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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 白頭大幹 ]
* 위 치 : 강원 평창. 홍천. 양양
* 산행일시 : 2023년 07월 22일
* 교통편 : 안내산악회
* 회차 : 대간 74-05
* 산행코스 : 진고개-동대산[1433.5m]-차돌백이-신선목이-두로봉[1421m]-신배령-만월봉[1280.3m]-응복산[1359m]-마늘봉-아미봉-약수산[1306m]-구룡령
* 산행시간 : 02:23~11:58 [11시간] (산행 09시간 35분/휴식시간: 1시간18분)
* 산행속도 : 2.83 km/h
* 산행거리 : 23.48km
* 날씨 : 맑음
* 기온 : 17~27℃
* 약수터 정보 : -
* 조망점 : 정상
* GPX 트랙 : 별도 첨부
* 산행 난이도 : 고도차: 보통 , 거리:보통
* 주요 볼거리 : 능선길. 정상 조망.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쪽으로 흐르다가 태백산 부근에서 서쪽으로 기울어 남쪽 내륙의 지리산에 이르러
우리나라 땅의 근골을 이루는 거대한 산줄기의 옛 이름이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은 이나라 골격의 틀 중에서 장대하고 당당한 산줄기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길게 연결된 장대한 산줄기로 그 길이는 약 1,400km이나 남한에서 종주할 수 있는 거리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향로봉까지 약 684km이다.
산행지 | 진고개 | 동대산 | 차돌백이 | 신선목이 | 두로봉 | 신배령 | 만월봉 | 응복산 | 마늘봉 |
고 도 | 1433.5m | 1421m | 1280.3m | 1359m | |||||
구간거리 | 1.7km | 2.7km | 2.3km | 1.7km | 3.3km | 3.2km | 1.5km | 1.9km | |
소요시간 | 43m | 52m | 38m | 39m | 1h42m | 59m | 37m | 49m | |
난이도 | 27.5% | 보통 | 보통 | 15% | -10% | 11% | 24%->-20.5% | 23.5% | |
가파른 육산 | 능선길 | 능선길 | 오르막길 | 내리막길 | 힘들지 않는 오르막길 | 오르막길 | 오르막 육산 |
산행지 | 아미봉 | 약수산 | 구룡령 | ||||||
고 도 | 1306m | ||||||||
구간거리 | 1.4km | 1.8km | 1.5km | ||||||
58m | 41m | 31m | |||||||
난이도 | 17.8% | -29.5% | |||||||
오르막길 | 오르막길 | 내리막길 |
* 등산로 현황은 전체적으로 육산이며
진고개에서 동대산까지 가파른 오르막(제일 힘든 곳)이고 신선목이까지는 평탄한 내리막이며
신선목이부터 두로봉까지는 가파른 오르막(2번째로 힘든 곳)이다.
두로봉부터 신배령 다음까지 4.5km 완만한 내리막이다.
신배령 다음부터 만월봉은 힘들지 않은 오르막이 이어지고
만월봉에 오르면 평탄한 길이 이어지고 응복산까지 약 700m 오르막이다.
마늘봉은 응복산에서 내리막이다가 잠시 오르면 마늘봉이며
마늘봉에서 3번을 내리고 오르면 약수산에 도착을 한다.
약수산에서부터는 잠시 내리막이 시작되다가 평탄한 길을 조금 걷고서
구룡령까지 가파른 내리막이 이어진다.
비법정 탐방로 구간 : 두로봉 ~ 신배령
고속도로를 타고서 오다 보니 도착시간이 다른 때보다 조금 이르다.
진고개에 도착한 시간이 2시 30분이 조금 못되었다.
앞 선두에서 출발하여 풀에 있는 이슬을 헤치고 산행을 시작한다.
이곳에서 반대편 밭두렁으로 올라서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된다.
가을에 왔을 때에는 동대산까지 오르는 등산로에 단풍이 참 이뻤던 길이다.
[진고개]
주문진과 하진부의 경계다. 2차선 포장도로인 6번 국도가 고갯마루 끊고 넘어간다. 대관령의 보조역으로 개설된 도로이며, 강릉 이북의 해안지역에서는 이 길을 이용해 내륙으로 접근하는 것이 거리가 가깝다. 정상에는 국립공원 매표소가 있고, 산장과 휴게소도 운영된다. '긴(長) 고개'가 소리 변형되어 '진고개'가 되었다. '장현' 또는 '이현'이라고도 불렀다. 이 도로의 해안 쪽은 연곡천을 따라 내려가는데 주변경관이 뛰어나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로 소개한 책도 많다. 도로 주변에 토속음식점이 여럿이다.
