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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일 사단법인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 정종명은 1931년 4월 조선공산당 재건사건에 연루돼 체포됐다. 사진은 1931년 8월15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때 찍은 감시대상인물카드. 그는 이 사건으로 3년형을 언도받았다.<국사편찬위원회>
3·1 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일어난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무참히 짓밟혔어도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60~70년대까지만 해도 큰 도시에는 동네마다 ‘조산소’가 있었다. 시골에서는 집안 어른이나 동네 할머니들이 아기를 받았지만 도시에서는 산부인과 병원이 적었고, 수술보다는 자연분만이 압도적으로 많았을 때라 출산을 준비하고 도와주는 산파(産婆)가 필요했던 것이다. 비록 경제적 수입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도와주는 존경받는 직업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산파’의 사회적·경제적 지위가 오늘에 비할 바 없이 높았고, 귀한 직업이기도 했다. 여기 간호사로서, 산파로서, 사회주의자로서, 사회봉사자로서 조선 민중과 운동가들의 존경을 받으며 헌신적으로 활동했던 여성 독립운동가가 있다. 정종명(1896~?)이 그 주인공이다.
정종명은 ‘을미사변’이 벌어진 이듬해이자 대한제국이 수립되기 직전 해인 1896년 태어났다. 일제의 식민지배 그늘이 차츰 조선에 드리우던 격동의 시절이다.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정종명이 태어난 곳은 <동아일보> 1925년 10월20일자 기사에 따르면 경상북도 경주로,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1931년 <삼천리> 기고문인 ‘전위선상의 인물평-열성과 근로의 정종명씨, 근우회 여류투사’에 따르면 정종명은 경상도 출신이기 때문에 동향의 사회운동가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사회주의 사상가가 됐다고 한다.
그는 17세에 결혼했으나 가정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남편은 결혼 3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 아들(박홍제) 하나를 데리고 기독교 전도사로 활동하던 정종명은 1917년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양성소에 들어갔다. 아마 경제적 독립을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당시 간호사 인력난이 심각해서 학생들까지 병동에 투입됐다. 간호사들은 고된 업무에 비해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정종명은 이를 개선하고자 동맹휴학을 일으켰다. 간호사들의 파업으로 병원을 멈추게 하는 최초의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최초 간호사 파업을 주도하다
정종명은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세브란스병원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강기덕이 민족대표 33인과 연결돼 연락책임을 맡아 학생들을 규합하다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그때 그녀는 강기덕이 외부와 원활히 연락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당시 세브란스병원 제약주임이자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인 이갑성의 기밀서류를 맡았다가 경찰에 잡혀 며칠간 취조를 받기도 했다. 정종명 본인은 며칠간 취조받는 것으로 끝났지만, 어머니 박정선은 적극적으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돼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양성소의 10회 졸업생이 된 정종명은 간호사로 일하는 대신 산파가 되기로 결심했다. 당시 산파는 간호사보다 보수가 좋았고, 병원에서 정해진 근무 일정에 따라 일해야 할 필요도 없어서 그가 꿈꾸던 경제적·사회적 독립을 이루는 데 적합했다. 하지만 당시 면허를 받은 조선인 산파가 21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면허를 취득하기가 어려웠고, 시험이 매우 어려워서 합격률도 낮았다.
정종명은 산파 면허를 취득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의원 산파강습소에 입학했다. 여기에 필요한 학비와 생활비는 산파강습소와 가까운 개인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해결했다. 그는 조산부과를 무사히 수료하고 산파 면허를 취득했으며, 지금의 안국동에 자신의 조산원을 개원했다. 이후 정종명은 일제강점기 동안 종로 근처에서 산파로 활동했고, 자신을 소개할 때나 남에게 소개받을 때나 항상 ‘산파’임을 강조했다. 정종명은 산파로서 쌓은 경험을 사회활동에 반영해 근우회를 이끌면서 농촌 탁아소 설치를 주장하기도 했고, 1930년에 <삼천리>의 산아제한 지상논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정종명은 1922년 가난한 여학생들을 돕기 위해 ‘여자고학생상조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회원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워 상조회비를 내기 어렵게 되자 자신의 산파 수입, 독지가들에게 받은 기부금, 전국 각지 순회강연에서 벌어들인 입장료 및 기부금을 모아 지원했다. 그는 1923년 여름부터 전국 각지에서 대중 강연을 벌여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1924년 2월18일에서 3월24일까지 40일 동안 황해도와 평안남북도의 약 21개 지역에서 연일 강연을 해 1천634원30전이나 벌었다고 한다. 정종명의 강연 주제는 주로 여성문제에 관한 것으로, 사회주의자의 시각에서 조선 여성의 현실을 짚어보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내용을 열정적으로 전달해 당시 대표적 대중연설가 중 한 명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여성해방’ 통한 실력 양성이 ‘민족해방’의 길
1924년 1월 정종명은 ‘조선간호부협회’를 창립했다. 조선간호부협회는 조선인 간호부들이 만든 단체로 회원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구직 알선을 하고, 대중을 대상으로 보건교육을 개최했다. 수해를 포함한 재난 상황에서는 다른 사회단체와 연합해 구호를 제공하는 등 폭넓은 사회활동을 수행했다. 1926년 12월 세브란스병원에서 파업이 발생하자, 그는 진상을 파악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1924년 5월10일 정종명은 박원희·김필애·정칠성·허정숙·주세죽·오수덕 등 20여명과 함께 사회주의 사상을 배경으로 한 최초의 여성단체 ‘조선여성동우회’ 발기총회에 참석해 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그는 1927년 2월 좌우합작과 민족유일당운동의 일환으로 신간회가 조직되자 5월27일 김활란·황신덕·최은희 등 민족·사회주의 계열 여성들과 함께 자매조직인 근우회 창립총회에 참석해 중앙집행위원 21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됐다. 그는 선전조직부를 맡아 활발하게 활동해 9월에 상무집행위원이 됐고, 1928년 7월에는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됐다.
