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계산(淸溪山 618) 광교산(光敎山 582) 종주
1. 산행코스
양재시민의숲역, 화물터미널(1.8K), 굴바위산, 옥녀봉(375 2.6K), 돌문바위, 매바위, 매봉(582 2.2K)
혈읍재, 청계산(망경대 618) 우회, 석기봉(600 1.7K Back), 이수봉(545 1.3K), 국사봉(542 1.4K)
하오고개(1.7K), 영심봉(369 0.8K), 고분재고개, 우담산(발화산, 425 1.3K), 붓골재(1.2K), 365계단
바라산(427.5 0.6K), 고분재(0.7K), 백운산(567 1.6K), 억새밭갈림길(1.0K), 노루목
광교산(시루봉 582 1.2K Back), 토끼재(0.9K), 비로봉(종루봉, 488 0.2K), 양지재(황골고개 335 0.8K)
형제봉(448 0.5K), 문암재(1.9K), 반딧불이화장실(100 1.9K), 광교공원입구(0.4K) -- 27.6Km
* 양재시민의숲역-청계산-우담산-바라산-백운산-광교산-반딧불이
2. 소개
서울 서초구 양재동의 매헌시민의숲은 우리나라 최초로 숲 개념을 도입한 공원으로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당시 서울의 관문이었던 양재 톨게이트 주변 환경을 개선하고자 1986년에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양재동(良才洞)은 이곳에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이 많이 산다 하여 붙여졌다.
경기 과천시 주암동과 서울 서초구 원지동 경계의 굴바위산(194.4)은 지명의 유래를 찾기 어렵고 산정에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서울 서초구 원지동의 옥녀봉(玉女峰 375)은 봉우리가 예쁜 여성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경기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 돌문바위는 바위의 윗부분이 맞닿아 사이로 지나갈 수 있고 문을 통과하면 복이오고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에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길에 바위를 통과한다.
경기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의 매봉(582.5)은 산의 모양이 매처럼 생겨서, 매가 많아서, 매가 살았다하여, 매가 사냥하던 곳이라하여 등 다양한 유래가 있고 청계산 매봉은 매가 많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혈읍재는 경기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 약초샘골과 경기 과천시 막계동 서울대공원 캠핑장 사이의 고개이다. 무오사화에 연루된 정여창이 피눈물을 흘렸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서울 서초구와 경기 과천,의왕,성남 경계의 청계산(淸溪山 618)은 서울을 에워싸고 있는 산들 중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청계산이라는 이름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맑아 청계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며 조선시대에 푸른색 용이 승천하였다는 전설을 두고 청룡산이라고도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풍수에서 관악산을 백호, 청계산을 청룡이라하여 좌청룡 우백호로 해석하기도 한다.
망경봉(望京臺)은 조선 태조 이성계에 의해 고려가 망하자 충신이었던 조윤(후일 이름을 조견으로 개명)이 청계산 북쪽 고려의 수도인 송도를 바라보며 세월의 허망함을 탄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경기 과천시 막계동의 석기봉(石奇峰 600)은 망경대 바로 옆 바위 능선상의 봉우리로 망경대 방향의 조망이 좋고 정상부에 작은 표지석이 있었지만 위험하다하여 정상석을 철거하고 지금은 표지석이 없다.
경기 성남시 수정구 이수봉은 무오사화에 연루된 정여창이 이곳에 숨어 위기를 두번이나 모면하였다고 지어진 이름이다. 추사 김정희는 청계산 옥녀봉 북쪽 자락에 초당을 짓고 살았다.
경기 성남시 수정구 국사봉(國思峰)이라는 명칭은 고려 말기에 청계산에 은거하던 조준((趙浚))이 조선의 개국공신이 된 동생 조견((趙狷))으로부터 새로운 나라의 조정에서 함께 일하자는 권유를 받았으나 이를 뿌리치고 날마다 이 봉우리에 올라가 고려의 멸망을 슬퍼하였다는 데서 유래한다.
하오고개는 경기 성남시 분당구와 경기 의왕시 청계동 사이의 고개로 57번도로가 지나간다. 도로를 가로지르는 육교가 설치되어 있다.
