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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 생활화가 주변에 끼치는 소름>의 줄거리 :
내가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동안 주변인들이 내게서 소름 돋아 하는 상황을 대해본 적이 있습니까? 이런 상항이 벌어질 수 있는 이유는 내 속에서 자기들이 생각하는 인간의 일반적인 모습이 살아 있음을 발견할 수 없는데도 내 삶이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내 주변인들은 나와는 다른 인격체인 내가 믿는 하나님이 실제로 내 삶에서 살아 움직이심을 보며 소름 돋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주변에 끼치는 소름
(창세기 26:26~35)
26.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27.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28.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29.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30.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31.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32. 그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이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알리어 이르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33.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생활 현장에서 십자가 생활화가 진정으로 이루어질 경우에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볼 때 소름 돋는 경험을 합니다. 이것이 본문 속에 들어있는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일을 평생 직업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 아브라함의 상속자인 이삭이 무저항 속수무책의 상태에서 그랄 주민들의 악의적인 적대감에 먹잇감이 되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삭은 우물을 반복적으로 강탈당했고 그와 더불어 매번 일궈놓은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억울한 상황이 반복되었습니다. 결국 이삭은 그랄 주민들이 더는 자기네 땅이라고 우길 수 없을 만큼 멀리 쫓겨나서야 비로소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하게도 생각하지 않았던 상황이 벌어집니다. 아비멜렉이 친구와 군대 장관을 대동하고 이삭을 찾아와 화친을 요청합니다. 그 명분을 보자니 다분히 뜬금없는 내용입니다. 28절을 보면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삭과 함께 계심을 분명히 보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화친의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9절을 보면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라고 합니다. 해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부터 이들이 이삭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화친의 명분입니다. 또 그러면서 자신들이 이삭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그랄 주민들은 여러 차례 이삭의 우물을 강탈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우물을 강탈한 것 정도는 아직 배려와 호의였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랄 주민들에게 이삭은 밖에서 굴러온 돌입니다. 본인들은 이삭을 때려죽였으면 좋겠다는 본심이 있었기에 우물을 강탈하고 살던 터전에서 쫓아낸 것 정도는 배려이자 호의였다고 느낀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화친의 명분입니다.
여기서 참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두 번째 화친의 명분인 이삭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아비멜렉은 혼자 왔던 것이 아니라 친구와 군대 장관을 대동했습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영역의 세 사람이 이삭에 대한 두려움을 공유했음을 드러냅니다. 그랄 지역 주민들에게 있어서 이삭에 대한 두려움은 보편적인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이유에서 이삭을 두려워했는지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아비멜렉은 블레셋의 그랄 지역에서 왕정 체제를 완비하고 군대 장관이라고 부를 사람이 있을 정도로 군사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아비멜렉이 일개 이주민 이삭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이삭에게는 종들이 있을 뿐이지 군사력을 가졌다는 언급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삭은 백배의 수확을 얻었고 심히 많은 가축과 종이 언급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삭이 군대 장관이 존재할 정도로 체제가 완비된 나라와 대등할 수는 없습니다. 어엿한 한 나라의 왕이 자존심을 구겨가며 화평을 요청할 정도로 두려움을 느낄만한 대상은 아닙니다.
