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떠도는 글을 가져오실 때는
‘정말 그러한가?’ 자세로 살핀 뒤
가져오셔야만 합니다.
朴埰同 (2014년 1월 24일)
송00 님 질문에 답한 답글로 윤영상 목사님이 “거듭난 자는 즉 중생한 영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견해를 한 본성주의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본성주의 견해를 지지하는 분이 개혁주의 안에도 있습니다.”라고 하신 뒤, 그 안에 드는 분으로 “20세기 개혁 신학의 거목”으로 평가 받으시는 ‘존 머레이 목사님’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에 떠도는 글, “다시 한 번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견해는 최근에 유행하게 된 것이며, 초기 개혁자들 가르침이 아니며, 또한 주요한 세대주의 신학자들도 가르치지 않은 이론입니다.”로 결론 맺는 글을 옮기셨습니다.
“세대주의 신학자들도 가르치지 않은 이론입니다.”는 글은 저를 ‘무척’ 불쾌하게 만듭니다. “해박한 성경 원어 실력으로 ‘개혁 신학의 거목 게할더스 보스 목사님 성경신학’을 조직신학에 접목한 인물이시다.”는 평가를 받으시는 존 머레이 목사님이 ‘종말론’에서 ‘이단사설’에 가까운 이론을 늘어놓는 세대주의 신학자들과 비교돼 ‘무척’ 불쾌한 것입니다.
존 머레이 목사님은 {영혼의 의사}를 지은 영국 피터 마스터스 목사가 넘볼 인물이 아니실뿐더러, ‘{영혼의 의사}에서 존 머레이 목사님 중생론을 개혁 신학의 “변종”, “미혹”, “원조”로 정죄한 피터 마스터스 연속적인 중생론(줄여서 연중론)을 진리로 여기시는 한국교회 목사님’들이 동네북으로 삼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존 머레이 목사님을 동네북으로 삼으시더라도 ‘텍스트’에 근거해 동네북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존 머레이 목사님이 소천 받으신 목사님이실지라도, 한국 교회 연중론 목사님들은 ‘텍스트’에 근거하지 않은 ‘거짓증거들’, ‘존 머레이 목사님을 음해하는 거짓증거들’을 멈추시기를 바랍니다. 이 ‘거짓증거들’을 하나님 앞에서 ‘직고’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기지 마시고, 이제 그만 ‘존 머레이 목사님을 음해하는 거짓증거들’을 멈추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존 머레이 목사님을 음해한 거짓증거들’을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과연 존 머레이 목사님께서는 “중생한 영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주장하셨을까요? 혹은 “중생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주장하셨을까요? 만약 존 머레이 목사님께서 “중생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면, 어떤 맥락(전후문맥)에서 그 말씀을 하셨을까요? 한국 교회 연중론 목사님들 앵무새와 같은 주장 “존 머레이 목사는 성경의 근거도 대지 않고”···. “성경의 근거도 대지 않고” 존 머레이 목사님께서는 자신의 논리(신학)를 전개하셨을까요?
인터넷에서 떠도는 글이 아닌 ‘텍스트’로 갑니다. 다음 글은 제가 “20세기 개혁 신학의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하는 책”, 장호준 목사님 역 ‘존 머레이 {구속}’ [제12장: 성화]입니다. {페북} 특성상 [성화] 전체를 옮기지 못합니다. 들여쓰기 없이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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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부르심과 거듭남의 우선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유효한 부르심을 입고 거듭난 모든 사람들에게 죄는 더 이상 아무런 권세도 없다는 것이다. 부르심을 입고 그리스도와 연합한다(고전 1:9)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말이다. 죄에 대해서는 죽고,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죄의 몸은 멸했고,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롬 6:2~14). 로마서 6장 14절 바울 사도 말씀은 단순히 격려의 말이 아니다.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은 더 이상 죄의 권세 아래 있지 않다는 귀납적이고 논리적이며 필연적인 진술이다. 문맥상 수신자들을 격려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대목에서만큼은 강한 부정을 하고 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 문제를 거듭남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똑같은 결론에 이를 것이다.
모든 거듭난 사람 안에서 그들을 주장하고 이끄시는 주체는 성령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난 모든 사람이 가진 지배적인 성향과 근본적인 원리와 주도적인 성품은 거룩이다. 거듭난 “신령한” 사람은 그 속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기뻐한다(고전 2:14~15. 롬 7:22). 거듭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않고 죄를 지을 수도 없다는 요한 사도 말씀은 이런 의미일 것이다(요일 3:9, 5:18). 거듭난 사람은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참조; 요일 1:8. 2:1). 요한 사도는 지금 거듭난 사람이라면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을 수 없고(요일 5:16),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음을 부인할 수 없고(요일 4:1~4), 자신을 다시 죄에 방임할 수 없고, 스스로를 악으로부터 지키고,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신자 안에 거하시는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시다(요일 4:4).
