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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 直指寺
소백산맥의 준령(峻嶺)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그 서쪽 추풍령에서 잠시 머물러 관문(關門)을 이루었고, 다시 서남쪽으로 웅장한 산세를 유지하며 달려와 힘차게 솟아오른 황악산(黃岳山) 동남쪽 산자수명한 곳에 직지사(直指寺)가 자리하고 있다. 해발 1,111m에 달하는 황악산은 북쪽으로 충청도, 서쪽으로 전라도, 동남쪽으로는 경상도에 연이은 삼도(三道)의 도계(道界)에 접하였으며, 이 중심에 직지사가 자리하고 있다. 황악산의 " 황(黃) "은 靑, 黃, 赤, 白, 黑의 5색(色) 중에서도 중앙색(中央色)을 상징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직지사는 해동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 東國第一伽藍>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직지 直指
직지사는 <사적기 事蹟記>에 의하면, 신라시대인 눌지마립간 2년(418)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선산의 도리사(桃李寺)를 창건할 때 함께 지었던 절이라고 한다. 그러나 직지사 사명(寺名)의 유래에 다하여는 3가지가 전하고 있다. 그 첫번째는 아도화상이 선산의 도리사를 개창할 때, 도리사에서 황악산(黃嶽山)의 직지사터를 손가락으로 곧게 가리키며, 저곳에 절을 지으라고 해서 직지사(直指寺)라는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두 번째는, 9세기에 유행하였던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한종파인 성주산문의 조사(祖師)인 무염대사가 머물렀던 심묘사에 부속된 절로, 남종선의 가르침인 종지(宗旨)를 나타낸 "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 (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 "이라는 말 가운데에서 직지(直指)를 따와서 지었다는 설이다.
나머지 하나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시절, 왕건에게 도움을 주었던 능여대사(能如大師)가 직지사를 크게 중창하는 불사(佛事)를 하면서, 자(尺)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만 가늠하여(測地) 일을 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모두 창건설화와 연관된 직지(直指)의 미화(美化)된 전설에서 유래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실은 불교 본연의 직지인심(直指人心)을 상징하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창건설화의 직지와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직지(直指)가 둘이 아니라고 볼 때, 이는 곧 불교의 본질(本質)을 나타내는 이름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사명(寺名)에 불교의 본지를 이처럼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사찰도 흔치 않다.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
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
불립문자 不立文字
문자, 글로써 교(敎)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교종(敎宗) 또는 교가(敎家)에서는 경전의 문자와 교설만을 주로 하고, 불교의 참 정신은 잃고 있다고 보고, 선종(禪宗) 또는 선가(禪家)에서는 참된 불법으로서의 정법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 즉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하고, 체험을 중요시하여 불립문자, 교외별전 또는 직지인심이라고 하였다.
교외별전 敎外別傳
달마대사에 의해 중국에 전해진 조사선(祖師禪)에서는, 불교의 진수는 어떠한 경전이나 문구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직접 체험에 의해서만 전해진다고 말한다. 이는 불립문자, 직지인심과 함께 禪의 입장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이다. 석가모니가 언어로써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교내(敎內)의 법이라면, 교외(敎外)의 법은 석가모니의 마음을 직접 다른 사람의 마음에 전하는 것이다.이는 표월지(標月指 ...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비유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진리를 달에 비유한다면, 교(敎)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으며, 이에 반하여 선(禪)은 달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다른 종파가 모두 교내의 법을 가르침에 반하여, 선종에서만은 교외의 법을 주장하는 것이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직지인심 直指人心
교외별전, 불립문자, 견성성불과 함께 불교 선종의 주요 교리를 이루는 말이다. 직역하면,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킨다는 뜻으로, 눈을 외계로 돌리지 말고, 자기 마음을 곧바로 잡을 것, 즉 생각하거나 분석하지 말고 파악하라는 것이다. 이는 선종의 개조(開祖)인 달마(達摩)의 가르침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불성(佛性)을 깨달아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이었음을 알게 되고 그대로 부처가 된다는것이다. 흔히 '직지인심,견성성불"이라 하는데, 모든 중생은 본래부터 불성을 갖고 있어 교리를 공부하거나 계행을 떠나서 직접 마음을 교화하고 수행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선종의 2대조 혜가(慧可)와 달마(達摩)와의 문답(問答)에서 유래하였다. 혜가가 달마에게 불도를 얻는 법을 묻자, 달마는 한마디로 마음을 보라고 대답하였다.마음이 모든 것의 근본이므로 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나고 마음을 깨달으면 만가지 행(行)을 다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마음이 참 부처인지 모르고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생각하여 밖에서 도(道)를 구한다면 많은 세월을 수행으로 보내고, 애써 경전을 쓰며, 끼니를 잊고 경을 외우더라도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보람도 없이 수고롭기만 하다. 그러나 자기 마음을 곧바로 알면,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어지므로 성불(成佛)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자유롭고 쉬운 일이라고 하였다.
견성성불 見性成佛
불교에서 인간이 본성을 깨치면 누구나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즉 본 마음을 깨치면 바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교외별전, 불립문자, 직지인심과 함께 선종의 4대 종지(宗旨) 중 하나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그런데 그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에서 부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것이 교종(敎宗)이라면, 선종(禪宗)은 부처의 마음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선종은 연꽃을 내보인 부처의 뜻을 이심전심으로 알아내고 슬며시 웃었다는 제자 가섭(迦葉)의 염화미소(염華微笑)를 그 뿌리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수행이나 계율을 통해 마음을 맑게 함으로써 지혜를 얻는 교종과 달리, 단도직입적으로 단번에 깨쳐서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누구나 본래 자기 안에 부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득 깨쳐서 자기 본래의 성품을 바로 볼 수 있게 되는 것, 즉 견성(見性)이 곧 자기 안에 있는 부처를 찾는 것이고, 견성하면 바로 부처가 되는 것이다. 즉, 성불(成佛)이다.
사적기 事蹟記
현재 직지사에는 1776년(영조 52)에 쓰여진 "금산직지사중기(金山直指寺重記)"와 1776년(正祖 원년)에 급고자(汲古者)가 쓴 " 경상도금산군황악산직지사고선종대가람사적(慶尙道金山郡黃岳山直指寺古禪宗大伽藍事蹟)"을 비롯하여 연도 미상의 사적 3권이 전해지고 있어, 직지사 관련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그 외 법당의 중수기, 상량문 등이 별도로 다수 있다.