우담산(발화산, 425m)은 산이 가파르고 높아서 그 쪽으로 가는 나그네가 산을 바라보면서 간다하여 바라산리라는 지명이 붙여졌다가 다시 발화산리로 불리어졌다고 한다.
북골과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 및 성남시 운중동에 걸쳐있는 바라산(427.5)은 의일주민들이 정월대보름날 달을 바라보던 산으로 개경을 사모하던 고려 충신 조송산이 산에 올라 서울을 바라보던 곳이라 하여 바라산 또는 망산이라 한다.
백운산(567)은 산이 높고 산세가 험해 항상 흰눈에 둘러싸여 있고 산봉우리에 흰 구름이 항상 끼어있어 백운산이라 한다.
억새밭(528)은 갈대밭으로도 불리며 원래의 이름은 긴 산길이라 늦게가는 길이라는 의미로 늦은목, 느진미기 라고 하였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과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사이의 고개이다.
노루목(507)은 시루봉과 억새밭 중간지점으로 노루가 왕래하며 뛰놀던 곳이라는 설과 넓다는 뜻의 너르가 음의 변화로 노루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와 용인시 수지구에 걸쳐 있는 광교산(582m)의 본래 명칭은 광악산이었는데, 928년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평정한 뒤 이 산의 행궁에 머물면서 군사들을 위로하고 있을 때 산 정상에서 광채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는 부처가 가르침을 내리는 산이라 하여 광교라는 이름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 용인군 지도읍지에는 서봉산으로 기록되어 있고, 1872년 제작된 수원부지도에도 기록되어 있다. 시루봉(582m)은 산봉우리의 모양이 시루처럼 생겨서 붙여졌다고 한다.
토끼재는 토끼를 잡으러 다니던 골짜기 위에 있는 곳이라서 붙여졌다고 한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 광교저수지와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 상황골 사이의 고개이다.
종루봉(비로봉 毘盧峰 485)은 양지재와 토끼재사이의 봉우리로 비로봉이라고도 부른다. 신라 대학자 최치원(857~?)은 12살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많은 공부를 하고 29세에 돌아왔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정해진 벼슬인 말단 6구품밖에 할 수가 없었다. 관직을 버리고 전국 곳곳을 돌던중 광교산 문암골에 머물며 종루봉(이곳을 찾았을 때 종과 종루를 보고 종대봉이라 한 것에서 유래)부근 이곳에서 서해를 바라보며 종은 있지만 울릴 사람이 없으니 종과 자신의 신세가 같다며 한탄하며 다시 당나라로 돌아갈까 생각 했었다. 그래서 이곳을 망해정(望海亭)이라 하였다. 하지만 조국에서 저술과 후학에 힘쓰며 나라를 깨우는 것, 이것이 선비의 길이라 여겨 그 길을 택했다고 전해진다.
양지재는 형제봉과 종루봉의 중간에 위치하며 옛날 용인과 수원을 넘나들던 고개로 양지 바른 곳에 있는 언덕이란 뜻인지, 두 지역의 중간 지점이란 뜻인 지 분명치 않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 하광교 소류지와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 황골 사이의 고개이다.
형제봉은 봉우리가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져 두 개가 있어 형제봉이라 불린다.
건너말(하광교동)은 중간말의 소류지에서 발원한 내를 건너 상광교쪽으로 약 150m 정도 가면 길 오른쪽에 보이는 마을로 중간말의 냇물 건너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건너말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하광교동 소류지 중간쯤의 충고라니골이라는 골짜기에 있는 거적바위는 입을 벌린 형상으로 근처에 묘를 쓰면 벌린 잎으로 자손을 잡아먹는다고 해서 돌로 막아 거적처럼 덮어 버렸다고 해서 거적 바위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문암골(文巖-)은 문암 바위가 있으므로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문암재는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 문암골, 백년수약수터와 용인시 수지구 성복동 성불골 사이의 고개이다.
하광교동에 있는 바위인 문암은 문암골 못미처 개천을 건너면 보이는데 신라말 대학자인 고운 최치원이 행전 동문 밖에 있던 바위 세 군데를 즐겨 찾아서 그 바위 이름을 문암이라고 명명했다고 전한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