작년에 같은 길을 걸었지만 몇 번을 와야만 백두대간길은 기억을 할 수 있다.
이곳도 벌써 5번은 와본 것 같은데.
조망이 없는 백두대간 등산로는 기억이 쉽지 않다.
조금 가파른 경사를 우거진 숲길을 걸어서 올라간다.
[동대산] 東臺山 1434m
강원 평창군 진부면에 있는 산으로, 북쪽의 두로봉(頭老峰), 북서쪽의 비로봉(毘盧峰) ·상왕봉(象王峰), 서쪽의 서대산(西臺山) ·호령봉(虎嶺峰), 동쪽의 노인봉(老人峰) 등과 함께 태백산령의 줄기를 이루는 오대산령 안에 솟아 있다. 이 산은 동사면을 흐르는 연곡천(連谷川)과 서사면을 흐르는 평창강(平昌江)의 발원지를 이루고 있다.
계곡과 짙은 수림에 유서 깊은 월정사(月精寺)를 비롯하여 상원사(上院寺)·관음암(觀音庵) 등이 있으며, 1975년 2월에 지정된 오대산국립공원 구역에 포함된 데 힘입어 관광개발이 추진되고 있다. 또 최근 관광·등산객이 늘어나면서 오대산과 노인봉을 잇는 등산로가 있다
동대산을 넘어서는 평탄한 능선길을 걷는 수준이다.
이곳은 차독백이 구간으로 큰 차돌박이가 3개 정도 있다.
[신선목이]
삼국유사의 대산오만진신·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에 의하면, 자장 이후 그 신앙사상을 계승하여 오대산 신성굴(神聖窟)과 울진국(경북 울진군) 장천굴(掌天窟=聖留窟)에서 수도하여 성도한 신라 정신대왕(신문왕)의 태자 보천은 신성으로 일컬어질 만큼 신인의 경지에 이르렀던 인물로 보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보천태자가 신통력을 발휘해 새처럼 하늘을 날아다녔다기 보다는 그의 도력이 높아지고 수차력(水借力)에 의한 경신술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축지법도 행할 수 있는 고도의 수행 경지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성굴은 송광연(1638-1695), 김창흡(金昌翕·1653-1722), 강재항(姜再恒·1689-1756)의 오대산기에 의하면, 현 두로봉 남쪽 골짜기인 신선골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계곡가 왼쪽 산기슭에 있었던 굴로 추정된다. 김창흡은 '(상원사 방면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다른 시내가 흘러와 모이는데, 그것을 살펴보니 제법 맑고 그윽하였다. 그 골짜기를 뚫고 가면 양양의 부연동 계곡에 이른다고 한다. 그 곁에 신성굴이 있는데, 옛날 명승이 살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터가 폐지되었다'고 했다.
신성굴이 있는 계곡은 곧 오늘날의 신선골로서, 이 계곡으로 들어가 백두대간 주능선 상의 신선목을 넘어 양양(현재는 강릉시 연곡면)의 부연동계곡으로 넘어가는 등산로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선골은 곧 신성골이 전음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신선골 입구에는 현재도 보천태자의 수행정신을 계승하고자 신성암(神聖庵)이란 건물을 지어놓고 수도처로 삼고 있다.
신선목이는 이 신선골에서 따온 지명으로 보인다.
가끔 조망이 되는데 오늘의 일출이 5시 10분 경이다 보니 지금 현재 4시 32분으로 일출 30분 전인데
강릉 쪽으로 운해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두로봉까지 조망처가 거의 없는데.
두루봉 삼거리에서 일출이 시작되는 곳을 찾아서 작은 나무에 올라서 이렇게 일출 사진을 담을 수 있었다.
운해가 장관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밝은 아침해가 떠 오르고 있다.
현재시각 5시 22분이다.
언제 봐도 이렇게 일출은 참 멋지고 가슴 벅찬 일이 아닌가 한다.
이곳에서 잠시 구급함 뒤쪽으로 가서 일출을 볼 수 있었다.
이곳부터는 이제 비탐 구간이 이어진다.
비로봉은 이곳에서 좌측으로 해서 내려가면 갈 수 있다.
백두대간길은 전체 거리에서 곳곳이 이렇게 비탐구간이다.
두로봉 삼거리에서 100m 정도 안쪽으로 들어오면 두로봉 정상이 있다.