수직사찰 守直寺刹 이곳 직지사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 정종(定宗)의 태실(胎室)을 모셨다. 직지사는 왕실의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답게 최고의 吉地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의 2대 왕 정종은 태조의 둘째 아들 '방과'이다. 정종은 제1차 왕자의 난이 수습된 뒤, 왕위를 '이방원'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직지사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은 정종이 임금으로 즉위하자 곧 다른 곳에 안치되어 있던 자신의 '태실'을 직지사 대웅전 뒤편의 북봉(北峰)으로 옮겼다는 기록이다. 태실이란, 왕실에서 산모가 태아를 출산한 뒤 나오는 태반을 묻는 장소로, 태봉(胎封)이나 태묘(胎墓)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태의 자리가 다음 아기의 잉태(孕胎)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액이 없는 방향에서 태를 태우거나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직지사는 풍수적으로 마니산, 태백산 문수봉, 오대산 적멸보궁과 함께 ' 기(氣)를 폭포수처럼 분출하는 생기처(生氣處) '로 알려져 있으며, 정종의 태실은 풍수에서 최고의 吉地로 알려진, 뱀이 먹이를 찾아 내려오는 형상의 머리 부분 혈 (蛇頭血)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동생 이방원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오른 정종은 목숨을 부지하고자 왕위를 이방원에게 물려주고 격구, 사냥, 온천, 연회 등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19년 동안 영위하다가 63세로 일기를 마쳤다. 사두혈(蛇頭血)에 태실을 옮긴 덕분인지, 정종은 정인왕후 심씨 사이에 자식은 없었지만, 나머지 7명의 부인 사이에 15남 8녀를 두었다. 냉엄하고 비정한 권력다툼에서 한 발 벗어나 상왕생활을 19년이나 누리고, 또 23명의 자식까지 둔 정종이 누린 영화가 풍수적 최고 길지에 자신의 태실을 옮긴 덕분이지.... 정종(定宗)은 직지사를 수직사찰(守直寺刹)로 지정하여 태실 수호의 책임을 맡겼다. 직지사의 주지는 수직군의 소임을 수행하는 승려들의 수장이기도 했다. 덕분에 직지사는 조선 초기부터 시작된 숭유억불의 모진 세월 속에서도 비교적 순탄하게 사세(寺勢)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왕실은 태실을 보호하고자 직지사 주위 30리 내에서는 벌목과 수렵과 경작을 금지하였다. 태실 수직사찰의 사격을 확보한 덕분에 직지사는 태실 주변의 산림을 태봉산(胎封山)으로 수호하는 한편, 넓은 영유지(嶺有地)를 확보할 수 있었다. 직지사는 현재 약 600ha의 산림을 보유하고 있으며, 직지사에서 12km나 떨어진 김천 시내의 법원과 구화사(九華寺)까지가 직지사의 영유지이었다고 한다. 정종 태실 定宗 胎室 정종의 태실은 1926년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태실 조사 때 ' 태 항아리 '를 꺼내면서 태실(胎室)의 석물이 파괴되어 그 원형을 잃었다. 태실 가운데에 있던 태실석인 개첨석, 중동석과 난간석 2기는 직지사 천불선원과 성보박물관 앞으로 옮겨져 있다. 태실석의 몸돌인 중동석은 대개 타원형 또는 원형이지만 정종태실 중동석은 특이하게 팔각형이며, 높이는 약 1.6m이다. 정종의 태항아리는 전국에 흩어져 있던 48기의 태항아리와 함께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삼국유사와 고려사에는 신라 ' 김유신(김유신)'도 태(태)를 묻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액(厄)이 없는 방향에서 태를 태우거나 매장하는 풍습이 오래 전부터 내려온 것으로 볼 수 있다. 태봉은 백제, 마한, 가야, 고려시대의 기록에도 나타나며, 풍수지리를 중시하던 조선시대에는 의궤(의궤)까지 편찬했을 정도로 왕실의 중요한 의례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봉에 관한 논의가 120여 회나 나타나고 있으며, 태실에 관한 조선시대의 연구자료에 따르면 조선의 국왕과 그 자녀의 태반을 묻은 구체적 위치나 지명이 90여 곳에 달한다. 그밖에 '태봉'이라 불리던 지명까지 망라하면 276곳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의 명당에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조선 왕실이 100리 이내에 왕릉을 썼던 것과는 달리 왕실의 뿌리인 태실을 전구 각지에 골고루 둔 것은 왕실과 지역 부민 간에 일체감을 갖게 만들 의도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가람배치 우리나라의 사찰은 직지사의 창건연혁 직지사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사적기 자료는 여러 종류가 전하고 있다. 이들 자료는 대부분 1980년에 영인된 '직지사지'에 종합적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1681년 조종저(趙宗著)가 지은 "금산황악산직지사사적비명'과 1776년 급고자(汲古子)스님이 지은 '경상도금산군황악산직지사고선종대가람사적'이 대표적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전에도 기록이 있었으나, 자료가 전해지지 않고 있으므로 따라서 직지사의 역사는 대부분 위의 두 자료에 의존하여 설명되고 있다.이들 사적기 자료에는 직지사가 418년 아도화상(阿道和尙)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아도화상이 구미의 도리사(桃李寺)를 창건할 때 이곳 직지사도 함께 창건하였다는 설인데, 직지사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각종 사적기에는 예외없이 이 견해를 밝히고 있다. 직지사의 창건과 관련된 내용 가운데 주목되는 또 하나의 사항은 ' 직지 (直指) '라고 하는 절 이름의 유래이다. '직지'는 보통 ' 직지인심 견성성불 (直指人心 見性成佛) ' 이라는 선가(禪家)의 용어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직지사의 사찰 이름은 이러한 선종의 가르침을 표방하고자 하는 의도 속에서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하지만 사적기 자료에는 사찰 이름과 관련한 또 다른 두 가지 설이 소개되어 있다. 