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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함석헌학회 회장, 전국사편찬위원장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학교수
박재순: 씨알사상연구소 소장
박재순 2019년이면 삼일운동 100주년입니다. 또한 한국 근현대사에서 삼일운동이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삼일운동과 민주정신’이란 주제로 좌담을 진행할까 합니다. 여기 계신 이만열 교수님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지내시고 지금 함석헌학회 회장으로 계신 원로 사학자이십니다. 김동춘 교수님은 예전에 학교 다닐 때 함 선생님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귀한 책들을 많이 내서 젊은이들에게 존경을 받고 지금은 성공회대 사회학 교수로 계십니다.
첫번째 주제는 “삼일운동의 국내외적 배경과 실상”입니다.
우선 삼일운동의 배경이 되는 한국 현대사의 맥락과 세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세계평화주의에 대해서 살펴보고 이후에 삼일운동의 실제 과정과 전개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선 한국사 전문가이고 원로 교수이신 이만열 교수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삼일운동의 국내외적 배경과 실상
이만열 : 종래에는 삼일 운동의 배경과 관련해서 외적인, 국제적인 영향을 강조했습니다.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에 끝나고 ‘베르사이유 강화회의’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종전(終戰)과 관련하여 15개 조항을 이야기했습니다. 이 중 한 항목이 민족자결주의 분위기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세계사에 새 기운을 불러일으켰다고 할 수 있지요. 삼일운동 독립선언문에도 신천지가 도래한다는 그런 내용이 보이는데, 이건 그런 세계사적인 조류와 관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이후에 생존권을 박탈하고 신앙과 사상,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했다는 것이 더 중요한 배경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보고 있습니다. 제가 몇 가지 자료[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7 등]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우선 일제가 1914년에 지방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는데 그것은 일제의 통치 체제에 맞도록 한 겁니다. 그 전까지는 행정이 자치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면 단위 중심으로, 면에는 일제에 지지하는 자들을 수장에 앉힘으로 지방을 장악했습니다. 그 시기에 조선인들을 감옥에 보내서 감옥에서 즉결 처분한 수치가 1911년에 18,100건이었습니다. 그런데 1918년에 가면 82,100건이 됩니다. 일제가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을 정당한 재판 없이 즉결 처분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문제를 보니까, 미곡(米穀)의 일본 이출(利出)이 1910년 66%에서 1919년 98.6%로 증가하고 직물의 이입(移入)도 1910년 54%에서 1919년 85.1%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쌀과 직물의 이출입이 일본 단일창구로 집중되어 일본 시장 동향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쌀값도 보니까 1914년-1916년 사이에는 1섬당 12원에서 16원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1917년 5월 18원 33전, 10월에 23원 50전에서 1919년에 가면 1월에 40원대, 2월에는 43원 57전을 돌파합니다. 그때 일본 정부는 자국 내의 쌀값 안정을 위해 비밀리에 조선쌀 20만석을 매점했습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조선인의 삶이 핍절해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에 따라 조선인의 저항도 심해지겠지요. 이때 이미 동맹 파업이 나타나는데 1916년에 6건에 362명이 참여했는데, 1918년에 50건 4,452명으로 급증하게 되어 10배 정도로 증가되었습니다. 그만큼 수탈과 압박에 대항하는 조선인 저항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경제적 사항, 포학한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독립운동이 구체적으로 움직이는 것과 관련, 그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나 독립 운동가들이 해외로 망명하지요. 망명한 지역으로는 연해주, 북간도에 많이 갔고 그 다음에는 북경과 상해로 갔습니다. 상해로 간 사람들이 삼일운동을 일으킨 것과 상당히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1918년 8월 20일경 상해에서 여운형, 장덕수, 한진교, 김철, 선우혁, 조용은-삼균주의를 주장한 조소앙이 조용은입니다.- 이런 분들이 신한청년단을 결성합니다. 그때(11월) 마침 미국 대통령 특사로서 찰스 크레인이 중국에 오게 되는데 여운형이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조선독립을 좀 도와 달라, 그리고 파리에서 강화회의를 하는데 우리가 특사를 파견할 테니 그것을 도와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 독립에 관한 진정서> 2통을 작성하여 미국 대통령 윌슨과 파리 평화회의 의장에게 전달해 주도록 부탁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1919년 2월 1일에 김규식을 신한청녕당 대표 겸 한국대표로 파리로 파송합니다.
세계 대세와 상해에서 행한 일들을 국내에 알리기 위해 사람들을 파견합니다. 선우혁을 파견, 평안도의 이승훈과 양전백, 길선주 목사에게 알려요. 또한 김철이라는 사람을 서울에 보내서 천도교 측에 국외의 이런 활동을 알리고 이때 천도교 측으로부터 30,000원의 지원을 약속받았다고 합니다. 서병호와 김순애도 대구지방에 파견되었다가 상해로 돌아갔습니다. 서병호는 장로교 초대 7목사 중의 한 분인 서경조의 아들이고 서경석 목사의 할아버지입니다. 김순애는 김규식의 부인으로 해방 후 정신학교 이사장을 지냈습니다. 또 상해의 신한청년당은 일본에도 사람을 보내 유학생들과 접촉하게 했습니다. 1차로 조용은을, 2차로 장덕수와 이광수를 보냈습니다. 이게 또 2.8독립운동과 관련 있어요, 장덕수는 동경을 거쳐 서울로 갔다가 잡힙니다. 이광수는 서울을 거쳐서 일본으로 건너가 2.8독립선언을 기초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신한청년당의 역할이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죠.
당수였던 여운형은 간도 지방과 노령 연해주로 가서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간도에서 여준을 만나고 연해주에서 박은식 문창법 이동휘를 만났고, 북간도에서는 간민회의 김약연, 정재면 등을 만납니다. 이런 분위기를 주도적으로 전개한 게 신한청년당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1919년 2월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39명의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이 발표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박재순- 안창호 선생의 전기에 신한청년당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신기한 단체였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한 단체인데 임시정부를 세울 무렵 전혀 개입을 하지 않고 그냥 사라져 버린 단체로 나오더라고요.
이만열- 하여튼 이 때에는 단단히 결속된 것은 아니지만 여운형이 중심으로 되어 분위기를 일으키고 있었어요. 이게 어느 정도 힘이 집약되니까 삼일운동도 나오지 않았겠어요? 전적으로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단체가 뭔가 계기를 만들어 주고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그리고 1918년 11월 1일 미국의 안창호가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 이런 사람들을 워싱톤에 보내서 비자를 받아서 가도록 합니다. 그런데 미국 정부가 일본 정부의 항의로 여권 발급을 못하죠. 이 사람들은 못 가게 됩니다.
그 밖에, 앞서 언급한 대로, 만주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가들 39명이 대조선독립단이라고 하는 단체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혹은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합니다. 조소앙이 기초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선언서의 내용을 보면 해외 독립운동은 국내 동포의 위임을 받아서 하고 있다, 그냥 자의적인 활동이 아니다, 국내 수많은 국내 동포들이 자기들이 해외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에게 위임을 주어서 하고 있다고 함으로 독립운동에 자부심을 갖도록 합니다.
그때 국내의 분위기를 보면 고종이 돌아가게 되었죠, 1919년 1월 22일 붕어(崩御)했는데, 이 당시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추측과 의문이 떠돌았죠. 그 가운데 많이 유포된 게 독살설인데 이것은 민족의 울분을 토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이건 당시의 천도교 간부로 보성사라는 출판사를 운영했던 묵암 이종일이 비망록을 남겼습니다. 발굴된 지가 오래 되지 않았는데 거기에 기록을 많이 해놨어요. 거기에 보면 “고종이 독살당했다”로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나라가 망했는데 고종까지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나돌게 되니 이게 삼일운동을 촉발시킨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죠. 또, 지방에서는 유생들을 중심으로 망곡(望哭)식을 행하기도 하고, 인산(因山)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기차를 이용하는 경우, 남대문(서울)역에서 그전에는 매일 평균 1500-1600명의 승객이 내렸는데, 2월 26일에는 3,000여명, 27일에는 6,000여명이 이용했다고 해요. 전국에서부터 올라와서 국장에 참석하겠다는 거지요. 바로 이 때 3.1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천도교와 기독교 측에서 선언문들을 많이 준비하여 국장을 마치고 돌아가는 이들이 이 ‘불온문서’(독립선언서)를 두루막 속에 넣어 가지고 쉽게 지방으로 이송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박재순 -신한청년단에는 여운형을 비롯해서 많은 중요한 인물들이 있었는데 순수했던 거 같아요. 중요한 일도 많이 했는데, 그냥 역사에서 사라진 단체가 되더라고요. 당파심 같은 게 없었던 순수한 청년들이 아닌가 합니다.
