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산행은 2013년 9월에 근 30년만에 개방된 웅장한 바위 군락지가 있는 두모-부소암 코스로 진행하는 산행입니다.
남해 금산은 높이 705m의 산으로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유일한 산악공원으로 온통 기암괴석들로 뒤덮혀 절경을 이루고 있다.
신라 원효대사가 보광사라는 절을 지어 보광산이라 불려오던 것을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 산에서 100일 기도 끝에 조선왕조를 개국하게 되어 온 산을 비단으로 덮어 준다는 약속을 하였으나 조선의 개국 후 이를 실행하기 위해 중신들과 회의를 가진 결과 중신중 한사람이 "우리나라에는 그 산 전체를 덮을 만한 비단이 없으며, 비단으로 산을 감싸드라도 몇년이 지나지 않아 누더기가 되므로 산이름을 "금산(비단금)"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금산으로 불리 우기 시작했다.
섬 산행중 남해 금산은 조망도 좋고 산 자체가 가진 멋도 뛰어난 대표적인 산이다
제주도, 거제도, 완도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네번째로 큰 섬인 남해는 '가는곳 마다 관광지'라 할 만큼 한려수도 해상공원과 금산을 비롯,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 및 유적지 등 둘러볼 곳이 많다.
이곳 금산에는 비둘기를 닮은 봉우리, 개바위, 날일(日)과 달월(月)자를 닮았다는 일월암, 자라처럼 생긴 흔들바위, 닭바위 등 갖가지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가득하다.
대장봉, 사자암, 향로봉, 흔들바위, 쌍홍문, 음성굴 등이 울창한 숲과 함께 눈 앞에 보이는 남해바다와 조화를 이루어 금산 38경을 자아내고 있으며, 산 정상에는 우리나라 3대 기도처의 하나인 보리암이 소재하고 있다.
쌍홍문
금산 비경지의 관문격으로 굴의 윗부분이 쌍무지개가 뜬 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큰 구멍의 왼쪽으로는 통행로가 조성되어 사람들의 통행이 이루어진다.
보리암과 3층석탑
보리암은 동해의 낙산사 홍련암, 서해의 석모도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으로 꼽히고 있다.
보리암은 금산 38경의 명소에 둘러싸여 있어 더욱 돋보인다.
법당 뒤에 층암절벽을 이룬 거대한 암봉이 대장봉,
그 왼쪽 아래, 흡사 좌대에 올려둔 것 같은 구슬 모양의 둥근 바위는 농주암,
그 왼쪽에 농주암을 옹위하듯 솟은 암봉은 그 형상이 화려한 꽃과 같다는, 혹은 '화엄(華嚴)' 두글자 같다는 화엄봉이다.
사방 어디를 보아도 절경 아닌 데가 없는 바로 이곳, 3층석탑이 선 자리가 탑대라 하여 또한 38경중 하나다.
오른편으로 화엄봉과 일월봉, 왼편에 삼불암이 늘어서 있고, 건너편에 거대한 상사바위가 보인다.
뿐만 아니라 세존도 등 섬들이 점점이 떠있는 그림 같은 상주 앞바다를 굽어보고 있고 그 너머로 망망대해를 그윽이 바라보고 있다.
보리암은 불교 남방전래설의 예가 되고 있는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인 인도 아유타국 허황옥 공주의 삼촌이 되는 장유선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신라의 원효대사가 강산을 유람하며 다니다 금산이 발광하듯 온 산이 빛나는 것을 보고 보광사를 짓고 산을 보광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보리암 앞 탑대 위에 있는 3층석탑(경남 유형문화재 제74호)은 기이한 전설을 지니고 있다. 김수로왕비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婆娑石)으로 김해 구지봉 아래 호계사에 세운 탑을 원효대사가 이곳으로 옮겨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부처님 사리를 모시려고 원효대사가 이 탑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실제로는 고려 후기 양식의 탑이라 한다.
이 탑이 신비스러운 것은 나침판을 놓으면 나침판 바늘이 남북을 가리키지 못하고 방황한다는 것이다.
밤에는 종종 이 탑이 빛에 싸인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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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석(婆娑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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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후가 인도에서 건너올 때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서 싣고 왔다는 빛나는 돌
파사석 즉 파사돌은 고대 타밀어로도 Paasadol 이라고 불렸다.
인도 타밀 사회에선 자녀들이 멀리 부모 곁을 떠날 때 평안과 신의 가호를 빌고 악을 물리치기 위해 몸에 지니는 부적과 같은 돌을 주었다.