이곳에서 정상석 뒤쪽으로 진행하면 신배령으로 가는 길이다.
[두로봉] 頭老峰 1422m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珍富面)과 홍천군 내면(內面) 및 강릉시 연곡면(連谷面) 사이에 있는 산. 높이 1,422m. 북서쪽의 비로봉(毘盧峰)·상왕봉(象王峰), 서쪽의 호령봉(虎嶺峰), 남동쪽의 동대산(東臺山) 등과 함께 오대산령 중에 솟아 있는 고봉이다. 산은 동사면을 흐르는 연곡천(連谷川)과 서사면을 흐르는 홍천강의 발원지를 이룬다. 상원사(上院寺)와 미륵암은 계곡과 더불어 명승지를 이루는데, 오대산국립공원에 포함되었다. 산봉우리가 노인의 머리처럼 생겼다 함.
- 頭(두)관련 이름에 관하여...
두류산, 두루봉, 두리봉, 두로봉, 두량산, 두룡봉 등..
이 산의 특징을 보면 산봉우리가 둥그렇고 산세가 그리 험하지 않다. 아니면 어느 터를 둥글게 울타리 치듯 둘러싸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두렵고'는 '둥글고'의 옛말이고, 이 말에서 '두리'(둘레)라는 말이 나왔다. 두리목(둥근 제목) 두리반(두레상) 두리새암(우물의 사투리) 두리 함지박(둥근 함지박) 돌려가며 돕는다는 뜻의 두레도 생겨났다.
여름꽃인 동백꽃이다.
곳곳에 핀 이 동백꽃은 깊은 강원도 산에는 깨끗하게 피어 있다.
아침해가 떴는데.
저렇게 바닷가 쪽으로 운해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등산로에는 이렇게 풀숲을 가야만 한다.
동쪽으로 햇살이 등산로에 가득하게 비추 운다.
도라모싯대이다.
이곳에는 잔대는 없고 대부분 모싯대인 것이다.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 있는데 이렇게 햇살이 숲을 비추 운다.
여로..!
여로가 참 많다.
산에서 여로는 그리 많이 볼 수 없지만
이곳에는 곳곳에 이쁜 여로가 참 많다.
여름이지만 오늘 날씨는 선선하다.
진고개에서 17도인데 등산하는 동안은 20도에서 22도 정도로 바람도 있어서 시원한 상황에서 등산을 할 수 있었다.
[신배령] 新梨嶺 1173m
신배령은 연곡면 삼산 3리와 홍천군 내면 조개리를 넘나드는 고개로 예부터 맛이 신 돌배가 많이 자생하여 신배령이라 불리운다.
이 지역의 역사를 되짚어보니 갑오농민항쟁의 피어린 역사가 되새겨진다. 강릉·양양·원주·횡성·홍천 등 5읍의 대접주였던 차기석(車基錫)은 홍천 서석을 중심으로 수천명의 농민군을 모아 활동한 강원지역의 뛰어난 동학지도자였다. 특히 그는 풍암리 전투에서 800여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굴하지 않고 내면쪽으로 후퇴하여 끝까지 항전함으로써 이 지역은 강원도 농민항쟁의 최후의 전투지로서 주목되고 있다. 차기석은 관동대접주 이원팔, 인제대접주 김치운 등과 함께 1893년의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하였고, 내면(당시는 강릉부에 속해있었음)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의 농민군을 조직하여 1894년 농민항쟁에서 세를 떨쳤다. 홍천군 서석지방은 동으로는 뱃재를 넘어 내면, 남으로는 한강기맥의 구간 구분지점인 먼드래재를 넘어 횡성, 서쪽으로는 솔치재를 넘어 홍천과 통하며 북서로는 동창을 지나 내촌으로, 서남으로는 부목재를 넘어 홍천 동면으로 통하는 요충지다. 토벌군은 신배령·응복산·응복령·약수산 등 험산준령을 넘어 봉평에서 내면에 이르는 보래령·운두령과, 양양, 강릉에서 내면으로 통하는 신배령·응복령을 장악하고 협공했고, 차기석은 내면 원당리에서 농민군을 이끌고 저항하였으나 결국 생포 당하고 강릉으로 압송되어 효수 당했다.