이만열- 이 사람들이 다들 각기 개별적으로는 다른 단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박재순 -김동춘 교수님, 이와 관련해서 말씀하시죠.
김동춘- 나는 국민들이 아는 상식적인 이야기만 알아서.(웃음) 단지 이만열 선생님이 다 정리한 이야기지만 초기에 주도했던 인물은 33인이나 지도급에 있는 분들은 기독교나 천도교이지만, 확산되는 과정에서는 일반 농민들이 참여했죠, 처음에는 평화적으로 시작했지만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폭력화되고... 제가 통계를 보니까 7500명의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폭력화된 이유는 일본의 지배 자체가 억압적이고 폭력적이어서 일반 민중들의 자연발생적인 분노가 충돌한 것은 아닌가 합니다. 어쨌든 이걸 처음에 주도했던 인물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체적으로 폭력적인 확산 과정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분명히 윌슨이나 만국 평화회의 베르사이유 회의에 영향을 받은 것을 사실이지만 평화회의 자체, 그리고 윌슨의 14개 조항 자체가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일차 세계대전의 식민지, 패배한 제국의 식민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식민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고. 한국인들의 요구에 대해서는 일본의 압력도 있지만 미국 입장에서도 식민지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양보할 의지가 없었는데 그것을 한국의 독립운동가 지도자들은 그것을 과대평가했거나 혹은 과도한 기대를 가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또 뒤에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겠지만 결국은 미일(美日)의 이해관계가, 사회주의 혁명이 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났으니까 러시아 혁명에 대한 위기의식과 공포감이 사실상 미국이 일본을 지지하게 만들었던 국제적인 정세가 있었죠. 이것을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이 부분적으로 러시아 혁명에 영향을 받은 측면도 있었고 사상적으로 사회주의는 아니었지만, 강대국 정치의 틈바구니에서 당시의 독립을 했던 분들이 기대했던 만큼 국제적인 호응이라든지 입지를 불러오지는 못했던 것은 아닌지. 나중에 1945년 이후하고 연결이 되는 것인데 백 년 동안의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해양의 세력들하고 이쪽 소비에트 쪽 세력하고의 이 충돌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입지라는 게 굉장히 선택지가 좁았고, 그 과정에서 독립 운동가들이 이념적으로 어느 편에 설 것이냐, 거기서 분열된 모습도 보였지요. 삼일운동 이후에도 삼일운동 참여했던 분들이 온건한 노선으로 돌아서거나 완전히 투항하거나 한 것은 결국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노선을 따라야 한다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죠. 오늘날, 지금까지 연결된 그런 모습이 출발점이 삼일운동에서 시작된 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당시 강대국이 말한 평화라는 것은 사실 기만적인 건데 미국의 이야기와 윌슨의 이야기는 기만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만성을 이종일이라는 분은 깨달았던 것 같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상당히 기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박재순- 유영모 함석헌 선생이 씨사상을 만드셨지만 씨사상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 만든 오산학교에서 시작된 것이거든요. 두 분이 거기에서 만났고 씨알사상이 싹이 텄지요. 오산학교는 안창호 선생이 일으킨 신민회와 교육입국운동의 하나로 세워진 학교입니다. 나라가 망하게 됐으니까 나라의 주인과 주체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깨워 일으켜 주인과 주체로 구실을 해야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더라구요. 이건 굉장히 민주적인 접근입니다. 이것은 계몽운동이지만 서양의 계몽운동과 다르지요. 서양의 계몽주의는 지식인 엘리트가 몽매한 이들을 깨운다는 것인데 안창호, 이승훈은 민족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을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깨워 일으키려고 했던 겁니다.
그 이전에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나라가 망하게 생겼으니까 나라를 지키는 방법은 유일한 길은 민이 깨어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국민계몽교육운동을 전국적으로 펴는데 그 과정에서 이승만, 안창호가 나옵니다. 안창호 선생은 민족 구성원, 한 사람 한사람을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깨워 일으킨다는 그 원칙에 충실해서 깨우는 자세도 소년들에게도 큰절을 하면서 깨우는 거였거든요. 오산학교에서는 이승훈과 교사들이 어린 소년들한테 다 존댓말을 썼다는 거예요. 설립자인 이승훈 선생이 힘들고 어려운 일은 다 하고, 학생들을 나라의 주인과 기둥으로 받들어 모셨다는 것이죠. 이런 국민계몽교육운동은 삼일운동하고 정신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직접 연결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함석헌 선생이 누누이 하는 말하는 것은 삼일운동은 이전의 운동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죠. 이전에는 지배 엘리트가 앞장서고 중심에 서서 민중에게 따르길 강요했다면 삼일운동은 지식인 엘리트들이 민중에게 주체로 일어설 것을 호소한 첫 번째 운동이라는 거죠. 민중이 주체로 일어나서 움직이면 나라가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지식인들은 뒤로 물러나고 민중을 앞세우는 자세를 취했다는 겁니다.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앉아서 그냥 선언서 읽고 일본경찰에게 잡아가라고 한 것을 일반적으로는 투항적인 모습으로 보지만 이기백 선생의 한국사학사론은 그 대목을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삼일운동의 조직적 준비는 이미 다 되었고 문건도 보냈고 전국에서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일본을 자극하지 않고, 민이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그렇게 한 거라는 시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기백 선생의 부친 이찬갑은 홍성의 풀무학교를 세운 사람인데 이분이 남강 이승훈 선생 형님의 손자입니다. 그 내막을 알기 때문에 이기백이 그렇게 쓴 것이 아닌가 합니다.
또 멀리 보면 실학에서부터 갑신정변, 동학운동,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신민회, 교육운동, 삼일운동이 연속적으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실학에서부터 수백년 동안 민족 자주화와 민족 구성원의 각성을 지향하는 한국근현대사가 열매를 맺은 것이 삼일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삼일운동이 일어나기 20년 전쯤에 일어난 운동이니까 독립협회 만민운동회로부터 신민회와 교육운동을 거쳐서 삼일운동으로부터 이어지는 맥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만열- 독립운동도 보면 1910년 나라가 완전히 망하고 난 후 간헐적으로 삼일운동 이전까지 있어 왔습니다. 그때 복벽운동(復辟運動, 왕조회복운동), 이 운동은 독립운동자체가 옛 왕조의 주권을 회복하는 데에 둔 일종의 왕조회복운동이요. 양반질서를 회복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열심히 뛰었지만 호응도는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918년이 되면 대한독립선언서(혹은 무오독립선언서)라는 데서 보면 조금 바뀝니다. 결정적으로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 하는 질문에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세우겠다는 것이지요. 이런 생각들이 삼일운동의 주역들, 이승훈 같은 사람들한테서도 나타납니다. 그것은 재판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당시에 판사가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라고 물으니까 우리는 이제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세우겠다, 그것은 삼일운동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삼일운동을 지금까지는 독립운동으로의 가치를 더 인정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한국 민주화운동의 굉장한 기폭제가 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어요, 그 이념이 상해 임시정부 헌법 제1조로 나타납니다. 그 당시에는 약법이라고 해서 12개 조항이라고 했지만,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했지요. 이게 오늘날 제헌헌법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임정 하에서 4번 개헌을 하는데 개정할 때마다 대통령제에서 국무위원제로 그 다음에 주석제로 바뀌는 등 정치 체제는 바꾸어지지만 제1조는 안 바뀝니다. 이것이 그대로 48년 제헌헌법에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삼일운동이 그 뒤 한국독립운동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게 박재순 박사는 신민회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까지로 올렸는데 더 올라가면 실학사상에서 정약용의 「원목(原牧)」, 「탕론(蕩論)」이라는 글에 나타난 사상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런 글에서는 지배자 선출을 일종의 상향식으로 했다는 것으로 동네의 몇 사람이 장을 뽑고, 뽑힌 사람들이 차례로 올라가면서 왕을 세우는 그런 형태였다는 것이죠. 이것을 현대적인 민주주의라고는 볼 수 없지만, 이런 원리를 역사에서 잡아내는 것은 시민의 혜안이겠지요. 정 다산이 주장한 그런 사상이 발전했으면 우리가 빨리 뭐라도 이루었을 텐데, 세도정치와 당쟁 하에서 그런 사상이 묻혀버리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일이지요. 당시의 거대한 세도정치는 그런 바람직한 사상에 싹을 틔우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상과 창의성의 존중은 어느 시대에나 중요한 것이지요.
