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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諭都體察使柳成龍曰: "平日予所倚重者. 卿也。 曾以倭奴可虞之機, 措備之策, 累諭于卿, 而不以爲憂,
反以爲迂, 國事至此, 亦由天數。 今卿受閫外重任, 討賊復讎, 是卿之任, 而予所夙夜切齒者也。
近來有一種講和之說, 吁! 是何理哉! 豈忍出諸口而聞諸耳也? 卿若惑於此說, 則旣誤於前, 復誤於後,
以何面目, 自立於天地間乎? 凡以和爲說者, 此乃姦人之所爲, 必先斬梟首, 啓聞。"
【태백산사고본】 19책 36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664면.
"내가 평소에 큰 기대를 건 사람이 경이다.
일찍이 왜노(倭奴)의 염려스러운 낌새와 대비할 계책을 가지고 여러차례 경에게 유지를 내렸는데도
경은 걱정하지 않고 도리어 오활하다고 하여 나랏일이 이지경이 되었으니,
이 또한 하늘의 운수 때문이리라.
경은 이제 곤외(閫外)의 무거운 임무를 맡은 만큼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는 일은
바로 경의 책임이자 내가 밤낮으로 이를 가는 일이다.
그런데 요사이 강화의 말이 나돌고 있다니, 이 무슨 이치인가. 어찌 차마 입으로 뱉고 귀로 들을 말인가.
경이 만약 이 말에 현혹된다면 이미 앞서 그르치고 나서 뒤에 또 그르치는 것이니,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에 서 있겠는가. 무릇 강화를 말하는 자는 바로 간인(姦人)의 행위이니
반드시 먼저 베어 효수하고 나서 계문하라."
[부연설명]-태백산 사고본.
곤외(閫外)-왕성 도성 경계밖
계문[啓聞]-장계를 올려 문의.
1593년 3월16일 선조가 평안북도 정주시 몽진지에서 평안도 도체찰사 류성룡에게 말한 내용이다.
1592년 7월부터 9월6일까지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 정철은 충청도 도체찰사[정1품]로 내려가
충남 연산[연기~논산 연산],연무 등에서 충청도 관찰사 허욱, 조방장 배흥립, 조헌, 영규 등을 내세워
청주성 탈환작전을 총지휘하고 돌아온다. [9월 12일날 조헌, 영규대사 전사 장계 올라옴]
1593년 10월24일 환양환도 사흘후 동인 주리학파는 서인 정철에게 광해군을 옹립하라고 사주하여
광해군을 싫어했던 선조에 의해 실각당하고 다시 동인정권이 들어자, 정철을 명나라로 강화(强化)사절로
보냈다가, 강화도(江華島)를 거쳐 돌아오게 하여 동인 주리학파 류성룡 정권에 의해 병사처리 된다.
이 당시는 서인 정권이었으며 항전을 주장하던 시기였고, 밀려났던 동인은 강화를 주장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선조가 동인 세력 중에 강화를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류성룡에게 효수하고 저잣거리에
내걸라는 강력한 주문을 하고 있다.
1593년 3월14일 행주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었기 때문에 선조가 더욱 고무되어 강화를 주장하는
동인들에게 류성룡을 통해 경고를 주고 강력하게 처벌하라는 명령을 하달하는 내용이다.
임해군[이진]과 순화군이 함경도에서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군에게 포로로 잡혀있다가
추위로 후퇴하면서 북평사 정문부와 이붕수 의병장에게 밀려,서울 한양으로 내려와
웅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조는 한양 탈환을 위해 더욱 항전을 주장하던 시기였고,
강화를 주장하는 자들에게는 단호히 대처하던 시기였다.
임해군, 순화군과 장인, 장모 등 수행하던 정 3품 부사급 이상의 대신들까지
가등청정군에게 잡혀있었기 때문에 그 원망이 더해져 임진왜란 전 일을 거론하면서 류성룡에게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라고 주문하였는데,
而不以爲憂 反以爲迂[이불이위우,반이위우-감히(능히) 우환이 온다고 보지않고,
도리어 케케묵은 일로 치부하다]로 보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이 지경까지 왔다고 책망하는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오활(迂闊/우활)하다(현실의 경우와 거리가 멀다)로 해석하고 있음]
그책임이 동인에게 있으니 강화를 논하는 자는 지체없이 잡아 국문에 효수하여
저잣거리에 내걸라는 주문을 선조가 내리고 있는 것이다.
