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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속히 오신다더니 말을 실수하셨나?>의 줄거리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천사가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속히'라는 단어를 예수님은 혹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뜻으로 이해하셨을까요? 속히 오시겠다고 하신 뒤 이천 년이 지났어도 예수님은 다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재림은 지금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속히 오신다더니 말을 실수하셨나?
(요한계시록 22:6~15)
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9.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10.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주님께서는 ‘내가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주님은 다시 오시지 않고 계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재림과 요한계시록을 우리 삶에서 멀게 만드는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속히’라는 간단한 단어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6절을 보면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7절에서는 일곱 대접 재앙 때 등장했던 천사 중 하나가 다시 등장하여 말씀을 전하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 요한도 알고 우리도 알고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계시록은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기 위해 쓰였습니다. 우리는 그 내용을 22장까지 살펴봤습니다. 계시록의 내용을 요약해 보자면 어린 양 예수님과 정혼하면서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렇게 온전한 결합을 이룬 자들이 공생애 천년 왕국을 살게 될 것이고, 그 뒤에 재림이 있게 되고, 백 보좌 심판이 있게 되며,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 새 예루살렘 성을 살게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순서상으로 미리 보여주신 것은 우리 의식 속에 새 하늘과 새 땅을 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육체를 입고 있는 입장에서 볼 때 새 하늘과 새 땅은 천국입니다. 다만 그 천국이 육체가 아니라 신령한 몸을 입고 살게 될 새로운 삶의 터전이라는 의미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인 천국을 의식 속에 담고 살기를 촉구하는 말씀까지 주어지면서 계시록은 끝나갑니다.
이 말씀들이 다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에 포함됩니다. 한 사람이 ‘나는 어린 양 예수님과 날마다 십자가에서 연합하며 살겠다.’라고 결심하는 것이 정혼입니다. 이제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은 자의 의식으로 이 세상을 향해 일관되게 살 때 온전한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럴 때 천년 왕국의 공생애를 살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7절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는 말씀은 ‘어린 양과 정혼하고 결혼하라. 천년 왕국의 공생애를 살아라. 보여주신 새 하늘과 새 땅을 의식 속에 담고 천국 보좌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생명수 강을 마시며 생명나무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을 읽으며 눈엣가시처럼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속히 오시겠다고 뜻을 밝히셨습니다. 이 ‘속히’라는 말과 관련하여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종말과 재림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는 ‘속히’와 같은 의미에서 항상 깨어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속히’의 뜻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지체함 없이, 시간적 간격 없이, 이제 곧 닥칠 일을 가리킬 때 ‘속히’라는 말을 씁니다.
그리고 여기서 ‘속히 오리니’라고 하셨을 때 ‘오리니’ 또한 미래형이 아닌 현재형입니다. 지금 오신다는 것인데 여기에 ‘속히’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생깁니다. ‘속히’는 어쨌든지 미래에 일어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이 어떤 의미를 갖느냐가 아주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이천 년이 지났는데도 예수님은 아직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속히’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지 모르기에 다양한 해석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아프리카의 성자로 잘 알고 있는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는 의사이자 음악가이자 신학박사이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신약성경에 대해 뛰어난 신학자였는데 신학 세계에 ‘철저 종말론’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하나 제공했습니다. 철저 종말론이란 예수님 공생애 때의 모든 말씀과 사역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금방 다시 오시리라는 생각이 강박감처럼 예수님을 누르는 가운데 일어난 일들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갔다가 금방 다시 오겠다.’라고 생각하셨기에 쫓기듯이 말씀하시고 행동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속히 오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이천 년이 지나도 다시 오시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잘못이나 실수였다기보다는, 이성적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는 철저 종말론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급박한 재림 생각에 몰리신 상태에서 사역을 하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을 그렇게 긴박한 사건으로 이해하셨음을 알고, 이천 년이 지나도록 아직 오시지 않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크게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서 사실과는 다른 일을 말씀하셨다면,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진리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나름대로의 생각과 편견과 선입견에 쫓기듯이 나온 것일 수는 없습니다. 제가 십자가 생활화에 대한 말씀을 거듭해서 말씀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면 예수님께서 ‘속히’라는 단어를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3장 32~33절에서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속히’란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속히’를 시간으로 이해한다면 예수님이 아들로서 어림짐작으로라도 언제 재림할지를 안다는 뜻이 됩니다. 그야말로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신 말씀과 위배되는 내용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속히’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태도를 겨냥하는 표현입니다.
