닳지 않는 사탕을 주세요
오영미 ∣ 파란시선 0050 ∣ B6(128×208) ∣ 133쪽 ∣ 2020년 1월 30일 발간 ∣ 정가 10,000원 ∣ ㈜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이 세계가 끝장나기 전까지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시집,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익숙한 위로와 성찰을 기대했다면 이 시집을 펼치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순진한 화자가 의도치 않은 사건을 만나 상처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성장하는 서사란 이 시집과 어울리지 않는다. 세계가 바뀔 것이라는 믿음, 내가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박탈당한 자가 표면적으로는 이 시집의 주인공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자기를 학대하고 파괴하는 방식으로 이 폭력적인 세상을 끝장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만 쓰는 것은 옳지 않다. 오영미의 화자는 여성 화자이다. 세계의 폭력성은 여성에게만 선별적으로 작동된다는 자의식이 이 시집의 가장 강력한 발화 지점이다. 오영미의 시집은 남성 권력으로 젠더화된 세계가 끊임없이 여성 화자를 평가하고, 대상화하고, 타자화하며, 물화하고, 언어를 빼앗고, 구석으로 내몰고, 혐오를 내면화하도록 강요하며, 성적으로 착취하고, 폭력적으로 신체와 정신을 침탈하는 일들이 태연하게 반복되는 그런 현실을 보여 준다. 마치 끝나지 않는 악몽처럼 되풀이되는 고통 속에서 오영미의 여성 화자는 세계의 불의와 불공정함을 고발하고, 또 강력한 분노로 몸서리치지만 바뀌지 않는 현실 질서 앞에서 제 몸을 깨트리고 망가뜨려 저항의 마지막 흔적을 남긴다.
이렇게 다시 써 봐도 부족하다. 그래서 나는 더 말하게 된다. 너무나 많은, 부서진 유리 공들이 가루가 되어 늪을 이룰 정도로 쌓이고, 우리는 발이 빠진 것처럼 그녀의 강력한 심리적 충동과 우울한 에너지들에 잠식당한다. 움직일 때마다 몸 전체가 유리 가루에 쓸리는 아픔. 종일 핏물에 서걱거리는 이 소리. 당신들에게도 내가 겪은 그 아픔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 주겠다는 열망이 없다면 이런 언어들이 가능할까. 때로 잔인한 무대를 만들고 영화나 책에서 본 이국적인 이름들을 등장시켜 자신을 감춘 채로 인형극을 펼치지만 그렇다고 비명이 사라질 리 없다. 눈은 웃고 있지만 입은 찢어진 인형이 비틀린 얼굴로 기괴한 소리를 중얼거린다. “어째서 감정은 토해 낼 수 없는 걸까, 습관적으로 목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너는 손끝만 대도 문드러지는 연두부처럼 위태롭다”(「하얗고 연약한」)고 말하는 목소리.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묘사할 때조차 폭식과 거식, 가학과 피학, 그리고 신체 훼손과 자기혐오가 일상적으로 되풀이되는 이 세계의 비참은 좀처럼 톤 다운이 되질 않는다. 비명과 고통은 누구에게도 가닿지 못하고, 그렇게 위태롭게 쌓여 간다. 토해 내려고 해도 도저히 토해지지 않는다.”(이상 박상수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오영미 시인은 1987년 충청북도 영동에서 태어났으며,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17년 <시와 사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닳지 않는 사탕을 주세요>는 오영미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이다.