농민군 수천명 조직 '反봉건·침략' 항쟁
1894년 갑오농민항쟁은 봉건제도와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반대한 대규모의 반침략반봉건 투쟁으로, 봉건제를 타도하여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인 동시에 반식민지 사회로의 길에서 이탈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즉, 그 이전까지 진행되어가던 봉건제 해체의 과정이 자본주의 열강의 침입에 의해 가속화되고 이에 따라 봉건지배층의 수탈이 강화되자 봉건지배층과 피지배농민층 사이의 모순이 첨예화됨으로써 폭발한 농민항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조선민족의 자주와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열고자 한 내재적인 움직임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갑오농민항쟁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매우 커다란 의의를 지니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1894년 농민항쟁에서 보여준 농민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영웅적인 반침략 반봉건투쟁은 봉건지배층과 일본침략자에게 큰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애국적 기개와 민족적 단결을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특히 군사적으로 우세한 일본 침략자에게 맞서 총알이 비 오듯이 퍼붓는데도 불구하고 공격을 계속했던 농민군들의 용감성과 희생정신은 그 후 우리 민족의 반침략 투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갑오농민항쟁에서 차기석(車基錫)은 홍천 서석을 중심으로 수천명의 농민군을 모아 활동한 강원지역의 뛰어난 동학지도자였다. 특히 그는 풍암리 전투에서 800여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굴하지 않고 내면쪽으로 후퇴하여 끝까지 항전함으로서 이 지역은 강원도 농민항쟁의 최후의 전투지로서 주목되고 있다.
강원도 지역에도 일찍이 동학이 포교된 것으로 보이는데, 최제우에 의해서 홍천 북방면 지역에서 포교활동이 있었고, 홍천군 서석면 수하리 곧은골 지역에도 동학당이 설치되어 몰래 동학이 포교되고 있었다. 또 최제우가 체포되고 동학이 국가로부터 탄압을 받으면서 강원도로 피해 온 많은 동학교도들에 의하여 강원도 각지에도 널리 동학이 포교되었다.
이후 강원도 지역에서 동학의 조직과 활동이 어떠했는지 잘 드러나지 않으나 홍천대접주 차기석이 관동대접주 이원팔, 인제대접주 김치운 등과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에서 열린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어 강릉·양양·원주·횡성·홍천 등 5읍의 대접주로 불리워지던 차기석은 내면(당시는 강릉부에 속해있었음)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의 농민군을 조직하여 1894년 농민항쟁에서 세를 떨쳤다. 그는 9월 말경에 군대를 일으켜 창고를 불지르고 학정에 시달리던 농민들을 모아, 포목·어곽·화우(貨羽) 등 상인들에게서 재물을 빼앗아 물자를 충당하는 등 세력을 모았다.
한편 내면에서 가까운 봉평면에서도 차기석의 영향아래 윤태열·정창해·조원중·정헌심 등이 백성을 결집하여 군대를 이루어 창사 곁에 목책을 세우고 각 촌락의 집집마다 좁쌀 6말과 미투리 1쌍씩을 거두어들이는 등 농민항쟁을 준비하였다.
이렇게 농민항쟁을 준비한 차기석은 박종백과 함께 농민군을 이끌고 10월13일 밤에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동창(東倉)을 들이쳐서 건물을 불태웠다. 동창은 강원도 내륙지방의 중요한 사창으로, 세곡을 거둬 보관해 두었다가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불어나면 뗏목에 실어 한강을 통해 서울로 보내던 곳이었다.
동창을 치고 보은 장내로 향하던 차기석은 동창이 농민군에 의해 불태워졌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경기도에서 홍천으로 들어온 농민군 토벌대 지평현감 맹영재와 10월 21일 장야평에서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농민군은 장비의 열세로 3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서석으로 후퇴하였다.
서석은 동으로는 뱃재를 넘어 내면, 남으로는 먼드래재를 넘어 횡성, 서로는 솔치재를 넘어 홍천과 통하며 북서로는 동창을 지나 내촌으로, 서남으로는 부목재를 넘어 홍천 동면으로 통하는 요충지이다.
