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 등정(봄이 오면)
정현수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곱게 피어난 이팔청춘 가슴이나 저무는 가슴에도 차별 없이 삶의 기쁨을 누리는 화사한 봄은 변함없이 찾아온다. 그 환희의 찬가가 조금은 희망찬 기대를 같게 해 주는 것은 온갖 것들이 다시 소생하는 활기찬 봄이기 때문이다. 당당히 앞서는 민들레를 위시해 봄의 전령 매화, 화려 찬란 복사꽃, 노랑이 짙은 산수유, 개나리, 봄의 대명사 벚꽃, 꽃망울이 탐스럽고 수려한 목련 등, 우리가 가까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아래 뜰 아무 데서나 피는 꽃 들이다. 아무렇지 않은 듯 봄의 상징인 꽃들과 함께 때 되면 오는 새봄이 지금 내 앞에 있다.
아직은 아침저녁으로 쌀쌀하고 때론 낮에도 차가움을 느끼게 한다.
산에는 서풍이 익은 하늬바람이 등산 재킷의 깃을 여미게 하고 나무 빈 가지는 바람에 보드랍게 흔들려 겨울과 봄의 갈래에 와있는 듯하다. 새싹 눈은 아직 움틈이 쪼끔 멀고 엊저녁 비 온 탓도 있지만 겨우내 얼었던 산등성 길가 바닥은 봄기운 날씨에 풀려 짓궂게 질퍽거려 걸음이 무거워 한참 더디다.
거의 이 년여, 일 때문에 운동을 게을리했던 게 들통이 나 버렸다. 보름 전 북한산에 올랐다가 내려올 때 땅기는 허벅지 근육에 쩔쩔매다 ㅡ힘찬 체력을 항상 자랑했던 나ㅡ 같이 산에 올라온 '안드레아 신부님'께 노골적으로 들통이 나 버렸다. '어디다 쓸까나 이 저질 체력' 화들짝 놀라 일주에 두 번은 산에 다닌다는 결심에 지금은 열심히 산에 오르고 있다. 봄이 오면 분명할 일이 많고 숙제 많은 내 인생, 가벼이 지나칠 수 없다는 내 의지를 달치듯 닦아세운다. 나는 아직도 몸과 마음이 싱싱하다. 시들지 않고 악착스러워 다행이다.
한 번도 쉬지 않고 오르던 청계산 등반이 이젠 조금은 힘겹다. 천육백 개 정도가 되는 계단 오름이 가쁜 숨을 몰아쉬게 하고 기운이 소모되는 땀을 샘솟게 한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연신 흐르는 땀에 시야가 가려져 눈이 따갑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올라가야만 한다. 할 일을 끝맺으려면 지금 쌓아놓아야 한다. 어렵고 힘들다고 쉬거나 포기하면 그만큼 늦어지고 완성은 멀어진다. 계단 턱 여기저기가 움푹 패어 손상이 많이 가, 내려올 때 발을 헛디뎌 미끄러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위험할 수도 있다.
낙엽이 쌓였던 가장자리 맨땅에서는 보일 듯 말 듯 더운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 오르고, 이름 모를 벌레들이 그들 생의 목적을 위해 인간의 무지막지한 워커 발도 개의치 않고 느릿느릿 한가롭게 계단 길을 동행한다. 설한(雪寒)을 지내고 삼라만상(森羅萬象) 하찮은 미물도 그들 삶의 가치를 존재하고 확인하려 하는데 이까짓 땀이 무슨 대수랴!
꾸준한 오름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저 멀리 목적지가 보이고 겨울 끝자락과 봄의 시작인 따스한 햇볕은 사지를 이완시키고 조금은 나른하게 하지만 그래도 쉬지 않고 열심히 올라간다. 구속을 벗어나 혼탁했던 내 정신이 맑아져 저쪽, 이상의 세계인 피안의 언덕을 향하여 가듯 쉼 없이 꾸준히 걸어가야 만 한다.
등산객들이 흘린 듯한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산불조심'이라는 노란 리본이 낙엽과 같이 널브러져 있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고 문제를 야기하는 듯, 나로서는 조금은 철학적 의문에 빠지게 한다. 단순하게 봄철이니까 당연한 산불 조심보다도, 삶에서 중요한 것들을 흘려 그것을 다시 메꾸고 복구시키려는 자기 의문과 허점에 회한을 같게 하고 사뭇 미궁 속으로 빠지게 한다.