박재순 : 아쉬운 것은 지성사적으로 역사와 사회를 형성하기 위한 지식인의 학문 활동이 정약용의 실학활동으로 끝나고 민중의 역사변혁운동과 지식인들의 학문 활동이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실학까지는 민생, 민본을 걱정하는 사람들이었거든요. 그 이후 동학운동과 독립운동은 적어도 대학에서 연구하는 지식인들의 학문 운동과 단절되었습니다. 전문적인 학자들이 외국에 가서 공부하거나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학문 활동을 하니까, 오랜 세월 지식인들의 학문 활동은 민주화 운동, 민중운동과 단절됨으로써 역사를 형성하는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때까지도 내용적으로 민주사상을 표방했지만 왕조제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안창호의 신민회에서 처음으로 민주공화제의 이념을 제시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만열 : 미주에서 간행한 『신한민보』에서 국민혁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요. 과문인지는 몰라도 국내에서는 공화제를 주장했다는 자료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박재순 : 안창호를 중심으로 1907년에 신민회를 만들었는데 신민회의 기본 강령에서 교육입국운동과 자주적인 산업 경제, 민주공화정의 이념을 분명히 제시했다고 합니다. 한국사에서 신민회가 민주공화정의 이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민주공화정의 이념과 정신이 삼일운동과 이어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삼일운동의 구체적 전개 양상
박재순 : 시간이 많이 지나갔으니까 삼일운동의 구체적인 전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죠.
이만열 : 우선 앞서 신한청년당에서 선우혁이라는 사람이 선천으로 와서 유여대, 길선주 목사와 이승훈을 만나고 돌아갔습니다. 그 뒤 이승훈이 중심이 되어 거사를 진행시키고 있어요. 김철이 천도교 측과 만나고 돌아간 후 천도교 측에서는 1919년 1월 20일경 권동진, 최린, 오세창이 교주 손병희를 찾아가 독립선언에 대한 건의를 하지요. 손병희는 동의하면서 세 가지 조건을 분명하게 제시하지요. 대중화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몇 사람 가지고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다음에는 일원화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기독교와 계속 접촉한 것도 이 때문이지요. 그 다음에는 비폭력화로서 이 세 가지 독립운동 방향을 이야기를 분명히 하죠. 대중화를 하자니까-종교인들이 당시 인망이 높지 못하니까 대중을 끌어들이려면- 인망 높은 사람을 내세워야겠다, 그래서 한말의 그래도 좀 괜찮은 사람들로 윤용구라든지, 한규설, 철종의 부마로 있던 박영효, 윤치호, 또 나중에 이상재, 김윤식에게까지도 이야기가 되었다고 하지요.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유보 혹은 사양하니까 젊은 사람들이 우리가 나서보자고 합니다. 이때 최남선, 최린 등이 서북지역의 기독교 세력과 접촉하게 됩니다. 당시 오산학교 출신의 김도태-이 분이 『남강 이승훈』이라는 전기도 썼어요-이라는 사람을 통해 이 양반을 통해 이승훈에게 사람을 보내서 급히 만나자고 제의, 2월 10일 경부터 남강이 올라와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의 여러 사람을 접촉하면서 독립운동을 일원화하기로 합니다. 그는 기독교 나름대로 해 보려고도 했어요. 그러나 천도교 측과 합작하기로 하고 선천 지역의 유여대라든지 하는 분들의 동의를 얻고, 평양에 와서 길선주, 신홍식 등의 동의를 얻고 서울에 와서 오하영을 비롯, 남북감리교의 지도자들을 만납니다. 이 때는 감리교가 한 교단으로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장로교는 1907년 이후 한 교단으로 되었지만 감리교는 1930년에 하나로 되었거든요. 이승훈은 남감리교, 북감리교 사람들을 만나 동의를 얻죠. 그리고 최린하고 함태영하고 이승훈이 삼자회담을 합니다. 삼자회담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그러면 날짜를 언제로 할까, 장소를 어떻게 할까, 그 다음에 선언서를 어떻게 만든다, 선언서 배분을 어떻게 한다, 지방 발송은 기독교와 천도교가 각각 맡아서 한다든지, 해외 발송, 일본 쪽은 천도교가 맡아라, 미국하고 세계 만국평화회의 쪽은 기독교가 맡는다 등 업무 분담도 구체적으로 합니다. 이때 불교 측에서도 한용운과 백용성-이 두 분은 그래도 친일하지 않았습니다-이 참여하도록 합니다.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에서 한 십여 명씩 대표가 될 만한 사람 명단-당시 이름을 올리면 감옥에 가야 한다는 것을 각오해야 했다-을 구체적으로 만듭니다. 약속된 거사일에 태화관에서 모이기로 했는데 그 날 33인이 다 모이지는 못하고 29명이 모입니다. 기독교 측에서 양전백, 길선주, 정춘수, 김병조 네 사람이 참석하지 못했지만 세 사람은 늦게 도착하고 김병조 목사는 아예 상해로 망명해 버렸습니다. 이날 손병희는 12시까지 태화관에 갔고 다른 사람들도 모였습니다. 오후 2시가 되자 손병희가 이종일-33인 가운데 한 분으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분-을 향해 읽으라고 합니다. 낭독 후 최린을 향해 경무총감에게 연락하라면서 “우리가 여기서 독립을 선언했다”는 것을 알리지요. 그러자 얼마 안 돼 경찰들이 들이닥쳐 잡혀가지요. 그때 파고다공원에서 민족대표들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원래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을 선언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두시 반이 돼 가지고 대표들이 잡혀간 것을 알고, 경신학교 학생인 정지용이 선언서를 읽고 거리 시위에 나섰습니다. 3월 1일 첫날에 전국적으로 일곱 군데에서 일어났어요. 서울 평양 의주 선천 안주 원산 진남포.
박재순 : 대부분 북쪽이네요.
이만열 : 네,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었는데 목회자와 기독교 학교가 중심이 되었지요. 2일째 되면 조금 남쪽으로 내려오고 3일째가 되면 독립운동이 경기도 지역까지 내려옵니다. 통계를 보면, 일제가 오십명 이상이 회집한 운동만 정리했다고 해요. 일제 입장에서 보면 되도록 계산에 안 넣는 게 좋았겠지요. 3-6월까지의 통계로 2,000여회의 집회에 2백2만여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1년간 1천만명이 모였다고 하지요. 4월말까지 매일 10회 이상이 일어났고 4월 21일에는 전국적으로 67회가 일어납니다. 서울의 경우에는 수십만명이 참여했고, 의주에 30,000명, 강화읍에서 20,000명... 대단한 거죠. 강화는 옛날 이동휘가 진위대장으로 있으면서 보창학교도 세우고, 교회를 많이 세웠습니다. 종교 학교 운동을 굉장히 일으켰습니다. 합천 삼가에서 10,000명, 선천 8,000명, 삭주에도 8,000명, 그리고 내 고향인 함안 군북이라고 하는 곳에서도 3월 21일인 경에 3,000명이나 운동에 나와 주재소를 둘러싸게 되었습니다. 면단위치고는 가장 희생자가 많았는데, 21명이 즉사했고 18사람이 크게 다쳤지요. 하여튼 218개군(일제가 1914년에 지방 제도를 고치면서 전체 317개의 군현을 통폐합하여 218개군으로 만들었다) 중에서 213개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어요. 다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거족적이라고 할 수 있죠.
박재순 : 202만 명에 2000여 회라고 하는 것은 일본의 자료죠? 당시 인구가 2000만명이 안되지 않았습니까?
이만열 : 독립선언서에서는 ‘2천만 민중’이라고 했습니다만 1,600만이 채 안 되었을 겁니다. 박은식이 1년간 일천만명이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도 과장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상해에서 쓴 겁니다. 일제가 50명 이상만 통계를 잡았다고 하니까 박은식의 통계는 일제 측 통계를 비판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박재순 : 그런데 당시 일본과 우리나라의 무력의 차이는 압도적이었습니다만 혹시 교육의 힘으로 그 격차를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요? 예컨대 동학 혁명의 경우, 아쉬운 것이 체계적이고 근대적인 교육과 훈련이 있었다면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좀 더 나은 상황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김동춘 : 저도 잘은 모르지만 지금 말씀하신 (동학혁명의 경우는 동학군 50,000명이 죽임을 당함) 일본군 2000명에 도륙당한 것은 근대 무기 체제, 기본적으로 과학 기술의 문제로 봐야 할 것 같구요. 일본은 이미 15세기 16세기부터 난학을 받아들여, 임진왜란 때도 그랬지만, 도대체 조선의 일반 농민들하고는 무기 체계를 비교할 수가 없었죠. 이미 연발총이 나왔기 때문에 도저히 안 되는 것이었고. 오히려 동학에서는 그런 식의 자유인권의, 근대적인 인권의 사상의 요소들이, 물론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제우 선생의 이런 부분이 민주화운동을 이미 했던 것이 있기야 하지만, 적어도 근대적인 개인주의나 인권의 사상하고 결합된 사상이 좀 약하기 때문에 민족주의적인 사상은 있지만 근대적인 이념으로 발전을 못해서 그런 게 아닌가 합니다.
