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감나무에 열린 호박 세덩이
기억과 추억 사이/수필·산문·에세이
2005-12-25 17:09:01
집에 들른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봐도 이것을 화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담장 밑으로 길쭉하게 차지한 화단이 작물들로 들어찬 것만 봐도 이제 화단은 그 존재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대신 텃밭이라고 불러야 더 어울릴 것만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화단의 좁은 땅에는 고추와 가지, 호박이 소리 없이 다가온 초가을 날씨에 취해 있었다.
이른 봄 모종을 할 때만 해도 '제대로 자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 보니 그때의 그런 생각이 기우였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봄에서 가을까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그 빛깔만으로도 활기찬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빨간 빛깔을 매단 탱탱한 고추며 자줏빛 물파스처럼 꼬부라진 가지, 그리고 푸르스름한 빛깔이 감도는 애호박을 보고 있으면 문득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2005 유진택
이 화단을 텃밭으로 만든 사람은 순전히 아내였다. 애초 화단에는 꽃 종류 이외에 다른 것은 안 된다고 못을 박았지만 나의 그런 엄명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내는 흙만 보면 작물을 심을 궁리만 했다. 아내가 작물을 고집했던 이유는 한 푼이라도 돈을 절약하기 위해서다. 아내 역시 농산물을 파는 유통센터에서 일을 하지만 특별한 일이 아니면 집에서 기른 작물을 애용한다.
손수 기른 작물이라 돈도 들지 않고 또한 믿을 수 있어 농약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점이 있다. 요즘 웰빙이란 말이 떠도는 것도 그만큼 모든 작물들이 농약에 노출돼 있어 안심하고 먹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몇 평 안 되는 땅이지만 집에서 작물을 길러 먹을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큰 행복이다. 아내는 이 행복을 가져다 준 유일한 사람이다. 또한 셋방 할머니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분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창문을 통해 도란거리는 소리가 먼저 들려온다. 보나마나 아내와 셋방 할머니다. 둘은 무슨 이야기가 그리 재미있는지 저절로 귀가 솔깃해진다. 어머니와 딸 만큼 나이 차이가 나지만 오고가는 대화를 들으면 영락없는 친구 사이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그 맛을 더해준다.
이웃집 뭐시기가 버릇이 없네, 누구 자식들이 속 썪이네, 집값이 얼마 올랐네, 도로 건너편에 아파트가 언제 들어서네, 하는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면 따로 뉴스를 들을 필요가 없다. 심심하면 둘은 여기에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헤친다. 그러면서도 손길은 작물에 가 있다. 늘 이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작물을 가꾼 덕분에 화단이 텃밭으로 변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따지고 보면 2년 전 이 집을 샀을 당시에는 화단이라고 말하기에도 부끄러웠다. 몇 포기 안 되는 꽃들이 꽃을 터뜨려도 색깔이 시원치도 않고 채소나 작물을 심어도 시들거리는 일이 많았다. 과일나무를 심어 놓아도 잎도 피우지 못한 채 말라버렸다. 그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되었다. 셋방 할머니와 화단의 흙을 뒤집는 작업을 하는데, 돌과 자갈은 그렇다 치더라도 잡다한 쓰레기들이 몇 자루 정도 쏟아져 나온 것. 조각조각 부서진 짐승 뼈가 오복이 나왔을 때는 푹푹 한숨까지 새어 나왔다.
“아휴, 전 주인이 얼마나 게으른지. 쓰레기는 화단에다 파묻어요. 그리고 죽은 개까지도 묻는 걸 봤어요.”