그 첫 번째는 창건주 아도화상이 도리사(桃李斯)를 창건한 이후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만한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한 것에서 절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이다. 다음 두 번째는 고려 초 능여(能如)스님이 사찰을 중창할 때, 자(尺)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의 손으로 땅을 재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찰 이름이 지어졌다는 설이다. 이들 설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지만, 역시 직지사의 중심 사격을 감안한다면 선종(禪宗)과의 연관성 속에서 사찰 이름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선종(禪宗)이 본격적으로 유행하는 시기는 9세기 이후라고 보아야 하므로, 직지사라는 사찰 이름이 정착된 시기와 그 배경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할 것이다. 각성임천고치 覺城林泉高致 숲과 샘이 솟는 높은 산사에 올라서야 깨닫게 되는구나. 조선 후기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알려진 김병연(金炳淵)이 이곳 직지사를 찾아와, 스님들과 글짓기 내기를 하여 스님의 이빨을 뽑았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 시를 소개한다. 직지발치승 直指拔齒乘 금오라 했는데 눈이 쌓여 까마귀 머리가 희구나 / 황악이라는데 꽃이 피어 학의 머리가 붉구나 / 추풍령인데 봄꽃이 피어 괴이하구나 / 직지라 했는데 꼬부랑길이 왠말이냐 금오설적오두백 金烏雪積烏頭白 황악화개학두홍 黃岳花開鶴頭紅 추풍령상춘화괴 秋風嶺上春花怪 직지유중노곡하 直指由中路曲何 일주문 一柱門 어느 절집엔들 숲이 없으랴만, 조선 왕실의 수직사찰이던 직지사의 숲은 절집 안에 바짝 들어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절집 마당에서 사방 어느 곳을 둘러 보아도 빈 구석이 없을 만큼 녹색 세상을 이루고 있다. 그 녹색세상의 첫 구성원은 일주문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사천왕문과 만세루 오른편 언덕의 단풍나무 숲이다. 썩 넓은 숲은 아닐지라도 이 일대의 단풍 숲은 철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제 방식대로 뽐낸다.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경험한 이들은 봄철의 신록과 여름철의 녹음과 함께 가을 단풍의 풍광을 잊지 못한다. 위 사진 일주문에 걸려 있는 '황악산 직지사 (黃岳山 直指寺)라고 씌여 있는 현판은 조맹부(趙孟斧. 1254~1322)의 글씨이다. 사천왕문과 함께 임진왜란의 병화를 모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일주문은 고려시대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1959년 주지 녹원화상에 의하여 기와가 번와되었고 축대를 신축하여 단청까지 완료하였다. 사적기에는 조계문 3칸이라고 하였으나, 현재는 1칸의 팔작지붕이다. 금강문 金剛門 불교 사찰 입구의 일주문 다음에 있는 문으로, 사찰의 대문 역할을 한다. 흔히 인왕상이라 불리는 두 명의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어 '인왕문'이라고도 한다. 흔히 사찰의 삼문(三門)이라 하면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을 말하며, 따라서 금강문을 세우지 않은 사찰도 많이 있다. 금강문이 있는 사찰은 금강문이 사찰의 대문 역할을 하지만, 금강문이 없는 사찰은 천왕문이 대문 역할을 한다. 그래서 사찰에 따라서는 금강문이 없이 천왕문에 금강역사를 모시기도 한다. 금강문은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를 모시는 전각이다. 금강역사는 힘뿐만 아니라 신성한 지혜를 갖춘 불교의 수호신으로 현겁 천불의 법을 수호한다. 사찰문의 왼쪽에는 밀적금강,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이 서 있다. 금강저 金剛杵 금강저는 본래 고대 인도의 신(神)이 사용하던 무기의 일종이었다. 밀교에서는 진언(眞言)을 외울 때 휴대하는 의식용구로,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모든 악마를 물리치고 지혜광명을 발현시킨다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금강저는 중앙의 손잡이 부분과 양 끝의 갈고리 부분으로 구성되고 있으며, 갈고리의 숫자에 따라 독고(獨錮), 삼고(三錮), 오고(五錮), 구고(九錮) 등으로 세분하여 부르고 있다. 위 사진의 '금강저'는 중앙 손잡이 부분과 양 끝 다섯개의 손톱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일반적인 형태의 금강저이다. 천왕문 天王門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전각으로, 직지사에서 대웅전과 함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전각이다. 천왕문에 대한 기록으로는, 현판인 " 직지사 사천왕각 중즙서 (直指寺四天王閣重葺序) "와 "천왕각기(天王閣記)" 등 두 점의 자료가 전하고 있다. < 직지사 사천왕각 중즙서 ... 위 사진 >는 1830년 (순조 30)의 중수 기록으로, 시주자이었던 郡守 신학휴(申學休)가 글을 지은 것이다. 1776년 (정조 원년)에 직지사에 까닭을 알 수 없는 불이 번져 전각이 소실되었음에도, 천왕각만이 재난을 면하였다는 사실을 들은 후에, 직접 사천왕각을 찾아본 신학휴가 자신의 녹봉(祿俸) 700금을 기부하여 낡은 사천왕의 몸체를 수리하고 단청을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금강문과 불이문 사이에 있는 산문으로, 임진왜란의 피해를 당하지 않은 3동의 가운데 하나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에 맞배지붕 건물이다. 