〔○〕 以李時彦爲司諫院司諫, 以具宬爲承政院同副承旨, 以許筬爲司憲府執義, 以黃璡爲兵曹參議。
이시언(李時彦)을 사간원 사간으로, 구성(具宬)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허성(許筬)을 사헌부 집의로,
황진(黃璡)을 병조 참의로 삼았다.
1593년 3월26일 황진은 병조참의[차관보급/정 3품]에 전주 부윤으로 제수되고,
동인에서 류성룡을 따라 남인으로 분열하는 이시언은 사간원 사간[종3품]으로 제수된다.
[선조는 숙천으로 몽진지를 옮긴 시기다]
황진 [남원/호남 서인중 주기학파]은 공이 넘쳐서 병조판서>참판 >병조참의 [정 3품]에
전주 부윤(원래 해당 지역인을 문관 요직으로 임명하는 것은 공이 아주 많았을 때 임명하는 것이고
그렇지않은 상태에서 임명하면 권력을 장악한 정당의 힘으로 주어진 특혜 중의 특혜였음)으로 제수되었고,
이시언[동인]은 황해도 좌방어사에서 사간원 사간[종3품/언론 삼사의 요직으로 대사간 다음 서열]을
제수받았다가,1593년6월 충청도 병마절도사 [종2품] 황진이 진주 제2차 전투에서 전사하자,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오른 이시언은 도원수 권율과함께 1596년 한현,이몽학의 난을 진압하고
훗날 인조반정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이괄의 난에 합세하려 하였다가
서인정권에 의해 참수된다.
[남인 여주의 이괄은 정유재란 칠천량 해전 패전 이후 동인 주리학파에서 류성룡파가 남인으로 분열하자,
경남 고성이씨였기 때문에 남인화되는 것이며, 남인 중에서도 비주류에 속한 남인.
-남인의 정신적 기조는 나주~부산까지임]
황진은 3월내내 사간원 사간, 간원으로부터 처벌을 하라는 탄핵 상소를 받지만
선조가 공이 많다며 거부한다.
임진왜란 전투에서 호남 서인중 주기학파 문무관 제자들이 종횡무진으로 공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견제하려고 마구잡이 탄핵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시언등 동인 사간[종3품], 4품이하 간원들로부터 끊임없이 처벌하라는 탄핵을 받음.
황해도 좌방어사 시절 남원의 김경로 황해도 방어사[종3품] 휘하에서 평양에서 퇴각하는
우희다수가 [우끼다 히데이에]군을 공격하여 승전하는데, 보고라인을 무시하고 승전 장계를 직접 올림.
그래서 사간원의 수장 대사간 [정 3품] 다음 서열인 사간[종3품]요직으로 행주대첩이 벌어지기도 전에
먼저 진급하는 것임].
김경로는 평양에서 퇴각하는 우희다수가군, 소서행장 [고니시 유키나가]군을 격퇴시키며
행주대첩 [우끼다 히에이에군/소서행장(고니시)군 3만]에서 승전하도록 주변에서 교란전을 펼치고
행주대첩 승전 이후 전라도 방어사[정3품]로 부임하여
정유재란 때 명나라군 부총병 양원과 함께 왜군을 상대하다가 양원은 도망가고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 전라 우방어사[종3품] 오응정, 산성별장 신호등과 함께
남원성 전투에서 자신들만 살아나오자 성밖 풀더미 속으로 들어가 종사관에게 불을 지르라하고
불더미속에서 산화한다.
1591년 2월 조선 최초로 동인 주리학파 정권 [세력 중심 체제]으로 권력이 교체되어
이산해, 류성룡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선전관, 비변사의 비변랑 등 군사 핵심요직에서
서인중 호남 주기학파와 남인을 고향지방 한직으로 5~7품계 직급 강등하여 좌천시키고
동인으로 모든 요직을 채우고 나서 1년후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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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36권, 선조 26년 3월 20일 을해 3번째기사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권율로 도원수를 삼고 조호익을 순찰사로 삼는 일을 의논하라고 전교하다.