이삭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전쟁에서 승리해 본 역사가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힘과 무력으로 강제하거나 압도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물을 빼앗을 때마다 삶의 터전을 포기하고 미련 없이 쫓겨나는 모습을 반복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삭의 태도는 무저항 속수무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 왜 아비멜렉이 이삭을 두렵게 느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이들이 이삭에 대한 두려움을 공유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여호와를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시 28절을 보면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삭에게만 일어나는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분명히 보며 두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비멜렉은 단순히 이삭이 번영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번영은 굳이 이삭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세상에서 볼 수 있습니다. 화친의 이유가 될 수는 있어도 두려움의 이유는 될 수 없습니다. 번영한 사람과 친해져서 득이 되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는 있어도, 특별히 군사력이 없는 사람에게 두려움을 갖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아비멜렉과 그 친구와 군대 장관은 도대체 이삭에게서 어떤 식으로 여호와가 함께 계심을 보았을까요? 또 여호와가 함께 계심을 본다는 것이 왜 두려움의 이유가 될까요? 그 대답을 본문을 통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삭은 무저항 속수무책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으므로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서도 마땅히 나타나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나서서 의욕을 부리지 않아도 하나님 주권의 바탕과 토양 위에 삶이 놓여있고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따로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것과 똑같은 태도가 나타나는 이삭을 보면서 강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이삭은 그랄 주민들이 쓸모 없다고 버린 땅에서 백 배의 결실을 얻고 수많은 가축 떼와 종을 갖게 되고 목초지는 형성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특별한 일입니다. 그런데 더욱 특별한 것은, 우물을 빼앗긴 뒤 이삭의 태도입니다. 이삭은 백 배의 결실을 이루게 한 땅에 대한 아쉬움을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몇 번이나 땅을 빼앗김에도 똑같이 무저항 속수무책의 태도를 보입니다. 보통 사람에게 있어서 번영하는 삶의 근원이라고 할 수도 있는 땅에 대한 미련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삭은 번영을 이루고 그 땅을 빼앗김에 대해 아무런 아쉬움을 보이지 않고 무저항 속수무책으로 쫓겨 다니기만 합니다. 그런데 이삭의 삶이 쇠락하거나 망할 기미나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본 그랄 주민들은 소위 멘붕이 됩니다. 일반적인 상식과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는 이삭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삭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의 한계 밖에서 살고 있음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삭은 아내를 내 누이라고 속일 때부터 자기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아까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없는 것들을 향해 강렬한 열망을 갖고 얻으려는 아등바등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의 삶이란 주어진 것을 지키려 아등바등하고 없는 것은 얻으려 아등바등합니다. 그야말로 삶은 아등바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의 삶에서는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아등바등함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기준에서 보자면 이삭은 삶에 대해 죽은 것입니다. 지키려 하거나 얻으려 하는 아등바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을 등짐에 아쉬움이나 미련이 없습니다. 없는 것을 획득하려는 열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의 기준에서 보자면 이삭은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랄 주민들은 이러한 이삭을 바라보면서 소름 돋는 경험을 합니다. 이삭은 삶에 대해 살아있는 자가 아니었으나 이삭의 삶에서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음을 본 것입니다. 그만치 이삭은 땅에 대해 철저하게 죽은 자의 모습을 띱니다. 그렇기에 이삭의 삶을 들여다보면 무엇인가 다른 인격체가 살아있음이 도드라져 보입니다.
분명히 삶에 대해 죽었는데 삶이 쇠락하거나 망하거나 중단되지 않습니다. 이삭은 삶에 대해 살아있는 모든 사람이 보이는 아등바등함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던 그랄 지역 주민들은 깜짝 놀랍니다. 누군가가 이삭의 삶 속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움직이는 존재가 누구일까를 보니 이삭이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것을 평생의 은퇴 없는 직업으로 삼았고 이삭은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상속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이삭의 직업은 하늘에 계신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대해서 자기의 의욕과 생각과 희망과 뜻과 의지를 동원하는 아등바등함을 보일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의 삶은 그랄 주민들이 버린 땅에서 백 배의 수확을 얻는 이상한 기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아무리 우물을 빼앗기고 토지를 빼앗겨서 쫓겨가더라도 삶이 쇠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본 그랄 주민들은 이삭이 부르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이 이삭의 삶 속에서 움직이심을 알게 됩니다. 이로부터 소름 끼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당시에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종교와 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신이란 없는 것을 갖고 싶어 하는 희망과 주어진 것을 잃는 두려움이 만들어 내는 신들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희망과 두려움에 의해서 신이라는 대상을 만들어 붙잡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신이 소름 돋을 정도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경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삭의 모습에서 바로 그것을 본 것입니다.