박재순 : 무기체계가 달랐기 때문에 동학군이 패한 것은 사실이지요. 제가 말씀드리는 초점은 동학군에게 현대적인 교육이나 훈련, 현대적인 전략이 부족했다는 겁니다. 교육적인 관점에서 아무래도 천도교가 종교다 보니까, ‘시천주’, ‘사인여천’해서 사람을 하늘을 모시는 존재로 보고 사람을 하늘로 대접하라고 하는 것은 인권과 민주의 근거가 될 수 있으면서도 또 다른 한쪽에서는 보편적 전체성에 개체를 함몰시켜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개별적 주체의 시민민주의식을 약화될 수 있는 측면이 있다는 거죠. 그런데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그리고 안창호, 이승훈의 교육운동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적 주체를 깨우치자고 하니까. 민족 전체를 생각하면서도 개별적 주체를 생각했다는 점에서 안창호, 이승훈의 교육운동에서 민주사상의 진전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사상적으로 개별적 주체와 민족전체를 동시에 강조하는 이런 사상이 나오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서구 철학에서도 한쪽을 강조하면 다른 쪽이 약해지기 마련이지요. 우리 민족사에서 개인의 주체와 민족 전체를 동시에 강조하는 교육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만열 교수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유영모의 제자 박영호 선생의 주장하는 바로는 김성수, 현상윤 등이 천도교와 이승훈 사이를 연결시켰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인가요? 윤치호와 이상재한테 삼일운동에 앞장서라고 하니까 지금 그런 운동을 하면 폭동이 일어나서 우리 민족이 상처를 입는다면서 사양했다고 합니다. 현상윤의 장인이 오산학교 교장을 했어요. 현상윤이 이승훈 선생을 찾아가서 천도교 측과 연결시키고 삼일운동에 참여시켰다고 합니다.
이만열 : 난 그것까지는 못 봤어요.
박재순 : 기독교 쪽에서 삼일운동을 주도한 이승훈과 관련해서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선우혁도 이승훈도 105인 사건으로 고생을 같이 했어요. 선우혁이 이승훈을 찾아와서 독립만세 운동에 앞장서시라고 하니까 이승훈이 “내가 안방에서 자리 깔고 죽을 줄 알았더니 이제 죽을 자리 찾았다.”고 좋아했다고 합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이 삼일운동 일으키고 감옥에 가서 사형이 예상되는 상황에도 어깨춤을 너울너울 추었고, “우리가 죽음을 각오하고 들어온 거니까 위축될 거 없다.”면서 젊은 사람들을 격려했다고 합니다. 감옥에 들어간 첫날부터 “변기통 청소는 내가 한다.”고 선언하고 그때부터 삼년 육개월 동안 변기통 청소를 했대요. 민을 섬기는 겸허한 민주정신이 삼일운동을 일으키는 배경이 됐다고 저는 보고 싶습니다, 이승훈의 이런 자세는 교육운동에서 큰 귀감이 됩니다. 섬기는 교육, 섬기는 정치의 귀감이지요. 빛나고 좋은 자리는 다 남에게 주고 험한 일은 자기가 맡는 겸허한 자세가 안창호 이승훈에게 있었습니다. 두 분은 겨레의 스승입니다.
이만열 : 임시 정부 만들 때도 보면, 임시정부라고 하는 게 사실 안창호가 다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거든요. 삼일운동이 발발한 후 L.A에서 안창호 선생이 현순을 통해서 삼일운동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되요. 곧 행장을 꾸려가지고 상해 쪽으로 오거든요. 와서 임시정부를 만드는 그 작업을 하는데 미주에서 동포들로부터 받은 성금을 가지고 합니다. 삼일운동 이후에 서울에서는 한성정부가 임시정부로 선포되었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는 국민의회정부가 세워집니다. 이동휘, 문창범 이런 사람들이 중심이 됩니다. 이렇게 처음에 임시정부는 상해 외에 두 곳이 더 보이는데, 이걸 합쳐야 하거든요. 합치는 운동에서 안창호가 참 희생적으로 일했습니다. 이승만이 자기는 한성정부에 집정관 총재다, 이것을 살려 대통령제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대통령제가 아니었죠. 1919년 9월 세 임시정부를 통합할 때 대통령제로 해 달라고 고집하니까 이거 안 넣어가지고는 일이 안 될 거 같으니까 통합임시정부에서는 대통령제가 되었습니다. 상해임시정부는 4월 11일에 출범했고 통합임시정부는 9월에 출범했습니다. 통합임시정부에서는 블라디보스톡의 국민의회정부도 끌어들이고 한성정부도 끌어들이면서, 장소는 상해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안창호더러 당신 너무 애를 썼으니까 노동부총판 대신 장관급의 부장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이 때 안창호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내가 우남이 자신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일이 되지 않을 거 같아서 하는 수 없이 대통령직을 넣었는데, 이참에 내가 다시 내 직급을 올린다면 일이 되지 않는다, 나는 노동부총판 그대로 있겠다라고 하면서 안창호의 지위를 높여야 한다는 것을 받지 않았습니다. 바로 여기에 도산의 아주 위대한 점이 나타납니다. 제가 보기에는 우리나라가 글로벌 스탠다드로 나가려고 할 때 내세울 사람은 도산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박재순 : 마틴 루터킹 공원에 아시아 사람의 동상이 둘밖에 없는데 간디하고 도산 안창호의 동상이라고 하더라구요.
이만열 : LA근처 리버사이드 시청 앞에 있습니다. 안창호는 접근하면 할수록 인격이 삶속에 녹아난 사람입니다.
박재순 : 7~80년대에 안창호나 이승훈 이야기를 아무도 안 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 홀로 50년대부터 안창호·이승훈을 입에 담고 사셨는데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요 몇 년 씨사상 공부를 하면서 안창호, 이승훈 이야기를 읽으면 눈물을 안 흘리고 읽기가 어려울 정도로 감동적입니다. 고려 공산당의 당수 김철수가 안창호가 독립운동 세력의 대통합을 이루기 위해서 희생적으로 분투하는 것을 보고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는 기록을 일지에 남겼더라구요. 이전에는 도산을 민족주의자로 가볍게 생각했는데 다수파를 이끌면서 소수파를 끌어안아 대통합을 이루기 위해 도산이 입에서 피를 토하면서 밥 먹는 것도 잊고 지극 정성을 다하는 걸 보고나서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만열 : 남강 선생은 삼일운동 후 옥에서 나와 대이상촌을 구상하면서 오산을 키우려고 하면서 총독부에 드나들게 되는데, 이게 구설수에 오르게 돼요. 그러나 달리 보면 그릇이 큰 그는 이 단계에 가면 민족주의를 넘어선. 그러면서 우리 민중이 어떻게 살 수 있는가를 하는 그런 것을 고민한 게 아닌가 합니다. 그가 총독부를 드나든 것은 석연치는 않습니다.
박재순 : 종손자인 이찬갑이 남강에게 제발 밖에 나가지 말라고 항의하는 대목도 나오긴 나와요. 이제 그냥 가만히 계셔야 남강의 정신과 업적을 지킬 수 있다는 거지요. 그런데 남강은 영국의 옥스퍼드와 같은 명문대학을 세우고 덴마크처럼 농촌부흥운동을 벌이고 큰 이상촌을 세우려 했습니다. 농업운동과 이상촌과 교육운동을 함께 펼치려고 대학교와 이상촌 설립의 꿈을 이루려고 하다 돌아가셨습니다.
삼일운동이 근현대사에서 갖는 의미
박재순 : 한국 근현대서 삼일운동이 갖는 의미를 김동춘 선생님이 말씀해 주시죠.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또는 민족자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그리고 식민지 근대화론에 관련해서 좀 말씀해 주시죠.
김동춘 : 제가 이해하는 범위에는 1945년 8.15해방 이후에 조선왕조로 다시 돌아가려는, 다시 돌아가자는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고 보여지는데, 왕정복고나 입헌군주제에 대한 생각이 아예 사라진 가장 큰 이유가 삼일운동이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돼요. 그러니까 일본식의 천황제는 물론이고 전통적인 조선왕조의 그런 식의 정치체제에 대한 것이 일체 거론되지 않는 이유가 삼일운동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어쨌든 모든 백성들이 참여를 했던 이 운동을 통해서 전통적인 반상 질서가 무너지고, 삼일운동 이전부터 지속되었던 민란이나 의병운동이나 그런 것들이 삼일운동에 합류한 것 같고, 그 위에 신학문 배운 서구적인 민주주의나 자유주의 사상에 눈뜬 사람들이 합류하게 되면서, 한국에서 제국주의인 일본과는 달리 군국주의나 파시즘적인 이런 요소들이 별로 우리 사회에서 입지를 못 갖게 된 중요한 이유가 삼일운동을 통해서 형성된 인권운동이나 혹은 자주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거시적으로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게 가장 근대화의 경로에서 제국주의의 길을 걸었던 일본하고,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저항하는 과정에서 내적인 우리 사회에서의 차별의 질서가 깨질 수밖에 없었던 계기가 삼일운동이 아닌가 합니다.