○上敎曰: "金命元爲人至輕, 言多可哂, 不合元帥, 自受命以來, 了無成功。 李薲爲人可惡, 麤慢無比,
不合將帥。 予意欲以權慄爲都元帥, 曺好益爲巡察使, 竝議啓。"
"金命元, 以元帥之重, 初守漢江, 賊未及渡, 望風先遁, 退據臨津, 終致敗績, 刑章不加, 兵柄自如, 一年臨戎,
未嘗窺一賊陣。 人稱其文武才幹, 其亦異矣。"
備邊司啓曰: "金命元久專征討, 事多弛緩, 李薲一年臨戎, 別無顯效, 雖無罪犯, 理合遞來。 第臨軍易將,
自古所戒。 權慄獨領遠師, 客寄傍陣, 其於畿甸及本道軍情事勢, 皆未熟諳, 一朝換易, 或未必有加於前,
而軍情之動, 滋益焉, 所提南軍, 必將渙散, 所係非輕。 好益誠心勇往, 則果爲可嘉, 而軍旅之事, 必多生踈。
一朝暴起, 猝統大衆, 士心去就, 臨陣規爲, 亦難必其勝於前人。 且與賊隔江, 朝夕待戰, 遞代之間, 脫致紛紜,
悔無及矣。 臣等愚意, 不如姑責後效無妨, 敢啓。" 傳曰: "依啓。 若立後功, 豈不好哉!"
"李鎰一武夫也, 其官爵之崇, 恩數之異, 只爲今日用也, 干弋一年, 功效蔑如, 其將何以報國哉?
然其終始爲國之誠, 非如李薲諸將所可及。"
상[선조]이 전교하기를,
"김명원(金命元)은 매우 경솔하고 말도 우스꽝스러운 것이 많으므로 원수(元帥)에 합당하지 않아
명을 받은 이래 공을 이룬 것이 전혀 없다.
이빈(李薲)은 흉악하여 추잡하고 게으르기 비할데 없으니 장수에는 합당하지 않다.
권율(權慄-서인)로 도원수를 삼고 조호익(曺好益)으로 순찰사를 삼고자 하니, 함께 의논하여 아뢰라."
김명원 원수의 중임을 띠고 처음 한강을 지키다가 적이 미처 건너기도 전에 소문만 듣고 지레 도망쳐 물러나
임진(臨津)강에 가있다가 끝내 패적(敗績)하였는데도 형벌을 받지 않고 여전히 병권을 잡았으며
1년 동안 군사에 임하면서 적진은 한번도 엿보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문무의 재간이 있다고 일컬었으니 그것 또한 이상하다.
하자, 비변사가 아뢰기를,
"김명원은 오랫동안 정토(征討-전장터의 적을 토벌하는일)를 전제 (오랜동안 돌아봄)하면서
일을 이완(긴장을 늦추는 일)시킨 것이 많았고 이빈은 1년 동안 군사에 임하여
별달리 드러난 공이 없었으니, 비록 죄를 범한 것은 없다 하더라도
도리상 체직(책임을 물어 직책을 파함)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나 싸움에 임하여 장수를 바꾸는 일은 예로부터 경계하던 것입니다.
권율은 혼자서 먼 지방의 군대를 이끌고 옆진에 의탁하여 있으므로 경기 및 본도의 군사 정세에 있어서는
모두 익히 알지 못하는데 하루아침에 바꾸었다가 행여 전보다 낫지 못하면 군정(軍情)의 동요만
더 심해질 것이고 이끌고 있는 남쪽 군병도 분산될 것이니,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습니다.
호익은 진심으로 용감하게 나선 것은 가상하나, 군사의 일에는 반드시 생소한 것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갑작스럽게 등용하여 군사를 거느리게 한다면 군정의 거취와 진중의 규획에 있어
앞사람보다 반드시 낫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적과 더불어 강을 사이에 두고 아침 저녁으로 싸움을 대기하고 있는데, 교체하는 사이에
혼란을 일으킨다면 후회하여도 미칠 수 없을 것입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차라리 다음에 공을 세우도록 독책하는 것이 무방할 듯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다음에 공을 세운다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일(李鎰)069)은 일개 무부(武夫)이다. 그에게 높은 관직과 남다른 은총을 내린 것은
다만 오늘날에 쓰자는 것이었는데, 창과 방패를 잡은 지 1년인데도 공을 세운 것이 전혀 없으니
그가 앞으로 어떻게 나라에 보답하겠는가.
그러나 시종 나라를 위하는 그의 성의는 이빈 등의 여러 장수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부연설명]
여전히 선조는 임진왜란의 책임이 동인 주리학파에게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서인은 칭찬하고 직급을 올려주지만 동인이 장악한 사간원 사간, 간원들로부터
서인 탄핵과 처벌 요구를 거부한다.