10월 22일 홍천 서석 풍암리 진등위에 진을 친 차기석은 농민군을 이끌고 맹영재의 토벌군에 맞서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농민군은 총이 모자라 버드나무를 깎아 먹칠을 해서 무기가 많은 것처럼 위장을 하기도 했고, 주문을 외우면 토벌군의 총에서 총탄이 아니라 빨간 물이 흘러나온다고 하면서 사기를 북돋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식무기로 무장을 하고 경기도 일대에서 농민군 토벌에 맹위를 떨치고 있던 맹영재와 접전을 벌인 차기석의 농민군은 많은 희생은 치르었다. 이 날 희생당한 농민군과 동네사람들의 수는 800여명에서 1,000여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 있는 `자작고개'라는 이름도 농민군들이 흘린 피가 고갯마루를 자작자작 적실 정도로 흥건했다고 해서, 또 이곳에서 싸우다 죽은 농민군들을 묻은 시체가 썩어 땅이 내려앉으면서 잦아진 고개라 하여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자작고개를 중심으로 진퇴를 거듭하며 토벌대에 맞섰던 차기석은 홍천군 내면으로 퇴각하여 다시 세를 모으기 위해 기린·양양·간성의 농민군에게 봉평을 치자는 통 문을 보내었다. 그러자 봉평의 농민군을 토벌한 포군대장 강위서가 11월 6일 토벌군을 이끌고 내면 1리로 들어왔다. 토벌대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차기석은 산위에 매복해 있다가 밤중에 강위서 토벌대를 습격하여 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강위서의 포군 부대는 8명의 부상자를 이끌고 패배한 채 내면에서 쫓겨났고, 그 후 전열을 정비한 토벌군은 각 지역의 관군과 연합작전을 펴면서 사방에서 농민군을 조여들었다.
11월 11일부터 14일까지 계방산과 오대산 기슭의 자운리, 흥정리와 계방천이 흐르는 협곡에 자리잡은 원당리·청두리·약수포 등지에서 차기석은 강원도 내륙지방의 농민군을 이끌고 토벌군을 맞아 치열한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청두리에서 약수포까지는 토벌군도 70리를 벽을 기어오르며 전진하였다고 할 정도로 험난한 곳이다. 이 계곡은 구룡령에서 오대산 두루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큰 산줄기를 이루어 양양·강릉의 영동과의 경계선이 되며, 그 사이에 모두 해발 1,000m가 넘는 신배령·응복산·응복령·약수산 등 험산준령이 놓여있다. 잎이 무성한 계절이라면 험난한 이곳 지형이 유격투쟁을 벌이기 적합할 것이나 활엽수의 잎이 모두 지고 눈이 쌓이기 시작한 11월 중순이어서 사방에서 협공하는 토벌군을 맞아 농민군이 싸우기에는 매우 불리하였다. 봉평에서 내면에 이르는 보래령·운두령과, 양양, 강릉에서 내면으로 통하는 신배령·응복령이 토벌군에게 장악된 상태에서 협공을 당한 농민군은 토벌군 뿐 아니라 지형에도 포위당한 꼴이 되었다.
11월 11일, 내면 자운의 농민군은 보래령을 넘어온 봉평 포군대장 강위서와 60여 명의 토벌군을 이끌고 합세한 홍천의 허경의 공격을 받아 접주 위승국 형제와 접사 심성숙, 박군오, 정창호 등 17명이 포살 되었다.
차기석은 내면 원당리에서 농민군을 이끌고 저항하였으나 12일, 운두령을 넘어온 강릉의 박동의와 양양의 이석범이 이끄는 토벌군의 협공을 받아 생포되었다. 이때 성찰 오덕현, 집강 박성원, 지덕화 3인은 포살 당했다.
13일에는 내면 청두리에서 홍천의 농민군 지도자 권성오, 권수청 등 12명이 포살 당하였다. 약수포 쪽으로 쫓겨간 500여 명의 농민군은 청두리 쪽에서 추격한 토벌대와 신배령을 넘어온 이석범의 동생 이국범, 응봉령을 넘어 온 이석범의 부종 김익제의 토벌군에게 세 방향에서 협공을 당하여 접주 김치실 등 11명이 포살 당하고 접사 박학조는 생포되었다. 농민군이 근거지로 삼았던 3처의 별당과 37채의 집도 불태워졌다. 자운·흥정·신흥 등의 농민군도 강위서가 이끄는 토벌군에 밀리면서 임정호 등 38명이 포살 당했다.
차기석은 생포된 뒤 강릉으로 압송되어 11월 22일 박학조와 함께 강릉 교장에서 효수 당하므로 일생을 마쳤다. 강원동학군의 지도자인 차기석이 이끌던 동학혁명군의 전투는 강원동학혁명군 전투의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엄찬호(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문학박사)
말나리이다.
가끔 피어 있는 말나리가 보색대비로 환하게 빛나고 있다.
밝은 햇살에 빛나는 여로..!
차암배즈기..!
산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꽃인데.
이렇게 이 귀한 꽃을 보았다.
두로봉에서 계속 하산길을 걷고서 신배령 다음까지 내리막인데.
그곳부터 작은 오르막이 시작되고서 오르면 만월봉이다.
