아합왕과 같은 연약함과 그릇됨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을 교회로부터 흘러나오는 아름답고 올바른 진리의 가르침을 통해 곧 선포를 통해 극복하고 올바른 길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의 주제요 제목은 선포(1요한 1장 3절 참조)입니다. 오늘 강론을 들을 때 얻을 수 있는 은총은 하느님이 참 진리임을 깨닫게 함입니다. 이 강론을 들으실 대상자들은 아직은 연약한 사람들인 우리 자신들입니다.
계속된 우리의 강론 여정을 위해 추가 말씀 묵상을 통해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레위기서 4장 3절
기름부음 받은 사제가 죄를 지어 백성도 죄인이 되게 하였으면, 자기가 저지른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흠없는 황소 한 마리를 주님에게 속죄 제물로 바쳐야 한다.
제 1 예화) 이스라엘과 이탈리아 성지 순례 때 가톨릭 교인인 우리의 연약성을 절감하는 순간을 겪었습니다. 성지 순례 참여도에 있어서 개신교인들의 열성은 우리의 그것을 능가하고 있었습니다. 젊은 층의 참여도 또한 우리의 참여도를 능가하리만큼 대단하였습니다. 가톨릭 교인 가이드가 턱없이 부족한 실정 안에서 제가 작년 떠난 성지순례에서 오죽하면 개신교 목사님 가이드가 따라 오시게 되었습니다. 방금 들으신 레위기서 4장 3절은 제가 강론을 준비하면서 여러 번 읽어보았던 말씀이었습니다. 사제의 속죄 제물로 구약엔 황소를 잡아바친 것을 알고 있었는데 개신교 목사님 가이드의 언변 실력 여러분이 잘 아시지요? ^^ 아무튼 가톨릭 신부로서 언변이 달려서 한쪽 구석퉁이에 쳐박혀 있는 꼴이란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현지에 살아본 적이 없어서 목사님 가이드는 청산유수와 같은 언변으로 이스라엘 지리를 꿰뚫고 계셨고 많은 설명을 들려주시어 많은 유익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설명 중에 사제의 속죄 제물로 송아지를 썼다고 우기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닌데라고 말하려던게 쏙 들어갔습니다. 너무 유창하게 말씀을 잘 하셔서 어쩌다 실수하셨나보다 생각을 했습니다. 뭐 목사님도 실수하시구나 생각을 했는데 제가 눈물이 핑돌던게 뭐였는지 아십니까? 황소가 아니고 송아지라고 하는데 아멘!하고 있는 같이 성지순례를 떠난 가톨릭 신자들이었습니다. 저야 성경을 늘 가까이 대할 수 밖에 없고 송아지라고 우기니 틀린 것을 알면서 목사님 체면 생각해서 가만히 있었지만 우리 교우들 아멘!하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무너지던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일년 전 요맘 때 즈음에... 아무튼 개신교도들의 장점과 단점 가톨릭 교도들의 장점과 단점 모두가 서로를 통해 배우고 익혀서 성숙된 신앙으로 나아가 하나의 일치를 이루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희망할 따름입니다.
제 2 예화) 현 우리 가톨릭 교회는 선포에 있어서 교회에 깃드는 신도들에게 어필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간혹 갖게 만듭니다. 성가가 부족해서 개신교 복음성가를 들여와 쓰다가 호되게 당할 위기에 처해있지요. 그것은 바로 저작권 문제입니다. 가톨릭 교인인 최병철 교수님의 미사곡도 새 가톨릭 성가집엔 수록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최병철 교수님이 저작권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이에 주교회의에서 그분의 곡을 쓰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는가 봅니다. 세월이 흘러 이제 저작권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성가에 있어서 많이 부족하고 열악한 환경의 가톨릭 교회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웠습니다. 루카 11장 2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퀴즈: 안전하다 or 불안하다) 안전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개신교 복음 성가를 틀고 부르다가 역습을 맞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유비무환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자체 안에 갈린 형제들의 복음 성가 물론 좋지만 개신교도들도 오래되어서 부르지도 않는 성가들이 태반입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미션스쿨을 나와서 거기 복음성가 중창단 (페아 : 피스티스 엘피스 아가페의 준말) 일원으로 활동했기에 아마 한국 가톨릭 신자들 중에 제가 개신교도들의 복음성가 최신 것들을 어느 정도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 속하지 않는가 자부할 정도입니다. 이렇게 성가도 그렇고 성지 순례에 가서도 가톨릭 교인 가이드 수의 부족 및 가톨릭 교인들의 참여도에서 상대적으로 개신교도에 비해 젊은이들의 참여 저조에 많이 실망했었습니다. 신앙적인 열정이 개신교도들에 비해 얼마나 미약한지를 절감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에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듯, 사목자로서 성가를 만들어 공표해야하겠다는 생각이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안하느니보단 낫다! 다윗의 시편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당신 이름에 찬미 노래 바칩니다." (시 18, 50)
저는 그래서 일차로 "오 나의 주님"이란 곡을 작사 작곡하여 포도나무 2집에 수록하도록 도왔습니다. 교리 선포용으로 만든 곡입니다. 들려드리겠습니다.
(오나의 주님)
지금 현재 앨범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새 앨범이 나오면 다시금 여러분을 만나뵈옵는다면 의미있고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의 주제요 제목은 선포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강론을 들을 때 얻을 수 있는 은총은 하느님이 참 진리임을 깨닫게 함입니다. 이 강론을 들으실 대상자들은 아직은 연약한 사람들인 우리 자신들입니다.