박재순 : 일본하고 비교해 봐도 일본에는 백정계급이 있어서 오늘날에도 신분적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고 하네요. 우리는 이제 백정계급은 없어졌거든요. 6.25때 이동을 많이 하면서 남아 있던 신분체제가 해체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김 교수님 말씀 들으니까 신분질서의 해체에 삼일운동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되네요.
김동춘 : 저항적 민족주의가 가지고 있는 진보성이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저항과정에서 어쨌든 그런 전통적인 권위라든지 신분적인 질서라든지 이런 특권 이런 질서들이 깨질 수밖에 없고 저도 이승훈 선생의 전기를 읽다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이승훈 선생님이 초기에는 반상, 말하자면 양반들하고 싸워서 이걸 바꿔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나중에 가보니까 일본이 들어와서 청일전쟁 겪고나서 보니까 조선 민족 전부가 쌍놈이더라.(웃음) 이게 참 재미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는데 결국은 처음에는 잘못된 반상 질서를 깨야겠다, 워낙 장사하고 돈벌고 하는 사람을 워낙 차별하고 하대하고 이런 게 말도 안 되니까, 일종의 말하자면 근대 부르조아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민족 억압을 당하다 보니 그 부르조아 사상이 민족주의하고 결합이 되고, 또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민중적인 것하고도 결합을 하고 그런 현상이 삼일운동에서 독특하게 나타나는 거 같아요.
박재순 : 삼일운동이 내세운 이념과 원리를 살펴보면 우선 거족적으로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이 떨쳐 일어났으니까 민주 원리가 분명히 표현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다음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주장했으니까 민족 자주를 내세운 것이지요.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통해 제국주의와 국가주의에 맞서서 세계평화를 내세운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일제식민통치 아래서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낡은 국가주의, 제국주의를 떨쳐 버리려는 그런 정신과 기풍이 삼일운동에 가득 들어차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일본과 중국하고는 다르게 우리가 경험한 것이 있다면 나라를 잃고 나라 없는 민족으로서 여러 십년 살았다는 것입니다. 나라 없이도 존속할 수 있었던 백성이었다는 사실이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라가 없어도 아주 민족이 없어지지 않았고, 나라 없이 살다가도 다시 나라를 세우는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비록 지금 나라가 쪼개져 있기는 하지만. 나라 없이 사는 경험을 우리 민족은 했습니다. 나라 없이 사는 경험을 했다는 것이 앞으로 세계화 시대에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뛰어 넘어서 세계의 일원으로 살아갈 때 큰 자산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만열 : 제가 2010년을 전후로 해서 일제 강점기 100년을 맞아 제가 글도 쓰고 강연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서 강조한 것의 하나가 우리는 식민지 경험을 가지고 있다,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까지는 그것을 원망하고 없애 버려야 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원망하고 없애버려야 할 경험이 아니라 오히려 굉장히 중요한 자산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자산은 지금도 제국주의 하에서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어 굉장히 중요한 자산이다라고 강조를 했습니다.
우리가 서럽게 생각하고 자기 비하적으로 생각하면, 식민지백성이었다 하는 좌절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걸 통해서 우리는 지금도 고난 받고 있는 백성을 도울 수 있는 자양분이라고 생각한다면, 과거의 그 괴로움과 고통은 하나의 축복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약소 민족들을 좀 돕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지나간 고난의 역사를 설움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 민족이 경험한 소중한 자산으로 역발상(逆發想)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함석헌 선생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에서 강조하는 ‘고난의 종’(조선)이 세계의 희망을 안길 수 있다는 내용의 주장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재순 : 아리랑은 민족의 아픔 속에서 생겨난 노래인데 아리랑의 설득력과 공감력이 엄청나지 않습니까? 외국인들도 아리랑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는다고 해요. 우리가 일제 치하에 있을 때 경험했던 아픔의 경험 그 아픔의 경험을 딛고 민족전체가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일어나는 삼일운동의 경험이 큰 설득력과 공감력을 가질 수 있고 민족 전체의 앞날을 헤쳐나가는 데 큰 자산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한류라고 해서 춤과 노래, 드라마와 영화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고 하지만. 우리 음악과 문화가 세계 속에서 공감력과 설득력을 갖는 것은 우리 겨레가 역사 속에서 아픔을 깊이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에서도 불교는 대자대비(大慈大悲) 동체대비(同體大悲)를 말하는데, 대자대비는 큰 아픔과 슬픔 속에서 큰 사랑이 나온다는 것이고 큰 아픔과 슬픔 속에서 한 몸이 된다는 말입니다. 기독교에서도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서 큰 사랑과 구원이 나온다고 하니까. 고통과 아픔 속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나오는 것이지요.
이만열 : 아까 김 교수님 말씀 속에서 근대적 인간의 탄생 같은 것을, 이걸 삼일운동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이건 같은 이야기이지만은. 그전까지 우리나라 백성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한 것은 전근대적 왕조 하에서 신민적(臣民的)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삼일운동이 계기가 되어 근대사회의 국민(백성)이라고 할까, 국민적 어떤 사고를 갖게 되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삼일운동이 우리 민족사에서 단순히 독립운동으로서만 생각했는데 백성이 주인이 되는 그러니까 근대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자각이 이때부터 나오게 되었다고 봐요. 또 삼일운동을 통해 민중적 지도자들이 나오게 됩니다. 굉장한 자산이죠. 그전까지는 양반층이 지도자가 될 수 있었지요. 그러나 33인만 봐도 처음에 모시려고 한 분들이 양반들이었는데 그 사람들이 안 하겠다니까 종교 지도자들이 나섰지요. 천도교나 기독교 지도자들, 그 사람들이 양반출신들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그 때부터 그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었던 거예요. 독립운동에서도 민중 지도자들이 나서게 되는데 이건 우리 민족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모멘트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삼일운동을 계속 기념을 하고 반추해야 한다면 이런 이유 때문에 더 그럴 겁니다.
삼일운동이 독립운동으로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보면, 민주적인 이념을 가지고 임시정부를 만들어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나중에 힘이 없어 형편없이 되었지만 임시정부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해왔거든요. 삼일운동 후에 홍범도의 봉오동전투라든지 청산리전투라든지 하는 독립투쟁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삼일운동은, 천관우 선생의 표현을 빌면, 그 전에 있던 여러 종류의 민족주의 운동, 예를 들면 척사위정운동, 개화운동, 민중운동 등을 하나의 큰 연못 속에 집어넣어 용해시켜 그때부터 새로운 물줄기를 내뿜는 것이라고 했어요. 내뿜는데, 그게 이게 임시정부운동으로도 나오고 무장투쟁으로도 나오고 외교운동, 의열운동 등이 나와 독립운동으로서의 새로운 기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민주화운동 못지않게 독립운동으로서 나타나는 것도 이 때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삼일운동은 우리 민족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분수령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계사적으로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김 교수님도 이야기를 했지만 베르사이유 회담이나 그런 것이 제국주의를 청산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시 패망한 나라의 식민지를 포함하여 승리한 제국주의 중심으로 세계질서를 어떻게 재편성화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제국주의를 없애려고 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아까 언급한 민족자결의 문제 같은 것도 그 적용을 승전국가의 식민지에는 해당시키지 않았습니다. 우리한테는 일본이 승전국가(중국에 있는 독일 조차지 교주만과 태평양 가운데 있는 독일군도를 공격하여 승리했다는 의미에서)이니까 승전국 일본의 식민지 조선은 민족자결의 대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2.8독립선언에 보면 4개 항을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패전국 식민지에만 해당하는 민족자결주의를 우리 조선에도 적용시켜달라고 요구합니다. 2.8독립선언에 참여한 이들이 대학생들이니까 민족자결주의의 내용을 알았던 것이지요. 그걸 알았기 때문에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시한 민족자결주의에 대해서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반 민중들은,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한계가 있었지만, 그것이 우리의 독립에 도움이 될 거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줄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민족자결주의가 전승국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았지만, 당시의 분위기 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데에 동력의 하나로써 발동되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논리적으로 따져서 이것은 우리가 해당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볼 것은 아니고, 심정적으로는 그 당시 자료에서 도움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후 베르사이유체제에 대한 세계 최초의 항거가 바로 삼일운동이었습니다. 베르사이유 체제에서 전승국 대우를 받고 있는 제국주의 일본에 항거함으로써, 베르사이유 체제에 대한 저항을 했다 저는 그렇게 해석합니다.