ⓒ2005 유진택
전에 아래채에 세 살던 아주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그 아주머니는 빚에 쫓겨 도주하듯 이사를 해 지금은 종적이 묘연하지만 전 주인의 행동을 가장 소상히 알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렇게 화단을 관리하니 몇 포기 안 되는 꽃과 나무들이 성장을 할리 만무했다. 꽃과 나무들은 가꾸는 사람들의 정성에 달려 있다. 이렇게 흙을 뒤집고 시골에서 가져온 계분을 섞어 뽑아냈던 꽃나무를 다시 심었더니 아무 탈없이 잘 자랐다. 거기다가 작물을 심었더니 그 줄기와 순이 번창하여 얼마 안 가 화단이 시골밭처럼 변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물구하고 가슴 아픈 것이 있다. 화단의 변두리에 우뚝 서 있는 단감나무는 왜 그리 주인의 마음을 몰라주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깍지벌레가 끼여 하얗게 말라가는 단감나무를 보고 있으면 가을 기분도 나지 않았다. 속속들이 단감나무 가지를 훑어봐도 눈에 띄는 건 단감 세 개뿐, 이것이 올 한 해의 단감 수확이다. 완전 흉작이다. 그래도 작년에는 단감이 많이 열려 수시로 단감 맛을 보았지만 올해는 단감은커녕 나뭇가지에 낀 깍지벌레에 숨통이 막힐 지경이다. 마치 회를 쳐 바른 듯 말라가는 나뭇가지를 만져보면 피 같은 게 엉겨 붙었다.
나뭇가지의 진을 빨아먹는 깍지발레의 몸에서 빨간 피가 나온다는 것은 보통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깍지벌레를 없애려고 감꽃이 피기 전 농약 한 번을 걸판지게 친 적이 있었다. 등에 분무기를 지고 담장이나 옥상에 올라가서 감잎이 몸살 날 정도로 흠씬 뿌려주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농약을 전문으로 치는 인부에게도 맡겼으나 마찬가지였다. 농약 한 번에 감나무가 기지개를 펴고 살아날 거라는 그 인부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감나무는 그렇게 황량한 모습으로 가을을 맞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의 황량한 마음을 씻어준 것은 감나무 가지에 풍성하게 매달린 호박이었다.
“저걸 어떻게 따. 저렇게 높은데….”
단감나무 가지에 매달린 호박을 보며 아내가 큰 걱정을 하고 있었다. 아내가 걱정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애기 머리통만한 호박이 감나무 가지 끝 허공에 아스라이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 저렇게 자랐을까. 사실 난 호박이 애기 주먹만 할 때 처음 보았다. 그것도 우굴 거리며 담장을 뒤덮은 넝쿨 속에서였다. 그런데 지금은 감나무 가지에 넝쿨을 걸고 저렇게 크게 자라있다니, 그동안 호박을 보지 못한 것은 앞만 보고 달려가야만 했던 나의 바쁜 일상 때문인지도 몰랐다.
가끔은 허공을 보고 이웃도 살피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앞만 보고 달려가다 보니 내 이웃의 삶을 간과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호박을 보지 못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호박을 보았다 해도 아둔한 인간의 눈길이 호박의 성장을 따라잡는다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어찌나 자라는 속도가 빠른지 하루 밤만 넘겨도 호박은 부피를 더해갔다. 그 자라는 속도를 말해주듯 갑자기 호박 하나가 떨어져 박살나 버렸다.
심을 때도 호박씨 하나만 묻어두고 눈 밖에 난 자식처럼 내버려두더니 제 힘으로 저렇게 큰 열매를 맺어주어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호박의 운명이 애처로웠다. 그러나 이제 호박이 매달려 있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이제는 내 눈길도 자주 호박에 가 머문다. 담장 밑 습기찬 땅에서 시작해 울타리를 타고 올라 감나무 가지 끝 허공에 꿈을 꾸듯 애기 머리통만한 열매를 맺어준 호박, 어쩌면 인간의 행로와 같은 길을 밟고 풍성한 결실을 맺어준 호박에게 자꾸만 눈길이 쏠렸다.
더구나 단감 하나 맺지 못하고 잎만 술렁이는 단감나무 허전한 공간을 호박이 채워주고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내 마음이 설레었다. 마저 남은 호박이 또 땅으로 떨어져 박살이 나기 전에 미리 따야 할 것 같았다. 단감나무에서 단감을 따듯 그렇게 호박을 따서 호박 같은 아내의 가슴에 풍성히 안겨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