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제동 외갓집 나들이
글 천수정
지난 8월 초 여름휴가로 상해와 항주 일대를 다녀왔다. 가는 장소마다 특별한 개성이 있어 즐거웠고 호기심이 들었다. 그 중 특히 잊을 수 없는 장소를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항주의 서호를 들겠다. 상해의 마천루나 번화한 쇼핑가보다는 잔잔한 물결과 살랑살랑 이는 바람으로 마음에 저절로 안식을 주는 서호의 풍광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이토록 서호에 반한 이유는 소제동이라는 지명의 연원이 이곳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인공호수 서호를 파낸 흙으로 호수 안에 두 개의 방죽을 쌓았는데 백거이의 이름을 딴 백제와 소동파의 이름을 딴 소제가 그것이다. 과거 소제동에 있었다는 소제호를 찍은 흑백 사진을 보면 버드나무와 연꽃이 풍광의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는데 마침 서호에도 버드나무와 연꽃이 한창이었다. G20 정상회담을 앞두고 일부러 늦게 식재했다는 연꽃이 여기저기 피어나고 있었고 가지런하게 단발로 자른 버드나무가 작은 바람에도 한들거렸다.
서호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까닭은 이름 때문이다. 사람이나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바로 정체성을 인정하는 일임과 동시에 나와 그것 사이에 관계 맺기가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7월 15일, 소제동에 있는 문화유산울림에서는 '소제동 외갓집 나들이'라는 아주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그중 첫 프로그램이 소제동 뚝방투어였다. 뚝방은 방죽의 충청도 사투리이다. 뚝방투어의 시작점은 울림 사무실 앞인데 이곳에서 소제동 이름의 유래를 알게 된다. 욕심 많은 시아버지 대신 며느리가 스님에게 시주를 하였다. 스님은 보답의 뜻으로 모월모일 아이를 업고 이곳을 떠나되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하였다. 드디어 스님이 말한 그날 아이를 업고 산으로 올라가면 며느리는 궁금하여 뒤를 돌아다보았고 갑자기 홍수가 일어 마을과 집이 모두 잠겼다.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 바로 소제호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이름의 유래는 소동파가 항주 자사로 있을 때 소호 안에 소제 방죽을 쌓았는데 소제호가 서호처럼 아름다워 '소제'라는 이름을 붙였다고도 한다. 금기는 깨지면서 아름다운 전설을 남긴다. 게다가 누구든 칭찬해 마지않는 장소의 이름을 따왔으니 소제호는 호수 바닥에 신비한 전설을 잠재운 그윽한 곳이었을 것이다.
뚝방투어는 뚝방의 동, 북, 서, 남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동쪽에는 옛 뚝방의 일부분이 그대로 남아 있다(서쪽에도 일부분 남아 있다). 그 뚝방 한켠에 송자고택이 남아 있다. 지금은 관리 차원에서 문이 잠겨 들어갈 수 없지만 송시열이 중년에 내려와 8년쯤 기거하던 곳이다. 골목을 따라 좀 더 나오면 버드나무 상회가 있다. 이름은 버드나무 상회인데 그 앞에는 은행나무가 서 있다. 소제호에 있던 버드나무에서 유래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간판으로나마 소제호의 추억을 기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자영약국 쪽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가면 철갑교가 나온다. 철갑교 인근이 소제호를 가로지르던 뚝방이 있던 곳이다. 철갑교를 건너기 전 우측 천변 길을 따라 내려가면 벽화마을과 대동천변의 연꽃을 만날 수 있다. 올 여름 엄청난 비에 많은 연꽃이 피해를 입어 부러진 가지는 정리한 상태였는데, 옛 소제호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이곳에서 가제교를 건너면 관사촌으로 이어진다. 관사의 독특한 지붕과 굴뚝, 나무 전봇대를 만날 수 있는 곳이 이곳이다. 대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대창이용원도 이곳에 있고 소제 창작촌도 위치해 있다. 창작촌 인근의 좁은 골목을 따라 빠져 나오면 청양슈퍼가 있고 이곳에서 다시 벽화 골목으로 이어진다. 벽화 골목 말미에는 빼뺴로 나무 전봇대가 있다. 전봇대에는 제법 큰 가로등이 달려 있는데 밤만 되면 환히 불이 들어와 지금도 전봇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벽화 골목에서 양버즘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 동광장 주차장 쪽으로 내려오다 좌측 골목으로 빠지면 대동천이 나온다. 돌다리를 건너면 울림 사무실, 우리의 출발점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오래전 이곳에 소제호가 있었다는 상상을 발걸음으로 구체화 시킨 이번 투어로 소제호의 규모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그곳에 깃들어 살던 사람들의 삶도 추측해 볼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흔한 촌수는 이모가 아닐까 한다. 식당이나 재래시장에 가면 여기저기에서 이모들이 출몰한다. 이모들은 이렇게 많은데 그렇다면 그드릐 외갓집은 어디일까. 도심 속 외갓집, 언제든 편안하게 올 수 있는 곳, 소제동의 외갓집은 함께 뚝방길을 걸을 전국의 조카들을 기다린다.
첫댓글 어쩜..!! ..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