두 번째는 세계 피압박 민족의 혁명운동에 도화선을 제공했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5.4운동 때에 뒷날 북경대학 총장으로 된 진독수 등 이런 사람이 5.4운동을 할 때 조선의 삼일운동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에 인도의 간디의 사티아 그라하, 진리운동이라던지, 비폭력 무저항 독립운동, 이것도 일정하게 조선의 삼일운동과 관련이 있다고 지적되고 있습니다. 다른 데 보면 이집트, 필리핀, 베트남 이런 곳에서도 조선의 삼일운동이 조금씩 언급됩니다. 너무 과장되게 이야기 하면 우리가 다 영향을 미쳤다라고 말해서는 곤란하지만 그래도 삼일운동과 조선이 조금씩 언급되고 있으니까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지요.
식민지 근대화론에 관하여
박재순 : 박은식 선생이 삼일운동이 인류문명사의 신기원을 이룬 거라고 말씀했다고 합니다. 삼일운동에 의미 부여를 크게 하신 거지요. 다음 주제로 넘어가기 전에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시기 바랍니다. 씨 회원들 가운데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성립되는 말인지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삼일운동하고 연결시켜서 생각해보면 근대화는 민중의 주체적 자각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공장 짓고 길을 닦는 게 근대화인가요? 민중의 주체적 자각이 이루어지고 민중이 사회와 역사의 주체로 일어서는 것이 근대화의 핵심 원리와 내용이라고 생각하는데 김 교수님 한 말씀 해주시지요.
김동춘 : 박정희 정권 때에도 삼일운동을 그렇게 해석했던 것으로 제가 기억을 하는데 삼일운동의 정신을 받아서 우리 조국 근대화를 하자, 박정희가 주로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지요.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근대를 보는 관점이 두 가지 측면이 다 있는데, 한편으로는 왈러스타인의 이야기를 빌리면 해방으로서의 근대와 기술로서의 근대가 있어요. 물론 두 가지 측면이 다 필요하죠. 다 필요한데 주로 삼일운동 이후에 일본에 협력을 하는, 33인 중에서 결국에 나중에 일제에 협력을 했던 사람들이나 더 타협적인 태도를 취했던 그런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삼일운동이 뭐라고 할까요? 기술로서의 근대화라고 할까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무지몽매함을 깨우쳐서 인간을 욕망을 가지고 있는 주체라고 할까? 근대 자본주의의 동력이 되는 계기로 삼일운동을 볼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전혀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한편으로는 해방으로서의 근대로 보자면 그것과는 상관없이 자기의 권리의식이나, 혹은 어쨌든 이런 걸 갖는 사회적 주체로서 인간을 만들어 나가는 그런 계기로 본다면, 즉 해방으로서의 계기로서의 본다면, 다시 말해 해방으로서의 근대를 본다면 기술로서의 근대화고는 충돌하거나 혹은 다른 측면이 있는데, 어쨌든 식민지근대화론은 우리가 많이 이야기하는 기술로서의 근대화에 초점을 많이 맞추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30년대 말에 한국 경제에 당시 조선식민지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든지, 각종 기술적이거나 근대적인 기업이라든지 이런 것이 형성화되었고 그것이 그 이후에 공업화의 기초가 된다든지 하는 그것이 식민지근대화론이잖아요. 사실 대만 같은 경우에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 식민지에 대한 기억이 우호적이거든요. 그건 사실인데, 대만사람들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일종의 야만으로부터 문명으로 이전해 가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보고, 우리나라의 뉴라이트의 관점도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한쪽 측면을 강화시킴으로써 제국주의의 논리를 받아들이는 결과를 받아들이는 입장이 되는, 그러니까 다윈의 진화론도 그러하고 약육강식의 논리도 그러하고, 이게 다 제국주의의 개발주의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이 있는데 너희들이 개발이 덜 되었고 수준이 덜 되었으니까 열심히 준비해가지고 따라가자는 것이지요. 윤치호 씨도 일기에 보니 조선이 일본 따라가려면 이백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삼일운동 할 때는 무모한 짓이다, 탄압운동 심하게 하면 나중에 더 힘들어진다고 했습니다. 이광수도 똑같고. 이 사람들의 논리가 기본적으로 식민지 체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논리와 거의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가 무지몽매하고 덜 깨어있고 백성들의 수준이 낮으니까 함부로 덤비었다가 더 큰 화를 입기보다는 빨리 우리가 저 사람들을 따라가기 위해서 준비하고 열심히 깨우치고 받아들이자, 그런 논리인데 그게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그것은 제국주의가 ‘너희는 항상 식민지로 갈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데 그런 논리를 정당화시켜주는 측면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쩌면 제 생각에는 20세기의 우리가 삼일운동으로 시작되는 저항의 민주화 운동과 인권 운동이 한편으로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논리를 정당화시켜주려는 현지 대리인으로서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왔고, 그 사람들이 실제로 45년 이후에도 우리 사회에 주류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박재순 :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날 정치 사회 문화를 보면 한국 근현대사를 왜곡하는 논의와 주장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교과서 문제도 그렇고. 이것은 민주주의 와 직결된다고 생각해요. 다행히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로 대한민국 정부는 삼일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과 정신을 계승한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걸 중심으로 해서 한국 근현대사 논란을 바로잡아가는 잡아가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지금 너무 혼란스러울 정도로 한국 근현대사 문제자 왜곡되고,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진 상황입니다.
끝으로 한국정치와 사회가 삼일정신을 계승하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 문제를 짚어보고 마치면 좋겠습니다.
삼일정신의 계승
이만열 : 삼일정신은 무엇보다도 독립운동과 민주운동의 두 바퀴가 있었다고 봐요. 독립운동을 하는 데에는 민주적 이념과 그 운동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런 원리에 따라서 임시정부를 만들고 그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전개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뉴라이트 계통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이야기하면서, 김 교수님 말씀대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일으키고 있는데, 그 중 독립운동사나 민주화 운동사에서 본다면 삼일운동에 대한 의미 같은 것을 거의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다음에 한국이 해방 이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항상 방점은 산업화라는 데, 기술 근대화라는 데 두고 있습니다. 저는 그 우선순위가 바뀌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산업화가 민주화를 이끈 것이 아니라, 민주화가 산업화를 이끌었다 하는 것이지요.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삼일운동에서 나타난 그 민주정신, 민주적 기반 위에서 독립운동을 활성화했고, 이것이 임시정부 하에서 경험과 훈련을 쌓아 그걸 해방이후에도 민주주적인 기초로 다져갔다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4.19로 새로운 계기를 만들었다는 거죠. 그런 민주적인 정신이 결국 자유와 창의력과 그걸 가져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게 사실은 이승만 독재와 유신 치하의 폭압적인 정치 체제에 대해서 저항을 하면서 자유와 창의성을 가지고 산업화를 이끌어 왔다 이렇게 역사를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화와 산업화가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고 하더라도 산업화 때문에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라고 하는 것은 역사를 잘못 봤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유와 창의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삼일운동이 우리의 민주화를 촉발하는 최고의 점에 서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삼일운동에서, 오늘 우리가 거론하지 않았습니다만, 평화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처음에 내세운 비폭력이 그대로 고수된 것은 아니고 일제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일부 폭력화되는 것이 없지 않습니다만, 우리가 비폭력을 내세운 것은 평화를 사랑한다는 것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비폭력을 내세우지 않고서는 당시 사람들을 만세운동으로 끌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민중들이 가진 무기가 없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몇 차례에 걸쳐 무기류에 해당하는 것을 모두 회수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폭력적인 기치를 들었다 하면 사람들을 운동 현장으로 끌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비폭력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사람들을 끌어냈습니다. 