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정리: 2001.4.5
09:50반선-10:30와운마을-12:00헬기장-12:30영원령(점심)-13:35상무주암-14:00삼정산-15:00묘지-16:실상사-16:10산내 버스정류장-17:00뱀사골주차장-17:30정령치-19:00남원
오늘은 식목일. 어제 테니스를 하던 중 Y고로 전근 간 K부장의 전화를 받고 반가움에 회포를 풀었고 아침에 띵한 머리를 만지며 길을 나섰다. 산행 전날은 술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세상일이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걸 어찌하랴. 그놈의 술. 투덜대면서 남원으로 향한다. 3일 전에 남원O적과 지리산행 약속을 받았다.
오랜만의 지리산행이다. 점심 준비는 남원O적이 하였고 반선 마을 상점에서 비상식으로 초코파이와 음료수를 사서 배낭에 넣었다. 뱀사골 등산로가 시작되는 공비토벌 전적기념관 앞에서는 산불 예방 캠페인을 나온 자원봉사자의 안내를 받았다. 담배와 라이터는 이미 차 속에 두고 나온 터라 도덕적으로 마음은 가볍다.
뱀사골의 계류 소리를 시원스레 들으며 산행을 시작한다. 산불 경방 기간이라 산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봄나들이를 나온 상춘객들만 몇몇이 보일 뿐이다. 걷기 좋은 큰길을 남원O적과 담소를 나누며 걷는다. 계곡을 따라 노랗게 피어난 생강나무 꽃을 바라보며 지리산에도 봄이 왔다는 것을 느낀다. 와운교 앞에는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이 특근하는 모양이다. 우리를 보더니 차에서 나와 목적지를 묻는다. 와운마을에 들러 산책을 한다고 하니 입산자 명부에 기록하라 한다.
우측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본격적으로 뱀사골코스의 산행이 시작된다. 우리는 직진. 제법 가파르게 시멘트로 포장된 와운마을로 오른다. 좌측으로는 제법 많은 와운골 계류가 흘러내린다. 30여 분 오르니 와운마을. 민박집 바로 뒤 와운마을의 명물 멋진 천년송이 반긴다. 사진 한 장 남긴다. 와운산장 민박집은 시산제를 준비하고 있다. 맘씨 좋은 주인아주머니가 권하는 막걸리 한 통을 남원O적과 단숨에 비우고 충분한 식수를 확보한 후 본격적으로 전북과 경남을 가르는 중북부 능선을 오른다. 특히 능선의 중간 기점인 영원령을 향한다. 이 길은 지리산 코스 중 거의 알려지지 않아 지리산꾼들도 잘 모르는 루트 중의 하나이다. 초입부터 길 찾기가 어렵고 희미하며 영원령까지 길이 확실치가 않다. 동물적인 감각이 필요하다.
잠시 쉬었다 간다. 흐르는 땀을 닦으며 메마른 목을 물로 헹구고 다시 능선을 오른다. 정오가 되어서 8부 능선쯤 되는 헬기장에 올랐다. 약간의 시장기를 느끼며 조금 오르니 멋진 바위가 마중 나온다. 이곳에서 주위를 살피니 바로 아래에 영원령이 있고 명선봉과 삼각봉으로 오르는 능선이 까마득하다. 동쪽 정면을 바라보니 언제나 늠름한 천왕봉을 비롯한 주능이 멋지다. 우측에는 반야봉과 토끼봉 능선이. 뒤를 돌아보니 정령치와 만복대, 바래봉과 덕두산의 서북부 능선이 이어진다. 남원O적이 준비한 김밥으로 점심을 먹고 초코파이까지 후식으로 2개를 더 먹는다.
원래 내 생각은 삼정산을 오르고 영원사를 들른 후 삼정마을로 하산하려 했으나 남원O적이 날머리로 실상사를 원한다. 영원령에서 삼정산까진 2시간. 삼정산에서 실상사까지는 2시간 정도. 삼정산으로 오르는 길은 4월인데도 아직 잔설이 많이 남아있고, 낙엽 밑에는 눈이 얼어 있어 미끄럽다. 사람 키보다 웃자란 조릿대 숲을 양손으로 헤치며 나가느라 먼지를 뒤집어 쓴다.
