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이 미국에 불법으로 체류한 시간은 10년이 넘은것으로 안다. 불법체류 기간중 안해본 일이 없다고했다. 오랜시간 이미테이션 쥬얼리를 가판에서 팔았다고 했다. 돈이 떨어져 끼니를 해결하기 어려울 때는 음식점에서 버린 음식을 주워 먹었다고 했다. 화장실이 급하면 옆 피자가게 직원에게 잠시 가판을 봐달라고 하며 급하게 뛰어다녔다고 했다. 이 이야기만 들어 보아도 불법체류를 하던 미국생활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미국은 일정기간이 지나면 불법체류자에게도 영주권을 내주는 제도가 있었다. 형님은 영주권을 받을 때까지 버티고 버티셨다. 그리고 마침내 영주권을 획득했다. 형님은 영주권을 얻자마자 귀국해서 가족들을 미국으로 데리고 들어가셨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나이가 많아 형수와 애들만 먼저 들어갔다. 어머니에게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시간이 지난 후 알게된 이야기였다. 형님은 미국에서 마트에 상품을 진열하는 냉장고 사업을 하셨다. 중고 냉장고를 사서 수리 후 다른곳에 팔았다. 뉴욕에 공장도 있으셨다. 처음엔 트럭을 이용 직접 배달을 다니셨다. 미국은 땅덩이가 넗어 멀리 배달을 갈 땐 2~3일도 걸렸다. 혼자 트럭을 몰며 산골 깊숙한곳 까지 배달을 했다. 졸음이 오면 차에서 쉬며 자며 배달을 했다. 자리를 잡고 나선 직접 배달을 하지 않았지만 사업체 사장들을 만나 영업을 하고 직원들을 괸리했다. 직원들은 모두 남미 계열이었다. 말이 잘 통하진 않았지만 마음은 통했던지 형님과 함께 일하는 직원들은 오랜시간 같이 일한 가족같은 사이였다. 형수님도 처음 미국에 가선 일을 했다. 옷가게에서 옷도 팔고 네일샾등에서도 일했다. 애들은 어렸지만 큰 사고를 치진 않았고 알아서 공부도 열심히 했다. 형수님이 공장직원들에게 뼈다귀 감자탕을 끌여주면 "오! 굿, 너무 맛있어요" 하면서 엄청 잘 먹었다고 한다. 형님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고 내가 미국에 갔을 때 형님은 미국에서 완전 자리를 잡고 잘 살고 있었다. 지금은 큰 아들에게 사업체를 물려주고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다. 둘째 아들은 맨하튼에서 치과를 개업했다. 세째 딸은 치과의사와 결혼 해 휴스턴에 살고 있다. 세 아들 딸들이 낳은 손자들도 7명이나 된다. 젊어서 고생도 하고 외로웠겠지만 자식 농사를 잘 지어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나는 미국에 가기전 형님에게 전화를 해서 알아볼것도 있고 해서 같이 일하는 분과 뉴저지를 방문할거라 말했다. 형님은 미국에 오면 자기에게 들렀다 가라고 했다. 나도 외로웠지만 형님도 외뤄웠을것 같다. 형님은 자신을 낳아 주었던 어머니와 어린시절 헤어져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컷다. 분명 외로움이 있었을 것이다. 형님과 나는 열살이상 차이가 나고 아버지가 다른 형제로 교류가 많이 있진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형님과의 끈을 놓지 않았고 나이가 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예전보다는 가까워지게 되었다. 뉴욕 과르디올라 공항에 도착해보니 저녁 쯤 이었다. 형님이 픽업을 나와 계셨다. 몇년만에 형님을 봤지만 미국에선지 더욱 반가웠다. 형님은 맨하튼과 가까운 도시에 살고 있었다. 지하 포함 3층 주택에 거주하셨고 그 당시엔 90세 넘은 할머니도 함께 살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께 큰절을 올렸다. "애가 병남이에요" 형님은 할머니께 나를 소개했다. 할머니는 나를 알아보시는지 얼굴에 미소를 띄며 잘왔다고 했다. 형님 집에 머물면서 지하에 있는 손님방에 한 일주일쯤 있게 되었다. 형님은 나에게 어디를 가보고 싶냐고 했다. 나는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메트로폴리칸 박물관등이 가보고 싶다고 했다. 형님은 시간을 내어 나와 함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갔다. 형님도 오랜만에 이 빌당에 올라간다고 했다. 형님과 나는 기념사진도 찍고, 전망대에선 형님이 뉴욕 이곳저곳을 설명해주었다. 형님과 처음으로 만든 즐거운 추억이었다. 메트로폴리칸 박물관은 나 혼자 가게 되었다. 형님이 입구까지 데려다 주었다. 관람이 전부 끝나면 연락하라고 했다. 전화도 있겠다. 나는 아무런 걱정도 없이 박물관 구경을 했다. 박물관의 규모가 무척 컷다. 유럽관, 아프리카관, 동양관 등 세부적으로 나뉘어진 방에 여러가지 유물들이 있었다. 특히 기억나는것은 중세시대 기사들이 입었던 철갑옷이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것을 실물로 처음 봐서인지 꽤나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동양관엔 우리나라 도자기도 전시되어 었었다. 우리나라 도자기를 미국 박물관에서 보니 감회가 새뤄웠다. 관람을 끝낸 후 박물관을 나와 푸드트럭을 찾았다. 미국에 오면 베이글을 먹어봐야 한다고 해서 주문을 했다. 영어가 짦은 나는 판매인이 말하는것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지금이라면 눈치것 소스를 선택 했겠지만 그 땐 아무것도 몰라 당황했다. 나는 아무것도 발라지지 않은 베이글을 받아 들었다. 베이글은 매우 퍽퍽했다. 베이글을 조금 먹고 형님 핸드폰에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당연히 문제없이 통화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연결은 안되고 뭐라뭐라 쏼라쏼라 하는 말만 흘러나왔다. 나는 갑자기 얼음이 되었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아니 무슨 말을 하는거야, 도저히 알아 먹을 수가 없었다. 손에 땀이 맺혔다. 이제 어떡하지 지하철을 이용해 갈까, 아니면 택시를 탈까? 길을 잃어 버리면 택시를 타고 형님 집 주소를 말하면 될 듯 싶었다. 나는 박물관 앞에서 갈팡질팡 갈 길을 못찾고 헤매고 있었다. 한시간 정도 지났을까 형님이 나를 데리러 왔다. 관람을 다 했을것 같아 데리러 왔다고 했다. 나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렇게 미국에서 형님과 추억을 쌓고 귀국할 수 있었다. 미국 이민도 꿈꿨으나 같이 갔던 C사장이 이민을 포기 했고 나혼자 무턱대고 형님을 찾아 의탁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미국 이민에 대한 꿈은 사라졌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