독립선언문에도 일본이 약속을 어겼다고 해서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조선의 독립이 동양의 평화는 물론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라고 하면서 이 평화 사상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게 우리 헌법 정신에 투영되어 평화통일까지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근데 일부에서는 이런 민주적인 질서와 남북의 평화통일에 대해서 반대하면서 북한을 적대의식으로 대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최근 자주 종북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삼일정신을 통한 민주 정신과 평화 정신, 이게 모두 우리 헌법 속에 다 들어 있고, 헌법 정신에 따라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 들어와 강조되는 듯한 역사관을 새롭게 정리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하나 더 덧붙이고자 하는 것은 건국론과 관련한 것인데. 사실 1948년 당시 정부 수립에 참여한 사람들이 대부분 건국과 관련시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도 1948년 5월 31일 국회가 열려 국회의장으로 연설할 때 1919년에 나왔던 정부(이승만은 서울의 한성정부를 가리킴)의 후신이다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1948년 8월 15일에, 이건 다 아는 이야기지만, 옛 총독부 건물 정문 앞에서 축하식을 하는데 거기에 붙인 플라카드에 분명히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이라고 했습니다. <대한민국 건국 국민축하식>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해 9월 1일자로 정부의 <관보> 1호가 나옵니다. 거기에 발행일자를 뭐라고 했냐면, <대한민국 30년 9월 1일>이라고 했어요.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때 이승만이 말한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1948년에 ‘건국’했다고 해서는 안 된다, 왜 그러냐 하면, 만약에 1948년에 건국했다고 하면 1945년 세계 열강들이 우리 대한한국을 해방시켜준 그 터 위에서 그분들의 덕분에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승만은 그렇게 되면 얼마나 비주체적이냐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승만은 다시 말합니다. 우리는 일제의 포악한 고통 속에서 ‘삼일혁명’을 거쳐 독립을 선언하고 나라를 세웠다, 이렇게 봐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어야만 대한민국의 건국이 자랑스럽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승만은 그런 의미에서 삼일혁명 즉, 삼일운동은 미국의 독립전쟁보다도 더 귀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게 이승만의 이야기입니다. 최근 이승만을 추종하는 분들이 많은데 적어도 이승만의 이런 역사의식이라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웃음)
박재순 : 그렇게 이승만 자신이 삼일운동을 존숭하고 중요하게 여겼는데 삼일운동의 그런 정신과 기풍이 어떻게 해서 해방정국에서 갑자기 소멸되었을까요? 김구도 일찍이 안창호의 흥사단 특별회원으로 가입했고 문화국가론을 내세웁니다. 삼일운동의 정신과 기풍이 적어도 안창호, 김구, 이승훈 같은 사람에게는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이승만도 말로는 삼일운동의 정신을 이어받고 높이 평가하지만 사실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 수립과정에서 삼일운동과 임시정부의 정신과 기풍은 갑자기 사라졌고, 그 이후 삼일운동정신은 계승되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만열 : 집권하고 난 뒤 변화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현실에 타협했다고나 할까요. 건국절 주장은, 뉴라이트가 대변하고 있습니다만, 따지고 보면 해방당시 반공에 앞장서서 노력한 사람들에게 포상을 하자는 주장과도 통하고 있습니다. 해방 후 친일파들이 갈 곳이 없어졌습니다. 미군정이 다시 등용하니까 우선 살 길을 찾았지요, 그러다가 해방 정국에서 공산주의와의 대결로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니까 일제 때 친일했던 사람들 중에는 반공을 내세워 그 그늘에 숨게 됩니다. 친일파가 반공주의자로 탈바꿈한 것이지요. 반공주의자로 탈바꿈하면서 마치 대한민국을 세우는 데에 공을 세운 것처럼 하여 건국공로자로 행세하게 됩니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세력 중 상당수가 나중에 이승만과 결탁된다고 이야기되지요.
국회에서 통과는 안 되었지만 지난 18대 국회에서 건국공로자 예우법이라는 것이 발의가 되었습니다. 여당의 모 실력자가 그 안을 쥐고 있었어요. 그러고 있었는데 국회 안에 입법 조사처에서 그 법에 대한 타당성 조사를 했어요. 거기서 곤란하다고 했고 특히 광복회에서도 반대하여 결국 상정되지 못했습니다.
그 법에 예우받도록 된 사람들은 특히 해방 이후에 반공전선에 서가지고 대한민국 건국에 도움을 주었다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을 독립운동가와 같이 예우를 하자는 것이었지요. 때문에 건국절 주장은 어떻게 보면 독립운동세력과 독립민주세력 대 친일독재세력과의 대결 같은 모습이 보입니다. 김 교수님, 이걸 선명하게 칼럼을 쓰시면 어떨까요. 선명하게 해 주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웃음)
김동춘 : 한국의 헌법은 지금 헌법 전문에 나온 내용은 저는 참 우수한 좋은 내용이라고 생각이 되고요. 물론 헌법이 조금씩 바뀌었지만 87년 민주화 이후의 헌법은 굉장히 좋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한국 정치는 헌법을 감당하기에는 헌법이 버거운, 헌법이 버겁다는 말은 48년부터 지금 이만열 선생님께서 이야기하신 것처럼 임시정부나 삼일운동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대한민국에서 다 배제되었다는 점에서지요. 거의 신익희 선생님 정도 제외하고 임정 출신들이 거의 없었고, 아마 삼일운동에 가담했던 희생하고 고생하셨던 분들은 거의 다 48년 이후부터 70년대까지 수난을 당했던 것으로 생각하는데, 박정희 정권 때까지 가족들까지 풍비박산 처참하게 고생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헌법하고 실제 정치는 안 맞았고, 정신으로 보더라도 삼일운동에서 어떤 민주주의가 혹은 자주 독립이 분단으로 인해 지켜질 수 없었고. 남한 사회가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상황 속에서 체제를 유지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삼일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을 수가 없었고. 임시정부가 표방했던 공화제의 정신도, 군사정권에 의해서 이승만 독재에 의해서 공화제 정신도 지켜질 수 없었고. 그리고 또 국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상이나 표현의 자유 같은 경우도 헌법에 나와 있는. 또 어떻든 임정에서부터 나왔던 평등과 자유의 문제도 국가보안법 체제하에서는 지켜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국가보안법이 헌법보다 상위에 존재하는 마당에 초보적인 어떤 권리나 표현과 사상과 집회와 결사의 자유도 지켜질 수 없었고. 임정에서 애초부터 표방했던 선거와 피선거의 자유도 유신체제하에서는 대통령을 뽑을 수 없었고. 이어 전두환 체제 안에서 대통령을 뽑을 수 없었고. 그 당시 국회의원도 마찬가지고. (한국 현대사는) 그런 쪽으로 끝임 없이 이런 것이 유린되어 온 과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쨌든 이만열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이렇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저는 남북한의 분단에 있던 것으로 봅니다. 그 분단이 결국은, 이 독립 운동했던 분들이나 일제의 저항했던 분들을, 다, 말하자면 정책우대에서 뒤꼍으로 쫓아버리게 되는, 그런 것의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 남북한 분단이 아닌가.
그 다음에 또 삼일운동선언에서 주장했던 큰 평화의 정신도 독립선언서에서 나왔던 강대국과 약소국의 지배와 수탈과 억압을 넘어서야 한다는 이런 정신인데. 말하자면 탈제국주의죠, 탈식민주의나 탈제국주의 정신인데, 이것도 한국전쟁으로 인해서 전혀 지켜질 수 없었고. 함선생님 이야기를 많이 하셨듯이, 결국 근대 문명의 국가주의 문제인데. 한국전쟁도 국가주의의 충돌인데 좌우의 충돌이기 이전에 국가주의의 충돌이고, 서구 문명의 뭐랄까? 가장 어두운 점이라고 할까? 근대서구의 이런 자본주의적인 탐욕과 지배, 이런 것이 한반도에서 전쟁의 형태로 동족끼리 죽고 죽이는 열전이 있었고. 그 이후에 60년 동안 냉전이라는 형태로 대리전을 치루고 있는 상황도 평화의 정신하고는 전혀 맞지 않는. 그런 것들이 현재까지는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그래서 삼일운동의 정신은 역시 지금도 저항운동 속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들을 합니다. 사회를 지금까지 백년 동안 이끌어 왔던 사람들은, 여전히 그 사람들을 억압했던 사람들이 여전이 이 사회의 주류의 담론도 만들고 그렇게 나가고 있는 것 말입니다.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문제
박재순 : 마지막 주제가 삼일운동과 동북아시아의 평화인데 구체적으로는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문제도 있고 밀양의 송전탑 문제도 있습니다. 삼일운동의 민주정신을 지금 실현한다면 탈국가주의, 탈제국주의의, 그러면서 민중의 정의와 평화를 민주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과제일거라고 생각하는데. 오늘의 시점에서 삼일운동의 우리 삶속에서 구현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런 현실적인 문제와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시고 마치겠습니다.