그리고 동인에게는 반감의 뜻을가지고 표현하고 있다.
[평양 이북으로 선조 어가호송과 파천을 동인이 하고, 임진강 이북을 동인이 주로 막고,
서인은 한양 이북을 방어하는데 투입되고 호남 주기학파 관의병과 남인 수군만이
주로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었음.
또 호남은 호남 방어를 위해 권력에서 멀어지고, 동인정권이 오래 유지되는 것임]
이일은 서인[주자학 원리주의 학파/송익필의 정주학 신봉학파]인데 공이없으나
경기도 수사 이빈의 공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추켜 세우며 차후 이일에 대해 처벌 요구와
탄핵하지 말라며 미리 이야기하고 있다.
그에 비해 선조는 동인 도원수 김명원[1534~1602]이 한강, 임진강 전투에서부터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하기만 하여 장수로서 합당하지 않다며 서인 권율(경기 강화 출신)로
교체하라고 주문하지만, 사간원을 장악한 동인에 의해 변호를 받아 교체되지 않고,
권율이 1593년 3월 14일 행주대첩에 승리하고도 도원수로 바로 오르지 못하게 된다.
김명원은 1597년 정유재란 시기 칠천량 패전 이후 류성룡이 남인화되자, 같이 남인화되는인물이다.
이시언도 따라서 남인화된다.
동인정권은 주기학파 이순신이 공을 너무 많이 세우자 부산포 해전 출병을 명령하고 명령을 듣지 않자,
서인 원균[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으로 교체하고 이순신을 압송하여 국문으로 다스리다
칠천량 해전 패전으로 이순신[서인중 호남 주기학파이자, 정유재란 때 원균의 칠천량 해전 패전 이후
백의종군하면서 남서인화]이 극적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다.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복귀시키면서 류성룡은 남인화된다.
동인 조호익 역시 류성룡을 따라 남인화되는 인물이다.
동인들이 고향지방을 무리하게 탈환하려고 패할줄 알면서도 이순신에게 부산포로 출병하라고
선조에게 고했으나 이순신이 거부하자, 이이재이 전법으로 서인 원균을 내세워
둘다 처리하려다가 원균이 대패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을 다시 백의종군시키게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게 류성룡이 남인으로 완전 돌아서는 계기가되는 이유일 것이다.
류성룡도 칠천량 해전 패전 이후 동인 주리학파로서 큰 책임을 지고 더 이상은 안되겠다고 싶어
남인으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다.
너무나 엄청난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전란중에 상대당의 공적에 배가 아파 탄핵하고,정권을 빼앗기면 되찾아오려고 전전긍긍하다니,,,
류성룡도 치를 떨며 책임을 지고 자신의 책임을 면피하기 위해
동인에서 남인으로 돌아서게 된다는 말^^].
서인 정권 하에서도 삼사의 요직 곳곳에서 동인은 끊임없이 서인, 남인이 공을 세울 때마다 역 탄핵한다.
이것이 서인정권[주자학 원리주의 학파]의 무능함이다.
정권을 잡고도 전란에만 치중하느라 물갈이를 하지 않은 대가를 혹독하게 받았던 것이다.
[서인중 주자학 개혁 혁신파 (근대 이성 철학파)이자 근대식 개혁학파인 주기학파 제자 문관, 무관들은
이성주의, 경험주의, 현실주의, 합리주의 사상철학을 배웠기 때문에, 근현대인과 별반 차이가 없어
조총을 든 왜군을 상대로 사수부대만을 가지고도 전투에서 승전하는 요인이 되는 것임].
p/s
동인 주리학파는 명나라 주자의 주리철학을 그대로 신봉하는 학파였고,
서인중 호남을 중심으로하는 주기학파는 주자의 주리론을 정면으로 거부하며 성리학 반란 사건을 일으키고
주기론을 창시한 화담 서경덕을 중심으로 기대승의 이성의 상호 통제론, 이이의 이기 이원론적 일원론을
정립시킨 학파였기 때문에, 주리학파가 중국에 신고하면 멸문지화를 당할 우려가 높아 약점을 단단히 잡혀
정치적으로 약화되기 시작하며, 1591년 2월 동인 주리학파에게 조선 최초로 정권이 세력 중심 체제로
넘어가는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