‘속히’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대로 태도를 취해야만 재림이 의미가 있고 요한계시록도 의미가 있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라는 말씀을 예수님의 입장에서 풀어보겠습니다. ‘네가 나를 믿는다고 한다면 나와 관계를 해야 한다는 것은 피치 못할 사정이다. 그렇다면 너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절대로 다른 데 신경 쓸 생각을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우리는 바쁠 때 ‘그런 데 신경 쓸 시간이 없다.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한가하게 딴 데 정신 팔 때가 아니다.’라는 말을 씁니다. 역에서 지하철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 주변에 무슨 광고 안내가 붙어있든 신경 쓸 틈도 없이 들어오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달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속히’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속히’는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 이루어질 것이라는 시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부사가 아닙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님 외에는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어떤 일이 속히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그 기간 동안은 딴짓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오직 그 일에만 신경을 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바로 이러한 의도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마태복음 24장 4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속히’는 바로 이 말씀과 의미가 같습니다. 항상 깨어 있음이란 주님에 대해서 의식이 깨어있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만 깨어있기에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속히’라는 말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며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기를 힘쓰다 보면,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맞이할 일은 다시 오실 예수님밖에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이 땅의 삶은 근본적으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내가 하는 일은 날마다 사도 바울처럼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내가 관심할 수 있는 대상은 오실 예수님뿐입니다.
13절을 보면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21장 6절에서 하나님께서도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재림 예수님께서는 내가 신경 써야 할 일의 마침이십니다. 내가 살면서 신경 쓸 일은 회사에서든 가정에서든 시장에서든 재림하실 예수님을 만날 때 내가 어떤 모습일지를 신경 쓸 수 있으면 됩니다. 이처럼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상태를 예수님께서는 ‘속히’라는 표현을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애인이 한 달 동안 미국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남아있는 아가씨는 애인이 보고 싶을 때마다 시차를 잘 살펴서 전화를 합니다. 전화를 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아가씨의 몸은 한국에 있고 애인의 몸은 미국에 있지만 전화로 이어져 있습니다. 애인이 귀국 중인 비행기 안에서도 통화를 합니다. 비행기에서 내려서도 어디에 있느냐며 통화를 합니다. 결국 전화 들고 말하는 도중에 얼굴을 맞대게 됩니다.
재림하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이와 같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다른 것을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날 때의 내 모습이 어떠할지를 신경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속히 오리라는 말씀에 담겨있는 뜻입니다. 결국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의 관심거리는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고, 죽을 때 의식 상태로 깨어나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한편 8~9절을 보면 말씀을 듣던 사도 요한이 천사 앞에 무릎을 꿇으려 하나 천사가 만류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서 본 19장 9~10절에서도 이와 같은 장면이 나오는데, 두 장면 모두에서 천사가 ‘복이 있으리라’라고 축복의 말씀을 해주실 때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라고 대답합니다.
본문에서 ‘복이 있으리라’는 말씀은 속히 오실 예수님을 준비하는 것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루마리의 내용대로 살면서, 예수님과 정혼하고, 결혼하기 위해 살고, 결혼한 상태에서 예수님과 왕 노릇하는 공생애의 삶을 삽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예수님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사도 요한에게 ‘복이 있으리라’는 말씀은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어린 양 예수님이 복이기 때문입니다. 시작으로써 어린 양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연합하고, 마지막으로써 어린 양 예수님과 결혼합니다. 그리고 어린 양 예수님의 공생애가 나타납니다. 그 어린 양 예수님이라는 복이 가슴에 사무치기에 무릎을 꿇었다는 이야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천사를 경배하기 위해서 무릎을 꿇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경배할 수 없다는 것을 몰랐을 리는 없습니다. ‘복이 있으리라’는 말씀에 담겨 있는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어린 양, 다시 오실 어린 양, 결합해야 하는 어린 양, 내 생애 동안 천년 왕국의 공생애를 살아가실 어린 양이라는 복이 너무 좋았기에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사도 요한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어린 양 예수님을 복으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으면 못 견딜 정도로 복이 실감되고 좋게 여겨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10절을 보면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때가 가깝다는 것은 ‘속히’와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어떤 모습으로 준비될 것인가에 대해 신경 쓰는 것 외에는 다른 일에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재림하실 예수님은 십자가 생활화로 준비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예수님과 결합함으로 준비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머물면서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앞서 애인이 미국으로 출장을 간 아가씨의 예를 들었습니다. 이 아가씨의 마음은 애인을 따라 미국에 가 있습니다. 심지어 공항에 도착해서도 직접 만나기까지 계속 전화를 끊지 않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재림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너는 한순간도 나를 찾지 않고는 못 배겼구나.’라고 말씀하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림 예수님을 만나기를 준비하는 방법은, 아가씨가 애인과 통화를 하듯이 계속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과 이야기하고 마음으로 연합한 상태입니다. 이렇듯 재림하실 예수님을 만날 때를 생각하는 것 외에는 이 땅에서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11절을 보면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만을 보면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어린양의 복을 계시를 통해 다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서도 다 알려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사도 요한처럼 알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다시 오실 어린 양이라는 복은, 돈이나 건강 같은 세상의 가치들과 달라서 바라기만 하고 갖지 못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기만 하면 내 것이 되는 복입니다. 이 복을 가지면 모든 말과 행동이 의롭고 거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린 양이라는 복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 양을 등졌기에 어린 양의 피로 깨끗해짐이 없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말하고 행동하니 불의와 더러움이 계속됩니다. 