현재는 '돌'대신에 '금(Gold)'으로 만든 목걸이 등을 준다고 한다. |
버선바위(또는 문장암, 명필암)
정상 직전의 길 왼쪽에 38경의 하나인 기암이 섰는데, 버선 형상이라 하여 버선바위, 명필의 글씨가 씌여 있다고 하여 문장암, 혹은 명필암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중종 때의 대학자 주세붕이 이 정상에 올라보고 바위벽에 '유홍문 상금산(由虹門 上錦山)' 이란 글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해석은 두 가지다.
'홍문을 경유하여 금산에 올랐다' 고도 하고, '홍문이 있으므로 금산은 최고의 명산이 되었다' 고 풀기도 한다.
금산정상
옛 봉수대가 가지런하게 복원돼 있는 금산 정상에 서면 온갖 기암 무리와 미조리 앞의 섬무리가 두루 한눈에 든다.
여기 망대도 금산 38경에 드는데 이곳에서의 조망이 특히 뛰어나서이다.
저두암
헬기장 남쪽으로 '아래 사람이 있으니 돌 던지지 마시오' 란 팻말이 선 것이 보이는데, 이 팻말이 선 암부는 여기 아래에 있는 좌선대나 상사암에서 보면 어미돼지가 새끼돼지를 안은 것 같은 형상의 저두암이다.
저두암 바로 아래의 산중 민가는 금선산장으로, 남해 금산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이 종종 묵어가고, 밥도 파는 곳이다.
이 집 동쪽 옆의 높직하게 솟은 바위가 제석봉이고, 그 아래 고개를 치켜든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천구암으로, 밀면 흔들린다고 하여 흔들바위라고도 부른다.
거북이 턱을 45도 방향으로 짧은 템포로 강하게 반복해서 밀어야 흔들린다.
좌선대
원효대사를 비롯한 고승대덕이 앉아 참선했다는 곳으로, 꼭대기엔 가부좌를 틀고 앉은 사람 엉덩이에 맞추어 파놓은 것처럼 하트 모양으로 바위가 패여 있다.
커다란 암봉으로서 역시 금산 38경 중 하나인 사자암 벽을 향해 면벽하는 자리다.
등 뒤쪽이 낭떠러지라서 팽개치고 앉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등 뒤 아래쪽의, 정수리가 네모 난 기둥 형상의 바위 중 왼쪽 아래 것은 촛대바위, 오른쪽의 키가 좀 더 큰 것은 향로바위다.
역시 금산 38경 중 하나지만, 이 두 바위는 이곳보다는 상사암이나 보리암 앞뜰에서 바라보아야 더 멋지다.
상사암
안내 팻말 뒤의 넓적한 암부가 상사암으로, '한 머슴이 과수댁인 주인을 사랑하여 상사병에 걸려 죽어가게 되자 보다 못한 과수댁이 사람 없는 금산의 이 바위 벼랑 아래에 서 원을 풀어주었다' 는 전설이 얽혀 있다.
남쪽은 까마득한 절벽으로 자리를 뜨기 어렵다.
이 상사암에서 보는 금산 일대 풍경은 한 번 보고 나면 바위의 이름처럼 흡사 상사병에 걸린 듯 다시 찾고 싶어진다.
동쪽으로는 금산 정상 부터 흘러내린 암봉의 대장봉이며, 그 아래 절묘하게 움틀고 앉은 암자 보리암, 그리고 쌍홍문 오른쪽 옆의 거대한 절벽 만장대, 그 앞쪽으로 삼신산의 네 선녀 전설이 얽힌, 네 개의 기암이 차례로 늘어선 사선대, 네모난 긴 석주 향로봉 등의 기암들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그 오른쪽 아래는 크고 작은 한 무리의 섬들이 그야말로 그림 같은 바다 풍경을 펼쳐보인다. 멋대로 흩어진 것이 아니라 그 근처로 일부러 모아둔 것 같은 느낌의 호도, 목과도, 고도 등 섬 무리를 어떤 풍수가는 부처님 앞에 차려둔 성찬에 비유하기도 한다.
상사암 서쪽 너머 저 아래 서포 김만중이 유배 중에 사씨남정기 등을 쓴 자리인 노도 근해를 배경으로 온갖 기이한 형상의 바위가 연이어진 만물상 암릉이 또한 절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