이삭에게서는 보통 사람들과 같이 살아있는 자로서의 태도가 보이질 않습니다. 아등바등함이 없는 이삭의 삶은 죽은 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삭의 삶은 쇠락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삭의 삶은 도대체 누가 이끌어 가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겨납니다. ‘이삭이 믿는 신은 정말로 살아있는 것인가?’라고 생각하자 깜짝 놀라며 소름이 돋고 두려움이 생깁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아비멜렉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면 결국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를 받아들이고 믿게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비멜렉이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를 두려워하였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종교 상황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당시에는 국가와 민족 별로 신이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공통으로 풍요와 다산을 소원했고 이미 있는 재산이 상실될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얻고 싶은 희망과 지키려는 두려움에 의해서 자기들만의 신을 가지고 섬겼던 것입니다. 이 신을 바꾸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30년 만에 여고 동창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동창회에 나가보니 고등학교 시절 가장 못났던 친구의 남편이 엄청나게 잘 나가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 팔자는 왜 이런가 푸념을 할지언정 남편을 바꾸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동창회는 결국 누구의 남편이 풍요와 다산을 많이 가졌는가를 확인하는 자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분위기도 이와 같습니다. 남편을 바꿀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신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풍요와 다산을 관장한다고 여겨지는 신들은 많았습니다. 가나안 땅에서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고, 이집트에서는 민이라는 신을 섬겼고,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에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습니다. 아프로디테는 로마의 비너스 신입니다. 사랑과 미의 신인 아프로디테는 고린도 사람들이 섬기던 풍요와 다산의 신입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아데미 여신이 풍요와 다산의 신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누구의 신이 풍요와 다산을 많이 가져다주는지를 경쟁하는 것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풍요와 다산에서 밀렸다고 생각하면 신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신을 더 잘 섬겨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신에게 경배하고 제물을 바쳤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정성껏 모시니 부디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기게 해주십시오.’라는 마음가짐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내 소원과 두려움이 강렬함으로 신을 붙잡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게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그랄 주민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삭에게서 이상한 모습을 봅니다. 이삭은 없는 것을 소원하지도 않고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이삭이 부르는 신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풍요와 다산을 위해 신을 호출하지도 않는데 이상하게 삶이 쇠락하지 않습니다. 이로부터 그랄 주민들은 이삭의 신이 정말로 살아있는 신임을 느끼게 됩니다. 이삭의 삶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인격체가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본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삭의 삶이 이렇게 진행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비멜렉은 바로 이 두려움에 의해서 이삭을 찾아와 화친을 청합니다.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왔던 것은 단순히 이삭의 번영 때문이 아닙니다. 이삭은 번영에 대해 죽은 자와 같은 태도, 아까워하지 않는 태도, 무저항 속수무책의 태도를 보일 뿐입니다. 아비멜렉은 이삭의 삶 속에서 살아있는 다른 인격체가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 여호와가 이삭의 삶 속에서 살아서 움직이고 계시기에, 이삭은 삶 속에서 죽은 자처럼 되었습니다. 이러한 대비 속에서 아비멜렉은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의 생활 현장에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풍요와 다산을 추구합니다. 부자 되고 번영하는 길을 향하여 아등바등하며 살아갑니다.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신을 믿기도 하며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조차도 우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자기들이 아등바등하며 살아있는 동안에 붙잡는 신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삶에 대해서 아등바등하고 있는 한 반드시 죽은 종교의 신을 붙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삶에서 의욕을 보입니다. 뜻과 의지를 보입니다. 소원하고 지키려고 아등바등합니다. 잃어버릴까 두려워합니다. 건강을 잃을까, 자녀가 취직을 못할까, 남편이 승진을 못할까, 일정한 수입이 없을까 걱정합니다. 그러한 마음이 가득한 채로 부르는 하나님은 이삭의 삶 속에서 함께 계시던 그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아데미 여신이나 아프로디테 여신이나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우상에 불과한 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는 이유는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마주하기 위함입니다. 그러기 위해 이 세상에서 내 마음을 빼앗는 모든 대상에 대해 죽습니다. 가난에 대해서도 죽고, 번영에 대해서도 죽고, 땅에 대해서도 죽고, 우물에 대해서도 죽습니다. 당시 우물은 이 세상에서 내 몸이 살아있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생명줄입니다. 이삭은 내 몸을 위한 생명줄에 대해서도 죽었습니다. 하나님을 마주하는 것만이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서 삶에 대해 죽어야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갖고 싶은 아등바등, 지키고 싶은 아등바등함이 십자가에서 죽으면 내 삶에서 하나님이 움직이십니다. 그럴 때 내 주변 사람들은 그랄 주민들이 이삭을 본 것처럼 삶에 대한 내 죽음을 볼 것입니다. 