심지어 어린 양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중에도 불의와 더러움을 계속해 나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 가족 중에도 어린 양이라는 복을 차버리고 불의와 더러움에 빠져 사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보고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우리 아이들이 어린 양을 등지고 살아갈 수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혹은 ‘우리 아이들이 어린 양을 받아들인 사람으로서 살려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어린 양이 절대적인 복은 아니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녀나 손주들까지도 끝까지 불의와 더러움에 빠져 살다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짜 복이 계시되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 복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12절을 보면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나와 만날 생각하는 것 외에는 딴짓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라고 다시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제가 지금 65세인데 100세까지 살기로 정해져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기간상으로는 아직 살날이 35년 남은 셈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딴짓할 시간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몇 년이 남았든 딴짓할 시간은 없습니다. ‘속히’라는 단어는 바로 내 태도를 겨냥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또 행한 대로 상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직장에서도 재림하실 예수님을 만날 때의 모습만을 신경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어차피 우리가 만나야 하는 예수님은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고 부활과 승천을 생각하는 것은 진짜 살아계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만드셨고 그 길을 따라간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살아계신 분으로 나를 만나주시고, 부활하신 사건 속에서도 살아계신 분으로 나를 만나주시며, 보좌 우편에서도 살아계신 분으로 나를 만나주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예수님을 만날 때 내가 하는 행동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가정이나 직장에서 십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재림하실 예수님을 만날 때를 기억하면 그 상태에서 행동하게 됩니다. 마음속에서 예수님을 만난 상태에서 사장님이 시킨 업무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상태에서 말하고 행동하며 직장생활도 하고 가정생활도 합니다. 행한 대로 상을 주신다는 것은 그러한 모든 말과 행동은 상 받을 일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직장에 나갔다고 해서 예수님을 다 잊어버리고 모든 의식을 직장 일에 집중한다면 어떨까요? 그것이 더러움이고 불의입니다. 가정에서는 배우자를 볼 때, 자녀를 볼 때, 돈 문제 등에 대해 더러움과 불의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돈 문제가 생겨도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 만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돈 문제를 마음에 담지 않기 위해 십자가 예수님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예수님을 붙잡은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만을 받아들입니다. 아버지만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재림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 끊어버리고 곧바로 돈 문제를 받아들인다면 불의와 더러움입니다.
21장 8절에서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두려워하는 이유는 내가 관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건강 문제, 가족 문제, 회사 문제 등에 대해 내가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것을 기어코 등지지 않고 끌어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이유에서든 육체가 죽게 되면 마음은 불의와 더러움 속에 있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만날 날을 기억하면서 준비하려면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일단 예수님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기억에서 예수님을 되살려야 합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붙잡고 가정으로 들어가고 직장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퇴근길에 지하철에서 내려 집에 들어가기에 앞서 잠깐 ‘십자가 예수님, 주님과 함께 들어갈 가정에 대해서 저는 죽었습니다. 오직 제 마음은 아버지만을 바랍니다. 아내에게도 바라지 않고, 자녀에게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오직 예수님과 하늘에 올라가서 아버지만을 바라게 해주세요. 예수님과의 결합이 떨어지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결합하고, 부활에 결합하고, 승천에 결합하고, 보좌 우편에서도 결합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결합하면 아버지를 보고 계신 예수님 속에서 나도 같이 아버지를 봅니다. 아버지와 하나 되신 예수님 속에서 나도 같이 하나가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떨어뜨리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준비하고 가정에 들어가고, 그렇게 준비하고 직장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가정에서 직장에서 하는 말과 행동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상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는 말씀은 단순히 사랑하고 구제하고 봉사하고 충성한 것에 대해 상응하는 무언가를 주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또한 ‘속히 오리라’는 말씀과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염두에 두는 것 외에는 딴짓을 하지 말고, 예수님과 정혼하고 결혼하고 공생애 예수님이 나타나는 일에 있는 힘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밀착하는 일에 있는 힘을 다하는 동안에, 돈 버는 현장에서 일하면서 말하고 행동하고, 가족과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상 받을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행위로 상을 받는 공로 사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과의 밀착은 믿음입니다. 예수님과 밀착한 믿음의 상태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은 다 상 받을만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상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요한이 무릎을 꿇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했던 어린 양의 복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십자가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신 예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과 결합함으로써 재림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면 예수님과 연결될 수 없습니다. 세상이 파고들 때마다 십자가는 되살아나야 하고, 십자가 예수님과의 결합은 날마다 반복되어야만 합니다.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살다가 죽은 뒤에 깨어나면 그것이 재림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보일 수 있는 제대로 된 모습입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라는 말씀은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여러분이 앞으로 40년을 살든, 50년을 살든 매일 매 순간 적용되어야 합니다. ‘나는 다른 데 신경 쓸 틈이 없다. 십자가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가야만 한다.’라고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가신 곳에 우리는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매일매일 ‘나는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지금 내가 이러고 있을 겨를이 없다.’라는 의식을 항상 유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루를 살도록 허락을 받았어도 이 땅에서 딴짓하지 않게 해주시고,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자로서 분명한 의식을 곧추세워 놓고 어떤 장소든 어떤 환경이든 처하게 해주시옵소서. 오직 예수님과 밀착된 상태로만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예수님이 상을 주고 싶어서 못 배기시는 하루하루를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