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동네이발소
임두환
설 명절을 앞두고 동네이발소를 찾았다.
이발을 하고 사우나에서 몸이나 풀어볼까 했는데, 이발소 싸인 볼이 꺼져있었다.
셔터까지 내려져 있으니 예삿일이 아니었다.
우리 집에서 1Km쯤 떨어진 기린 이용원은 휴무일인 수요일이 아니고선
문을 닫은 적이 없었는데, 무슨 일인지 걱정이었다.
나는 20여 년 동안, 기린이용원 단골이었다. 최00 이발사는 올해
73세로, 바리캉을 잡은 지 48년째라고 했다.
8평 남짓한 이발소는 화장대 이발의자 세면대 소파가 전부였지만,
분위기가 아늑했다.
한쪽 벽면에 걸려 있는 빛바랜 이발사자격증에서 세월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고, 작달막한 키에 흰 가운을 입고서 가위질하는
솜씨는 놀라웠다.
그는 이발을 하면서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재치를 발휘하여
손님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곳에서는 TV나 신문을 접하지 않고서도 세상일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나의 쉼터였다.
오랜 세월 동고동락하던 그였는데, 소리 소문도 없이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최00 이발사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던 시절, 이발사자격증 하나면
먹고살겠다 싶어 무작정 집을 나왔다고 했다.
전주 어느 이발소에 들어가 잔심부름을 하면서 머리를 감겨주고,
면도를 하고, 이발사가 되기까지 15년 세월을 보냈다며,
지난날의 고초를 되새김질했다.
그 시절에는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이발소뿐만 아니라, 양복점 양화점
시계점 등, 기술을 익히려면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한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와 6?25전쟁으로 폐허가 돼버린 우리 사회는
극심한 혼란으로, 먹고살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릴 수 없었다.
가족을 한 명이라도 줄여보려고 아들은 꼴머슴으로, 딸은 식모로
내보내야 했던 시절이었으니, 새경을 받는다는 것은 꿈속의 떡이었다.
굶지 않고 끼니를 때우는 것만으로도 구세주를 만난 듯 했다.
내 어린 시절, 우리 동네는 새마을사업이전까지만 해도 우마차가 아니면
지계로 짐을 날라야 했다.
밤이면 호롱불을 켜 놓고 어머님은 길쌈과 바느질을, 나와 동생은
책을 읽어야 했다.
내가 살던 사옥(舍玉)마을은 하늘 밑 두메산골이어서 이발소가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어느 곳에서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달에 한 번씩, 돌팔이
이발사가 찾아와 머리를 깎아주고 봄여름에는 보리로,
가을겨울에는 쌀로 받아갔었다.
이발사가 동네에 나타나면 금방 소문이 퍼졌다.
너나할 것 없이 일손을 멈추고 달려가야 했다.
아이들은 항상 뒷전이었다.
어른들의 이발이 끝나야 아이들 차례가 돌아왔다.
이발사는 빨래판을 의자에 올려놓고는 다짜고짜 앉으라면서, 바리캉으로
머리를 밀어 올렸다.
어른과 아이들에게 사용하는 바리캉은 달랐다.
아이들에게 사용하는 기계는 고물이나 다름없었다.
기계를 밀어 올릴 때마다 머리가 깎이는지 뽑히는지 눈물이 찔끔찔끔 나왔다.
아프다고 소리치면 꿀밤이 주어졌다.
머리를 깎고서 집에 들어가면 어머님께서 머리를 훑어보시고는,
덜 깎인 머리를 샅샅이 손보아 주셨다.
문제는 또 있었다.
바리캉 하나로 머리를 깎다보니 기계충이 옮겨져, 온 동네 아이들의
머리에는 부스럼이 덕지덕지했었다.
요즘, TV에서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지금 같았으면 어찌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내가 이발소를 처음 찾았던 기억은 어렴풋하다.
아마도 중학교에 들어가고부터일 게다.
그 때는 학생들 머리가 2∼3Cm쯤 되면, 훈육선생님이 머리에
오솔 길을 내주었다.
동네에서 돌팔이에게 머리를 깎다가 처음으로 이발소에 들렀던
나로서는 딴 세상을 만난 듯했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싶었다.
회전의자에 푹신푹신한 소파는 신기해 보였고, 소파에 앉은 손님들은
한담을 나누며 지루함을 달래고 있었다.
그 때가 겨울이었다.
이발소 중앙의 연탄난로 위에는 양동이가 놓여 있고, 머리를 감길 때는
한 조리의 물을 푸고는 한 조리의 찬물을 부어놓아 항상 미지근했다.
난로의 연통을 고정해놓은 철사 줄에는 젖은 수건들이 걸려있었고,
면도사는 가끔씩, 비누거품이 묻은 면도솔을 따뜻한 연통에 문질렀고,
면도날이 무디어지면 귀퉁이에 못박혀 있는 가죽띠에 무두질을 했었다.
더벅머리 애송이는 세발을, 어여쁜 아가씨는 면도를, 주인장 이발사는
정성스레 이발을 하면서도 어린 나에게까지 친절을 베풀던,
그이발사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요즘, 누가 이발소에 가나요? 아버지도 한 번 미용실에 들러보세요.”
아들 진영이가 하는 말이다.
세상은 변해도 많이 변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문전성시로 끼니를 거르면서까지 이발을 해야 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미용실로 발걸음을 하고 있으니,
동네이발소는 파리를 날릴 수밖에…….
기린이용원은 동네사람들의 쉼터였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희로애락을 같이 나누던 곳이었다.
요즘 들어, 하나둘씩 동네이발소가 사라지고 있으니, 이걸 어찌하랴?
첫댓글 나는 지금도 미용실보다
이발소에 자주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