내가 죽었는데도 삶이 진행되는 이상한 기현상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입으로 고백하는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심을 보면서 소름 끼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살고 계십니까?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이 주변 사람들에게 강하게 보여서 두려움을 발생시킬 정도까지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들에게 소름 돋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죽음의 철저함에 달려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나를 보고도 내가 믿는다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전혀 느끼지 못할까요? 세상을 향하여 그들과 다를 바 없을 만큼 아등바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몸과 건강에 대해서 아등바등합니다. 건강을 얻으려 하고 이미 있는 건강을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재물에 대해서 아등바등합니다. 있는 것을 지켜내려 하고 없는 것은 얻으려고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사는 동안 입으로 하나님을 백 번, 천 번 불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나의 죽음이 배경이 되지 않는 한 내 삶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움직이신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보이고 느끼고 확인될 길이 없습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가라고 입으로 떠든다고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배우자와 자녀와 부모 형제들이 왜 내게서 소름 돋는 경험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물론 소름 돋는 경험을 하더라도 그들이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의 창조주이자 아버지로 받아들인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 사람은 죽은 것 같은데 무엇인가 다른 인격체가 살아서 삶을 이끌고 간다.’라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느 사람과는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삶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확인되어야 합니다.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나와 대화한 적도 없기에 나에 대해서 모른다고 칩시다. 그러나 적어도 나와 관계 맺어진 주변 사람들은 ‘이 사람은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니다.’라는 느낌은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이고, 이러한 나의 죽음을 배경으로 내 삶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종의 인격체가 있다는 사실이 소름 돋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전해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랄 주민들은 이삭이 이룬 번영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이 분명히 함께하신다는 것을 느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삭이 번영에 대해 죽은 모습을 보였기에 ‘어떻게 사람이 땅과 우물을 아무런 미련 없이 등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보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 또한 그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저 사람은 세상의 번영에 대해 조금도 아등바등하지 않는 걸까? 아등바등하는 것이 산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이 세상의 가치를 등지고 하늘로 올라가는 죽음이 보여야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잘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풍요와 다산에 대한 바람이란 있는 것을 지키고 싶음이기도 하지만 없는 것을 원함이기도 합니다. 없는 것에 대해서는 원하지 않음으로써 죽음을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아까워 하지 않음으로써 죽음을 보이면 됩니다. 물론 죽음을 보이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이유는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위해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러한 죽음이 철저하게 일어난다면 사람들은 나의 죽음을 볼 수밖에 없고, 세상 삶에 대한 나의 죽음을 배경으로 내 삶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모종의 인격체인 하나님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소름 돋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소름 돋지 않더라도 적어도 이상하게 여기며 두려움을 느끼는 경우는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사울이라는 청년이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은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서 목숨을 지켜내려 합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은 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그 모습을 보며 씩씩거리고 분노했지만 그 분노 깊은 곳에서 ‘이건 대체 무엇인가?’라는 두려움에 마음이 강타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려움이 시발점이 되어서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고꾸라집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몸을 갖고 사는 삶에 대해 아등바등하지 않고 죽었다고 여겨질 정도로 보이는 가운데, 이 사람을 움직이는 다른 살아있는 인격체가 있다고 느끼자 두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다메섹 도상에서 그 두려움의 대상을 만납니다. 살아있는 인격체이신 예수님이 현상적으로 보일 수 있고 들릴 수 있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삭이 주변 사람들에게 뿜어냈던 두려움을 우리도 뿜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함으로써 세상에 대해 죽어있는 나의 삶 속에 누군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자들입니다. 소름 끼치게 하는 자들입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음을 더욱 철저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봄이 뚜렷해질수록 주변 사람들은 내 삶에서 살아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봄으로 소름 돋는 경험이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부디 우리 속에 죄와 저주의 힘을 십자가로 이기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세상을 향한 아등바등함이 못 박혀 죽게 하시되, 모든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죽음을 배경으로 내 삶에서 살아 움직이시는 창조적인 주권자 하나님의 움직임을 모든 사람이 소름 돋는 경험을 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