이만열 : 할 이야기도 난 별로 없는데(웃음), 삼일독립선언에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동양평화를 굉장히 강조합니다. 그 강정마을 같은 것은 앞으로 동양평화와 직결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때문에 우리가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동양평화를 주장하는 삼일운동 정신은 일본이 동양 영토를 침략하는 그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제국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그 정신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나 중국의 패권주의. 이것도 극복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고 보니 미국과 일본으로 대변되는 해양세력과 러시아와 중국으로 대변되는 대륙세력. 이 사이에 끼어 있는 우리는 남북분단까지 겹쳐 있어요. 이런 주변의 상황을 관리 내지는 극복하여 통일의 길을 어떻게 헤쳐가야 하는가? 저는 오래전부터 ‘중립화’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묘안이 없을 것 같습니다. ‘중립화’방안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압니다마는 그렇다고 그 방법 외에는 주변을 다독거려 가면서 또 남북이 숙의해 가면서 통일할 수 있는 방안이 잘 떠오르질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대륙에도 붙지 않고 해양세력에도 붙지 않는. 그러면서도 이걸 조화시키면서 한반도의 주체성을 유지하는 방안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이게 ‘영세중립화’ 외에 다른 방안이 있을 것인가 하면서 생각을 좀 많이 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제가 사회과학 지식이 부족해서 그 생각을 더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나이도 늙어 생각만 오래전부터 한 것입니다.(웃음) 도무지 살길이 보이지 않아요. 통일의 길도, 한쪽에 붙어가지고는 가능할까요? 국제적인 양해가 없고서는 통일이 어렵겠다는 것은 점점 더해 갑니다. 남북이 주체적인 노력을 계속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주체적인 노력만 해서 되는 것이겠습니까. 국제적인 양해와 협력이 필요하다고 할 때 결국 ‘중립화’라고 하는 카드 외에는 다른 카드가 있겠느냐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걸 위해서는 삼일독립선언에서 강조하는 민주적 영향과 평화의 역량을 키워가야 할 것입니다. 남쪽의 민주적 역량 뿐만 아니가 북쪽의 민주적 역량도 많이 키우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할 이야기가 없어서 아까 이야기를 되풀이했습니다.(웃음)
박재순 : 제주도 강정에 해군기지가 세워진다면 한미일 군사동맹과 북.중.러 군사동맹의 대결이 이루어지고 결국 한반도의 분단이 고착될 뿐만 아니라 동북아의 평화에서 갈수록 멀어지는 것은 아닌가 걱정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상당히 중요한 지점에 와 있는 것 같아요. 이 교수님 말씀대로 삼일민주정신을 이어서 영세 중립국을 선언하고 주변국들을 아울러서 같이 갈 수 있는 가운데 길(中道)을 찾지 않으면 우리 역사가 앞으로 갈수록 꼬여지고 어지럽게 될 것 같습니다. 역사를 크고 길게 보면 정의와 평화의 길로 진보할 거라고 기대하지만 지금 역사가 잘못 꼬이면 참으로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고 혹독한 시련과 고통을 겪고 나서야 어둠과 혼란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강정 마을 해군기지문제와 밀양 송전탑 건설 문제는 우리 사회와 역사의 변곡점인거 같아요.
이만열 : 게다가 결국 우리는 전시작전권(전작권) 문제도 걸려 있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이걸 갖지 않는 상태에서 MD체제도 제대로 대응하기 힘들 거예요.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설치되도 미국이 그걸 사용하게 되면 중국과의 문제가 복잡하게 되겠지요. 미국은 일본에게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집단적 자위권이란 결국 미군이 교전하게 되면 일본군을 투입하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함으로 평화헌법을 고치지 않고서도 일본군이 참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지요. 한반도에서 미군이 공격이 받았다 하면, 집단적 자위권 체제에서 일본이 한국에 상륙할 수 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더구나 전작권을 미군이 갖고 있다면 우리는 속수무책이 될 것입니다. 그걸 걱정하는 국민을 향해서 우리의 승인이 없이는 일본군이 들어올 수 없다고 강조하지만,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러나’입니다. 노무현 정권 때의 전작권 환수계획에 따르면 2012년에 환수하게 되게 되어 있었죠. MB정권 때에 2015년으로 미뤘는데 또 유예시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빨리 환수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중립화’ 문제도 전작권 없이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방부에서 나오는 소리는 참으로 한심합니다. 북한보다 34배가 국방비를 쓰고 있다고 하면서도 며칠 전에는 국방부의 조 무슨 실장이 일대일로 싸우면 진다 했다가, 김 국방장관은 전력은 북한의 80%밖에 되지 않지만 직접 붙게 되면 북한은 멸망한다 하는 소리도 했군요 전작권이 없는데 뭘 가지고 어떻게 대처하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셈법이 나오질 않습니다. 삼일운동의 자주독립정신이 전작권 문제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 것인지는 명약관화할 것입니다.
박재순 : 김 교수님 마무리 말을 해 주시지요.
김동춘 : 좀 같은 이야기인데요. 그러니까 한반도에서, 세계적으로 G2, 중국하고 미국의 신냉전체제가 굳어진다면 한반도 분단이 영구화될 가능성이. 영구화라는 게 그렇게까지 될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지속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거 같고. 그럴 경우에 남북한이 분단된 상태로는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선진국 복지국가가 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복지국가가 되기 어려운 이야기가 몇 가지 있는데요...
우선 상호 전쟁 체제인 상태에서는 국민들에 대한 복지에 대한 예산지출이나 그런 것이 어렵고. 전쟁 목적이 가장 국가의 우선순위가 되기 때문에 복지국가가 되기 어렵습니다. 안보 이데올로기가 부정, 부패. -지금 선거 부정 같은 것도 다 덮어버리고, 안보 이데올로기만 이슈가 되기 때문에 국민들의 신뢰를 획득하기 어렵고, 신뢰가 없이는 복지국가 되기 어렵고. 복지라는 것은 증세를 해야 하는데. 어쨌든 국가운영이 투명성이 확보가 되는 계급타협체제가 복지국가인데 증세가 할 수가 없어요. 증세를 할 수 없는 이유는 중산층이 세금을 내고 싶어도 강자들이 세금을 내지 않고, 이 사람들에 대한 면세가 이루어지고 있고 자영업자들이 소득 파악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국민들이 증세에 대해서 동의를 해주지 않고 증세에 동의를 해주지 않으면 복지가 되지 않아요. 메카니즘 자체가 안보문제가 복지문제와 연동이 되어 있고 이것이 국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문제하고 연동이 되어 있기 때문에 남북한이 대결상태에 있는 경우에는 어쨌든 남한이든 북한이든 사회의 질적 변화가 어렵다고 그렇게 봅니다. 양자의 질적 변화가 어렵다면 자연스럽게 경제성장은 조금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반 사람들의 삶의 질은 점점 떨어지고 양극화가 심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류 국가나 삼류 국가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죠.
통일 지상주의를 외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평화, 남북한이 화해와 평화 정도는 해야만 운신의 폭이 넓어지고, 양쪽의 지렛대가 아니고, 외교의 지렛대가 넓어지고. 결국은 백년의 식민과 냉정의 역사가 청산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데 현재와 같이 이런 식으로 치킨게임으로 남북한이 가서는 안 됩니다. 과거에 냉전식으로 절대적 미국에 대한 의존을 통해서 북한 붕괴를 통해서 통일로 가겠다 하는 식으로 가서는 너무 큰 희생이 초래됩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저는 삼일운동을 근대가 우리가 자주 민주국가를 만들려고 하려고 하는 국민들의 거족적인 운동이라고 본다면 그 과제는 아직은 완수가 안 되었고 완수가 안 된 이유는 냉전체제 때문이라고 봅니다. 냉전체제를 전 식민지의 연장이라고 보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식민지의 연장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국가가 형성이 안 되었다고 볼 수 있고. 안 됐다는 말은 끝임 없이 국민들이 이런 전쟁체제에 동원되고 희생되는 그런 상황으로 계속 가는 그런 것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장기적으로는, 국가주의를 넘어선다는 것은, 먼 미래의 과제이기도 한데, 동북아에서 이게 실현될 수 있을지는 조금 의심스러운 점이 있지만, 일본이나 한국이나, 제가 봐서는 국가단위로 해결하는 단계는 넘어섰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일본의 후쿠시마 핵문제도 그러하고 에너지 문제도 그러하고 국민국가라고 하는 20세기의 틀을 가지고는 그 내부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게 것은 굉장히 어렵게 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21세기에는 국민국가라는 것을 떠나서 이중시민권, 이중국적 이런 것들도 고민을 해서 지금 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일본에 있는 재일동포들, 중국에 있는 조선족들, 화교들. 이런 사람들을 묶어서 서로 내왕을 하면서 서로 어느 정도 시민권을 누리고 참정권을 가질 수 있는. 이런 형태의 탈국가주의적인 상상력으로, 이걸 가질 수 있는 식으로 가야만 항구적인 평화가 되고 그리고 win-win하는 동북아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20세기 민족해방 사상이, 21세기에는 탈 국가. 평화주의 사상으로. 자주라는 것이 국가가 자주라는 말이 아니라 국민들이 자주인 것 아니겠습니까? 자기 운명이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자기가 생존권을, 생명권을 박탈당하는 것을 자주성이 상실되는 것으로 본다면 지금 우리 상황은 우리 국민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생존권과 생명권이 박탈될 위험성이 항상 노출되어 있으니까요. 결국 그것이 경제적인 문제, 그 다음에 핵위험으로부터의 해방 등 새로운 문명과제와 연관되어 있지요.
박재순 : 긴 시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