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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섬 누리마루 자리에 종덕원(고아원)이 있었다
걷기코스 일품, 동백섬 산책로
초등학교 2학년 시절 며칠째 학교를 나오지 않는 학급생을 만나보라는 선생님 지시로 종덕원(지금 누리마루 하우스가 있던 자리)을 찾아갔던 적이 있다. 1966년 그때만 하더라도 동백섬은 해송을 제외하고는 거의 민둥산이었다. 동백섬 정상에서 보면 지금과 달리 사방팔방이 시원하게 뚫려 전망이 아주 좋았다.
우리나라 남해안에는 동백나무가 자생하고 있는 ‘동백섬’이란 이름을 가진 섬이 많다. 뿐만 아니라 동쪽과 서해안 해변 어느 곳에서든 굳이 찾아보자면 더러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유난히 이곳을 특별히 찾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해운대 동백섬은 신라하대의 학사 최치원이 소요자적 했던 곳으로 조선 성종 12년(서기 1481)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해운대는 육지가 바다 쪽으로 누에머리처럼 쳐들고 들어가 멈춘 곳이다, 그 위에 동백과 두충나무 소나무 삼나무가 사시사철 푸르게 우거져있고 겨울이 가고 봄이 올 무렵이면 동백꽃이 떨어져 3~4치나 쌓이며, 남쪽으로 대마도가 가까이 보인다. 신라의 최치원이 이곳에 대를 쌓고 노닐었는데, 아직도 그 터가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름같이 왔다 가는 인생이기에 최치원 선생 자기 스스로 고운이라 자를 짓고 ‘소요자적’했던 해운대다.
사람은 땅의 정기를 받아 태어나고, 땅은 사람으로 인하여 이름을 얻게 된다. 사람들이 유난히 이곳을 찾았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천 년 전 통일신라 말 이곳에서 소요자적 한 인물에 대한 동경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중국에서도 이름을 날린 국제적인 인물이었다. 최치원 선생이 한때 소요했던 한 장소를 찾아 그의 고심과 사연을 회상하려는 이들이 고려 초부터 조선말에 이르는 근 칠백 년 동안 이어져 왔다. 시인 묵객들이 남긴 한시 속에서도 해운대 천년의 서정을 느낀다.
/ 이광영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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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운대에 놀면서> 남효은(1454-1492)
대양은 망망하여 하늘 끝이 아득하고, 메 뿌리가 거무스름하게 솟아올라 물결처럼 평평한 푸른 바위에 일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곳 해운대, 둥근 잎이 겹겹이 푸르러 사각거리며 이어져 5 리에 걸쳐 뻗어 있는 곳은 홍다림(동백섬)이요, 언덕이 왼편으로 끌려가다가 동으로 솟아 바다 속으로 달려드는 곳은 원앙대(달맞이길)요. 산이 오른쪽으로 둘렀다가 남쪽으로 끊어진 곳은 오리도(수영강)요. 강물이 서편에서부터 바다로 들어가며 마전한 듯 맑고 깨끗한 데, 강의 하구 목구멍을 지그시 누른 곳이 해운포이며 넘실거리는 바다 동쪽 끝으로 자라등에 실려 있는 삼신산같이 보이는 것이 대마도이다.
● 종덕원
종덕원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서 건립되었다. 1929년 5월 5일 서울시 용산구 후암동에서 평전 육애원으로 개소하였다. 1947년 5월 1일 종덕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운영하다가, 1950년 12월 4일 6·25 전쟁을 피하기 위해 부산으로 피난을 왔다. 1952년 1월 1일 가덕도로, 1955년 4월 8일 해운대 동백섬으로, 1979년 2월 1일 연제구 연산동으로 이전하였다. 2004년 4월 22일 연산동 132번지 [현 위치]의 신축 건물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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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이광영 객원기자)는 새벽마다 동백섬에서 체조구령봉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