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 때문에 불교를 믿고 있을까?’ ‘과연 불교가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궁극의 결과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다시 말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행복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고 있는 최고의 목표는,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젊은 사문이 깨달음을 얻어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신 것처럼, 그와 똑같은 열반, 해탈을 증득(證得)하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다 수행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이익의 궁극적인 목표도 마찬가지로 바로 이 것, ‘구경열반’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현실생활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온갖 두려움, 괴로움, 마음에 걸림, 전도된 몽상 등을 깨끗이 씻어내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결국에 궁극의 열반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수행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열반이란 과연 무엇인가? 원어로는 ‘니르바나(nirvana)’의 음역으로, 원래의 의미는 ‘불어 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타오르는 번뇌의 불길을 불어 꺼버린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 말은, 괴로움이 모두 소멸된 상태인 절대적인 행복, 최고의 행복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앞에서 누차 언급했으므로, 여기에서는 제(諸)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열반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해 두고자 합니다.
탐욕, 진에(嗔恚), 우치(愚癡)가 길이 다하고, 일체 번뇌가 길이 다한 것을 열반이라 한다. 『잡아함경』
이처럼, 근본 불교 경전에서는 탐, 진, 치 삼독심이 모두 소멸된 상태를 열반이라고 이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본래로, 내가 공하여 무아(無我)이며, 무자성(無自性), 공(空)이라는 사실을 올바로 보지 못하여, ‘나다’ 하는 아상에 얽매여 있으므로, 그로 말미암아 탐, 진, 치 삼독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탐, 진, 치 삼독이 모두 소멸하여 ‘나다’, ‘내 것이다’, ‘내가 옳다’, ‘내 맘대로 한다’고 하는 아상이 모두 소멸되었을 때, 열반의 즐거움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열반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다음과 같습니다.
이 두 가지 법의 열반계가 있으니, 유여(有餘), 무여(無餘)이다. 유여는 어떠한 것인가?
이에 비구가 다섯 가지[貪, 瞋, 身見, 戒禁取見, 疑]를 면하면, 곧, 저것이 반열반으로서,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또, 무여는 어떤 것인가?
이에 비구들이 유루를 다하고 무루를 이루면 의(意) 해탈, 지혜 해탈이니, 제 몸으로 증(證)을 지어서 스스로 생사에 유희해 마치고, 범행(梵行)이 이미 성취되어서 다시 유를 받지 않고, 여실히 아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열반계는 마땅히 방편을 구하여 무여 열반계에 이른다. 『증일아함경』
이처럼 열반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성취하는 열반을, ‘생존의 근원’, 즉,
육신이 남아 있는 열반이라 하여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이라 하며, ‘생존의 근원이 남아 있지 않은 열반’을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 하는데,
이는 완전한 열반을 의미하므로 반열반(般涅槃)이라고 합니다. 이는 정신적, 육체적인 일체의 고가 모두 소멸된 상태의 열반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열반은 일체의 괴로움이 모두 소멸한 최고의 행복의 경지이지 만, 우리들은 열반에 대해서 너무도 멀게만 느낄 뿐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보통 절에 오랫동안 다니시는 신도님들에게 당신의 소망이 무엇인지, 왜 절에 다니는지를 물어보면, 대부분 ‘자식 대학 붙게 하기 위해서’, ‘남편 직장에서 진급할 수 있기 위해서’, ‘가정의 화목 때문에’, ‘병 낫게 하기 위해서’ 등의 대답을 자주 들어 볼 수 있습니다.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서’ 라고 대답하는 이는 열 중의 하나도 찾아보기 힘들지 않은가 생각이 됩니다. 이것 또한 전도된 생각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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