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나 조직신학 책은 읽을 때는 재미있는데 책을 덮고 나서 머리와 마음에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말씀(성경구절)이 많이 남아있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시라도 회사 출장을 가고 병원에 입원을 하고 시골에 내려가는 일이 있을 때 교리나 조직신학 책을 일일이 들고 다니기는 어렵지만, 성경 책 한권 정도는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성경 한권을 펼쳐 읽고 묵상하고 음미하며 우리의 심령을 잘 보존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작은 노력의 일환으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 위해 트렘퍼 롱맨 3세•레이 딜러드의 『최신 구약개론』에서 스바냐서의 신학적 메시지와 신약으로의 접근 내용을 타자 쳐 올립니다.
신학적인 메시지
심판이라는 주제와 은혜와 자비라는 주제가 이 책의 지배적인 주제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주로 여호와의 날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들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주로 남은 자와 회복이라는 모티프들을 통해서 기술되었다.
1. 여호와의 날은 선지서들에 자주 나오는 주제이다. 스바냐는 아모스서(암 5:18-20; 8:3-13)와 이사야서(사 2:6-22)에 이미 사용된 비슷한 개념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명예를 지키시고, 열방들(2:4-15)이나 이스라엘(1:14-23)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오시는 날이다. 피조계는 무너지고, 우주는 동요하며 원시의 암흑으로 들아간다(1:2-3; 15-18; 3:6-8). 즉 우주는 그 생명이 없고 형체가 없는 상태로 되돌아간다(1:3). 여호와는 악과 대항해서 거룩한 전쟁을 치르는 이 위대한 날에 전사로서 오신다(1:14-16). 그의 임재는 불과 같은 신현 현상(theophany)에 의해 신호로 알려진다. 스바냐에게 있어서는 이 위대한 날은 역사 속에서 기대되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이러한 역사적 행위는 또한 죄가 이 땅으로부터 제하여지는 종말론적인 심판의 그림자였다(1:3).
2.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운 기대와 병행해서 남은 자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라는 주제가 또한 지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3:12-13). 남은 자 모티프는 성경의 많은 책들 속에서 발견된다. 어느 한 집단이 보통 죄에 대한 심판 때문에 일어나는 어떤 재앙을 겪을 때 그 재앙을 통해서 살아남아 존속하는 인류 혹은 하나님의 백성의 핵이 되는 자들이 바로 남은 자들이라고 불려진다(Dillard 1988을 보라). 하나님의 백성의 미래의 존속은 하나님의 약속을 새롭게 상속받는 이 정화되고 거룩한 남은 자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스바냐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에 살아남을 수 있을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2:3). 스바냐가 기대하는 하나님의 진노는 이 나라를 정화시켜서 죄가 없는 남은 자들이 나타나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3:13). 그리고 이 남은 자들이 열방들 가운데서부터 다시 모여서 본토와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2:7; 3:19-20). 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지금 당장 주어진 심판에 의해서 좌절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남은 자들 속에서 실현되어지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으신다(1:12-13; 2:10,15), 그러나 온유하고 겸손한 자들은 보호를 받을 것이다(3:12).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우주적인 하나님이시다. 그는 중동의 한 자락의 땅에 대해서만 주권을 갖고 계신 것이 아니다. 그는 모든 나라들을 다스리시며, 자신의 거룩성과 그들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따라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신다(2:4-15). 그가 이 땅을 창조했으므로 그의 심판은 그 전체에 걸쳐 내려진다(1:2-3). 우주를 통치하시는 그는 항상 모든 열방에 대해 자비로운 마음을 갖고 계신다(창 12:3; 22:18). 자신의 심판을 선포하기 위해 열방들을 소집하시는 그분(스 3:8)은 또한 그들이 자신의 은혜를 받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모으신다(9절). 모든 이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이다.