제 3 예화) 옛 사울이 바오로가 될 때 일을 상기시켜드립니다. 사도행전 22장을 보시면 이런 일화가 나옵니다. 8절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9절에 이러합니다. 나와 함께 있던 이들은 빛은 보았지만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소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누구만 소리를 들은 것이냐? 사울만 들은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님의 말씀이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내렸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는 선포(1요한 1장 3절 참조)입니다. 주님께서 택한 우리 자신들 또한 엘리야와 사울처럼 주님의 목소리를 간절히 간절히 애타해야 합니다. 에페소서 1장은 우리에게 그 희망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9절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알려주시고 그분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성령을 통해 오늘 우리의 귀를 열어주시는 우리 자신이 바로 교회의 핵심이요 빛이요 소금입니다. 선포란 무엇입니까? 오늘의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선포란 바로 우리 영혼 안으로부터 울려나오는 기도로부터 흘러나온 열매입니다. 하느님의 가호하심이 우리 곁에 존재하니 어찌 찬미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멘!
그래서 오늘 강론의 주제요 제목은 선포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강론을 들을 때 얻을 수 있는 은총은 하느님이 참 진리임을 깨닫게 함입니다. 이 강론을 들으실 대상자들은 아직은 연약한 사람들인 우리 자신들입니다.
B. 복음 말씀 오늘의 복음은 마태오 5장
묵상 성구 44절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성구 설명: 옛 구약의 정신에 따르면 원수는 치를 떨며 멀리하고 기피해야할 대상이었습니다. 거역에 따르는 벌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레위기 26장 39절은 이렇게 우리에게 구약의 원수에 대해 알려줍니다. "너희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은 너희 원수들의 땅에서 자기들의 죄악 때문에 스러져갈 것이다." 이스라엘을 원수로 삼은 부족들도 수두룩했습니다. 1열왕 9장 20절에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아모리족과 히타이트족과 프리즈족, 그리고 히위족과 여부스족 가운데서 살아남은 모든 백성을 솔로몬이 노역에 동원시켰다." 솔로몬 당시 이스라엘이 원수였던 나라들과 부족들의 열거입니다. 서로 목숨을 앗아가는 원수라는 의미에서 시편은 어떻게 이 감정을 나타내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시편 24편 19절을 봅니다. "저의 원수들을 보소서. 많기도 한 그들. 저를 모질게도 미워합니다." 이렇게 예나 오늘이나 원수는 징합니다.
하지만, 신약에서의 원수는, 사랑의 계명 새 계명 신약 안에서의 원수는, 루카 5장 27-32에서 밝혀집니다. 예수님께서 레위를 제자로 선출하시고 세리들과 음식을 드시게 되자 바리사이파들이 예수님을 비판하기에 이릅니다. 세리는 로마의 압잡이 매국노로 당대 원수로 치부되던 부류였기 때문에 경건한 유다인들에게 지탄의 대상이었습니다. 유대 당대 큰 죄인의 부류는 바로 세리와 창녀들인데 주님은 그들을 결코 묵과하지 않으시고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절대로 원수와 식사를 안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식사를 한다는 것은 너와 내가 같은 살과 피를 형성하여 형제가 된다는 의미가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유다인들은 절대로 절대로 원수와 식사를 안하는 관습이 존재합니다. 이는 그들에게는 매우 엄격해서 이방인인 대한민국 국민들은 유다인들의 이 습성을 낯설어합니다. 우리야 뭐 까짓꺼 원수와 겸상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다인들은 틀립니다. 이는 부족시대 때부터 곧 판관기 시대 때부터의 전통이라고 합니다. 왕정 시대 이전 부족과 부족이 전쟁하던 시대에 족장 대 족장의 식사는 혈맹을 맺는다는 의미와 진배 다를 바가 없는 인식 안에 관습으로서 식사는 절대 원수와 하지 않는다는 엄률이 존재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원수들과 식사를 하셨습니다. 이는 당대 율법과 사회 근간을 흔드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루카 5장 32절에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32절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이렇게 우리는 오늘 복음 속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구약과 비교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성서를 읽는 방법 중 자료 비평에 의거해 오늘 복음을 더 세밀히 들여다본 유익이 있습니다. 저는 성서 비평학 11가지 방법을 요한 6장을 통해 마스터한 성서 신학 전공 사제입니다. 저의 성경 선포 까페인 거룩한 평화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다음까페 검색 거룩한 평화 혹은 cafe.daum.net/amalficathedral로 여러분을 초대하는 바입니다.
황 안드레아 신부의 선포를 향한 도전과 모험, 수도 한복판 신대방 성당에도 전하다.
+사도들의 모후여, @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첫댓글 처음 평촌성당이 지리적으로 더 나았을 것입니다만 그 땐 보좌신부님이셨잖아요. 지금은 주임 신부님. ㅋㅋㅋ 구산에 쭉 계시게 된 것도 다 신부님께 큰 도움일 듯합니다. 축하드려요.
아참 페이스북 저도 초보라... ㅠㅠ 그런데 기능은 다음까페가 더 나은듯해요. 트위터 전철 밟을 것 같으니 페북은 사이드로 하시고 다른 신버전 앱이 나오면 즉각 알려드릴께요...
내일 하실 것인가봐요. 그런데 다른 강론보다 내용이 좀 긴 것 같은데... 아무튼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