…(중략)…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와 관련해서, 죄의 권세에 대한 이런 승리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이뤄 가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과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은혜로 단번에 이뤄진다. 이 승리가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수고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완전주의자들 주장만큼은 옳다. 믿음을 통해 순식간에 이뤄지는 일이라는 주장도 옳다. 하지만 이들은 성화의 전체 구조를 어그러뜨리는 세 가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첫째, 거듭나고 유효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승리를 소유했다는 사실을 이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 그들은 이 승리를 칭의의 상태와 별개인 하나의 복으로 여긴다. 셋째, 그들은 이 승리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것과 매우 다르게 설명한다.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한다. 최소한 죄인 줄 알면서 그것을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해당하는 죄의 권세와 죄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급진적인 단절로서 승리가 아닌, 다른 의미의 승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 구절들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은 그분 죽음이 가진 효력과 그분 부활의 능력 안에서 연합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 모든 사람은 죄로부터 자유하며, 죄가 더 이상 이 사람 위에 군림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를 얻고 거듭남을 통해 죄의 부패로부터 건짐을 받았다고 해서 신자의 마음과 삶에 남아 있는 모든 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참조; 롬 6:20. 7:14~25. 요일 1:8. 2:1). 신자라고 해서 완전히 거룩하고, 흠이 없고, 더러운 것이 없고, 죄인들과 전혀 상관이 없을 정도로 완전한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른 것은 아니다. 성화는 분명 이 사실과 관련돼 있다. 모든 죄를 근절하고 하나님 독생자의 형상과 완전히 일치해 주가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되는 것이 성화의 목적이다. ‘완전 성화entire sanctfication’ 개념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이는 우리 낮은 몸이 그리스도 영광의 몸과 같이 변화되고, 썩어질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을 입는 때가 돼야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빌 3:21. 고전 15:54).
…(하략)…
댓글란
윤영상
네, 그렇군요. 제가 쓴 스크랩해 온 그 글에서 그 부분은 삭제를 하겠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군요
그런데 존 머레이 중생론 중 그리스도의 연합에 대한 비판을 자꾸 거짓증거 한다고 하는데, 확실히 알고 하는 말이 아니라면 그 부분 삭제함이 좋을 듯합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언급하는데 자꾸 그것을 거짓증거 식으로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사계 님 역시 존 머레이 그리스도와 연합이 ‘정말 그러한가?’ 자세로 모두들 인정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따져 보고 나서 위처럼 거짓증거이니, 동네북이니 이런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댓글 중략)…
박채동
윤영상 목사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군요.”는 무슨 뜻입니까?
“존 머레이 중생론 중 그리스도의 연합에 대한 비판을 자꾸 거짓증거 한다고 하는데, 확실히 알고 하는 말이 아니라면 그 부분 삭제함이 좋을 듯합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언급하는데 자꾸 그것을 거짓증거 식으로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고 하셨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개혁주의 마을}에 쓴 제 글들을 링크해 드리겠습니다.
윤영상
처음에 존 머레이에게 기원이 있는 듯한 문구가 좀 확실치 않고 설마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에 존 머레이 부분 문장만 빼고 복사해 왔다가 그냥 다 복사하자, 하고 복사해서 붙였던 겁니다. 제가 공부했을 때는 존머레이 그리스도의 연합 외에는 다른 이상한 부분은 없었고 다 개혁주의에 굳게 서 있었거든요. 그런데 혹시 나도 모르는 존 머레이 자료에 그리 나와서 그런 말했을지도 몰라서 그냥 다 복사해 붙인 거였지요
朴埰同
<거짓증거: 제가 연중론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까닭입니다.>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D4ux/230
<존 머레이 [유효한 부르심]: 하나님께서는 ‘존 머레이 목사님을 음해하는 손성은 목사님 거짓증거’에 따른 ‘죗값’을 분명히 물으실 것입니다.>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D4ux/336
윤영상
존 머레이 그리스도와 연합 부분만 여기 올리시면 될 것을…. 그리고 위의 글을 검증할 참고자료도 첨부했겠지요? 이리도 저리도 해석되는 자료 말고 말입니다.
그런데 전에 송인규 교수는 전체적으론 존 머레이 글이 피터 마스터스 주장과 같다고 했는데, 정말 그게 진실이라면 사계 님은 어찌 되는 건가요? 하지만 존 머레이가 연중론과 비슷한 견해는 주장한 때는 초기 때였고 후에 변한 것 같은 자료가 발견되긴 했는데, 중간에 바뀌어야 사계 님 주장을 존 머레이 교수가 지지하게 되겠지요
朴埰同
윤영상 목사님, {영혼의 의사}에서 존 머레이 목사님 중생론을 왜곡 매도한 피터 마스터스 목사와 교제를 나눈다는 로버트 레이몬드 목사님이 존 머레이 목사님을 어떻게 왜곡 비평하셨는가, 그리고 그 왜곡 비평을 손성은 목사님이 또 어떻게 되풀이해 존 머레이 목사님을 왜곡 매도하셨는가, 하는 현장을 보셔야지요.
윤영상 목사님 {페북} 담벼락 댓글에서 “그 이상한 목사”라는 단어를 쓰셨더군요. 존 머레이 목사님을 뜻하는가, 아니면 제가 그러께 여름 연중론을 반대하기 전까지 연중론을 거의 홀로 꿋꿋하게 반대하셨던 라마드 목사님을 뜻하는가, 아니면 갈릭 목사님을 뜻하는가, 저는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어느 분을 뜻하는지 분명히 해 주십시오.
윤영상
갈릭이요. 갈릭. 이상한 목사
朴埰同
‘송인규 교수님 글’에 대한 독해법은 다음 글을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노승수 목사님 연중론’에서 빠져 나오는 길 - (1)>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D4ux/334
윤영상
송 교수 글은 연중론이 맞다는 거고요. 존 머레이도 전체적으로 같은 소리인데 피터 마스터스가 한 부분을 너무 과하게 비판했다고 하니, 결국은 연중론이 맞단 소리지요. 사계 님 입장에서 송 교수가 틀려야 합니다
朴埰同
윤영상 목사님, ‘갈릭’보다는 ‘갈릭 목사님’이라는 표현이 낫지 않겠습니까?
갈릭 목사님 어떤 점이 이상하셨습니까?
윤영상
갈릭 목사님께서 말한 좁은 중생 시 회심이 일어난다는 이 견해는 대체 어디서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요?
朴埰同
그 문제는 다음 글을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 비행>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D4ux/341
…(댓글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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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 그룹 {개혁공감}에서 옮겨오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