[만월봉] 滿月峰 1280.9m
약200년전 조선조 말 어느 시인이 이 봉을 바라보고 시를 읊었는데 시중에 바다에 솟은 달이 온산에 비침으로 만월이 가득하다 하여 만월봉이라 한다.
- 소양강, 강원도 인제군과 춘천시를 남서류하는 강
길이 169.75㎞. 한강의 제2지류이며, 북한강의 제1지류이다. 홍천군 내면 명개리 만월봉 남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북서쪽으로 흐르며 계방천이라 불리다가 척천천·자운천·방대천 등을 합류하고 내린천이라 불린다. 인제군 인제읍 합강리에서 서화천이 흘러들며, 소양호를 이룬 뒤 춘천시 우두동에서 북한강으로 흘러든다.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에 건설된 소양강 댐은 다목적 댐이며,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특히 이곳에서 인제읍까지 배가 운항하여 강원도 내륙산간지역의 교통로뿐만 아니라 설악산국립공원과 연계한 관광자원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유역 내에는 대승폭포·12선녀탕계곡·구성폭포·용소폭포·쌍룡폭포·황장폭포 등의 폭포와 백담사·청평사·봉정암·오세암·영시암 등의 명승 사찰이 있다. 유역의 연평균강수량은 1,100~1,200㎜이며, 강에는 어름치·열목이 등의 냉수성 어종을 비롯하여 쏘가리·뱀장어·메기·붕어·잉어 등이 서식하고 있다. 인제읍 합강리에서 뗏목을 타고 소양강, 북한강, 한강 본류를 따라 서울의 노량진까지 내려오면서 부른 〈합강리 뗏목아리랑〉이 전한다.
만월봉에서 잠깐 내려가다가 다시 응복산까지는 다시 올라야 한다.
저곳이 응복산인 듯하다.
이곳에서는 높아 보이지만 정작 걸어보면 금세 갈 수 있다.
귀한 나무의 주목이다.
고산 지대에 올라야만 볼 수 있는 아름들이 주목이다.
노루오줌..
긴산꼬리풀이다...!
흰송이풀..!
말나리..!
오리방풀..!
차암배즈기..!
응복산..!
오늘 등산코스 중 백두대간 마지막 인증지이다.!
[응복산] 鷹伏山 1369.8m
산의 모양이 매가 엎드린 형국이라 하여 매복산 또는 응복산이라고 함. 강원도 양양군 서면과 현북면, 홍천군 내면에 걸쳐 있는 산. 설악산과 오대산을 잇는 중간 지점에 있는 산으로 오대산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에 해당한다. 이 산에서 오대산 두로봉까지는 약 10km 정도로, 두로봉과 약수산·구룡령을 잇는 구간을 산행코스로 잡을 수도 있다.
백두대간 능선에 있는 한계령과 대관령의 중간에 있어 미천골·통마람골·약수골·합실골 등 사방에 골짜기가 발달해 있다. 산행은 명개리에서 구룡령을 넘어 갈천으로 이어지는 56번 국도가 포장됨에 따라 구룡령을 기점으로 하는 당일 산행이 가능해졌으나, 미천골을 따라 불바라기약수까지 다녀오려면 하루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산행 시간은 구룡령에서 정상에 오른 뒤 통마람골을 따라 약수동까지 가는 데 7시간 정도 걸린다.
정상에는 주목 한 그루만이 있어 전망이 좋다. 주변에 708년(신라 성덕왕 7)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수타사(水墮寺)와 철분을 비롯한 유리탄산·불소·칼슘 등이 들어 있어 만성위장병과 고혈압·빈혈·당뇨 등에 효과가 있다는 삼봉약수터가 있다.
'708년(신라 선덕왕 7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수타사와 철분을 비롯한 유리탄산, 불소, 칼슘 등이 들어있어 만성 위장병과 고혈압과 빈혈,당뇨등에 효과가 있다는 삼봉약수터가 있다하며...'
조망만 된다면 참 멋진 풍경일 것 같다.
운해가 산에 이쁘게 피었는데..!
독활인가..!
아님 구릿대인가..!
잘 구분이 가지는 않는다.
응복산이다.
왔던 산 뒤돌아 봤다.