나는 내 삶을 풍요롭게 할 수만 있다면 누구든 친구로 만나 생각을 나누며 한 잔 술과 함께 밤새도록 대화할 수 있다. 그것은 내 삶이 다양하게 정진하며 윤택해지기 때문이다. 나만이 만들어 가야만 하는 삶의 모든 문제에서 아쉬워하며 놓지 않으려는 마지막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 절규는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존재를 의미하는 자존감이다. 저물어 가는 삶에서 내 가치를 완성해야만 하는 숙제, 언제일지 모르는 후회 없는 죽음 때문이다.
누군가와 이해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내 주위 대부분 모든 이들은 나를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우매하고 후회하는 삶으로 여기까지 와버린 내가 또 다른 삶에서 오는 서로의 깊은 이해력과 공감을 갖고자 했던 것이 잘못이었나? 살아감에 참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바람에 잔가지는 흔들리고 회색빛 나무 군 사이에서 서글픈 한기를 느끼며 몸을 움츠리는 내가 바보였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지 않나 돼 돌아본다.
정상이다. 이 년 전만 해도 최고 기록 58 분에 주파했지만 오늘은 한 시간 하고도 20여 분이나 지난 시간이다. 그래도 날짱이는 걸음이지만 쉼 없이 왔다는 게 중요하다. 그동안 내 활동은 움직임에서 소극적이었다. 별 움직임이 없는 생활에서 겨우 근력 운동만으로 지탱해 온 것 같다. 지구력의 원동력인 유산소 운동이 한참 부족했던 것이다. 기껏 출근하고 퇴근하고 이 년여를 도토리 쳇바퀴 돌 듯 살아온 것이다. 이제는 계획했던 또 다른 삶을 향해 미지의 세상에 도전해야 한다. 내 속까지 따뜻하게 채워 주는 한가롭고도 아름다운 세상으로 빠져들고 싶다.
잿빛과 파랑이 오락가락하는 정상 하늘에 걸친 우듬지에 박새 한 마리는 오는 봄을 벌써 알고 주둥이에 작은 벌레를 물고 있다. 봄에 산란을 위해 열심히 배를 채워 놓아야만 한다. 자연은 그 속에서 얼마나 많은 속삭임을 주고받으며 신비한 진화를 해 왔는가. 낳아서 번식하는 것은 사람을 비롯해 지구상 모든 피조물의 당면 과제다. 각인된 DNA로 시키지도 안 했는데 나름들 열심이다. 그걸 거스르면 순리에 벗어나 종내에는 멸망뿐이고 아득한 나락이다.
해묵은 낙엽을 밟으면서 내려오는 길은 봄이 오는 길목이다. 희한에 빠져 마냥 낭만에 젖고 싶다. 차분하고 고즈넉한 산 오솔길은 기쁨과 슬픔이 함께 하는 분위기에 이끌려 수월하게 나에게로 스민다. 찬찬히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것은 누구한테나 보이는 것이 아니고 그걸 참되게 즐길 줄 아는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이 빛나 보이는 그대로의 향기가 저절로 풍기듯 스스로 표현되고 거리낌 없이 의도되는 것이 아닌가? 그 아름다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자. 지금까지 어지간히 시달렸다. "도연명"의 시인가? 저절로 읊어진다.
젊어서부터 속세에 맞는 바 없고 성품은 원래 산(자연)을 사랑하였다
잘못 도시 속에 빠져 30년이 가버렸다
이제는 더는 미룰 수 없고 되도록 빨리 촌으로 돌아가 내가 해야 할 숙제를 마저 끝내야만 한다. 먹는 두려움이든, 모진 삶이든, 그 어떤 것도 나 자신의 감정에만 중점을 두는 것에서 자유스러워야 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다시 도전하자. 이 봄이 오면 부지런히 발품을 팔자. 여행 겸 발길 닿는 어떤 곳이든 찾아 떠나자. 내 완성을 위해 불편한 오두막이 조금은 마땅치 않겠지만 이젠 참으로 속세를 떠나 숙제를 끝낼 그곳에 정착하자.
들꽃 피는 봄이 오면 작은 동네 끄트머리에 내가 정착할 집을 꼭 찾았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산을 내려가는 발길이 한층 가벼워진다.
2014. 3.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