근래 다식 채색하여 다소 古色을 잃었으나, 직지사의 귀중한 유물이며, 내부 천정의 판벽비천상(板壁飛天像) 역시 우아하다. 외부 사방 벽에는 용과 팔부신중 등을 그려 넣었다. 천왕문 내부 벽화 4대 천왕 4大 天王 만세루 萬歲樓 누각은 사방을 볼 수 있도록 마루바닥을 지면에서 한 층 높게 지은 다락 형식의 집을 말한다. 누(樓)는 궁궐 원림(園林) 속에 조성되기 시작하여, 사대부들이 야외에서 풍류와 휴식을 즐기는 장소로 일반화되어, 풍광이 좋은 산야에 있던 누각이 사찰의 구성요소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이다. 만세루는 보통 일주문과 중심 법당을 잇는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있는 사례가 많아, 다락식인 경우 누각 밑을 통과하여 법당으로 진입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사찰의 누각은 만세(萬歲), 안양(安養), 보제(普濟), 침계(枕溪) 등의 이름으로 불교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도교 또는 유교적인 정서가 강한것이 더 많다. 즉 만세루는 현세 복락이 영원히 유지되기를 바라는 말이다. 과거나 미래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 즉 三世를 통섭하는 인연법으로 설명하는 불교의 그것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만세라는 말이 불교에서 많이 사용하는 말이 아니나, 전패에서 "王妃殿下萬歲"라는 것처럼 쓰이는 경우도 있다. 대웅전 大雄殿 이완용이 쓴 대웅전 현판 현전하는 김천 직지사 대웅전(大雄殿)의 현판 글씨를 일당 이완용(一堂 李完用)이 썼음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그의 사후 이듬해인 1927년에 나온 일당일기(一堂日記)에서 발견되었다. 이 중 연보에는 이완용이 66세이던 다이쇼(大正) 12년 11월 25일 김천군(金泉郡) 직지사에 2종의 편액(扁額)을 서송(書送 .. 써서 보냄)하다. 직지사의 대웅전과 천왕문의 판액(板額)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와 같은 자료가 발견,공개되면서 문화재청의 보물 지정 예고기간 동안 시비가 일기도 하였지만, 건물 자체의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충분히 인정된다고 판단, 보물 제 1576호로 지정하였다. 직지사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1649년에 중창하였다. 보물 제 1576호 정면 5칸, 측면 3칸의 기와를 얹은 다포계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가구식(架構式) 기단을 갖추었다. 기단 가운데 나 있는 돌계단은 용머리 조각과 호랑이 형상의 조각이 계단의 소맷돌을 장식하고 있고, 그 결구법이 특이하다. 공포는 내외3출목이며, 전면과 측면, 후면의 구성이 각각 다르다. 짜임새 있는 가구의 구성 및 부재의 표현기법으로 조선후기의 건축적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불, 아미타불의 삼세불이 봉안되어 있고, 각 불상 뒤에는 세로 6m의 커다란 삼존불탱화(보물 제670호)가 걸려 있다. 이들 불화는 1744년(영조 20)에 제작된 것으로, 짜임새있는 구성과 뛰어난 묘사력, 정교한 표현, 안정감 있는 색감 등 조선시대 후기 불화를 대표하는 걸작이다. 불상을 봉안한 불단과 천장의 단청 또한 기법이 뛰어나고 화려하다. 王建, 임진왜란과 직지사 직지사는 창건된 이후 신라 선덕여왕 시절, 자장스님에 의하여, 그리고 경순왕 4년(930년) 천묵대사에 의해서 중창된 기록이 있고, 그 후 능여대사(能如大師)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도움을 주게 되면서 사세를 더욱 키우게 된다. 927년 (신라 경애왕.. 마지막 왕) 후백제의 견훤이 서라벌을 기습하여 경애왕을 죽이자, 왕건은 신라를 구원하러 내려갔다가 팔공산전투에서 신숭겸, 김락 장군을 잃게 되고, 자신도 겨우 목숨을 건져 도주하게 된다. 이 때 직지사에 머물던 능여대사의 도움을 받게 되고, 장차 말띠 해에 큰 일이 이루어진다는 예언을 얻게 되는데, 역시 그의 말대로 말띠 해인 934년부터 후백제를 제압하고 통일을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인연 등으로 고려시대에는 줄곧 큰 사세를 유지하던 직지사가 약화되기 시작한 것은 역시 조선시대에 들어와 임진왜란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에는 2대왕인 定宗이 태(胎)를 묻은 태봉(胎封)이 대웅전 뒷봉우리에 모셔지는 인연으로 수호사찰로 지정되면서 예전의 규모를 지탱해 나갔는데, 임진왜란을 맞아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직지사는 왜군에 막대한 타격을 가한 승군의 지도자 사명대사가 출가한 사찰이고, 그가 30세 때에는 이 절의 주지를 하기도 하였다. 왜군은 이러한 이유로 혹독한 보복을 가하여 대웅전 앞에 있던 5층 목탑을 비롯하여 40동의 건물이 전소되었고, 모든 유물들이 유실되었다. 이후 대웅전은 임진왜란이 지난 후 1602년(선조 35)에 새로 지었고, 1735년(영조 11)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안에는 중건 당시의 벽화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용을 타고 있는 관세음보살, 구름을 타고 있는 신선, 문수동자 등을 찾아 볼 수 있다. 대웅전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주심으로 약사불, 아미타불의 삼세불(삼세불)이 봉안되어 있고, 각 불상 뒤에는 세로 6m의 커다란 삼존불탱화(보물 제670호)가 걸려 있다. 이들 불화는 1744년 (영조 20)에 제작된 것으로, 짜임새있는 구성과 뛰어난 묘사력, 정교한 표현, 안정감있는 색조 등 조선시대 후기 불화를 대표하는 걸작이다. 불상을 봉안하고 있는 불단(佛壇)과 천정의 단청 또한 기법이 뛰어나고 색채가 화려하다. 보물 제670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에 봉안된 후불탱화(後佛撑畵)로 비단바탕에 채색되었다.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액자나 족자 형태로 만들어지는 불화로, 일반적으로 이곳 직지사 대웅전처럼 대웅전 본존불 뒷벽(後壁)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대웅전이나 대광명전 등에 흔히 3폭의 불화를 봉안하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인데, 이곳 대웅전 후불벽화도 그러한 특징을 따르고 있다. 