[마늘봉]
약수산과 응복산의 한가운데 독립적인 하나의 봉우리로 형성되어 있다. 마늘처럼 동그랗게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대간의 여러 봉우리 중에서 몇 안되는 우리말 이름이다. 규모가 작은 봉우리인데도 별도의 이름을 가진 것이 의외다. 남쪽으로 오대산의 비로봉과 상왕봉, 호령봉, 계방산 등이 건너다보인다. 북쪽계곡 1.5Km 지점에 유명한 불바라기약수가 있지만 내려서는 길은 마땅치 않다. 응복산 방향으로 10분 거리에 평평한 야영장과 샘터가 있다.
흰물봉선..!
큰까치수염..!
바위채송화..!
구릿대..!
새며느리밥풀..!
이제 내려가야 하는 구룡령 쪽 도로이다.
참 멋진 것 같은 산속의 도로이다.
약수산 정상이다.
[약수산] 1306m
약수산이란 이름은 흔히 명개리 약수라 불리는 이 산 남쪽 골짜기의 약수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약수산의 이름이 비롯되었다는 淵源을 좇으니, 약수산에서 발원하는 미천골에는 불바라기약수(미천약수)가, 약수산과 갈전곡봉 사이 구룡령 계곡에는 갈천약수가 있다. 갈천이라는 이름은 칡뿌리로 허기를 달랠 때 냇가에 칡물이 떠날 날이 없다는 데서 유래했다. 「양양군지」에 함께 실린 오색약수에 눌려 늦게 알려졌지만, 양양 주민들은 이 약수를 더 쳐주는 편이란다. 예부터 내려온 갈천의 4가지 보물(葛川四寶)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치는 약수인데 약수가 솟는 너럭바위 주변은 용출되는 철분 때문에 붉게 물들어 있어 쇳물 맛이 많이 나는 편이며 톡 쏘는 맛이 강하단다. 성분은 철분, 나트륨, 칼슘, 마그네슘, 칼륨, 망간 등으로 빈혈, 충치예방에 효과가 있는데 주민들은 위장병과 피부병에 좋다고 한다.
구룡령이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맛난 밥과 닭강정. 그리고 새우튀김과 맥주한잔..!
오늘도 대간74기와 함께 즐거운 산행을 하였다.
[구룡령] 九龍嶺 1013m
본래 지명 장구목. 도로가 나기 전 강원도 홍천에서 속초로 넘어가던 고개다. 속담에 9개의 용이 지나갔다 하여 구룡령이라 한다. 구룡령의 미천골, 미천[米川]이라는 이름도 이곳의 수도승들이 많아 공양을 짓기 위해 씻은 쌀뜨물이 하얗게 흘렀다 해서 붙은 것이다.
아흔아홉 굽이의 고개가 마치 용이 꿈틀거리며 지나간 듯 하다고 해 이름 붙여진 구룡령 옛길은 지금의 정상에서 북쪽으로 30분 가량 떨어져 있는 옛 구룡령 정상~갈천리까지의 5㎞로 100여년 전만 해도 사람들이 걸어서 넘던 길이다. 구룡령 정상주변에는 50년생 천연활엽수림의 숲으로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봄철에는 철쭉꽃이 만개하여 장관을 이룬다. 또한 양양군과 홍천군의 경계를 정할 때 양양의 땅을 조금이라도 더 넓게 하려고 달리다가 숨진 청년이 묻혔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묘가 있으며 주변은 갈천약수와 미천골 자연휴양림도 있어 탐방코스로 손색이 없다.
- 구룡령 옛길
구룡령 옛길 정상과 갈천마을의 딱 중간에 자리한 '솔반쟁이' 주변에는 1980년대 후반 경복궁 복원공사 때 재목으로 잘려나간 노송들의 그루터기가 흩어져 있다. 이곳에 자생하던 수령 100년 이상의 금강송 40여 그루가 경복궁 대들보와 기둥의 재목으로 베어졌다고 한다. 지금도 갈천마을과 가까운 옛길의 아래쪽 길가에는 어른 둘이 껴안아도 모자랄 만큼 우람한 금강송이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서 있다. 신목(神木) 같은 형용의 금강송이 있는가 하면, 뿌리를 반쯤 드러낸 채 늠름하게 서 있는 노송도 있다.