1928년 5월 근우회 창립 1주년 기념식을 거행하려 할 때 일제의 탄압이 있자 허정숙과 함께 교섭위원으로 집회 허가를 교섭했으나 실패했다. 같은해 7월14일 서울 경운동 천도교 대교당에서 임시대회를 개최할 때 대회준비위원장으로 선임됐으며, 사회자로 이 모임을 이끌었다.
1929년에는 임시집행부 선거에서 의장으로 선임돼 부의장으로 뽑힌 김순희와 함께 근우회를 운영해 나갔다. 1930년에는 정칠성 등 5명과 함께 검사위원에 선임됐다. 이보다 앞선 1929년 12월20일 광주학생항일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근우회의 허정숙·유덕희·박차정·박호진 등과 같이 일경에 붙잡혔다. 이처럼 정종명은 1931년 근우회가 해소될 때까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사회주의계열 여성을 대표하면서 여성운동에 투신했다.
1930년 8월 정종명은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에 참여했고, 1931년 조선좌익노동조합전국평의회 조직준비회가 결성되자 중앙상무위원으로 노동조합 내 부인부를 맡아 지도하는 일을 했다. 그해에 정종명의 외아들 박홍제는 ‘무산청년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격문을 배포했다 체포돼 징역 1년6월형을 선고받고 김천 소년감으로 이송됐다. 문학에 소질을 보였던 청년도 식민지라는 시대적 질곡을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로써 어머니와 자신 그리고 자식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독립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다 감옥살이를 하는 기록을 남기게 된다.
정종명은 1931년 4월 조선공산당재건사건에 연루돼 체포됐다. 그해 8월15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1932년 10월부터 취조를 받았고, 1934년 3월 공판에 참석했다. 일제가 사건을 키우기 위해 시간을 끌었고, 관련자들에게 전향서를 받아내기 위해 공작을 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정종명에게 전향서를 받아내기 위해 갖은 고문을 들이댔고, 끝내 그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전향서를 쓰고 말았다. 이 전향서는 1934년 5월2일자 <매일신보>에 ‘옥(獄)의 투철(透徹)한 자각은 과거의 오류(誤謬)를 청산’이라는 기사로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이후 그는 4년형을 구형받았다가 최종적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다양한 선전과 조직 활동을 치열하게 했지만 일상생활에서 정종명은 주변 사람들과 운동가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데 정성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동료들의 먹을 것을 대고, 땔감을 대고, 약값을 대고, 감옥 뒷바라지를 하고, 병원 뒷바라지를 하고, 장례식까지 치르는 정종명은 그들의 “누이, 식모, 애인, 어머니”였다고 한다.
위에서 인용한 1931년 <삼천리> 기사에서 필자 이양은 정종명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누구에게나 귀여움을 많이 받고 존경도 많이 받을 만큼 남을 몹시 친애합니다. 누가 회관에서 앓던지 혹은 유치장이나 감옥 같은 곳에 가면 그 구조가 많습니다. 물론 물질이 없으니 마음대로 못 한다 해도 이것 때문에 분주하는 양을 우리는 늘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찍 저 제동에서 소위 사회운동 회관 생활을 할 때 우리는 그의 밥도 많이 뺏어 먹었으며 그의 의복도 많이 잡혀 먹었습니다. 그의 직업이 산파인 때문에 며칠에 한 번씩 몇 원이 생기면 우리 회관에 석탄을 사 오고 전등을 켰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 정씨를 누이라 하고 식모라 하고 애인이라 하고 혹은 어떤 의미에서 어머니라고 한 일도 있습니다.”
운동가들의 “누이, 식모, 애인, 어머니”
▲ 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1935년 7월2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 그녀는 경성에서 산파 일에 전념하며 조용히 지내다 8·15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서울에서 결성된 조선부녀총동맹에 가담해 활동했다. 그러다 북으로 넘어가 함경남도 대표 자격으로 중앙위원에 선출됐다. 1947년에는 함흥에서 부녀 운동을 펼쳤고, 1948년 북조선민주여성동맹 간부로 활동했다. 그러나 이후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정종명에 대한 연구는 이애숙과 이꽃메의 논문 두 편이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정종명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정용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