■ 추천사
시작한 시들이다. 시작하고 ‘있는’ 시들이다. 말하는 시들이다. 말하고 ‘있는’ 시들이다. 보는 시들이다. 보고 ‘있는’ 시들이다. 많이들 뭐가들 나오는 시들이다. 많이들 뭐가들 나오고 ‘있는’ 시들이다. 벌어진 시들이다. 벌어지고 ‘있는’ 시들이다. 느끼는 시들이다. 느끼게 하고 ‘있는’ 시들이다. 화난 시들이다. 화가 나고 ‘있는’ 시들이다. 싸우는 시들이다. 싸우고 ‘있는’ 시들이다. 화해를 모르는 시들이다. 화해하지 않고 ‘있는’ 시들이다. 떠올리는 시들이다. 떠올리게 하고 ‘있는’ 시들이다. 만나는 시들이다. 만나게 하고 ‘있는’ 시들이다. 때리는 시들이다. 때리고 ‘있는’ 시들이다. 아픈 시들이다. 아프게 하고 ‘있는’ 시들이다. 베어 무는 시들이다. 베어 물게 하고 ‘있는’ 시들이다. 고함치는 시들이다. 고함치게 하고 ‘있는’ 시들이다. 뜨거운 시들이다. 뜨겁게 달구고 ‘있는’ 시들이다. 달리는 시들이다. 달려서 가고 ‘있는’ 시들이다. 먹는 시들이다. 먹게 하고 ‘있는’ 시들이다. 코를 감싸게 만드는 시들이다. 코를 감싸게 만들고 ‘있는’ 시들이다. 입맛을 다시게 하는 시들이다. 입맛을 다시게 하고 ‘있는’ 시들이다. 일상인 시들이다. 일상이 ‘있는’ 시들이다. 척하지 않는 시들이다. 척하지 않게 하고 ‘있는’ 시들이다. 아픈 시들이다. 아프게 하고 ‘있는’ 시들이다. 실은 건강한 시들이다. 건강을 위해 ‘있는’ 시들이다.
―김민정(시인)
■ 시인의 말
너와 소풍을 떠났다
풀밭에서 점심을 먹었다
낡은 이어폰을 나누어 끼었다
이따금 입을 맞추었다
죽을 만큼 행복해, 네가 말했다
나는 웃으며 내 목을 부러뜨렸다
■ 저자 약력
오영미
1987년 충청북도 영동에서 태어났다.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17년 <시와 사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닳지 않는 사탕을 주세요>를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그날은 페퍼민트라는 발음처럼 – 11
정동진 썬크루즈 호텔 라운지 – 12
은판 사진 – 14
소녀, 소녀를 만나다 – 16
두둥실 떠올라 나풀거리던 – 18
소녀, 소녀를 만나다 – 20
점심시간 – 22
너는 나와 어울리지 않아 – 24
입안 가득 돌멩이가 – 26
고소하고 아늑한 – 28
일주일 전 이사 온 프레디 크루거 씨가 건네준 팥 시루떡을 달게 베어 물자 – 30
차갑고 푸른 – 32
밑바닥 가득 가라앉은 – 34
열아홉 – 36
과민성대장증후군을 앓던 요안나가 화장실 타일 바닥에 휘갈긴 메모 – 38
까미유 씨에게 꼭 맞는 코트는 어디에 있나 – 40
마터스 – 42
제2부
터키쉬 딜라이트 – 45
다른 사람을 위한 계절 – 46
세계의 끝, 여자 친구라고? - 48
금빛으로 네모반듯한 – 50
여름, 날카롭게 무르익은 – 52
닳지 않는 사탕을 주세요 – 54
라 비 앙 로즈 – 56
헤어짐의 예의 – 58
하얗고 연약한 – 59
애인에게 사지가 찢어발겨지기 직전의 루고시가 밀크 캔디를 한 움큼 삼킨 뒤 쓴 유서 – 60
이유를 알려고 하지 말아 줘 – 61
정신 나간 베이비 – 62
마리모는 물만 자주 갈아 준다면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 64
합정역 딜라이트 스퀘어 – 66
각설탕 – 68
포스트 모템 – 70
라무네 – 72
이런 슬프고도 연둣빛 나면서도 정직한 농담 – 74
제3부
불거진 여드름이 하나, 둘 – 77
한없이 부드러운 쪽갈비 – 78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 80
넌 사랑스러운 집고양이야 – 82
여자는 허벅지 – 84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 – 86
식사 시간 – 88
오늘도 반질반질한 타티 씨를 위해 발모제를 발라 드릴게요 – 90
다락방에 핀 푸르스름한 꽃 – 92
어둠이 내 뺨을 후려쳤다 – 93
기억의 절반이 새로운 집을 짓고 – 94