중앙에 석가여래의 영산회상도, 왼쪽에 약사회도, 오른쪽에 아미타불의 극락회도를 배치하였다. 중앙에 석가여래의 영산회상도, 왼쪽에 약사회도, 오른쪽에는 아미타불의 극락회도를 배치하였다. 중앙에 배치된 불화는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여러 불,보살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영산회상도이다. 화면의 중앙에 석가모니불이 있고 좌우에 8보살과 10대 제자, 사천왕 등이 그려져 있으며 둘레에 많은 범문을 써 놓았다. 왼쪽 어깨에만 옷을 걸치고 있는 석가불은 악귀를 누르는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비교적 균형 잡힌 체구와 둥근 얼굴에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며, 머리 광배와 몸광배를 세밀하게 그렸다. 왼편에 있는 약사회도는 화면의 중앙에 약합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가 앉아 있고, 그 주위에 8대 보살과 사천왕, 12신장 등이 에워싸고 있는 복잡한 구도이다. 본존불의 신체는 건장하고 당당한 모습인데 비하여 얼굴은 지극히 작은 눈과 입 등이 매우 단아하고 엄숙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이러한 모습과 등 뒤의 물결무늬 원형광배, 옷의 문양표현 등이 18세기 불화의 시대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른편의 아미타회상탱화는 중앙에 아미타불을 두고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비롯하여 신장상 등이 주위를 둘러싼 구도이다. 이 세 폭의 탱화는 영조 20년(1744년)에 세관(世冠), 신각(神覺), 밀기(密機) 등 10여 명의 화승들이 그린 것으로 염불도인(念佛道人) 진기와 지영(智英)스님이 증명한 것으로, 전체적으로 짜임새있는 구성과 뛰어난 묘사력, 안정감 있는 색감 등으로 당시 불화를 대표하는 걸작에 속한다. "증명"이란, 그림이 경전이나 교리의 내용에 합당한 것인지, 또는 법대로 그려졌는지를 확인하고 감독하는 스님을 일컫는 것으로, 그림을 직접 그리는 화원 또는 화승과 구분되어 사용한다. 초벌탱 초벌탱 1999년과 2000년 두 차례에 걸친 직지사 대웅전 삼세후불탱(위 사진)의 보수 과정 중에 발견된 초본(草本)이다. 초본은 불화의 밑그림으로, 불화를 그릴 때 초(草)를 바탕천 아래에 놓고 본을 뜬 후 그대로 배접하여 그 쓰임을 다하거나, 제자들에게 교육용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불화를 새로 배접하거나 보수하게 되면, 원 그림 아래에 붙어 있는 초본이 종종 발견되기도 한다. 직지사 삼세후불탱의 초본은 특이하게 원그림의 아래가 아니라, 탱화의 위와 아래를 지지하는 나무 봉인 상축(上軸)과 하축(下軸)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초본의 상태는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를 서로 조합하여 본 결과 보살상 2점, 천왕상 2점, 사자상 1점 등 총 5점이 형상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 중 보살상 1점과 사천왕상 2점, 사자상 1점은 거의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었다. 연꽃을 들고 있는 보살초는 삼세후불탱 중 석가모니후불탱에서 수미단 오는쪽 아래에 있는 미륵보살과 일치한다. 또한 검을 들고 있는 천왕초는 석가모니후불탱에서 미륵보살 인쪽에 자리한 증장천왕과 일치하고, 다른 천왕초인 창과 탑을 들고 있는 천왕상은 아미타후불탱 하단에 자리한다문천왕과 일치하고 있다. 거침없고 유려한 필력을 과시하고 있는 이 초본들은 삼세후불탱이 조성되었던 1744년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주관 화사인 세관(世冠)스님이 그린 초본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초본 가운데 사자상은 삼세후불탱과는 관련이 없지만, 이 후불탱 조성당시 시왕 각부탱이 함께 조성되었다는 기록과 함께 시왕탱이 현존하고 있어, 이 사자상 초본도 1744년에 조성된 시왕각부탱의 일부인 사자탱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웅전 내부 벽화 후불벽 뒤의 공간이다. 커다란 괘불탱 함이 선반에 놓여 있고, 고주로 분할된 세 칸의 벽면에 관음도가 그려져 있다. 벽화의 색조는 녹청과 먹빛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어둠의 공간에 어둠의 깊이를 더하여 탈세속적 무채의 깊이를 심화시키고 있다. 어둠에 대한 시력의 적응이 익숙해져서야 그 형상이 서서히 돋아난다. 가운데 칸에 수월관음보살이 다소 풀린 결가부좌로 정좌해 있고, 오른쪽에는 정병을 든 선재동자가, 왼쪽에는 여의보주를 쟁반에 받쳐든 남해용왕이 서 있는 독특한 도상이다. 뒷벽 오른쪽 벽면에 그려진 기악비천상이다. 양 손에 마디가 분명한 긴 젓대를 들고 있다. 머리 모양과 전체적인 분위기가 여성적이고 또한 부드럽다. 다른벽화가 다소 남성적이라면, 이 벽화는 여성적이면서 귀엽다. 분위기마저 좌우가 대칭적인 형국이다. 수미단 須彌壇 삼존불이 앉아 있는 수미단은 "순치 팔년신묘사월(順治八月辛卯四月)"이라는 먹으로 쓴 한문글씨가 남아 있어, 임진왜란 이후인 1602년에 중창된 후 1651년에 수미단을 다시 손댓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1735년에 다시 중건된 기록이 뚜렷함으로 수미단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미단은 정면의 폭이 10m가 넘는 장방형으로 옆면은 2m가량 된다. 하대, 중대, 상대의 3단 구도에 다시 보단(寶壇)을 따로 설치하였는데, 적색, 청색, 녹색을 주로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밝은 느낌을 주고 있다. 수미단의 구성 하대(下臺)는 아무런 조각이 없이 궁글린 하대목 4개를 서로 연결하여 무게를 지탱하도록 하였는데, 족대의 배치나 족대 사이의 용조각 등이 없어 밋밋하게 보인다. 그러나 하대목의 높이가 33cm이고, 두께도 알맞아 매우 튼실해 보인다. 