신약으로의 접근
기독교 독자들은 스바냐서에 나오는 많은 비유적 표현들과 모티프들이 신약에서도 역시 사용되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스바냐는 임박한 역사적인 재난과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했다. 여호와의 날에 있었던 바벨론에 의한 정복 및 유배는 말세에 전 우주적 규모로 이루어질 거대하고 끔찍한 그 날의 전조였다. 바울은 여호와의 날, 그리스도의 날에 대해서 자주 언급했으며(롬 2:16; 고전 1:8; 빌 1:6, 10; 2:16, 딤후 4:8).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나타나셔서 최종적으로 자신을 옹호하실 날을 고대하고 있다. 요한은 용사이신 하나님이 심판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오시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계 19:11-6). 스바냐는 하나님 자신이 드릴 끔찍한 희생제사(1:7)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요한은 여호와의 날을 기술하면서 같은 이미지를 사용했다(계 19:17-18; 참고, 겔 39:18-20).
다른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스바냐는 모든 열방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배할 날을 고대했다(3:9-10),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져 있는 교회(갈 3:8-9, 14, 26-29)가 볼 때에는 이것은 이미 현재에 실현된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 역시 이 세상이 진정한 왕의 다스리심을 인정할 때가 올 것임을 알고 소망하면서 살고 있다(빌 2:9-11).
트렘퍼 롱맨 3세•레이 딜러드, 『최신 구약개론』(크리스천다이제스트), pp.362~363.
첫댓글 성경약어에 주의를 요합니다. 특히 스 자 돌림들이요:
에스라 - 스, 스바냐 - 습, 스가랴 - 슥.
오늘은 습 을 보신 겁니다.
맞아요^^ 저 3개 책의 약어가 종종 헷갈려요.
좋은 댓글이라고 생각해요. 초신자와 조금 모르는 분들을 위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공감합니다.
@천이다
저도 늘 헷갈립니다.간혹 에스라와 에스더도 헷갈린답니다..ㅠㅠ
@아파르 저도 그랬어요 솔직히^^ 칼빈 경건 묵상을 볼 때 슥과 습이 가끔씩 헷갈렸어요. 이제 신학 책 조금 줄이고 성경 좀 세게 읽어야 하겠습니다.
글쓴이나 번역자들이 모티프(motif)라는 단어는 신중히 잘 사용해야 합니다. 신학이나 성경학이 아닌, 문학이나 예술에서 쓰이던 단어가 유입해 온 셈이니 초신자들이 웬? 문학이라고 생각하며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동기(motive)도 그 연장이고요. 소설이나 창작에서 지어낸 이야기에서 쓰는 동기의 의미를 가진 단어를 (대체할 만한) 좋은 단어를 잘 찾아서 적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저는 '중심 주제'... 정도로 바꾸어 쓰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영어 회화 공부하는 분들에게는 main idea 정도도 괜찮고요.
좋은 아이디어와 문제 제기에 공감하고 감사합니다.
저도 상당 부분 공감합니다.
유익한 댓글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
'중심 주제' 라고 하니까 잘 이해가 됩니다~
@아파르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파르 공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전세계와 온 우주의 하나님이심을 알려주는 소선지서에서 복음을 깨닫고 신약으로의 점진적인 발전을 보게 됩니다.
좋은 글입니다.
본문을 정리해 주시는 댓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
신현(thophany)에 대한 이 카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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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현현
https://cafe.daum.net/1107/YNWz/7
https://cafe.daum.net/1107/YDR0/41
잘 읽어 보았습니다.
이 글을 읽고 스바냐서를 읽으면 더 유익한 공부가 되겠어요. 이렇게 소선지서를 읽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잘 살려야겠습니다.
넵~ 그렇게 하겠습니다.
공감합니다^^
본문에 나와있는 성구를 찾아가며 공부하였습니다.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습1:7은 지나치며 읽었는데 오늘 형광펜으로 밑줄 쫙~!!그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파르님의 진리와 말씀을 향한 진지함과 성실함을 보면 존경스럽습니다.
@장코뱅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