구룡령 옛길은 우리 사회가 옛길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구룡령의 지명과 위치가 현재 잘못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지리에 밝고 산을 잘 안다는 사람들조차 구룡령의 옛길은 모른다. 대부분이 구룡령 하면 지금 차가 다니는 56번 국도가 넘나드는 고개를 원래의 구룡령길이라 생각한다. 이 도로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자원 수탈 목적으로 구룡령 고개에서 1km가량 떨어진 곳에 개설한 비포장도로가 지난 1994년 포장된 것이다. 일제 당시 일본인들이 지도에 원래의 구룡령의 위치가 아닌, 차가 다니는 비포장도로를 구룡령으로 표기하면서 사람들은 구룡령의 위치를 잘못 알기 시작했다. 더욱이 94년 이후에는 모든 지도와 행정 표기에서 구룡령의 위치가 현재 차가 다니는 지점으로 정리됐다. 백두대간을 연구하고 관리하는 정부나 민간단체, 학자들조차 구룡령길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구룡령 옛길에는 조상들이 어떻게 길을 다녔는지를 보여주는 원형이 남아 있다. 요즈음 사람들은 영서와 영동을 차로 넘으면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백두대간의 험한 지형을 실감한다. 그래서 이런 급경사의 산지에서 말이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길을 걸어보면 구룡령 옛길에서 노새와 조랑말 등이 큰 등짐을 지고 다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게 된다. 그만큼 옛길은 힘겨운 고개를 가장 힘이 덜 드는 형태로 만들어놓았다. 비탈길이어도 최대한 경사를 누인 길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은 누군지도 모를 옛사람들의 지혜가 세월과 함께 쌓인 덕분이다. 어떤 빼어난 등산로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자연 속에 파고드는 절묘한 흐름이 길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숲과의 조화가 자연스럽고 깊다는 점은 걸어보면 단박에 느껴진다. 똑같은 고도의 등산로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여유가 길에 묻어 있다.
지리산이나 설악산 등 큰 산의 등산로를 오르다 보면 주변의 숲을 감상하기 어려운 비탈과 고빗길이 수없이 펼쳐진다. 그래서 산쟁이들 가운데서도 발품이 노련하고 옹골진 이가 아니면 대부분 숲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하고 정상으로 오르기에 바쁘다. 하지만 구룡령 옛길은 숲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다. 옛사람들은 요즘 일부 등산꾼들처럼 싸우는 듯이 산길을 걷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차피 갈 길이니 최대한 여유 있고 천천히 걸음이 이어지도록 길을 냈던 셈이다. 그러다 보니 숲의 원형이 훼손되지 않으면서도 다니기에 편안한 길이 되었다. 선조의 경험과학이 녹록지 않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솔반쟁이, 묘반쟁이, 횟돌반쟁이…
구룡령 옛길에는 굽이굽이 민중들의 꿈과 희망, 아픔과 좌절도 녹아 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때 숯을 구웠던 재탄장과 함께 철광의 흔적이 남아 있다. 농경사회의 시작과 함께 철기문화가 열리면서 양양 일원으로 공급한 철로 만들어진 농기구의 원재료를 구룡령의 옛길 한쪽에서 생산해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철을 캐던 동굴이 그대로 남아 있다. 광산이 일제 강제수탈의 현장이었던 점도 흔적을 통해 확인된다.
숲으로 펼쳐진 구룡령 옛길의 또 다른 상징은 금강소나무다. 1980년대 말 경복궁 복원 과정에서 많은 금강소나무가 베어진 뒤 국내에는 금강소나무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드물다. 무리를 이룬 200~300년 된 금강소나무들의 붉은 기운이 하늘로 뻗어 있다. 굵은 금강소나무의 표본인 곳이라 해 '솔반쟁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젊은 청년 죽은 터는 '묘반쟁이', 장례식의 하관 때 회다짐을 하기 위해 쓰던 횟가루를 생산한 곳이라는 뜻의 '횟돌반쟁이'등의 지명도 남아 있다.
GPS 트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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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다행히도 비가 안왔군요.
네..!
그래도 비 소식이 없어서 편하게 잘 다녀왔습니다.
일전에 갔었는데.
같은곳을 1년만에 다시 걷는데도 길에 대한 기억이 없네요.
있는 것이라고는 정상석만 기억이 남는데..!
몇번을 걸여야만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금지구간이라 진고개에서 정신없이 랜턴불빛만 쫓아 정신없이 두루봉에 올랐던기억
동자꽃 모싯대 반갑네요
잘 다녀오셨네요
비도 안오구
그러셨군요..!
이번에 지인이 간다고 하여 다녀왔습니다.
오후에 비 소식이 있었는데.
다행하게 비는 오지 않아서 잘 다녀왔는데.
한번 넘어지고
또 풀들이 너무커서 정신없이 걷다보니 쓸려서 손에 상처가 다 났더라구요..!
그래도 이렇게 걷는것이 참 좋은 것 같아요..!
야생화는 여름 야생화로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있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