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수수山山水水를 풀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불교에서 잘 알려진 경구다. 네 개의 구절로 이루어져 있는데 물고 물려 있다. 그런데 보다시피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이 똑같다. 그 사이의 둘째 구절은 첫 구절을 부정하는 것 같고, 셋째 구절은 아예 뒤집어 황당무계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더니 첫 구절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겉보기는 같지만 전혀 다른 것이고 따라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첫째 구절과 마지막 넷째 구절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어떤 것이 땅인지는 저마다 입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먼저 첫 구절은 같은 말을 반복한 것이다. 두말할 나위도 없는 사실이라는 판단이다. 그런데 둘째 구절은 이를 부정한다. 사실판단이 언제 어디서나 옳은 것인가 의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산은 산이다’를 ‘산은 산이 아니다’로 부정하니 일단 술어부정으로 보인다. ‘산이다’라는 술어가 주어인 산을 온전히 다 드러내고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이 아닌 것들이 산에 들어 있어서 깡그리 산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보는 대로의 산만 산이 아니니 주어와 동격의 술어판단으로 쓸 수 없다는 일침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술어에서든지 그것이 아닐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내가 보고 내가 아는 것이 그것 자체이거나 전부일 수 없으니 말이다.
셋째 구절은 산이 물이라고 한다. 이런 황당한 궤변이 있을까? 둘째 구절이 술어부정이라면 이것은 주어부정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너무 황당하다. 그러나 술어의 판단에 오류가능성이 있다면, 주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주어에 오류가능성이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술어가 옳을 수도 있다. 여기서는 산과 물의 관계가 그것을 가리킨다. 주어와 술어에 걸침 모든 판단에서 오류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라는 것이다. 주어도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보다 앞선 판단에서 주어와 술어가 결합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산은’이라는 주어는 ‘이것은 산이다’라는 앞선 본질 판단의 결과다. 그러니 주어는 겉보기와 달리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이라는 주어는 이보다 앞서 ‘무엇인가 없지 않고 있다’는 존재 판단의 결과이다. 즉, ‘이것’도 ‘없지 않고 있는 것’으로 단순사물이 아니라 엄연한 사건이다. 문법구조상 명사의 꼴을 취하고 있을 따름이다. 무릇 모든 병사들이 그러하다 자고로 이 세상에 움직이지 않고 불변하여 생성 소멸에서 벗어난 것이 어디에 있을까?
이렇게 주어와 술어에서 그 판단이 부분적이고 편파적이어서 오류일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깨달음을 안고 다시 시작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니 넷째 구절은 더 이상 첫째 구절과 같지 않다. 이제는 산은 산이라고 해도 산이 아닐 가능성, 아니 물일 가능성을 싸안고서 ‘산’이라 칭하는 것이다. 거꾸로 물도 마찬가지다. 내가 무엇인가에 대해 지니고 있는 판단이라는 것이 얼마나 알량한 것인가를 되돌아보게 하는 깊은 통찰이다. 내가 보고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틀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불안하게 할 수도 있지만 더 많은 경우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불안과 강박에 내몰릴 때 그 원인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깨달음은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다 줄 것이다.
―정재현, 『인생의 마지막 질문』, 「무엇이 먼저인가」, 청림출판사, 2020.
첫댓글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문이 여기서 나온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