중대(中臺)는 3단으로 구성하였는데, 중대 상단은 구름 속에서 천면만화하는 용의 모습을 다양하게 조각하였고, 중대 중단에서는 땅 위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연꽃과 모란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다. 중대의 정면 조각은 밑에서부터 수중세계, 지상세계, 하늘세계로 나누고, 거기에 맞는 생물들을 배치하고 그 위에 다시 부처님을 모신 형태로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불교의 세계관을 축소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상대(上臺)는 부처님 좌대 바로 밑에 가리개 겸 꾸미개로 설치된 보단(寶壇)으로 부처님에게 올리는 공양의 의미로 여러가지 꽃들이 어울려 조각되어 있고, 중앙에는 부처님과 법당 수호의 역할로 龍을 모시고 있다. 위 사진, 중대 상단은 구름 속에서 천변만화하는 용의 모습을 담았다. 용을 정면세서 본 모습으로 새기기도 하고, 측면 모습으로 새기기도 하였다. 이는수미산 정상 도리천 위의 하늘세계임을 상징하는 것으로, 다시 그 위에 부처님의 세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쏘가리는 한문으로 궐어(궐어)라고 부르며, 우리나라 하천의 맑은물에 살면서 작은 물고기나 새우 등을 잡아먹는다. 궐어의 "궐(궐)"이 궁궐의 "궐(闕)"과 음이 같아서 쏘가리 그림은 과거에 급제하여 대궐에 들어가 벼슬살이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우리의 민물고기 종에서는 가장 힘이 좋은 종류이어서 수중의 왕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수미단에는 동물의 왕인사자, 꽃의 왕인 모란과 함께 나타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조개는 수중생물이지만 잉어처럼 자손창성의 의미로도 써왔다. 이는 화재로부터 법당을 보호하고 신도들의 자손창성을 기원하는 의미를 함께 포함한 것이다. 중대의 중단부분에는 땅 위의 세계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연꽃과 모란 사이에 나타나고 있다. 왼족부터 첫째 칸에는 수미산정상에 있는 도리천이 새겨져 있다. 용이 수미산 아래의 구름 사이로 여의주를 쫒으며 솟아오르고 큼직한 바위들로 둘러싸인 도리천에는 탑과 건물들이 숲속에 배치하게 된다. 도리천 위로는 바로 허공 중에 설치된 하늘세계이므로 중대 상단은 용만 배치하게 된다. 이 중단부에는 나비와 잠자리도 나타나고, 이는 불교의 최종목표인 해탈과도 관계가 있다. 나비나 잠자리나 애벌레 기간을 거친 후 번데기가 되고, 다시 날개가 달린 성충이 되어 날아다니게 되는데, 이를 불교의 수행에 빗대어 자유로운 해탈을 얻은 중생으로 표현해왔기 때문이다. 곧 모든 중생들도 올바른 수행을 통하여 해탈을 맛 볼 수 있다는 상징성을 번데기에서 나비나 잠자리가 나온 것으로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중대 하단 오른쪽 끝에서부터 두째 칸에는 연꽃 위에 파랑새가 조각되어 있다. 이 파랑새는 원효대사와 관계가 있으니, <삼국유사>에 이 이야기가 실려있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동해안 양양 땅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낙산사(洛山寺)를 창건한다. 그 후 원효대사도 이곳에 관세음보살을 참배하러 오는 도중에 산 아래에서 흰 옷을 입은 여인과 말을 주고 받게 된다. 다시 길을 가다가 빨래하는 여인과도 문답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나타나 원효스님에게 " 가지 마십시요 "라고 말하고는 갑자기 숨어버렸다. 원효대사는 그 소나무 아래에서 신 한 짝을 보았는데, 낙산사 관음보살상의 자리 앞에 똑 같은 신 한 짝이 있어, 앞의 여인들이 관세음보살이 나타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파랑세는 관세음보살을 보기 위하여 지성으로 기도하는 이에게 나타나는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으로 여져지게 되었다. 곧 좋은 징조를 알리는 상징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자연히 수미단에도 나타나게 된 것이다. 대웅전 앞 석등 석등은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법당 앞에 건립하여 도량을 밝혀주는 역할을 하는 돌로 만든 등(燈)이다. 위 석등의 화사석(火舍石)은 사각형으로 사방에 화창(火窓)을 만들고, 간주(干柱)는 팔각형으로 한 면에 다람쥐가 기어오르는 형상을 그려 놓았다. 아직도 화창에는 검게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다. 상륜부는 보륜이나 옥개를 얹어놓지 않아 간단히 처리하였다. 대웅전 東, 3층석탑 대웅전 앞에 2기의 3층석탑이 나란히 서 있다. 높이는 각각 5.3m로 보물 제60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석탑들은 원래 경북 문경시 산북면 웅창(熊倉)마을 북쪽 금강변의 도천사지(道天寺址)로 알려진 곳에 있었던 3基의 석탑을 이곳 직지사로 옮겨온 것이다.이들 3기의 석탑 가운데 하나는 현재 직지사 비로전(毘盧殿) 앞에 세워져 있다. 석탑의 형태는 3기가 모두 동일하다. 단층 기단 위에 3층의 屋蓋를 유지하고 있는 석탑으로, 지대석은 이전 당시 넓게 새로 조성하였다. 지대석 위에는 기단 하대로서 중석(中石)을 받치도록 하였는데 이는 1단의 각형(角形)으로 매우 높은 편이다. 中石은 각 면 한나의 돌로 모두 4매로 구성되었고, 네 모퉁이의 隅柱와 함께 撑柱를 각 면에 모각(模刻)한 것은 일반 석탑에서와 동일하다. 갑석은 2매석으로 덮었으며, 밑의 부연(附椽 ..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사리)은 1단이다. 갑석 윗면 중앙에는 2단의 각형 굄을 놓아 상부의 탑신부를 받치도록 하였으며, 탑신부는 옥개와 屋身 모두 별개의 1석으로 조성되었다. 초층 옥신은 높은 편이며 2,3층과 함께 모두 각 면에 우주를 모각하였다. 옥개는 추녀 밑이 직선이며 층급받침은 5단이다. 풍탁 風鐸 낙수면의 경사는 보통이며, 전각(轉角)에서 느린 반전이 나타나고 있다. 옥개의 네 모서리에는 양면으로 각각 두 개의 정공(釘孔 .. 못구멍)이 있어, 사방에 풍탁(風鐸)을 달았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상륜부는 신라 석탑의 상륜을 본떠 다시 조성하였다.