중북부 능선을 산행하면 지리산의 주능을 완벽하게 조망이 가능하다. 지리산의 장엄함과 광활함을 남부 능선 못지않게 느낄 수 있다. 영원령에서 가깝던 반야봉이 어느새 저 멀리 뒤로 자리 잡았다. 지리산 어디서나 멋진 모습의 반야봉.
이름 모를 봉우리를 오르고 내리니 우측 바로 아래가 상무주암이다. 바로 상무주암이 있는 봉우리가 삼정산. 제법 가파른 된비알에 숨이 턱턱 막힌다. 헬기장을 지나 삼정산에 올랐다. 석 달 만에 삼정산과의 재회이다. 그때 정말 많은 고생을 했었다. 실상사를 떠난 산행은 8시간이 지나서야 연하천 산장에 힘겹게 도착할 수 있었다. 예정 없이 벽소령 산장에서 1박을 하였고 새벽부터 폭설이 내렸고 벽소령 길을 걸어 실상사까지 강행군 했었다. 삼정산에 올라 남원O적과 지리산 주능을 바라보며 봉우리를 헤아린다. 잠시 후 삼정마을에서 오른 대여섯 명의 산님이 삼정산 아래 헬기장에 어슬렁거린다.
지금 시간은 2시. 실상사까지 하산은 시간상으로 여유롭다. 잔설이 많은 가파른 산죽 내리막길을 걷다가 그대로 자빠져 옷을 버리고 말았다. 5월까지도 잔설이 남아있는 곳이 있으니 과연 지리산이다. 우측 아래로는 마천마을이 가깝고 좌측으로는 산내마을이 보이는 실상사 뒷산 중북부 능선 첫 봉우리에 섰다. 멋진 배경을 찾아 사진도 몇 장 담았다. 여기부터 등로는 상당히 순하다. 지난번 산행 때는 이 봉우리 우측으로 능선을 타고 올랐는데 오늘 하산은 이 봉우리의 좌측 능선을 타고 내려간다. 오솔길을 걷는 기분으로 하산 길이 이어진다. 인적 없고 호젓한 산책로이다. 드디어 실상사에서 뻗어 올라오는 임도를 만난다.
임도 오름 길은 약수암과 상무주암, 영원사로 오르는 길이고 내림 길은 실상사로 향하는 길이다. 임도를 따라 내려가니 부산에서 왔다는 등산복 차림의 중년의 부인이 실상사를 묻는다. 그 부인은 산내에 있는 콘도에서 논 자락 밭 자락을 걸어 예까지 왔다고 한다. 십여 분 내려가니 실상사. 실상사 뒤편을 가로질러 산내로 향한다. 덕분에 상당한 시간 단축을 한다. 버스를 기다리며 먹는 아이스크림이 달콤하다. 이십여 분을 기다려 반선으로 가는 버스에 승차한다. 차량을 회수하여 반선 마을에서 덕동마을을 지나 정령치를 넘어 남원으로 가자고 의견을 보았다. 평화로운 달궁마을을 지나 정령치로 향한다. 곳곳의 주차장과 공터엔 교회에서 봄 소풍 나온 학생들이 봄의 소리를 들으며 즐긴다.
정령치. 산불 경방 기간으로 만복대와 고리봉을 오르는 출입구는 단단히 봉쇄되었다. 정령치에서 서서히 어둠을 맞이하는 지리산의 실루엣을 바라본다. 오전에 올랐던 와운마을이 저 아래 산 중턱에 보이고 영원령과 삼정산을 더듬는다. 중북부 능선 뒤로는 천왕봉이 우뚝 솟았다. 반야봉에서 이어지는 토끼봉, 명선봉, 덕평봉, 촛대봉. 장터목과 제석봉이 언제 오시라 유혹한다. 특히 거대한 모습의 반야봉이 인상적이다.
지리산 자락 지리에 밝은 남원O적과 장수마을 고기리에 들러 산나물 비빔밥으로 저녁 식사를 하는 즐거움을 더한다. 인심 좋은 고기리의 식당. 매실주와 쑥차까지 서비스받는다. 그 훈훈한 인심에 지리산이 더욱 정겹다. 다음 지리산행을 기약한 채 남원을 떠나며 아쉬운 하루를 접는다. 지리산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