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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말은 음식에도 적용된다. 내가 먹는 음식은 산해진미에 버금가는 맛있는 요리지만 남이 먹을 때는 엽기 식품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엽기까지는 아니지만 해삼도 나라에 따라 선호도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해산물이다.
우리나라에서 해삼은 그다지 고급 식품은 아니었다. 지금은 값이 비싸진 만큼 우리 역시 귀하신 몸 대접을 하지만 예전에는 썩 환영받는 해산물이 아니었다. 포장마차에서 멍게와 함께 먹는 안줏거리였고 고급 횟집에서 광어나 도다리를 주문하면 밑반찬으로 내놓았을 정도다.
하지만 중국으로 건너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고대부터 전해지는 팔진미에 해삼이 포함될 뿐만 아니라 지금도 바다제비 집, 상어 지느러미와 비견되는 고급 요리로 대접받는다.
우리는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긴 해삼이 중국에서는 왜 그렇게 고급 식품이 됐을까? 짐작해보면 우리는 해삼이 흔했고, 중국은 해삼이 귀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한반도에서는 동서남해에서 모두 해삼이 잡히지만 중국에서는 해삼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의 푸젠성, 광둥성 일부에서나 해삼이 잡히니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북부 지방에서는 해삼 맛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해삼은 문자 그대로 바다에서 나오는 인삼이라는 뜻이다. 중국의 의학서인 《본초강목습유》에서는 해삼의 약효가 인삼에 필적할 만하다고 해서 인삼이라고 했는데, 우리 문헌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인삼은 사람의 모습을 닮아 몸에 좋다고 해서 인삼이라고 하지만, 해삼은 남자의 ‘물건’을 닮아 신장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해삼이라고 한다고 풀이했다.
생김새 때문에 해삼이 정력에 좋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별명이 바다의 남자라는 뜻에서 해남자(海男子)다. 시커멓고 울퉁불퉁한 몸체 때문에 근육질 몸매에 거칠고 어딘지 모르게 성적 매력을 물씬 풍기는 바다 사나이의 이미지를 떠올린 것 같다.
정력에도 좋고 고급 식재료로 쓰이지만 구하기가 쉽지 않으니 가짜 해삼이 판쳤던 모양이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에는 가짜가 많았으니 해삼도 마찬가지여서 당나귀의 음경을 잘라 말린 후 해삼이라고 속여 팔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맛은 약간 비슷한데 가짜가 더 편편하다며 구별법까지 적었으니 속고 사는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해삼은 특히 우리 바다에서 잡히는 것이 품질이 뛰어났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조선 해삼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지 중국에 가는 사신이 반드시 챙겨야 했던 물목으로 빠지지 않았다. 선물하기에도 좋지만 경비를 마련하는 데 해삼만큼 좋은 품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너도나도 해삼을 가져갈 정도로 인기를 끈 것은 좋은데 그렇다 보니 폐단도 많았다.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사신으로 임명된 자들이 외부에다 편지를 보내 해삼, 가죽 따위의 자질구레한 물품을 요구하지 않은 적이 없고 이것을 팔아 여행 경비로 쓴다. 국경을 나서는 사신이 물건을 팔아 경비를 조달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고 적었다. 가져가는 해삼 물량이 너무 많아 무역 규제를 받기도 했다. 《영조실록》에 청나라 세관의 동향을 보고한 기록이 실려 있다.
청나라 예부에서 이르기를 산해관으로 들어오는 해삼이 봉성에서 검사 도장을 찍은 것보다 숫자가 더 많으니 금년에는 면세로 들여보내지만 앞으로는 세금을 거두겠다고 한다.
봉성은 청나라에 입국한 이후 첫 번째로 나오는 세관이고, 산해관은 지금의 베이징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세관이다. 국경을 넘을 때 신고한 것보다 현장에서 적발된 물량이 훨씬 많으니 이번에는 봐주겠지만 다음부터는 관세를 매기겠다는 소리다.
그런데 진짜 심각한 문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중국 어선들의 불법 조업이었다. 요즘 중국 어선들이 서해안에 몰려와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조선시대에도 해삼을 무더기로 잡아갔다.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 “4월 바람이 화창할 때면 황당선이 와 육지에서는 한약재를 캐고, 바다에서는 해삼을 따다 8월에 바람이 거세지면 돌아간다. 8~10척의 배들이 몰려오는데 한 척당 100명까지 타고 와 초도와 백령도 사이에 출몰한다”라고 기록했다. 중국 어선의 횡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별로 없다.
#음식#역사일반
#음식으로읽는한국생활사
글 윤덕노