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연(水煙), 용차(龍車), 보주 등을 두루 갖추었고, 탑 주위에는 신라시대 석주 난간을 만들어 사면에 돌렸다. 비로전 앞의 석탑도 3층까지 완존하며 같은 형식으로 복원되었다. 대웅전 西, 3층석탑 이 두 석탑은 신라시대 일반형 석탑 양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나, 다만 기단부에 변화를 가져왔다. 탑신부의 양식이나 새부적인 수법도 충실하며, 기단역시 건실한 편이다. 옥개의 층급받침이나 기단부의 양식수법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조성연대가 9세기의 석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탑의 지전 복원 시에 학술적 조사가 병행되지 못하여 내부 구조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다만, 원 소재지인 도천사는 경치가 좋은 강변을 택하여 이와 같은 3기의 아름다운 석탑을 조성하였으나, 그 사찰의 내력 역시 미상이다. 이 사찰은 일반적으로 삼국통일 이후에 건립된 쌍탑의 가람형식에서 벗어나, 3기의 석탑을 조성한 특수한 가람배치이다. 청풍료 淸風寮 1995년 개관한 직지사 성보박물관은 직지사를 중심으로 하여 말사(末寺)에 소장된 불교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다. 현재 국보 1점, 보물 6점을 비롯하여 전부 1,600여 점의 유물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청풍료(淸風寮)는 성보박물관의 이름이다. 석조 약사여래좌상 石造 藥師如來坐坐像 보물 제319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강암으로 조성하였으며, 전체높이는 1.61m, 부처 높이는 1.25m의 크기이다. 광배(光背)와 하나의 돌로 조성된 약사여래불상이며, 대좌(臺座)의 유무는 알 수 없다. 전반적으로 세부표현이 둔감해졌으며, 광배의 무늬도 세련미가 줄어든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양식을 계승한 약사여래좌상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소발(素髮 ... 민머리)의 머리에는 육계(상투 모양)가 큼직하며, 얼굴은 마멸이 심하여 세부적인 수법은 잘 알 수 없지만 둥글고 풍만하다. 목에는 형식적인 삼도(三道)가 가슴으로 내려가며, 여기서 시작된 가슴은 발달되었으나, 자연스럽지가 못하다. 결가부좌한 하체의 처리라든지, 왼손에 약병을 잡은 팔과 손등은 돋을새김(浮彫)이 잘 된 편이지만 역시 퇴화된 수법이다. 특히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는 결코 유려한 편이 못되고 광배는 주형거신광(舟形巨身光)이지만, 폭이 너무 넓어 맵시있는 처리는 아니다. 두광(頭光), 신광(身光)을 2조선(二條線)으로 만들어 그 안에 당초문(唐草紋)을 돌렸다. 성보박물관 소장 유물 청풍료 3층 석탑 淸風寮 3層石塔 보물 제1186호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에서 동남쪽으로 약 6km 되는 원동(院洞)에서 낙동강을 따라 1km쯤 떨어진 강창(江倉)부락의 강락사지(江洛寺址)에 무너져 있던 탑으로, 1968년 당시 선산군청 앞마당에 옮겨 복원하였고, 1980년 10월 다시 직지사 경내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즉, 1917년) 완전한 석탑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 후 도굴범에 의하여 파괴되었다고 한다. 복원 당시 부분적으로 몇 개의 부재를 새로 보강하였으며, 상륜부도 이 때 조성한 것이다. 단층 기단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정상에 상륜(上輪)을 장식한 일반형 석탑으로 높이는 9m이다. 기단부는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결구한 지대석 상면에 角形 2단의 굄대를 마련하여 기단면석을 받치고 있는데, 각 면석에는 양쪽에 우주(隅柱 ..모서리 기둥)와 가운데에 탱주(撑柱 .. 받침기둥)을 모각하였다. 갑석은 아랫면에 정연한 부연(附椽 .. 짧은 서까래)을 갖추고 있으며, 윗면에는 원호(圓弧)와 각형의 굄을 각출하여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을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하여 올려놓았는데, 각 층의 탑신석에는 양쪽 모서리에 우주가 정연하게 모각되었다. 각 층 옥개석은 아랫면에 옥개받침이 5단씩 정제된 층단을 보이고 있으며, 낙수면은 평박하고 각 면의 합각(合閣)은 예리하다. 그리고 윗면의 탑신 굄도 각형 2단이 정연하다. 위 사진의 상륜부는 복원 당시 조성한 것이지만, 기왕의 국가 지정물의 상륜부를 모본으로 하여 다른 같은 시대의 석탑 상륜부를 검토 종합하여 조성한 것으로, 노반(露盤 .. 탑의 최정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복발, 앙화, 상륜 등을 받치는 장식) 위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용차(龍車), 보주, 등이 차례로 정연하게 찰주(擦柱 .. 탑의 중심 기둥)에 꽂혀 있다. 이 석탑은 옥개석 네 귀퉁이 전각(轉角)의 반전이 뚜렷하여 전체적으로 경쾌함을 보이고 있으며, 각부의 양식과 수법으로 보아 9세기 경의 전형적인 석탑이라고 할 수 있다. 단층기단과 탑신부의 구성형식은 9세기 신라석탑의 특징을 잘 지니고 있으며, 9세기의 석탑으로서는 가장 巨大하고, 각 부의 양식수법이 분명함과 동시에 그 원위치도 정확한 점으로 보아 이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석탑이라고 할 수 있다. 보물 제1186호로 지정되어 있다.
직지사에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고 나라를 위해 싸운 사명대사의 출가(出家)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당시 직지사 주지었던 신묵대사(信默大師) 꿈에 천왕문 옆 은행나무에 황룡이 서려 있는 것이 보여 잠에서 깨어 나가보니, 그곳에 소년이 잠을 자고 있었다는 것이다. 소년을 깨워 부모가 모두 사망하여 혼자 남게 되었다는 사연을 듣고 거두어 제자로 삼은 것이 사명대사라고 한다. 지금도 천왕문 앞 은행나무 아래 사명대사가 누워 있던 긴 사각형의 돌이 놓여 있다.