여고생에 관한 평범한 필름 – 96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 98
매력적이고 상냥한 피핑 톰 씨 – 100
편도 결석 – 101
말만 하세요 – 102
아주 사적인 티눈 – 104
화장실의 하나코 씨 – 106
팔리지 않는 소설가 – 108
한 번의 장례식 – 110
분홍 구두 – 111
해설 박상수 여성의 말, 귀신의 말 – 114
■ 시집 속의 시 세 편
마터스
루시, 네게 줄 초콜릿을 손에 쥐고 가슴을 두근거린 게 15년 전의 일이었을까, 아니면 어제의 일이었을까? 온종일 사내 녀석들에게 두들겨 맞아 피범벅이 된 네 몸을 씻기고 엉엉 우는 너를 내 품속에 넣고 다독였던 것은 불과 몇 시간 전에 벌어졌던 일이었을까? 루시, 그 무엇도 뚜렷하지 않아, 루시. 나는 움푹하게 팬 시간 속에서 밀가루 반죽처럼 사정없이 짓이겨지고 있어. 내 다리에 친친 감긴 사슬이 보이니? 네가 그곳에서 긴 머릴 휘날리며 부드러운 밀크 초콜릿을 입에 넣는 순간에도 이 사슬은 절망적으로 길어져만 가고 있어. 제발 루시, 그렇게 공허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지 마. 어째서 너는 내 손을 잡아 주지 않는 거지? 너는 공기처럼 가볍고 투명하지만 나는 아직 무겁고 달린 것이 많기 때문일까? 하지만 곧, 나도 너처럼 가벼워질 거야. 기다려 루시. 그 자리에서.
선생님. 당신은 나를 뒤덮고 있는 이 무겁고 성가신 피부를 벗겨 줄 수 있겠지요? 한 점도 남김없이 모조리 말이에요. 루시, 사랑하는 나의 루시가 바로 저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 선생님, 어서요! 이러다 나의 루시가 영영 달아나 버리면 어떡해요? ***
하얗고 연약한
내 감정은 양파로 이뤄진 것 같아, 라고 너는 말한다 까도, 까도 끝이 안 보여 그래서 무심코 눈물이 나 깨진 유리 조각과 사지가 뜯긴 봉제 인형이 따귀 맞고 붉어진 뺨처럼 너와 내 주위를 뒹군다 어째서 감정은 토해 낼 수 없는 걸까, 습관적으로 목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너는 손끝만 대도 문드러지는 연두부처럼 위태롭다 어제는 내 자궁에 타다 만 담배꽁초를 던졌지만 아마 실수였을 거야 그렇고 말고, 너는 팽팽한 활시위처럼 입술을 당기고 너의 목에 새겨진 애인의 손자국은 무섭도록 검푸르다 언제라도 너를 데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검푸름은 깊고도 음험하게 웃는다 어느덧 알맞게 발효된 새벽이 네 눈을 부드럽게 적셔 주고 나는 너를 네모반듯하게 접는다 소용없는 짓이야! 몇 시간 전보다 훨씬 짙어진 검푸름이 나를 노려보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옷깃을 살짝 벌려 그 안에 너를 넣는다 조용히 흩어지는 너의 숨소리가 솜털을 간질이고 정수리 위로, 까면 깔수록 매운 감정이 별처럼 쏟아진다 ***
매력적이고 상냥한 피핑 톰 씨
바닥에 떨어진 내 눈동자가 당신의 비명 속에서 으깨집니다 하지만 코를 감싸 쥘 필요는 없어요 당신의 불규칙한 생리 주기와 주저흔이 복잡하게 새겨진 여고 시절만이 약간 흐를 뿐, 고약한 냄새는 나지 않을 테니까요 당신과 눈이 마주칠 각도를 미처 계산 못 한 나의 불찰입니다 당신이 떼어 내려던 눈곱을 막 포착한 순간이었는데요 폴란드 영화였지요, 아마? 기차에 탄 여배우가 유리구슬을 가지고 놀던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나는 당신을, 그 유리구슬처럼 이리저리 돌려 보았을 뿐입니다 만약 내 눈동자가 입안에서 살살 녹을 정도로 달았다면 이런 상황까지 오진 않았을 텐데요 지금 당신은 뾰족하게 깎은 연필심처럼 진저리 치고 있지만 연필심은 언젠가 무뎌지기 마련이지요 안 그런가요? 당신이 마구 화를 내려는 찰나, 나는 눈동자를 버리는 시늉을 합니다 망가진 동그라미 따위, 세모꼴로 바꿔 끼우면 그만인 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