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후기에 들어와서 37대 선덕왕 김양상이 36대 혜공왕을 살해한 난리를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니 왕권은 극도로 약화되고 반면에 귀족들은 각기 사병을 토대로 군사적 실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게다가 토지를 많이차지하고 있는 귀족들의 풍족한 생활은 심각한 사치와 무질서의 주범이 되고있었다.이에 왕실에서도 귀족들에게 질세라 사치와 향락이 절정에 달했으니 안압지,임해전,포석정등에는 날마다 술잔치가 베풀어져 임금이하 벼슬아치들은 백성들을 외면한채 노는데 정신이 팔려 나라는 점점 쇠태의길로 빠져들기 시작했다.그리고 중앙귀족들의 왕권 다툼으로 지방에대한 통제가 약해지자 지방에서는 서로가 사병을 양성하며 중앙진출을 호시탐탐 하였다 .사병을 많이 거느린 제상들의 사병숫자가 2만이 되는곳도 있었다하니 신라후기의 나라 모양이 어땠는지를 짐작할수 있는 부분이다.이렇듯 나라의 기강이 제대로 서 있지 못하자 지방 호족 (지방의 토착세력)들은 행정권까지 손아귀에 넣고 백성들을 괴롭혔다.신라의 마지막 여왕이었던 51대 진성여왕 (887~897)3년엔 극심한 흉년이들어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높아갔고 민심도 극도로 사나와졌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부족한 나라의 재정을 백성들에게 많은 세금으로 피를 말렸다.너무나 배가 고팠던 백성들은 쥐굴을 뒤져 양식을 채웠다하니~~ 쥐굴이란! 제아무리 흉년일망정 쥐들이 추수때 알곡을 물어다 먹을것이 없는 겨울철을 대비해서 닥치는데로 물어 쌓아놓은 것을 백성들이 역으로 훔쳐오는것이다.이렇듯 어지러운 세상이 계속되자 선량한 평민이 막다른 쥐구녕으로 몰려 하루아침에 도둑들이 되었다고한다.불교는 삼국이 통일되기 전에는 귀족들의 불교였지만 30대 문무왕 이후 5대를 거치는 이 기간에는 통일신라 전성기로 불교문화도 활짝 꽃핀 때로 전국 곳곳에 많은 절이 세워졌으며 자연스럽게 많은 불상과 석탑, 범종도 많이 만들어졌다.따라서 불교가 민중의 정신적 통일을 꾀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치자 통일신라에는 자장 (속명은 김선종랑),신라의 왕손이라 전해지는 원측,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원효, 역시 당나라에서 화엄종을 연구하고 돌아와 10여개의 사찰을 건립한 의상 등 많은 고승들이 나오기 시작했다.혜초스님의 일화가 돋보이는지라 잠시 소개하자면 그는 본래 산을 떠돌며 짐승을 포홱하는 사냥꾼이었다 한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동계천이란 강가에서 커다란 멧대지를 발견하고 그놈을 잡아 짊어지고 뒷마당에 놓아두었다가 다음날 아침 살펴보니 핏자욱을 남긴채 멧돠지가 사라진것이다.핏자국을따라 멧돼지 굴에 도달했을때 그곳엔 피투성이가된 멧돼지가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그기서 깨달음을 얻은 혜초는 그날로 살생을 그만두고 머리를깎고 중이 되었다고한다.그리고 열심히 불도를 닦던 어느날 인도의 승려로 중국에와서 중국 밀교의 개조가된 금강지의 권유로 죽음을 무릎쓴 오랜 여행끝에 마침내 인도에 도착한 혜초는 석가모니가 열반한 곳 등 갠지스강 유역의 여러 성지를 순례하고 오천축국 (당시 인도는 여러개의 나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걸 다섯개의 천축국이라 불렀다)을 두루 여행하며 듣고 본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했는데 이것이 바로 ~왕오천축국전~이다. 그리고 통일신라의 위대한 건축 예술을 대표하는 불국사와 석굴암은 제35대 경덕왕때 아버지의 벼슬을이어 정치를 했던 김대성이란 사람이 51세에 벼슬자리를 자진 사퇴하고 경덕왕 10년 서라벌 토함산 밑에서 불국사를 건축했으나 현제 불국사는 훗날 다시 지어진것으로 애초 그가 지은 불국사는 임진왜란때 불탔기 때문이다.석굴암 역시도 김대성의 작품이다.또한 통일후 불교가 민간생활속으로 깊숙히 스며들어 수많은 절이 세워지자 절마다 범종을 다는 일이 유행이었다.통일신라 35대 경덕왕은 33대 성덕왕의 높으신 덕을 흠모하는 뜻에서 봉덕사에 달 큰 종을 만들라고 하였는데 봉덕사는 경덕왕의 아버지인 성덕왕을 위해, 형님인 34대 효성왕이 지은 절이다.우리들이 쉬 알고있는 에밀레종이 봉덕사의 신종이다.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봉덕사의 주지가 봉덕사종 시주를 다니던중 가난한 여느집 보살이 시주할것이 없는것에 미안함을 대신해서 하나뿐인 딸아이를 바치겠다 농비슷하게 했으나 다음날 주지가 부처님의 뜻이라며 애를 데리고가서 쇳물에 함께녹여 종을 만드니, 타종식에서 크고 웅장한 종소리는 물결치는듯한 여운을 남기며 시방으로 퍼졌다.아이를잃은 어머니에게는 그 종소리가 마치 에미야, 에미야, 하며 부르는 소리같이 들렸다.이런 사연으로 후세 사람들은 봉덕사의 신종을 에밀레 종이라 부르게 되었다.에밀레종의 원 이름은 성덕대왕 신종이며 높이 3.78m, 입지름 2.27m, 두께 0.24m로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큰종으로 12만근의 구리가 소모되었다고 한다 ,현제는 경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