사명각(四溟閣)은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한 호국대성(護國大聖) 유정 사명대사 (惟政 泗溟大師.1544~1610)의 영탱을 봉안하여 대사의 유덕을 기리는 건물로, 조선 정조 11년(1787년)에 건립되었다. 사명대사 四溟大師 사명대사(1544~1610)는 풍천 임씨,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 또는 송운(松雲)으로 경상남도 밀양 출신으로, 수성(守成)의 아들이다. 1558년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마저 죽자, 김천 직지사로 출가하여 당시 주지이었던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 선종의 수사찰(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禪理를 탐구하였다. 1578년부터 팔공산, 금강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으며, 1586년 옥천산 상동암에서 오도(悟道)하였다. 그가 49세가 되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休靜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의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에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그후에도 서울 근교의 노원평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고, 宣祖는 그의 전공을 치하하며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그 뒤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서 가등청정(加藤淸正)과 회담을 갖고, 특히 2차의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宣祖에게 그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는데, 이 상소문은 문장이 웅려하고, 그 논조가 정연하여 보민토적(保民討賊)의 이론을 전개함은 물론, 그 실천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국방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山城의 수축에도 힘을 다하였다. 그가 수축한산성은 팔공산성, 금오산성, 용기산성, 악견산성, 이숭산성, 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제조에도 힘을기울여 해인사 부근의 야로(冶爐)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보내어 화약제조법과 조총사영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1604년 2월 강원도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休靜)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宣祖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講和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포로로 잡혀간 3,000여 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서 스승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 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碑를 세웠다. 관음전 觀音殿 관음전은 일명 원통전이라고도 하며 관세음보살을 봉안한 전각이다. 협시로는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있으나 이들은 대부분 후불탱화로 나타나고 있다. 대승불교가 낳은 수많은 보살 중에서 관세음보살만큼 대중의 신앙대상이 된 보살은 드물다. 모든중생의 애환을 대자대비로 거두어 주는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근기에 맞게 32응신으로 화현하여 중생을 구제한다. 응진전 應眞殿 응진전은 고려 태조 14년 (931)에 능여대사(能如大師)가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당시 전소되었던 것을 1656년에 관음전으로 중건하였다가 뒤에 응진전으로 개액하였다. 이 건물은 주지 녹원화상에 의하여 중수되었는데, 이때는 기와, 단청 및 석조 축대까지 신축하였다. 응진전에 봉안되어 있는 나한(羅漢)은 석가모니부처의 많은제자 중 상수제자(常隨弟子) 16인이다. 이들은 일찍이 말세의 중생들에게 福德을 성취하게 하고, 정법으로 인도하겠다는 원을세운 성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많은 영험담과 함께 민간에서 신봉되어 나한신앙(羅漢信仰)을 형성하게 하였다. 명부전 冥府殿 비로전 毘盧殿 고려 태조 때 능여조사(能如祖師)에 의해 처음 세워진 비로전은 천불상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천불전(千佛殿)이라고도 부른다. 임진왜란 때 兵禍를 모면한 3동의 법당 중 하나로 근년에 개수하였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이며, 크기는 53평에 금단청을 하였다. 천불전 상량 千佛殿 上梁 금릉황악산직지사천불전상량 (金陵黃嶽山千佛殿上梁)은 영조 44년(1768년)에 영전(影殿)과 함께 천불전을 중창할 때의 기록으로 상산(商山 .. 지금의 상주) 사람 일총(一聰)이 글을 썼고, 신경, 사언스님이 중창을 주도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복장유물 腹藏遺物 2006년 직지사에서는 비로전 불상의 중수를 계기로 비로자나불, 석가불, 약사불의 복장(腹藏)을 확인한 바 있으며, 이때 승가대학으로 쓰이는 남월료(南月寮) 큰방에 봉안되어 있던 불상 또한 改金을 위해 조사하였다. 비로자나불상의 경우 밑면의 나무판을 떼어내자, 그 안에 봉안되어 있던 불상 조상기(造像記) 1점,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3책, 다라니경 1책, 다라니 5점 등이 나왓으며, 노란 비단으로 여미고, 한지(韓紙)로 싼 후령통(喉鈴筒)도 있었다. 다른 불상들 역시 비슷한 복장물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들 수습된 복장물은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으며, 불상에는 조상기를 비롯한 옛 복장기(腹藏記)를 그대로 베껴 쓴 글, 이번에 改金하게 된 경위와 과정을 밝힌 삼존불상개금기 그리고 새로 마련한 복장물을 넣어 다시 봉안하였다. 조상기 造像記 이 조상기(造像記)는 .. 강희칠년무신오월초사일조상(康熙七年戊申五月初四日造像) .. 이라는 글로 시작된다. 그 뒤로 시주자, 화주, 화사 등의 명단이 적혀 있다. 강희 7년은 1668년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 불상이 1668년에 조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복장유물 腹藏遺物 후령통(喉鈴筒)이란, 불상이나 불화 등을 조성할 때 함께 넣는 오곡(五穀 ..다섯가지 곡식), 오향(五香), 오약(五藥 .. 다섯가지 약초), 범서(梵書 ..범자로 기록된 글), 오색사(五色絲 .. 다섯 가지 색실), 발원문(發願文) 등을 넣는 통을 말한다. 비로전 안에 있는 천 개의 불상이다. 경주 옥돌로 조성하였으며, 제작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천개의 불상이 높이 30cm, 둘레 26cm 정도로 큰 차이가 없이 거의 같은 크기이다. 모습은 약간씩 모두 다르다고 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겁(三劫)에 각각 천불이 난다고 하는데, 천불이라 하면 현재의 겁(劫)에서 차례로 나타나는 부처를 말한다. 아들 낳을 수 있는 벌거벗은 동자승 천불상의 중앙에는 벌거벗은 부처님 한 분이 계신다. 비로자나불 뒷편의 천불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서 있는 동자상을 볼 수 있고, 알몸상태의 모습을 하고 있다. 불경에 의하면, 천불 중에서 자신과 인연이 깊은 부처가 반드시 하나 있고, 천불전에 들어가서 절을 한 다음, 고개를 들어 천불상을 바라보는순간, 가장 먼저 나와 눈이 마주치는 불상이 바로 자신에게 깨달음을 주는 부처라는 것이다. 이곳 직지사의 불상 중에서 벌거벗은 동자승 하나가 숨겨져 있는데, 아들 없는ㅇ ㅕ인이 이불상을 단번에 찾아내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천불상의 좌상 모습 조선시대에는 여러 사찰에서 "千佛像"을 봉안하였으며, 이곳 직지사와 함께 해남이 대둔사, 공주의 마곡사가 조선시대에 천불을 모셨던 대표적인 사찰이다. 직지사 천불상에 관하여는 <천불 조성기> 및 <千佛像改粉重修功德主祝願文> 현판 등의 사료가 전하고있다. 천불조성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천불이 처음 조성된 것은 1656년 (효종 7) 경잠(景岑)스님에 의해서였으며, 1784~1785년에는 한꺼번에 259位를 새로 조성하는 큰 불사가 있었다고 한다. 1785년에는 옛 불상 741位를 도채(塗彩) 중수하고 2월24일 점안하여 2월25일 천불을 봉안하였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후 1896년에는 금분(金粉)개채가 있었다. 최근에는 1975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천불에서 모자라는 40位의 불상을 석고로 조성하였으며, 1992년에 호분 위에 금을 올리는 불사가 있었다. 이 금박이 크고 갈라져 2003년부터 기왕의 금박과 호분을 벗겨내고, 옻칠을 한 후 4회에 걸쳐 호분을 입히는 등 불사를 행하였다. 이때 천불상 중 7位가 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천불상의 입상 모습
비로전, 삼층석탑 황악루 黃岳樓 약사전 藥師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